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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14장 1절-11절 신앙의 숭고함에 관하여

by 알렉스강 2024. 3. 24.

https://www.youtube.com/watch?v=5G3fYuq_48Y&t=2335s

 

 

마가복음 14장 1-11절 새번역

1 유월절과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속임수를 써서 예수를 붙잡아 죽일까' 하고 궁리하고 있었다.

2 그런데 그들은 "백성이 소동을 일으키면 안 되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고 말하였다.

3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 환자였던 시몬의 집에 머무실 때에,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는데, 한 여자가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4 그런데 몇몇 사람이 화를 내면서 자기들끼리 말하였다.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그리고는 그 여자를 나무랐다.

6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만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7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너희가 하려고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8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

9.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10.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겨줄 마음을 품고, 그들을 찾아갔다.

11. 그들은 유다의 말을 듣고서 기뻐하여, 그에게 은돈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를 넘겨줄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 김영길(한국, 1940-2008)

 

샌드위치 기법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잡히시기 이틀 전,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문학 기법 중 샌드위치 구성이라고 하지요. 부각하고자 하는 내용을 그와 상반되는 내용 사이에 넣어서 문학적 효과를 얻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1절부터 2절에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방법을 구하고, 10절에서 11절까지는 유다가 이들과 공모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사이인 3절부터 9절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모습을 배치합니다.

 

샌드위치 기법은 영화에서도 사용됩니다. 영화 대부에서 피의 세례식이라 불리는 마지막 장면이 있지요. 아버지의 총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주인공은 가문을 위해 악인의 길을 걷기로 선택합니다. 때마침 여동생의 아들의 유아 세례식이 열리자 대부를 자처하며 맹세를 하지요. 주인공인 알 파치노의 유명한 대사입니다. ‘저는 마귀의 행실을 끊고 사탄의 일에 관여를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조카의 세례식은 자신의 알리바이를 위해 필요한 위장막이었습니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부하들이 계획에 따라 다른 마피아 패밀리의 정적들을 암살합니다. 한 아이가 영세를 받고, 그 아이의 대부가 되는 가장 성스러운 예식이 진행되는 가운데 피가 난무하는 잔혹한 암살 현장이 교차 편집되어, 인간이 가진 신성한 모습과 추악한 모습이 극적으로 대비가 됩니다.

 

영화 대부, 알 파치노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두개인 및 대제사장과 서기관에 이르기까지 당시 쟁쟁했던 종교, 사회 지도층이 합심해서 예수를 살해하고자 하는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유능했던  가룟 유다도 그들과 공모하여 스승을 배반하여 죽음으로 몰아가는 상황입니다. 인간의 천박하고 추악한 모습들만 가득한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마가는 이들과 대비되는 예상치 못했던 전혀 다른 인물을 등장시킵니다. 바로 이름 없는 한 여인의 헌신적인 행동입니다.

 

향유 옥합을 부은 여인

이제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생애 한 마지막 한 주간은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머무셨으리라 추측합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감람산 동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시몬이 자신을 고쳐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잔치를 열었고, 인근에 살던 나사로의 남매가 함께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아마도 이 여인이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유력한 후보로 생각됩니다.

 

당시 상황이 엄중했기에 분위기는 차분했을 듯 합니다. 여러 음식이 차려지고 식사를 한창 하는 중, 한 여자가 갑작스럽게 돌발행동을 합니다. 나드 기름으로 만든 향유 한 옥합을 들고 예수님께 다가가 그 병을 깨뜨려 머리에 흘러내리도록 모두 다 쏟아부었습니다. 나드는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인도에서 자라는 감송향의 뿌리 진액으로 고급 수입 향유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 양이 한 근으로 대략 삼백 밀리리터라 말하지요. 대략 1밀리리터에 한 데나리온 정도 쳐주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금액이 삼백 데나리온으로 지금 우리 가격으로는 오천만 원 가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향유는 주로 부모가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 오랫동안 모아 두었다든가 아니면 본인이 잘 준비해서 결혼 지참금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감송향

