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aBWC9ZVH2UU&list=PLh4-9uGANmwqQ-_1lMojr-OaWAKWpjfpf&index=6
새번역 마가복음 9장 2-9절
2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3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말을 주고받았다.
5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랍비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6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
7 그런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8 그들이 문득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고, 예수만 그들과 함께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명하시어,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다.
메타모르포노μεταμορφώνω 탈피하다
오늘 본문은 변화산 사건으로 불리는 일화로, 예수님이 환한 빛으로 빛나시며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신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변화하다 입니다. 변화하다를 그리스어로 하면 메타모르포노μεταμορφώνω 입니다. 그 어원은 형태나 형상을 뜻하는 모르페μορφή에서 왔습니다. 메타모르포노μεταμορφώνω는 일부분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그 전체 형태가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나비가 탈피를 하듯 유충에서 성충으로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따라서 변화라 말하기 보다는 탈피라 말하는게 그 의미를 적절하게 살리는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갑각류나 절지동물도 아니신데 탈피하셨는가? 그렇지는 않지요. 만약 예수님이 외적으로 변하셨다면, 탈피처럼 외형 전체가 확 변하신 다음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변화산 사건이 있은 후 시간이 지나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니 탈피한 다음 그 외형이 완전히 변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내면에 있던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이 갑자기 강하게 빛으로 발현되다 보니 외형이 변한 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제자들의 오해
변화산 사건을 두고 예수님이 외적으로 눈 보다 더 하얗게 빛나신 화려하고 찬란해진 모습만을 떠올릴 때가 많습니다. 이게 바로 육신을 벗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진짜 예수님의 모습이라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변화산 사건은 외적인 변화가 핵심이 아닙니다. 핵심은 내적인 변화에 있습니다. 사실 진정한 변화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시작되는 것이지요. 껍데기만 번질 하고 속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외형은 바뀌지 않아도 속이 알차면 그게 진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외형에 집착하여서 이런 오해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비단 우리만이 아닙니다. 직접 변화산 사건을 목격한 예수님의 수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순간마다 수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에도 세 사람만을 데리고 가셨고요. 감람산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세 사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렇게 가장 믿고 신뢰하는 세 명의 수제자들인데, 문제는 이들이 그렇게 신뢰할 만한 인물들이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순간마다 그 상황을 이해하거나 깨어있지 못하고, 두려워하거나 졸고 있었습니다.
특히 베드로가 많이 오해를 하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베드로는 헛다리를 짚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 정상에 올라 멀찍이 서서 상황을 지켜보니깐, 뭔가 굉장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곳엔 예수님만 계시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 온 듯, 왠지 모세와 엘리야처럼 보이는 두 사람들도 예수님처럼 새하얗게 눈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
육신을 넘어 영적인 존재로 변화한 모세와 엘리야
일반적으로 모세는 율법을, 엘리야는 예언자를 대변합니다. 둘 모두 하나님 말씀을 상징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조상들 중 모세와 엘리야는 죽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야의 경우 불병거를 타고 회오리 바람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요. 그리고 모세는 그 무덤이 없기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세의 육체를 놓고 악마와 천사가 다투었지만, 결국 천사가 승리하여 육신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왜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을까요? 이들은 구약에 나온 불멸의 존재들로서, 인간의 육신의 한계를 넘어 영적인 존재로 변화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보게 된 베드로는 당장 세 분을 위해서 장막을 짓겠다고 합니다. 하나는 예수를 위해서, 하나는 모세를 위해서,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장막을 세우고, 그리고 이곳에서 함께 살자고 제안합니다. 아마도 베드로 자신도 이들처럼 불멸의 존재가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을 역사적 사건으로 생각해서 기념관을 만들어 그 영광을 기릴 생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시면 마가복음 저자는, 베드로가 이 장면을 무섭게 느끼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얼떨결에 한 말이라 이야기합니다. 한 마디로 멍청한 소리를 했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헤르몬 산 정상 위에다 집을 짓는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소리이지요. 그리고 이들은 천상의 존재이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데, 왜 이 땅에서 머물 집이 필요하겠습니까?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보더라도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한 것입니다.
