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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장 23절-3장 6절 새번역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릴 때에,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26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28 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를 보려고,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3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4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하였다.
5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6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안식일, 샤밧שבת
오늘 본문은 안식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어로 샤밧שבת이라고 하지요. 안식일은 유대인에게 한 주간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금요일 해가 떨어질 때부터 그다음 날인 토요일 해 질 때까지 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루를 나누는 기준이 다릅니다. 해가 지는 것으로 하루를 구분하지요. 이것은 일을 하는 노동자의 입장을 고려해 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을 마침으로 하루를 끝낸 뒤에, 하루의 시작을 휴식으로 보내어 충분히 충전하여 그다음 날을 시작하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반대로 오늘날 우리는 하루를 24시의 단위 시간으로 나누어 0시를 기준으로 날을 구분합니다. 이것은 일을 시키는 관리자 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루를 세분화된 시간으로 구분해야지 일을 할 때 능률이 보다 향상되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관리자가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좋을 수 있습니다. 만약 휴일이 없다면, 시간에 쫓기어 쳇바퀴 돌듯 쉼 없이 일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노동 인권이 향상으로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되어서 충분한 휴식이 보장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과학기술 발달로 주 4일, 더 나아가 주 3일을 근무를 해야지 많은 사람들에게 노동의 기회가 돌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나 일주일에 하루 휴식을 보장받게 된 지도 사실 그리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후반 산업혁명 시기에 일어난 노동 운동으로 그때나마 법적으로 제도화되었습니다. 이게 전 세계로 보편화된 것은 백 년도 채 되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휴식을 보장하는 것은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겠지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후 일곱째 날에 쉬었다고 하지요. 하나님도 쉬셨기에, 우리도 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 신앙을 자신의 고유한 문화로 지키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세기 경 바빌론 유수 때부터 입니다. 타향에서 종살이하던 때, 종교적인 신념도 지킬뿐더러 실제로 휴식까지도 보장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구체적으로 기록하진 않지만, 분명 지배자인 바벨론으로부터 안식일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 투쟁하고 희생을 치렀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같은 경우 일제 식민 통치 아래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신앙을 지킨 것과 같은 것이지요.
안식일 39가지 규례
따라서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민족 정체성과도 같았습니다. 안식일을 정해놓고 그날만큼은 일절 노동을 금하고 경건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바빌론 유수 때 시작된 안식일의 규례는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기원전 3세기 경 유대 경전인 미쉬나에서 안식일의 39가지 규례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이것을 살펴보면, 주로 일상생활과 관련된 규례들입니다. 우선 농사와 관련하여 씨 뿌리고, 밭 갈고, 추수하고, 타작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음식을 하거나 바느질하는 것도 금지되고, 그리고 사냥하고 가축을 돌보는 일 등 당시 노동과 관련된 모든 일들이 금지되었습니다. 창고에 있던 짐이나 집 안 가구를 옮긴다든지, 불을 켜거나 끄는 일도 금지되었습니다.
39가지 금지 규정은 아니지만, 샤밧 거리라는 규례가 있습니다. 성경의 단위로 이천 규빗, 대략 900미터 이상은 안식일에 걷는 것이 금지합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준수하며, 샤밧 거리 규례까지도 지킨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경우 안식일인 토요일 오전이면 차가 거의 없습니다. 안식일 회당에 가야 하기에, 회당을 중심으로 1km 이내에 거주합니다. 오늘날 시선으로 보면 무척 빡빡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규례가 세워졌던 과거 시기에는 도시 규모나 사람의 동선이 크지 않았기에 나름 합리적인 기준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은 너무 짧은 거죠. 그래서 좀 넓히자는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안식일에 우물에서 끄집어내어 살려주어야 하는가?