 

식사를 하는 중 순간 갑자기 모두의 시선이 여인의 행동에 집중되었습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소리와 함께 향유가 흘러나오며 예수님이 머리로부터 향유로 적셔지셨습니다. 그 순간 공간을 가득 채우는 그윽한 향기로 인해 한 순간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고요함을 깨는 몇몇 사람들이 여인을 비난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마가복음에서는 특정하지는 않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이라고 하고 요한복음에서는 가룟 유다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무례하게 했다거나 모두가 있는 앞에서 예의 없이 행동한 것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분노한 까닭은 바로 향유를 허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당한 월권입니다. 자기 소유인 향유를 땅에 버리든 자기 몸에 발라 없애든 상관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면 좋은데, 아깝게 허비했다고 나름 비난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 말을 들은 이 여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책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했거나 내가 정말 잘못한 것 아닌가 하며 자책 하거나 자괴감이 들었을까요? 저는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여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은 것입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물러설 것도 없는 것이지요. 자기의 전존재를 드린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심정으로 한 행동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말과 시선은 전혀 고려할 것이 아니지요.

 

Dieric Bouts, 1440, Staatilche museen, Berlin

 

칼로스καλός

그래서인지 예수님께서도 여인을 힐난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이 여인을 내버려 두라. 왜 괴롭히느냐?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 여기서 예수님이 좋은 일이라 했는데, 원어로는 칼로스καλός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칼로스καλός는 선한 일을 했다기 보다는 미적인 아름다움이나 우아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여인의 행위로 인해서 고귀함, 즉 아름다움을 나타내어 좋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아름다움을 드러내어서 여인을 칭찬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기준으로 본다면 사실 이 여인의 행위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당시 문화인 고대 로마 그리스 문명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 남성중심적인 사회로 볼 수 있습니다. 여성이 아름답고 고귀하다고 했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도 매우 남성중심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달리 외적인 아름다움이나 성적인 매력은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더 있다고 보았습니다. 동성애가 성행했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고요. 그래서 당시 시대에는 누드 상도 남성 누드 상은 있지 여성 누드 상은 없었습니다. 물론 여성의 몸매나 얼굴이 예쁜 것도 중요한 평가 한 요소였지만, 사실 이것을 평가하는 기준은 여성의 생식 능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이를 잘 낳고 잘 기를 수 있는 것으로 여성의 외모를 평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사를 잘한다든지, 자녀를 잘 키우고 교육시키는 능력이야 말로 여성을 아름답고 고귀하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시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여인은 결코 아름답거나 고귀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닙니다. 앞서 이 여인이 나사로의 동생인 마리아로 추측된다고 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경우처럼 마리아는 언니인 마르다에 비해 가사 일을 좋아하거나 잘하는 여인이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앞으로 결혼하여 자신의 가정을 돌보기 위해서 모아두어야 할 향유를 계획 없이 낭비하는 모습은 무분별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여성으로 결코 아름답지 못한 행동인 것이지요.

 

<페플로스를 입은 코레> 기원전 530년경, 채색 대리석,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예수님의 칭찬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시대적 편견을 넘어서 이 연인의 행동을 아름답다고 평가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본인을 위해서 한 행동이기에, 예수님 입장에서는 잘했다고 칭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지요.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지만,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않다는 말씀을 들으면, 그래 맞어 예수님도 위로가 필요했을꺼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여인이 힘을 다해서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장례를 준비했다는 뜻일까요? 유대 관습으로는 시체에 향유를 부어서 염을 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자신이 죽은 후에 당할 일을 앞서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게  이 여인이 의도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지요. 예수님 보고 죽으라고 하는 행동으로 오해될 짓을 왜 하겠습니까? 이것은 향유를 깨뜨린 의도와 상관없이 그 여인이 알지 못했던 숨은 뜻과 의미를 예수님이 밝혀주신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혀 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사적인 감정으로 자기에게 잘해주었기에 칭찬했다고는 볼 수 없을 만큼 그 행동을 높이 여긴 것입니다. 앞서 이 여인이 한 행위를 아름답고 고귀한 일이라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일이 항상 기억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복음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 여인의 행동처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향유 옥합을 깨어서 예수님께 부어야 할까요? 아니면 거기에 비슷하거나 더 대단한 헌신을 해야 하는 것인가요?