시내산 사건 vs 변화산 사건
사실 변화산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함께 생각해야 할 구약의 중요한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시내산 언약입니다. 시내산 언약이 왜 중요하냐 하면, 하나님과 모세의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새로운 구속사의 출발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와 대비되는 변화산 사건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새로운 언약을 알리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 온 인류에게 주어진 새로운 구속사의 출발을 드러내는 장면인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내면에 빛을 발하여 변화하신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라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변화산 사건은 앞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다음, 바로 그 직후에 일어났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이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았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인정으로만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증하지 않았습니다. 참된 메시아는 사람의 인정을 넘어, 무엇보다 하나님의 인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은 변화산으로 향하신 것입니다.
메시아의 비밀
마가복음을 보면, 공생애 초기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후에 하늘로부터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면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사실 이때 이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로 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아닌지 긴가 민가 했습니다. 당시 세례를 주었던 세례 요한 조차도 헤롯에 의해 감옥에 갇혔을 때, 예수님이 메시아 정말 그분이 맞는지 의심이 되어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의심하거나 몰라보더라도, 아이러니하게 악령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공생애 초기 예수님이 축귀 사역을 하시는 장면을 보면, 악령들이 사람 밖으로 떠나가면서 하는 말이 예수님 당신이 누구인지 우린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지 않는가 하면서 큰 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악령들에게 주의를 주며 입 다물고 나에 대해서 밝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감추고자 하셨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입에서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를 지나가실 때,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뭐라 말하는지 묻습니다. 세례 요한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고, 엘리야라 하는 사람도 있고, 구약의 예언자 중 하나라 말한다고 제자들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바로 이때 베드로가 고백하길, '선생님은 그리스도 메시아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진면목을 확인한 최측근 수제자인 베드로의 입에서 드디어 메시아라는 고백이 처음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 사건이 중요한 까닭은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공식적으로 사람에게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사실 사람의 인정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그렇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시면서 자신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이제 하나님 앞에서 최종적으로 승인받고자 하셨습니다.
헤르몬 산의 정상에서 눈처럼 빛난 메시아 예수
따라서 예수님은 지체 없이 인근 주변 가장 높은 산으로 가셨습니다. 공교롭게도 빌립보 가이사랴로부터 북쪽으로 대략 30킬로미터 위에 헤르몬산이 있었습니다. 헤르몬산은 대략 2,800미터로 백두산 보다 좀 더 높습니다. 그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산입니다. 이곳은 아주 더운 여름을 제외하고는 그 정상이 만년설처럼 눈으로 덮여 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옷에서 빛난 광채가 변모산 정상의 흰 눈처럼 그렇게 희게 보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변화산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눈처럼 새하얗게 빛나셨으며,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그릴 뿐입니다. 그리고 하늘 위 구름 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고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 메세지가 중요합니다. 7절 말씀이지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구름 속에서 들린 이 메시지는 다름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승인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난 뒤 하늘에서 들려온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라는 메시지와 연결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말 대신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이스라엘이 구원받기 위해 구약 모세의 율법을 따랐다면, 이제는 온 인류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참된 진리에 이를 새 계명을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빛 vs 내적인 빛
예수님에게 나오는 빛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이 눈처럼 하얗게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이 빛을 예수님 외부에서 빛나는 빛이라 오해했지만, 사실 이 빛은 외적인 빛이 아니라 내적인 빛입니다. 외적인 빛과 내적인 빛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먼저 외적인 빛은 태양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사물들이 태양의 빛을 받으면 그 빛을 반사함으로 우리 시각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빛은 다릅니다. 내적인 빛은 태양의 빛보다 더 원초적인 빛으로, 모든 것을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빛입니다. 천지 창조 때, 하나님이 첫째 날 맨 처음 만드신 것이 바로 내적인 빛입니다. 혼돈과 어둠만이 있을 때,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생겨났습니다. 외적인 빛을 비추는 태양은 첫째 날에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넷째 날에 해와 달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내적인 빛을 먼저 만드신 다음, 그 이후로 창조 사역을 진행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내적인 빛은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고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기에, 이 내적인 빛을 먼저 창조하신 다음 다른 피조물을 만셨습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은 바 된 사람의 경우, 이 빛은 우리 영혼에 심긴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외적인 빛과 내적인 빛은 그 비추는 방식도 다릅니다. 외적인 빛은 누군가가 나에게 빛을 비춰주면 그 빛을 반사하여 빛이 납니다. 그러나 내적인 빛은 그렇지 않습니다. 빛을 자기 내면에 품은 자들만이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발광체와 반사체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외적인 빛은 반사체라도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인 빛은 자기 자신이 발광체여야지 그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빛이 없으면 결코 빛나지 않는 것입니다.
