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yTJ2VtLIZLU&t=35s
마가복음 3장 20절-35절 새번역
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 일러라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23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31 그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가복음 중요 단어, 집
성경을 읽을 때, 중요한 상징적인 단어들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경우 이 중 하나가 집입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11명의 사도와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을 비롯한 120여 명의 사람들이 마가의 집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옥에 갇힌 베드로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옥에서 나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는 곳으로 갔는데, 그곳 역시 마가의 집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핵심적인 장소가 마가의 집입니다. 마가의 경험이 특별했는지 몰라도, 마가는 집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실 때면 중요한 일이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가나 혼인잔치 집에 가셔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고, 제자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당시 세리 삭개오의 집에 가서 구원을 선포하시고, 누추한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가셔서 죽은 오빠 나사로를 살려주시기도 했습니다. 집은 단순히 식사하고 잠을 자는 공간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병자를 치료하시고 기적을 베푸시는 곳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제자들을 진리로 깨우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성경에서 집은 매우 영적인 곳입니다.
존재론적인 의미로서의 집
집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휴식하고 보호받는 장소만이 아니었습니다. 거주하는 사람의 정신 상태를 결정짓기도 했습니다. 조상들이 풍수지리에 집착하여 좋은 위치에 집에 짓고 거하고자 한 것도 길흉화복을 집이 결정짓는다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간신앙에 가신家神 의례가 있었습니다. 집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집을 지키는 신도 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혼령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비단 우리만이 아닙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새 집을 지으면 입주하기 전에 준공식을 거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그 집과 집안에 내리길 기원한 것입니다. 대신 우리와 달리 혼령이 귀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고, 집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장소로 생각했습니다.
집은 공간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집 속의 존재입니다. 가장 원초적인 집이라 할 수 있는 어머니 자궁에서 10개월 머물다가 나옵니다. 그리고 우주라는 집인 이 땅을 살아가다가 결국 죽음을 거쳐서 무덤이라는 수백 년이 될지 수천 년이 될지 모를 땅 속 집으로 들어갑니다. 인간은 항상 집 안에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집은 단지 장소나 건물이 아닙니다. 한 인간을 존재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틀 거리입니다.
따라서 집은 인간의 욕망이 가장 강력하게 반영된 곳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큰돈을 벌면 집부터 장만합니다. 그리고 집을 꾸밉니다. 집을 가 보십시오. 이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어떤 성격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집은 한 사람의 외면만이 아니라 내면까지도 반영하는 매우 차별화된 곳입니다. 그리고 집은 가족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이 속한 주변 가족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집에서 누구와 함께 사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존재가 결정됩니다.
진리를 찾아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에게는 밥을 먹이신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이 가버나움 어느 한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음식 먹을 겨를이 없으셨습니다. 집으로 인산인해로 몰려들어 사람으로 완전히 둘러싸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거나 사람을 고친 후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마라 하셨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이유도 있지만, 기적에 대한 소문으로 사람들이 구름 때처럼 몰려 하나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몰린 것이 말씀이 아니라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관심이 없는데, 어떻게 말씀을 가리킬 수 있겠습니까? 말씀은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은 적당한 숫자와 함께 모여서 식사 교제 하시면서 말씀하시길 좋아하셨습니다. 말씀을 가지고 서로 나누고 이야기하면서, 진리를 깨우치길 원하셨습니다. 때로는 적대심을 가진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시곤 했지만, 그 논쟁을 듣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산상수훈처럼 말씀을 전하기 좋은 장소에서는 많은 수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하셨습니다. 회당처럼 공식적으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장소나 해변가 근처나 나지막한 산에서는 전하는 말씀이 사람들에게 잘 들렸기에, 그곳에서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신 후 식사를 항상 같이 하셨습니다. 적당한 숫자와 말씀을 나누길 원하신 것도 밥을 먹이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천명이 넘는 이들이 말씀을 듣고 난 후 배가 고프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시켜 밥을 먹이게 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들었기에 꼭 밥을 먹이고자 하신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자 예수님은 특별히 오병이어로 이들을 배 불리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밥을 먹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만찬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일차적으로는 말씀이 삶으로 이어져 성육화된 삶을 살기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식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인 가족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같은 집에 사는 혈연이라도 가족이 아닐 수 있다
오늘 본문 20절 말씀을 보시면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님이 식사할 겨를이 없을 만큼 바쁘시고 피곤하셨다고 생각되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무리가 집으로 들어왔지만, 식구, 가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그저 기적만 보려고 몰려든 무리는 결코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단지 같은 집에 있다고 해서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밥을 먹는 것, 즉 함께 마음을 모아서 한 뜻을 향해 나아갈 때 참된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이 나타납니다. 21절입니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 일러라” 이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잡으러 왔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미쳤다고 할 만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족을 떠나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복음 사역에 열중하신 모습이 미쳐 보인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에 집중한 것이지 미친 것이 아닙니다. 이걸 보면 미쳐도 맑게 미쳐야 합니다. 탁광이라고, 흐리멍덩하게 미친 게 문제입니다.