 

향유를 부은 여인의 자화상

 

사실 이렇게 말씀을 해석한다면, 오늘 본문은 강한 율법이 되어서 우리를 옥죄이기도 합니다. 신앙이란 게 결국 있는 것 없는 것 다 바쳐야 하는 건가 생각이 들기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물론 우리는 나의 전부 다 바치지도 않지요. 이 여인의 믿음이 특별해서 그렇다 생각하고 대충 타협을 합니다. 당시 상황이 예수님이 죽기 직전이라 이런 헌신도 필요하지 하며 나와는 관계없는 것으로 치부합니다. 이게 보통 이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왜 이런 해석으로 빠지게 되는가 하면, 겉으로 드러난 여인의 행동만을 보기 때문이 것입니다. 이 여인이 향유 옥합을 깨뜨린 그 중심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면 결코 율법적인 해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칸트의 숭고함이란

자 그렇다면, 이 여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아름다움의 하나인 숭고함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철학을 진선미의 학문이라 하듯이, 아름다움은 진리와 선과 비견되는 매우 중요한 철학적인 주제입니다. 아름다움을 말할 때, 좀 더 고차원적인 아름다움을 가리켜 숭고함이라 말합니다. 아름다움이 극에 달했을 때, 나타나는 감정이 바로 숭고함입니다.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구분한 철학자가 있는데, 바로 그 유명한 칸트입니다. 먼저 칸트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쾌감만 있는 것이고, 숭고함은 불쾌감이 쾌감이 함께 있어서 불쾌감이 쾌감으로 변할 때 나타나는 것이라 구분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물을 바라보거나 인식할 때, 그것이 나의 생각과 조화나 균형을 이룰 때 쾌감을 느낍니다. 조화와 균형이 잘 이루어진 자연의 풍경, 음악 작품, 미술 작품 등은 우리의 눈과 귀를 매료시킵니다. 또한 내적으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조화롭고 균형을 이룰 때, 그 내면 역시 아름다움으로 인식합니다. 이것이 안정감과 평안이라는 쾌감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모두 다 인간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인 것이지요. 이렇듯 아름다움에는 쾌감이 있는 것입니다.

 

이마누엘 칸트

 

그런데 숭고함은 다릅니다. 숭고함은 조화와 균형만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쾌감이 지속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숭고함이 언제 발생하는지 설명하고자 칸트는 두 가지 예를 듭니다. 첫째는 수학에서 말하는 무한의 개념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대자연의 거대함을 예로 가져옵니다. 먼저 수학에서 무한을 생각해 봅시다. 무한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 상상력이 만들어낸 수입니다. 정확하게 무한이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숫자를 한 없이 세어가 보다가 결국 그 끝은 어디일까 문득 생각한 것입니다. 아마 무한이라는 수가 있을 거라 짐작을 한 것이지요.