내적인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이 항상 내적인 것을 외적인 것으로 오해를 많이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가 언제 도래하는지를 묻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외적으로 보이는 것으로 생각하며, 그것이 자신들의 눈으로 보이는 때에 집착한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오는 것을 심판의 때로 여기며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를 알면 자신들이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 나라는 내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어디에 계실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시면 혼자가 될 것이 두려웠습니다. 떠나가신 곳이 어디인지를 안다면 찾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들도 죽게 될 것인데, 죽은 뒤에도 불멸할 수 있을 것 같은 그곳으로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당신이 계실 곳이 어디 있는지 보여주십시오. 심지어 제자 중 빌립은 당신이 있을 곳이 하나님 아버지 옆일 테니, 아예 대놓고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요구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0절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곳은 눈에 보이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늘 아버지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기 마음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내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자기 마음 안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바로 그 마음 안에서 예수님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장막을 세우다
자 그렇다면, 우리 마음 안에 내적인 빛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 마음 안에다 거룩한 빛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마음에 장막을 세워야지, 그 장막에 하나님 아버지가 기거할 수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의 안타까움이 바로 이 점입니다. 장막을 세워야 한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외부 밖에다가 세우려고 한 것입니다. 장막을 세워도 어디에다 세우려고 했습니까? 사람이 살기도 어려운 그 높은 헤르몬산 꼭대기에다가 장막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장막을 세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장막을 세우듯 먼저 나 자신이 스스로 서 있어야 합니다. 장막을 칠 때를 보면, 먼저 기둥을 세웁니다. 장막의 기둥을 세우는 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원칙과 기준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기둥이 되는 원칙과 기준이 튼튼하게 서 있어야지 장막을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원칙과 기준이 흔들려버리면, 장막도 무너져 내립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속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그러나 나의 말을 듣고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의 장막 기둥을 튼튼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어디에 세워야 하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변화산 사건에서 하늘 위 구름 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에 장막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의 원칙과 기준으로 삼아서 변함없이 한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내 삶의 원칙과 기준을 삼았다고 해서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만 하면 반쪽입니다. 더 나아가서 정말 그러한지 확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메시아인지를 먼저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으셨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 승인받으셨습니다. 이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정한 나의 원칙과 기준이 세상과 부딪힐 때, 우리는 조롱받거나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처음 세운 기준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을 때까지 오랜 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논어 위정 편 4절 지천명
공자가 30세를 이립(而立), 40세를 불혹(不惑), 50세를 지천명(知天命)이라 했습니다. 나이 30세에 이립, 뜻을 세워도 40세가 될 때까지 10년 동안은 유혹이나 외부 조건에 흔들리지 않도록 훈련을 받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10년을 잘 훈련받으면 불혹이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확인받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내가 세운 뜻이 사람들에게 흔들리지 않더라도 이게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가 중요합니다.