예수님도 언급하신 이야기지만, 안식일과 관련된 유명한 논쟁이 있습니다. 만약 안식일에 사람이나 가축이 우물에 빠졌다면, 끄집어내어 살려주어야 하는가 입니다. 당연히 보수적인 유대인은 우물에서 건져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잔혹할 수 없지 않습니까. 우물에 빠진 사람의 경우 대다수가 자신과 관계가 있는 친 인척일 겁니다. 그리고 가축도 내 소나 양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죽어가는 것을 어떻게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사실 실생활에서는 보수적인 기준으로 안식일 규례를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온건한 해석을 채택했습니다. 만약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응급상황이면 건져주고,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 안식일이 지나가면 건져주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온건한 해석을 받아들인 후자였습니다. 나름 상식적인 수준에서 율법을 해석하고 안식일의 기준을 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온건한 해석을 취한 바리새인들 눈에도 오늘 본문에 나온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먹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가는 데, 제자들이 배가 고팠습니다. 밀이삭을 좀 잘라서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 주변에 바리새인들이 지켜보고 있다가 즉각 문제로 삼았습니다. 이들이 비난한 이유는 주인 몰래 훔쳐 먹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같으면 서리를 한 것이니 당연히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지요. 그러나 율법에 따르면 이 경우 도둑질로 보지 않았습니다. 배고픈 나그네가 지나가다가 과수원에 포도송이 하나 따먹거나 밀이삭을 잘라먹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를 금지하는 주인이 긍휼과 자비가 없다고 비난받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문제 삼은 것은 안식일 금기 사항 중 농사와 관련된 규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손으로 이삭을 꺾어서 비비는 행동이 추수하고 타작을 한 것과 같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즉각 응수하여 다윗의 예를 드십니다. 25절과 2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릴 때에,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것은 사무엘상 2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도망칠 때, 급히 나온다고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습니다. 먹을 것 없이 굶주리며 도망치다가, 결국 놉 땅에 있는 성소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의 아히멜렉이란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신분을 밝히고 먹을 것을 좀 달라고 요청합니다. 아히멜렉은 사람이 먹을 빵은 없고 누룩을 넣지 않은 진설병만 있다고 했습니다. 누룩을 넣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거룩하게 하기 위함 입니다. 일반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됩니다. 제사장만 규례에 따라먹을 수 있었습니다. 몹시 다급하고 굶주렸던 다윗은 진설병이라도 달라고 했습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의 요청에 따라 내어주었고, 다윗은 부하들과 함께 나누어 먹고 떠났습니다.
다윗과 진설병
오늘 본문에서 제사장 이름을 아비아달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마가복음의 저자가 착오를 한 듯합니다. 아비아달은 아히멜렉의 아들입니다. 나중에 사울이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고, 아히멜렉을 비롯한 놉의 제사장들을 모두 다 죽입니다. 그중 유일하게 아히멜렉의 아들인 아비아달이 목숨을 건져 다윗에게 도망쳤다가, 나중에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자 대제사장이 됩니다.
어쨌든 다윗이 진설병을 먹음으로, 아히멜렉도 율법을 어긴 것이고 다윗도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거룩한 제물을 함부로 한 것이라면 마땅히 저주받아야 할 텐데, 다윗은 아무런 문제 없이 오히려 기운을 되찾고 사울을 피해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성경도 문제가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후대 사람들도 다윗과 아히멜렉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어기고서라도 쫓기는 다윗을 도운 아히멜렉의 관용을 칭찬합니다. 반대로 분풀이로 아히멜렉을 살해한 사울의 패역함을 비난합니다. 바로 이 점을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다윗이 율법을 어겼음에도 왜 그 행동을 정당하다 평가 했을까요? 다윗이 왕이라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는 자라서 예외를 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다윗은 굶주린 도망자로서 생명이 경각에 달린 약자입니다. 그러기에 예외를 준 것입니다. 배고픈 나그네의 경우 밀밭에 밀이삭을 좀 따서 먹는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잘못을 한 것이 아닐뿐더러, 법적으로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했지요. 성경은 율법을 적용할 때, 예외적인 상황이 있음을 알고 그 여지를 둔 것입니다.
