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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8장 31절 - 38절 예측 불가능한 친구

by 알렉스강 2024. 2. 21.

https://www.youtube.com/watch?v=LNE48gpLTog&list=PLh4-9uGANmwqQ-_1lMojr-OaWAKWpjfpf&index=8

 

 

새번역 마가복음 8장 31-38절

3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3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3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38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마가복음의 전체 구조

마가복음은 16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조를 살펴보면, 8장을 중심으로 딱 반으로 나누어져 삼각형처럼 대칭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마치 등산에 비교할 수 있는데요. 1장부터 8장 후반부까지는 글의 분위기나 주제가 계속 올라가며 그 정상에 이릅니다. 그 뒤로는 마지막 16장까지 정상을 뒤로하고 쭉 내려오는 모습입니다.

 

마가복음 초반과 후반에 그려진 예수님의 모습도 다릅니다. 마가복음 8장까지의 예수님은 갈릴리 여러 도시들을 순회하시며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어 대중들에게 주목받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8장 이후로는 더 이상 갈릴리 순회 사역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도 하나 둘씩 떠나며 점점 대중들로부터 멀어집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해 길을 떠나십니다. 흥미로운 것은 지형적으로 보더라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은 내리막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인생 곡선과도 같지요.

 

마가복음이 둘로 나눌 때, 그 정상에 해당하는 부분을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사건이라 봅니다. 베드로가 맨 처음으로 예수님을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한 일이지요.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인정받게 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임을 본인 스스로 인정하시면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분명히 밝히기 시작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메시아로 확인이 되었기에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세상을 뒤집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자신이 메시아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도 가말리엘이 드다와 유다를 거론하지요. 비록 그들이 세상을 바꾸고자 한 혁명은 실패로 끝났더라도, 제자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엄청난 기사와 이적을 일으킨 예수님이 실패할 것이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진정한 메시아로 반드시 이스라엘에 다윗의 영광을 새롭게 재현하리라 확신하였습니다.

 

그 확신 속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했지만, 문제는 예수님이 제자들이 기대했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죽으러 가는 메시아였습니다. 베드로의 고백 이후 예수님은 자신이 할 일을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31절 말씀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셨다.’ 이것을 첫 번째 수난 예고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자들은 완전히 패닉에 빠지고 맙니다.

 

pilgrimage routes from Galilee to Jerusalem.

 

제자들은 자신들의 예측과 기대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가서 잠시 고난을 당할 수는 있어도, 그 끝이 죽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어떻게든 당시 이스라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을 설득해서 함께 대사를 일으키던지, 아니면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야 하는 것이지요. 만약 그냥 허무하게 죽임을 당한다면 메시아가 아닌 것입니다. 지금 잠시 예수님의 인기가 시들해졌다고 해도, 갈릴리에서 대중들을 다시 설득해서 힘을 모으고, 힘세고 유능한 자들을 불러 군대로 삼아서 예루살렘으로 멋지게 쳐들어가는 영광스러운 행군을 기대한 것입니다. 유약하고 무능한 몇 사람들과 함께 맨몸으로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한 마디로 개죽음을 맞는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더라도 부활할 것이라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패닉에 빠진 제자들에게 그 말이 들리기나 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살아난다고 해서 실패한 메시아가 성공한 메시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들이 생각한 부활은 이 세상 끝날 심판당할 때 있을 부활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날 것을 말했다고 해도, 죽는다는 것은 도저히 메시아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습니다.

 

예측 불가능성

사람이 언제 불안한지 아십니까? 바로 미래를 알 수 없을 때입니다. 내가 예측한 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입니다. 불안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그로 인한 위험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나는 심리 상태입니다. 우리 일상에서 불안을 조장하는 일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주식을 들 수 있지요. 주가가 올라갈 것을 예측하고 주식을 샀는데, 내가 기대한 대로 주가가 상승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를지 안 오를지 화면만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팔지 안 팔지 고민하면서 초조해하잖아요. 그러다가 주식이 폭락을 하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몰려 옵니다. 온갖 두려움, 불안, 후회, 아쉬움이 덮칩니다.