또 10년을 그렇게 하나님과 씨름하다 보면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냥 내가 세운 뜻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지만, 결국 이 원칙과 기준이 내 뜻이 아니라 하늘이 정해준 뜻임을 알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께 승인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공자가 지천명이라 한 것입니다. 30세 이립에서 시작하여, 40세 불혹을 지나 50세 지천명에 이르는 것은, 결국 우리가 세운 뜻이 삶의 길흉이나 외부환경에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는 자신의 삶의 원칙과 기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처음 세운 뜻을 쉽게 버립니다. 누구나 인생에 있어 길흉화복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인생에 운이 좋아져도 처음 가졌던 원칙을 버리고, 운이 나빠져도 자신이 처음 세운 기준을 버립니다.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길흉화복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길흉화복이 오더라도 내가 흔들리지 않는 삶의 원칙과 기준이 있다면, 그런 인생이야 말로 결국에는 사람들에게 존경받습니다. 그리고 그 원칙과 기준이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다면, 이 사람이야 말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복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사랑받는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중꺽마라고 하지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 신앙에 중꺽마는 정말 중요합니다. 이런 마음은 언제 갈려지는가 하면, 바로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입니다. 시련을 통해서 단련된 정한 영혼은 어떤 환경이나 삶의 변화와 관련 없이 꺾이지 마음을 가집니다. 처음에는 고난과 시련이 찾아올 때 흔들리기도 하고 포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붙드는 사람은 나도 모르게 그 가운데 견디게 됩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이런 통찰이 생깁니다. 고난과 시련이 사실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의 원칙과 기준이 흔들릴 때, 내 영혼이 겪는 아픔이 훨씬 더 괴롭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나도 모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견디며 최소한 한 20년, 길게는 그 두배로 한 40년 훈련받으며 지내다 보면, 드디어 내 안에 하나님의 영, 거룩한 빛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납니다. 드디어 내면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공간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내 영혼의 성소이기도 합니다. 이 사실을 고난과 시련이라는 훈련 없이는 결코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단기간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한 인내와 연단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모세의 시내산 언약
마지막으로 구약 시내산 언약 사건에서 모세가 마음의 장막을 세워 그 내면의 빛을 나타내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 한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을 받고자 시내산으로 향해 올라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을 들은 이후 헤르몬 산으로 올라간 것과도 같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직접 십계명을 돌판에 쓰신 증거판 두 개를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모세가 들고 두 돌판은 하나님 말씀을 상징하는 두 사람,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모습과 대비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시내산 언약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 내려오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우상으로 삼아 숭배하며 육신의 욕망과 쾌락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주었다고 생각하며, 광야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들의 본심은 육신의 안녕을 보장해 줄 애굽 땅으로 다시 돌아가 바로를 섬기며 종처럼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목격한 모세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돌판을 금송아지를 향해 던져버립니다. 돌판이 부서졌으니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이끌 하나님의 언약도 깨져 버린 것입니다.
모세는 낙담하여 힘이 다 빠져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힘겨운 광야를 지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는 의욕을 더 이상 낼 수 없었습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했는가, 차라리 출애굽 하지 말았어야지 하며 후회하고 자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희망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출애굽기 34장 1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이번에는 네가 돌판 두 개를 처음 것과 같이 깎아서 준비해라. 그러면 네가 깨뜨려 버린 처음 돌판 위에 쓴 그 말을, 내가 새 돌판에 다시 새겨 주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경고하시기를 아침 일찍 홀로 시내산 정상으로 올라오라 하셨습니다. 사람도 가축도 올라와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일찍 새벽에 올라오라고 명하셨습니다. 밤은 죽음을 상징하고 과거를 상징합니다. 지난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 자신의 실수와 과거를 뒤로 하고, 그다음 날 태양이 동녘으로 올라올 때, 그때 너도 새롭게 떠오르는 해처럼 올라오라 하셨습니다.
알라עָלָה, 알리아עֲלִיָּה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바로 올라가다입니다. 히브리어로 올라가다는 말은 알라עָלָה입니다. 산을 올라가다는 뜻도 있고, 높은 지위에 오르다는 뜻도 지닙니다. 그리고 알라עָלָה는 기둥으로 위를 받치다는 뜻도 있습니다. 따라서 알라עָלָה는 육체적으로 자신의 극한을 경험할 만큼 최대한 높이 올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마음의 장막을 세우는 것처럼 정신적으로 과거의 자신을 완전히 불살라 없애고, 새로운 자신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뜻합니다.
그리고 올라가다 알라עָלָה의 명사형으로 알리아עֲלִיָּה가 있습니다. 알리아עֲלִיָּה는 오름이라는 뜻도 있지만, 이주나 이민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단어는 특히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본토로 이주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서 해외에 거주하는 어느 한 유대인이 자신의 신앙을 깊이 이해하고 더 나은 환경에서 실천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종교적 이주를 결정했다면, 이것을 알리야עֲלִיָּה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두번째 시내산 등정, 가나안으로의 영적인 이주
모세가 두 번째로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을 올라간 것은 알라עָלָה와 알리야עֲלִיָּה, 이 두 단어가 가진 함의를 다 말해줍니다. 먼저 높은 산 정상 꼭대기로 육체의 한계를 넘어 등정하는 것처럼, 모세라는 한 인간 실존이 영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되기 위해서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극한을 넘어 자신을 확장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 땅이라는 광야를 떠나서 하나님 나라로 입성하는 영적인 이민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앞서 영적으로 가나안에 먼저 입성한 것입니다.