 

이렇게 무한을 생각한 것만해도 대단한 진전입니다. 따라서 무한이라는 정답을 찾아낸 우리 이성은 일시적으로는 기쁨에 도취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무한을 설명하려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무한에 다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람은 인지적 부조화에 빠져서 불쾌감이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수학자 가우스는 무한을 정면으로 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무한을 정면으로 보면 내가 무지하다는 생각에 불쾌하거든요. 그런데 이 불쾌감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생각하다 보면, 언젠가 무엇인가 중요한 깨달음에 이른다고 보아습니다. 내가 무한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무한을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되어서 어느 순간 불쾌감이 쾌감으로 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숭고함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이지요. 무한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대자연의 풍광들이 있지요.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보면서도 그 끝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게 되고요.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우주에 수없이 많은 별의 수가 얼마나 될까, 그 우주의 크기가 얼마나 될까 상상을 하게 되지요. 아마도 무한할 거야 상상하고 추측하면서 와 대단하다며 일시적으로 기쁘긴 하지요. 그런데 잠시 잠깐입니다. 사실 모르는 거예요.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의 초라함은 더 크게 대비될 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자연의 거대한 웅장함과 무한함 앞에 불쾌하지만, 무한의 개념을 통해서 계속 그 자연을 응시하다 보면, 결국 우리 정신이 그 자연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평선을 바라볼 때, 지평선은 끝이 없지만, 지평선을 무한의 개념으로 포착한 자신의 정신을 포착한 것입니다.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광대한 우주를 무한으로 포착하지만, 그 순간 사실은 우주를 무한으로 바라본 자신의 정신이 포착된 것입니다. 대자연과 무한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그것을 파악하려고 몸부림치는 나의 정신이 생생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요. 이게 불쾌감을 벗어나 쾌감을 주어서 숭고함이 나온다고 본 것입니다.

 

광활한 우주와 수많은 별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숭고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숭고함이라는 것이, 또는 아름다움의 극치가 무한에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런데 숭고함이 무한에 있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의 극치가 대자연에 있지 않아요. 바로 그 무한을 포착하고 대자연에 맞서는 우리 인간의 정신 안에 숭고함이 있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것은 결국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이라는 게 외부에 있지 않고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관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꽃을 보고서 아름답다고 쾌감도 바로 주관적인 생각이고, 불쾌감에서 쾌감으로 변하는 숭고함 역시 우리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주관적입니다. 칸트는 이 주관적인 기준을 도덕적 감정이라고 불렀습니다. 칸트가 참 매력적인 것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이 도덕적인 감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어요. 철학자이지만 신학자인 듯한데, 이런 점을 보아 아마도 독실한 신앙인이지 않은가 싶습니다.

 

또한 칸트는 무한에 좌절하여서 포기를 한다든지, 아니면 거대한 자연의 힘에 굴복하여 공포와 두려움에 빠진다면, 오히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보았습니다. 포기하고 두려움에 머무르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미신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마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금송아지를 섬기는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지요. 따라서 참된 신앙인은 무한이나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으로서 가지는 자신의 한계에 대한 두려움을 직시하고 그 두려움에 맞서서 자신의 숭고함을 마땅히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숭고함을 일으키는 도덕 감정을 우리 신앙의 언어로 말하자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형상인 신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걸 발현할 수 있다면, 결국 우리는 진리이신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본심