 

부동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경제 성장을 지속해 왔기에. 늘 부동산 불패 신화가 있었습니다. 물론 빠질 때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계속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부동산에 대한 불패신화를 믿고 있지요. 그런데 지금 부동산이 어떻습니까? 불안하지요.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처럼 부동산 폭락을 경험하거나 미국의 경우처럼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같은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걱정되실 겁니다.

 

미국이나 여러 서구 선진국들 중 가장 학력이 좋고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 뭐냐면, 주로 은행이나 사모 펀드에서 투자하는 직업을 가집니다. 주로 돈과 관련해서 미래에 대한 예측하는 일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장 최근에 있었던 경제 위기인 리먼 사태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측과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갔잖아요. 생각지도 못한 것이 문제가 되어 연쇄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리먼 사태 이후 금융 경제학에서는 예측 이론을 믿지 않기 시작했어요. 대신 미래 예측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상황에 집중하고 이를 관리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해요.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측에 의존하는 것보다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고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죠.

 

 

베드로의 질책과 예수님의 욕

이렇게 자신들의 생사가 달린 예측 불가능하고 불안한 상황에서 수제자인 베드로가 나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싹 잡아당기고 항의했다고 하지요. 베드로가 제자들 무리에서 따로 예수님을 잠시 한쪽으로 데려가서 꾸짖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체면이 있으니, 제자들 앞에서는 그러지는 못하고 일대일로 따로 불러서 질책한 것입니다. 선생이 선생답지 못하고, 리더가 리더답지 못하고, 메시아가 메시아 답지 못하기에 베드로는 모든 원망과 분노를 담아 한소리 한 것이죠. 어쩌면 베드로 자신이 예수님보다 연배가 있고 경험이 있기에, 이번에는 내 말을 들어라 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당신 자신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지금까지 따라온 제자들이 함께 다 죽는 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결코 이걸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만만치 않으시죠. 스승을 꾸짖는 베드로도 한 성격 하지만, 예수님도 결코 물러서질 않습니다. 31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베드로를 제자들에게로 데리고 가서 그 보는 앞에서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도 엄청 셉니다. 우리말로 의역을 하면, ‘이 마귀 뱀새끼 같은 놈아 냉큼 꺼져라'라고 욕을 퍼부은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제자들 전체를 나무라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

그리고 이어지는 말로 예수님은 자신이 온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에서 처음으로 십자가가 언급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단순히 금욕적인 삶을 살아가거나, 자기를 혐오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메라고 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는 모든 사람의 실존에 내재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인정하여, 그것을 자신의 어깨에 메고 각자 정해진 삶의 마지막인 죽음이라는 시간과 장소로 향해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해서, 과도한 율법주의에 빠져서 금욕주의자가 되던지 아니면 자기 혐오자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종의 나르시시즘이나 메조히즘과도 같습니다. 지나친 자기애로 인한 자기 강화이거나 진리가 없는 헛된 자아실현일 뿐입니다. 때론 우리가 이런 분들을 만나곤 하지요. 하나님을 잘 믿는다 하면서, 유별나게 자기 고집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보호본능이 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로는 세속적인 욕심을 버려야지, 육체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 죄악 된 본성을 떠나고 어둠의 권세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육신에 이끌리는 삶이 아니라 성령이 다스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의 고백이 아니라면, 자기 십자가가 되지 못합니다. 사실 이런 말들은 이미 누군가가 먼저 했던 말일 수 있지요. 바울이 한 말이고, 다른 사람들이 이미 한 말입니다. 다른 누군가의 십자가이고, 바울의 십자가이기에 자기 십자가가 아닌 것입니다.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말은 자기 언어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자기 존재가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그 정도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정한다고 했을 때, 자기는 삶의 일부가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말합니다. 당연히 죽음을 전제로 한 것이고, 그리고 그 죽음을 넘어서서 자신을 전적으로 해체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를 부인한 해체된 존재에게는 마땅히 이전과 다른 완전히 새로운 언어가 담겨집니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어라는 것은 우리 실존의 집입니다. 존재가 해체되고 새로워졌기에, 당연히 그 존재에 맞게 사용되는 말이 달라집니다. 실존이 변해서 언어가 바뀐다는 것은,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고, 모든 존재 양태가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존이 변할 때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예측 불가능성으로 인한 불안입니다. 하이데거는 우리 실존 자체가 불안이라 했습니다. 그 불안은 다름아니라 예측 불가능이 주는 불안정감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기 위해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예측 불가능성으로 인한 불안입니다. 그 가운데,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그냥 안정한 곳에 머물러 있던가, 아니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불안정해 보이는 곳으로 나아갈 것인지는 우리가 결국 선택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라는 작품이 있지요. 긴 장편답게 여러 인물들의 군상들이 나오지만, 무엇보다 주목하는 인물은 삼각관계를 이루는 주인공들입니다. 나따샤라 불리는 한 여자와 명문가 출신인 안드레이 공작, 그리고 사생아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운 좋게 거부가 된 삐에르입니다.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로 인한 로맨스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정작 톨스토이가 말하고자 하는 소설의 핵심 주제를 많이들 놓치게 됩니다.