안식일은 생명을 살리는 선한 일을 하는 날이다
때론 율법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것은 기준이 모호해서가 아닙니다. 예외를 적용할 때에도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약자일 경우 배려한다는 것입니다. 당장 목숨이 날아갈 상황에 율법을 지키고 죽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율법을 어겨도 생명을 지키는 것이 좋겠습니까? 오늘 본문 3장 4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하였다." 당연히 안식일에는 목숨을 구하고 생명을 살리는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세부적인 규칙보다 더 중요한 율법의 근본정신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핵심 강령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시대 제사장인 아히멜렉이 볼 때, 진설병을 먹게 하는 것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는 율법의 핵심 강령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진설병과 관련된 율법의 세부 조항을 어기면서도, 이웃 사랑이라는 더 큰 율법의 뜻을 받든 것입니다.
제4 계명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안식일의 규례도 그 본 뜻을 담은 핵심 강령이 있습니다. 안식일의 39가지 규례를 살펴 보면 모두 다 금지 조항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유일하게 이것만큼은 행하라고 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쉬어라는 것입니다. 핵심 가치는 주로 부정이 아니라 긍정으로 표현합니다. 바로 쉬는 것이 안식일의 본래의 뜻입니다. 안식일 금지 규정도 결국 쉬어라는 핵심 강령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세부 규례인 것입니다.
신명기 5장에 기록된 십계명의 안식일에 대한 계명을 통해 이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4번째 계명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입니다. 4번째 계명은 다른 계명들과 달리,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신명기 5장 14절입니다.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나, 너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뿐만 아니라, 너희의 소나 나귀나, 그 밖에 모든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안에 머무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하여야 한다.”
안식일의 핵심은 약자들을 쉬게 하는 것에 있다
일을 하지 말고 쉬게 하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핵심은 쉬는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들만 쉬는 게 아닙니다. 자녀들도 일을 해서는 안되고, 종이나 가축도 일을 시켜서도 안됩니다. 지나가다 도움을 받고자 찾아온 식객도 쉬어야 합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일 하지 않고 쉬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안식일 규례는 강한 사람을 위한 법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위한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1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억하여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주 너희의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었으므로,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른다고, 이스라엘 백성은 원래 애굽의 종살이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에서 쉬지도 못하고 일주일 내도록 강제로 일했던 때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 시절만이 아닙니다. 이후 바벨론에게 망하여 포로로 끌려가 노예 생활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안식일의 39가지 규례는 바벨론 포로 시절 만들어진 것입니다. 안식일에 쉬어라는 명령은 당시 약자였던 유대인을 위한 법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강자인 바벨론 앞에서 비록 약자일지라도 하나님 나라 백성의 존엄함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27절에서 말씀하시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당시 바리새인이나 유대 기득권자들이 안식일을 지킨다는 명목아래, 자신은 더 쉬고 대신 다른 사람들은 일하게 하는 위선적인 태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에 자신들이 쉬기 위해, 대신 종들은 더 많은 일을 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약자들을 돌보지 않고 심지어 생명이 위급한 사람조차도 외면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안식일의 근본 정신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28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여기서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 함은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모든 피조물은 안식일 동안 하나도 빠짐없이 주인으로 존귀하게 여김 받아야 합니다. 사실 안식일에 주인은 하나님이시죠. 그렇기에, 모든 사람이 안식일에 권리를 누리는 것은 천부인권입니다. 하나님의 권리를 우리가 받아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양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식일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다
다시 본문으로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의 논쟁을 뒤로하고, 안식일 그날 바로 회당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회당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안식일 규례에 따르면 병자를 고쳐서는 안 됩니다. 이제 안식일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나절만 지나면 해가 떨어지고 안식일이 끝나게 됩니다. 고치려면 그때 하시면 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경우 목숨이 경각에 놓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리해서 고치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당시 회당에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로 가득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가운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불러다 세우셨습니다. 치료해 달라고 직접 요구한 것도 아니기에, 본인 역시 당혹해했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굳이 자연스럽지 못한 상황을 연출하셨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 하셨습니다. 손을 내밀자 곧장 정상적으로 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장면을 모든 사람들이 보게 하셨습니다. 공개적으로 안식일을 어기신 것입니다. 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기적에 놀라면서도, 자신들의 율법을 무시하고 전통을 파괴하는 자라 생각하며 화가 났을 것입니다.