마리아가 왜 그랬을까?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누가복음의 경우 강한 믿음의 어머니로 그려지는데 마가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도 사람의 소문으로 흔들렸을까요? 역시 마리아도 한 인간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자기 아들로만 보였을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을 잡으러 온 가족이 출동했습니다. 예수님을 회유하여, 집 밖으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집은 하나님 나라로서 진리 공동체인 교회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나오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가족이다
나라는 잃어버려도 가족은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하지요. 그만큼 가족은 소중한 곳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가족에게 약하고 혈육에 집착합니다. 다른 건 건드려도 가족을 건드리면 난리가 납니다. 특히 모성애로 자식에게 특별한 사랑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자녀는 어머니 품에서 자라기에, 어머니를 잊을 수 없습니다. 낳은 어머니든 기른 어머니든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가족끼리 특별한 애착관계로 형성된 경우, 마지막이 좋지 않습니다. 애착에서 벗어나지 못해 각자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새끼 새가 어미 새로부터 벗어나는 것처럼 자식은 어머니로부터 벗어나야지 날아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아서 끌어다가 다시 혈연 공동체로 끌고 가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간파하시고, 냉정하게 대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잠시 만나서 돌려보내면 되는데, 얼굴도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3절부터 3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누구든지 하나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내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혈육으로, 인간적인 정으로 가족이 구성된 게 아니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했기에 내 가족이고 내 형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가족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육으로서 가족이 아니라 영으로서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육으로 난 가족은 결국 죽으면 끝이 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마리아와 형제들이 예수님의 발목을 잡는 원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훼방죄라 할 수 있습니다. 28절과 29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다른 모든 죄는 용서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꺾으려 하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자기 형제와 심지어 어머니에게 심한 저주를 하셨습니다. 당신들은 성령을 모욕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막음으로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라 한 것입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악인들
마리아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것은 사람들의 소문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리새인들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도 보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족들에게 예수님을 붙잡아 집에 데려가서 자제시켜라 했을지 모릅니다. 이들 협박에 겁을 먹은 마리아는 아들을 아끼는 마음에 서둘러 나온 것일 수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조사하러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바리새인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머물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눈에는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도 문제이지만, 무엇보다 예수님의 하시는 일이 문제였습니다. 바로 기적을 행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기적을 행하니 사람들이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며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을 규합하여 소요를 일으키면 문제가 될 것으로 여기며 긴장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악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않습니다. 기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게 뒤틀려 버립니다. 바로 보지 못하고 비틀어 보니깐, 예수님이 하시는 일 모든 것이 못 마땅하고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연스럽지가 않고 억지 논리를 펴는 것입니다. 이게 악한 영이 하는 일입니다. 거짓과 미혹의 영이라고 하지요.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이 이런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이 하시는 기적을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귀신이 한 것이라고 억지 해석을 한 것입니다.
똥파리들의 왕 바알세불
이들은 예수님에게 바알세불에게 씌었다고 했습니다. 바알세불은 가나안 토착 귀신으로 ‘집주인’ 또는 ‘똥파리들의 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똥파리가 윙윙거리잖아요. 일설에 따르면 바알세불의 제사장 중에 하나가 윙윙 소리를 내면서 신탁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똥파리는 농사와 관련이 있지요. 요즘은 약을 치기에 많지 않지만, 예전만 해도 시골에 가면, 소똥이나 인분으로 거름을 쓰기 때문에 주변에 똥파리가 많이 달려듭니다. 똥파리가 많이 낄수록 거름이 충분한 것이고 농사의 성공을 보장하는 일이 되는 것이지요. 농사의 풍요를 위해서 똥파리의 왕인 바알세불에게 똥파리를 많이 보내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들의 터무니없는 모함에 예수님은 분쟁하는 나라는 스스로 설 수 없다는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한 나라나 집안에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분쟁하면 제대로 세워질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사탄도 서로 대적하면 사탄의 나라는 설 수가 없습니다. 귀신의 왕의 권세를 이용하여 귀신을 내어 쫓으면 결국 귀신의 나라를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사탄이 누구 좋으라고 같은 사탄을 쫓아내겠습니까.