 

전쟁과 평화는 워낙 방대한 대작이라서 줄거리를 하나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간략하게 남자 주인공의 성격과 그들의 인생 스토리의 마지막이 어떤지를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남자 주인공인 안드레이와 삐에르는 매우 상반되는 인물입니다. 먼저 안드레이의 경우, 그는 좋은 집안 출신에 걸맞게 고귀한 정신을 겸비한 합리적인 현실주의자입니다. 기억력이 뛰어나고 성격이 꼼꼼하여 일을 야무지게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명예를 얻고자 전쟁에 참여합니다. 반대로 삐에르는 안드레이 달리 인물도 그렇고 능력도 별로 없는 허풍에 찬 지식인으로 그려집니다. 뭔가 진리를 알고 싶은 마음으로 나름 꿈을 좇지만, 실속이 없는 이상주의자입니다.

 

Leo Tolstoy

 

이 두 인물에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간순간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이 펼쳐집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입니다. 현실주의자도, 이상주의자도 하나 같이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전쟁과 평화에는 당시 천하의 권세자였던 나폴레옹도 나오고, 그리고 군대에 끌려가 고생하다 이름 없이 사라지는 비천한 신분의 농노들도 나옵니다. 그런데, 전쟁이라는 예측 불가능성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시간과 생사를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이 가득한 전쟁을 통해서 이 두 주인공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게 됩니다. 현실적인 명예를 좇던 안드레이는 결국 전쟁에서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모를 포탄에 맞아서 치명적인 부상으로 죽게 됩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현실주의자인 안드레이는 참 운이 없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전쟁에서 부상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 부상이 안드레이의 운명만이 아니라 존재를 바뀌게 하는 단초가 됩니다. 맨 처음 부상당하여 쓰러져 있을 때, 우연히 멀리서 바라보게 된 나폴레옹이라는 한 영웅의 허영심이 공평하고 선량한 하늘에 비해 얼마나 시시하고 초라한 것인지를 느낍니다. 이것이 첫 번째 변화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부상은 너무나 치명적이었는데, 놀랍게도 죽기 직전 사랑했던 여인 나타샤를 우연히 만나 그 품에서 죽으면서, 그 여인을 용서하며 사랑의 위대함을 깨닫게 됩니다.

 

안드레이와 달리 삐에르는 이상주의자였습니다. 심지어 적군의 수장인 나폴레옹을 이상적인 영웅으로 여기며 흠모합니다. 그러나 한 영웅의 허영심으로 생겨난 전쟁의 처참한 현실을 목도한 다음 분노하게 됩니다. 그 분노를 해소하는 방식도 이상적입니다. 욱한 심정에 나폴레옹을 죽이고자 농노로 변장을 하여 홀로 적진으로 무모하게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상주의자이기에, 자신의 분명한 목적이 있음에도 가던 길을 멈추고 어느 불난 집에 있는 소녀를 구하려다가 그만 방화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감옥에 삐에르는 자기 앞에서 죄수들이 하나씩 처형당하는 것을 보고 패닉에 빠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기 차례임에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처형이 면제되어 기적적으로 살아남습니다. 안드레이와 달리 정말 운 좋은 사람입니다.