안식일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다
이 순간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선이 악으로 바뀌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질문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왜 선이 악으로 바뀌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안식일에 하면 왜 죄가 되는 것인지를 역으로 물은 것입니다.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안식일에 했기 때문에 악한 일이 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안식일이기 때문에, 선이 악으로 바뀐 것일까요? 아닙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입니다. 가장 선하고 거룩한 날입니다. 오히려 그런 날일 수록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선한 일이 악한 일이 된 것은 안식일이 문제가 아니라, 결국 사람들이 가진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치 병자의 오그라든 손처럼, 회당에 모인 바리새인들과 유대인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 있었기에,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악한 일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의 마음을 보시고 매우 화가 나셨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셨다고” 말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은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안식일에 쉬는 것도 결국 하나님이 선하심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39가지 안식일 규례의 경우 파종하지 않고, 밭을 갈지 않고, 추수하지 않고, 타작하지 않고, 양털을 깎지 않고,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나 자신을 위한 일을 금한 것입니다. 나를 배 불리고 살찌우는 일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 한 것은 모든 일을 금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을 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안식일만은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 사용하라
평일에는 자신을 위한 일에 집중하면 됩니다. 그런데 칠일 중 하루인 안식일에는 나 자신을 위한 일은 멈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쉴 때, 그냥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까요? 사실 쉰다고 해서 쉬는 게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자면 오히려 피곤해질 경우가 많습니다. 일상을 멈추고 쉴 때, 다른 무엇인가를 자연스럽게 하게 될 것인데, 그때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그 시간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유익이 아니라 타인의 위해서 섬기는 것이 안식일에 우리가 해야 할 적극적인 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더 나아가 안식일에 집중적으로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 타인을 위하는 것이야 말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내도록 타인을 위해서 일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평일에는 나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살아가고, 안식일은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도록 가르치신 것이지요.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마지막으로 6절 마지막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헤롯당은 분봉왕 헤롯의 친인척으로 당시 갈릴리 일대를 통치하던 권력 집단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들을 매국노라 여기며 원수로 지냈습니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이 끝나고 난 후 저녁이 되자 헤롯당을 불렀습니다. 어두운 밤에 비밀스럽게 함께 모여서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 머리를 모은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안식일조차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평일에는 어떤 삶을 살아갈지 예감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조차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면, 평일이 되었을 때, 나를 위하는 정도를 넘어 더 나아가 타인을 죽이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며 몰두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평일에 나 자신을 위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건강하게 사용하려면, 안식일 만큼은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시간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남을 위해 살게 되면, 그것을 사용한 시간과 에너지를 하나님이 배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무턱대고 남을 위해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나 자신을 위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 계산 방식입니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의 칠의 일조를 하나님께 드리자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자는 그 뜻을 이룰 때까지 멈춤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안식과 쉼은 마지막 날 하나님 소명을 다 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쉬지 않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사실 육체적으로 그냥 쉰다고만 해서 좋은 게 아닙니다. 퍼져버리면, 오히려 회복하는데 더 힘듭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잠시 쉰다고 깜빡 졸다가 신랑이 도착했을 때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낭패를 보면,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평일에 이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러다 칠일 중 하루는 이 땅에서 나 자신을 배부르게 하는 일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일은 구제와 봉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것만 있지 않습니다. 내적인 것도 있습니다. 바로 말씀 가운데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역시, 절대 타자이신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는 시간입니다. 내가 쓰는 시간과 에너지의 칠 분의 일을 거룩한 일에 소비해야 합니다. 십의 일조가 아니라 칠의 일조를 거룩한 삶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우리는 참된 안식과 쉼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존귀하고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적극적으로 안식을 실천하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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