지금까지 숭고함에 대해서 설명했는데요. 이 점을 향유 옥합을 깬 여인의 경우와 연결 지어서 생각해 봅시다. 먼저 예수님과 그 일행이 처해진 당시 분위기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인자인 자신이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상황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도도 모른채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두려움 가운데 놓여 있었습니다. 제자들도 그랬으니, 일개 한 촌부에 불가한 이 여인은 어찌했겠습니까? 자신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의 속 마음은 저 지평선처럼 무한하여 도저히 알 수가 없고, 그리고 이후 전개될 예수님과 자신의 운명 또한 밤하늘에 광활한 우주처럼 무한하여 가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그냥 두려움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움츠려 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포기하고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어쩌면 해야만 하는 것을 행했습니다.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무한하신 예수님에게 자신의 전부, 즉 자신의 무한이라 여겨지는 향유를 부어버린 것입니다. 이 행동을 바로 불쾌감에서 쾌감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한을 포착하려는 인간의 몸부림이라 볼 수 있습니다. 거대한 무한이신 예수님에게 자신의 보잘것없는 무한인 향유를 부어 하나가 되게 함으로, 결국 무한의 극치이신 예수님을 포착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여인이 무한의 극치이신 예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자신이 한 행동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이 나의 장례를 위해서 미리 한 일이라 알려주신 것입니다. 어쨋든 이 여인은 이렇게 행함으로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불쾌감에서 쾌감으로 나아가, 결국 숭고함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 핵심인 것이지요. 그리고 그 숭고함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지요. 바로 무한하신 예수님을 포착하였던, 이 여인의 정신, 그 영혼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숭고함을 보시고, 이 여인의 행동이 나에게 좋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라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앞서 오늘 본문이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향유 부은 사건 앞에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악한 모습이 나오고, 그리고 뒤에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사건이 나옵니다. 이 두 사건이 앞뒤로 놓은 것은 바로 향유 부은 여인이 보여준 숭고함과 대비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긴박했던 당시 상황 속에서 제자인 가룟 유대는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였겠지요. 자신이 생각한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달리 도저히 알 수 없는 예수님의 속마음,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예측 못할 미래로 인해 심한 좌절과 두려움, 그리고 분노의 마음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유다가 선택한 것은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무한이신 예수님을 어떻게든 포착하기보다는 무한에 등을 돌려서 불쾌감 가운데 머무르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는 진리로부터 떠나 진정한 아름다움인 숭고함으로부터 멀어져 간 것입니다.

 

무한의 극치이신 하나님께 나아가기

이것을 우리 신앙에 적용해 봅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신앙의 연수가 쌓여가면 쌓여갈수록 하나님을 도저히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고, 하나님께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 확신했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점점 회의와 두려움이 커져가면서 낙심이 되어 냉담자가 되곤 합니다. 앞서 무한을 직면할 때 인간이 느끼는 불쾌감과 비슷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야 말로 무한 중에 무한, 무한의 극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불쾌감에 머물러 있으면 칸트에 말대로 신앙이 아니라 미신을 따르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안타깝게 미신을 믿듯이 하나님을 믿지요. 그냥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기복신앙에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부인하고 떠나가 버립니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 점점 회의와 두려움이 커지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몸부림칠 때, 어느 순간 불쾌감이 쾌감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내가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래도 그 무한하신 하나님을 내가 붙잡으려고 하는 내 영혼이 있으며, 그 영혼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숭고함이 나오는 상황입니다. 바로 향유 부은 여인의 행동과 같은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깊은 갈망에서 나온 것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일이 항상 기억될 것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신앙의 숭고함은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나 반드시 거쳐야 할 필연적인 과정인 것입니다.

 

마이클 토르벨, 엠마오로 가는 길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율법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하나님 앞에 몸부림처야 합니다. 회의와 두려움이 더욱 쌓여가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처절한 상황일수록, 냉소적으로 불쾌감으로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향유 부은 여인이 한 것처럼, 나의 부족한 무한을 가지고 무한의 극치이신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고난 가운데 인생의 바닥으로 내팽겨 치는 상황, 아마 어쩌면 나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일지 모릅니다. 바로 나의 무한을 마주하는 순간이지요. 이것이 나의 무한이자 나의 향유 옥합입니다. 이것을 깨어 부서뜨려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가만히 있을까요?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는 확인시켜 주십니다. 바로 무한의 극치이신 하나님을 붙잡고 포착하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내 영혼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제껏 하나님이 함께 해주신 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만으로도,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부분적으로 하나하나씩 맞추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인생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놀랍게 우리 삶에 역사하셨는지가 점차적으로 더욱 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완전히 깨달을 때까지 오직 믿음으로 무한의 극치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 계속해서 나의 한계, 나의 무한인 향유 옥합을 깨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이죠.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 영광스러운 진리의 면류관을 모두 얻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