 

삐에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전쟁도 이해가 안되고, 나폴레옹도 이해가 안되고, 그리고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인간 세계가 가진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문제를 고뇌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뽈라똔이라는 한 농부를 통해서 큰 정신적 변화를 경험합니다. 이 농부의 특징이 뭐냐면 불확정성을 즐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전쟁에 갔기에, 동생이 전쟁에 나가지 않아서 다행이고, 그리고 감옥에 갇혀 있기에 싸우러 나가서 죽지 않기에 잘 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삐에르는 진정한 위대함이 뭔가 대단한 영웅적인 업적이나 탁월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에 삶 속에 담긴 소박함과 선량함, 그리고 진실함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일상이라는 현실이 평범한 듯 보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된 것이지요. 결국 놀랍게도 이들은 불확실성이라는 전쟁의 한가운데를 거쳐가면서, 현실주의자였던 안드레이는 선량한 이상주의자가 되고, 이상주의자였던 삐에르는 건강한 현실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라는 작품을 통해 전쟁과 같은 인생의 시간이 가져다주는 불확정성이 한 인간 실존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가는지를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삶이 이성에 의해 통제된다면, 인생의 모든 가능성은 파괴 될 것이다.

 

이 두 주인공의 공통점이라면 한 가지입니다. 타고난 자기 기질과 성격, 어떻게 보면 한 인간이 지닌 약점이지요. 저는 이것이 자기 십자가라 생각합니다. 이들은 자기 십자가를 매고 전쟁으로 상징되는 예측 불가능성으로 자신의 인생을 던져 넣었다는 것입니다. 안드레이라면 지나친 현실주의, 삐에르는 지나친 이상주의가 자신의 핸디캡입니다. 이것을 부인하지 않고, 그 기질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전쟁이라는 죽음의 자리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각자 자기 십자가이기도 한 각자의 타고난 기질과 성격이 예측 불가능함 속에서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신앙의 전반기와 후반기

앞서 살펴본 마가복음의 구조처럼 일반적으로 신앙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기도 하지요. 신앙의 전반기인 초신자일 때는 뭔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 같고, 하나님을 찾으면 바로 응답하시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일종의 초신자의 특혜라 할까요. 그래서 우리가 신앙에 재미를 붙여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아 그래,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는구나. 앞으로 주님을 위해 내 모든 것을 걸겠다. 주님만을 믿고 모든 것을 바치겠다.' 물론 주님을 믿겠다는 것이 무작정 믿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초신자의 행운처럼, 변함없이 주님이 날 책임져 주시겠지 하며 기대를 가집니다. 내가 100을 바치면, 200까지는 아니라도 아무리 안 주시더라도 110이나 120은 주셔야지. 이런 속내를 가집니다.

 

그래서 열심히 신앙생활하면서 헌신하게 되지요. 그런데 교회 일은 많아지고 잘 되는데, 반대로 내 삶은 현실적으로 결과가 그리 좋아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던 일이 잘 안 되는 경우도 생기고요. 내가 바라던 것들이 뜻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 처음과 좀 다르네. 그런데 이게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런 상황이 더 자주 발생되면, 왠지 내가 사기당한 기분이 들고, 뒤통수 맞은 기분이 들게 됩니다. 바로 이게 신앙의 후반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때가 사실 고비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실 여기서 냉담자가 됩니다. 하나님께 실망하는 것이지요. 어쨋든 이런 생각은 들어요. 하나님은 참 예측 불가능한 분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대로 쉽게 해 주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할 때가 많지요.