영적인 문제는 결과를 보고 판단하라
여기서 중요한 영적인 원리를 발견합니다. 결국 집을 분열시키는 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영적은 문제는 그 결과를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잘 현혹되지요. 선악과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다고 했지요. 눈에 탐스러운 것에 넘어갑니다. 악한 영이 미혹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섭고 사나운 모습으로 올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치 천사처럼 다가옵니다. 귀신이란 말이 그리스어로 프뉴마타πνεύματα입니다. 성령은 프뉴마πνεῦμα 단수로 표현하고 귀신은 복수로 프뉴마타라고 한 것입니다. 귀신도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인 것이지요. 영이기에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축귀 하실 때를 보면, 귀신을 박멸하지 않고 쫓아내십니다. 귀신이 있으려고 하는 장소나 사람에게 머물지 못하게 하십니다. 대표적인 예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실 때,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 갈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하자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귀신도 영이기에 악하다고 해서 그냥 함부로 제거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마지막 때 한꺼번에 무저갱으로 던져버리신다고 했지요. 이처럼 영적인 것들은 조심스럽게 분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 열매로 알라 하신 것처럼 마지막에 그 결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악마처럼 행동해도 결과적으로 사단의 집을 분열시켰다면, 하나님의 일을 한 선한 영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천사처럼 행동해도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집을 분열시켰다면, 사단의 일을 한 악한 영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지는 마지막을 봐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람도 그렇고 일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유익한 것으로 다가 오지만, 결과적으로 재앙이 될 때가 많습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그리 좋지 않아도 결과적으로 덕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영적인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하라
27절의 말씀을 통해서도 악한 영에 어떻게 대항해야 할지 영적인 권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27절입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무엇보다 집을 차지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악한 영으로부터 집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집 안에 있는 가장 강한 것을 결박시키면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여러 명과 싸울 때, 어떻게 싸울지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그중에 제일 센 사람 한 명만 붙잡고 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세에 밀려서 다른 사람들은 덤빌 생각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쉬운 문제를 해결해서는 끝이 없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다시 도루묵이 됩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풀어야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럼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인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있으면서, 이런저런 착하고 좋은 일을 해보았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한 착한 일이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사단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다. 유명한 해적선의 비유가 있습니다. 해적선에 선한 의사가 있었다고 합시다. 성심성의 것 해적들을 치료하고 도왔습니다. 이 사람이 선한 사람일까요? 결과적으로 이 사람이 행한 착한 일은 해적들이 악을 행하는데 도움이 될 뿐입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결단하고 해적선을 탈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약 내가 사는 집이 육신의 집이라면, 영적인 집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내가 속한 집이 변해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도 육신의 집에 거하면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육신의 집을 떠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심지어 부모와도 원수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5절과 3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내가 살던 옛 육신의 집을 부정하고 떠나야지 참된 영적인 집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가족을 떠나는 것이 때론 두려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적인 가족을 떠나면, 새로운 영적인 가족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가족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 이자 진리 공동체인 교회에 주신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시편 85편 10절부터 13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진리가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진리가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 주님께서 좋은 것을 내려 주시니, 우리의 따은 열매를 맺는다. 정의가 주님 앞에 앞서가며, 주님께서 가실 길을 닦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때, 하나님의 가족으로 누리는 기쁨인 것이지요.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말씀은 마무리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의 소원은 야훼 하나님 집에 영원히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편 84편 10절에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 왕궁에 살며 상아로 만든 침상에서 자고 온갖 진미를 먹을 수 있지만, 다윗은 더 이상 기쁨이 되지 않았습니다. 잠자리는 불편하고, 먹는 것은 거칠지 모르지만 야훼 하나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기쁘다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은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 참된 생명이 어디에 있는가, 참된 성공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바로 하나님 뜻 가운데 살아가는 삶입니다. 비록 하나님 나라의 문지기라는 작은 소명을 받았을지라도, 주신 뜻대로 충성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천국이 죽어서 가는 곳만이 아닙니다. 천국이 좋은 것이 아픔도 병도 없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풍성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곳만이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8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인 것은 각 사람이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히 살아가도록 함께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믿음의 길을 온전히 걸어가도록 참된 영적 가족으로 진리로 하나님의 집을 이루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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