절차탁마, 마음의 돌판에다 하나님 말씀을 새기다
두 번째 시내산 등정에서 모세가 이 두 가지 의미를 성취하도록, 하나님은 가혹할 정도로 철저하게 모세를 훈련하십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40일을 보낸 것과도 같습니다. 모세는 출발할 때부터 무거운 돌판을 메고 정상까지 올라가야 했습니다. 혹독한 환경인 시내산 정상에서 40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심지어 40일 밤낮으로 빵과 물을 먹지 않았습니다. 40일은 한 존재가 과거에 자신으로부터 새로운 자신으로 바뀌는 상징적인 시간이기도 합니다. 나비가 애벌레에서 번데기가 된 다음 그 시간을 보내어, 결국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어서 자유롭게 하늘로 날라 오르게 되는 탈피에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40일 동안의 훈련 시간 동안 모세에게 십계명을 비롯하여, 인간이 지켜야 할 계명을 낱낱이 알려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부 기억하여서, 자신이 준비한 석판에다가 직접 기록하였습니다. 34장 8절에서 '모세는 거기서 주님과 함께 밤낮 사십 일을 지내면서, 빵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판에 기록하였다'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돌판도 준비했으며, 그리고 그 돌판 위에다 십계명을 직접 기록하였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다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실 때, 모세에게 돌판은 준비해서 올라오지만 십계명을 세기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해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준비한 돌판을 들고 시내산에 올라가 보니, 모세 본인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억하여 직접 기록해야 했습니다. 40일 동안 음식도 먹지 않고 물도 먹지 않고 맨 돌에다가 하나님 말씀을 기록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정이나 끌과 같은 도구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주변에 돌멩이를 주어서이든지, 아니면 자신의 손톱으로 돌판을 끌으며 기록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바로 모세 자신의 마음에다 율법을 새겨 넣었다는 말입니다. 돌과 같이 굳은 마음을 절차탁마, 즉 자르고, 썰고, 쪼고, 갈아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마음의 돌판에다가 담은 것입니다.
자신만의 고유한 빛 모세의 뿔
모세처럼 절차탁마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의 돌판에다 새겨 놓았다면, 우리 내면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에 이렇게 말하지요. '모세가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왔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모세에게 나타난 이 빛은 내가 남들에게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아우라와도 같습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이 기가 막히게 금방 알아차립니다. 왜냐하면 남들과 다른 그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고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고유성이야 말로 마음의 장막에서 발하는 내적인 빛입니다.
서구 예술가들은 모세에게 발현된 빛을 뿔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나 샤갈과 같은 이들은 모세를 조각하거나 그릴 때, 모세 머리에다 뿔을 표현하였습니다. 내면의 빛을 뿔로 형상화 한 것입니다. 비록 외적인 뿔로 형태를 나타내었지만, 이 뿔이야 말로 창조 때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넣어두신 하나님의 형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뿔은 이후에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은 시내산 언약을 유효하게 하는 싸인, 즉 도장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내가 주님을 믿고 나서 세우게 된 나의 인생 여정의 원칙과 기준이 무엇인지 돌아봅시다. 그 삶의 원칙과 기준을 타협하지 않고 사람이나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지켜 오고 있습니까?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 뜻이 단지 나의 뜻이 아니라 정녕 하나님의 뜻인지 하나님께 승인을 받았습니까? 이 과정에서 삶의 고통과 아픔이 있을지라도 사실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모세처럼 시내산 정상 40일 밤낮으로 아무리 고된 훈련받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절차탁마하며 걸어 올라간 영혼의 산 정상에 세운 마음의 장막 안에 하나님의 빛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빛을 간직한 자는 온 세상을 향해 그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이사야 60장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지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한 영광과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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