 

그래서 주님은 친구가 없는 겁니다

이 상황을 유쾌하게 잘 설명해 주는 예화가 있습니다. 아빌라의 테레사라는 기도에 관한 탁월한 저서인 영혼의 성을 지으신 분입니다. 이 분이 실제로 겪은 일입니다. 어느 날, 악천 후 속에서 아빌라의 테레사가 어느 지방으로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차가 달리던 도중 진흙탕에 빠져서 꼼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테레사는 마차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습니다. 옷이며 가방이며 할 것 없이 다 비와 진흙으로 뒤범벅이 되어서, 기도하는 중이라 예수님께 원망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때 놀랍게 예수님은 테레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딸아, 나는 내 친구들을 종종 이렇게 대한단다." 테레사의 성격이 거침이 없고 쾌활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친구를 대하니깐, 그래서 주님은 친구가 없는 겁니다"

 

테레사가 정말 예수님과 원수가 져서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오히려 친밀하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게 진짜 친구인 것이지요.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서로 멀어지거나 원수가 된다면, 그건 친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일로 테레사는 이런 생각을 했다고 그래요. 자신이 보기엔 예수님에게 친구가 거의 없기에, 나라도 좋은 친구가 되어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일이 테레사가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는데 큰 동기가 되었다고 하지요.

 

St. Teresa of Ávila

 

하나님과 친구가 된다는 것

왜 하나님은 우리를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몰고 가시는가? 사실 친밀함을 원해서이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도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를 향해 시원하게 욕을 해버리잖아요. 이 마귀새끼놈아 꺼져라고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불경한 말을 내뱉습니다. 사실 그 앞에서 베드로도 예수님을 불러다가 갈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참 가까운 관계임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을 들은 베드로가 속으로 뭐라 말했겠습니까? 아빌라의 테레사와 비슷한 말을 했을 겁니다. 주님 그러니깐 사람들이 주변에서 떠나는 거예요.

 

친구는 수평적 관계입니다. 수평적 관계가 되려면,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구걸하듯이 부탁해서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주시는 분이라면, 그럼 수평적 관계가 아닙니다. 그런 관계는 수직적 관계입니다. 종과 주인 사이에, 아니면 회사나 고객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착각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갑을 관계로 생각합니다.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이 갑이 되면 내가 을이 되고, 아니면 내가 갑이 되면 하나님이 을이 되는 관계가 자연스럽게 취해집니다. 사실 이게 인간이 가진 매우 악한 본성입니다. 모든 관계를 수평이 아닌 수직 관계로 형성해서, 타인을 착취하거나 자기혐오의 모습을 가지는 것입니다. 

 

수평적 관계는 서로를 존재를 인정하는 관계입니다. 이익관계로 만나거나 일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일종의 마음을 나누는 사이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만약 백일 기도하면, 100억 준다고 해 봅시다. 이게 사실이면, 백일기도 안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이 다 들어주신다면, 당연히 기도해야 하지요. 그런데 왜 기도를 안 하겠어요. 안 믿는 것입니다. 한번 속지 두 번 속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럴 경우는 기도하게 돼요. 절실한 것이 있어요. 100억은 아니라도, 이건 주님이 해주셔야 한다. 정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노력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대의를 보더라도, 나만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다.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 기도를 하게 됩니다. 백일기도도 하고, 심지어 예수님처럼 모세처럼 40일 금식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신앙의 후반기처럼 오히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거나, 내가 기도한 대로 되지 않게 되었어요. 이럴 때, 하늘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피씩 웃으면서, 아빌라의 데레사가 그러니깐 주님은 친구가 없지요라고 한 말처럼, 아니나 다를까 주님은 역시 그렇죠. 이렇게 속으로 말해 본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극단적인 경우까지는 아니라도 사실 우리 인생에서 이런 비슷한 감정을 사소하게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심한 경우는 신앙을 버리기도 하고요. 그리고 냉담자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있어요. 그래도 또 기도하는 거예요. 아빌라의 테레사처럼 나라도 친구가 되어야지 이런 마음을 가지거나, 아니면 도저히 지금 상황이 감당이 안되어서 그냥 죽지도 못하겠고, 죽더라도 이거라도 하고 죽어야겠다는 심정으로 또다시 기도를 하는 겁니다. 백일기도 하다가, 안되면, 또 백일기도 하고, 그리고 또 안되면 또다시 백일기도하고, 그렇게 300일, 400일, 어떤 경우는 1000일을 계속 기도할 수도 있어요. 그렇게 기도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드시 뭔가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생겨납니다. 사실 크고 작든지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게 무엇이든지 이런 마음이 들어요. '주님이 내게 딱 알맞은 것을 주셨다.'

 

어떻게 보면 내가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외부의 변화도 있지만, 더 큰 변화는 바로 내 내면이 변화한 것입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는 이 마음이 드는 것이지요. 마치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처럼, 전쟁 가운데 결국 평화를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는 소설 주인공의 고백처럼, 평범한 삶에 있는 소박함과 선량함과 진실함이 진정 위대한 것이라 이야기할 수 있어요. 멋진 말들이 많잖아요. 영원한 현재를 살아라. 바울의 말처럼 어느 것에도 자족하는 마음을 주셨다. 사실 이건 다 머릿속 지식이나 말일뿐입니다. 이게 나에게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성육신 사건이 되어서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과 친구로서 수평적인 관계로 서로 마음을 나눌 때 가능한 일입니다.

 

 

예측 불가능성 가운데 사랑하기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너희를 나의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길은 새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서로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 주인이 되고 누군 종이 되어서 시키는 대로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친구는 오랫동안 가깝게 사귀어 온 사람입니다. 진실한 친구는 기쁨도 슬픔도, 없어도 있어도, 변함없이 그 옆에 함께 하면서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는 사이입니다. 내가 그 문제를 직접 도와주거나 해결해주지 못해도, 진실한 친구는 어떤 상황에도 이해해 주고 지지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연약한 인생들은 알 수 없는 예측 불가능성에 놓였을 때, 서로를 이해해 주기보다는 판단하고 배신하고 떠나가 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가운데 친구가 되길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 이후로 베드로를 보십시오. 결국 베드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측 불가능한 고난의 길을 따라나서게 됩니다. 베드로의 심정은 이런 마음 중 하나였을 거예요. 모든 걸 내려놓고 삼 년이나 쫓았는데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끝까지 따라가 보자 했을 겁니다. 아니면 설마 자기가 말한 대로 무책임하게 죽기야 하겠어 하면서 믿져야 본전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옆에 아무도 없는데, 짜증은 나지만 그래도 나라도 가야지 하면서 작은 의리를 가졌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막상 예수님이 없으면 왠지 모르게 불안했을 겁니다. 따라가도 불안하지만, 안 따라가면 더 불안한 겁니다. 저는 이 심리가 크다고 봐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 길이 멋지게 끝나지 않지요. 예수님이 잡히신 뒤, 몰래 따라 들어간 제사장의 집에서 하녀 하나가 예수와 한패냐고 베드로를 고발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연속해서 부인하지요. 그때 새벽이 되어 닭이 울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연약한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지막까지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이후 승천하기 전 갈릴리 호수로 찾아가셨습니다. 그때에도 여전히 제자들은 알 수 없는 미래의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예측 불가능성이 주는 두려움을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떠나가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며 먹고살 일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원래 하던 고기 잡던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밤새 수고하여도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일했는데도,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손수 떡과 물고기를 구워 먹여주시면서 제자들의 친구가 되셔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베드로를 따로 불러내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세 번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님이 아십니다. 예측 불가능한 앞으로의 미래에 내가 불안하여 주님을 배신할지 안 할지는 주님만이 아십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시길,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너는 내 양 때의 친구가 되어라. 내가 사랑한 사람들을 너도 사랑해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부탁하신 이 사랑이야 말로 예측 불가능성 속으로 자신을 던져 넣음으로 주님이 빚으시는 새로운 형상으로 변화되는 길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