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fkxO1h2iH3M&list=PLh4-9uGANmwqQ-_1lMojr-OaWAKWpjfpf&index=7
새번역 마가복음 1장 9-15절
9 그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10 예수께서 물 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11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12 그리고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13 예수께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 계셨는데, 거기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15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세 가지 사건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있었던 처음 세 가지 사건을 연속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과 그 이후 광야로 가셔서 시험을 받으신 것, 그리고 광야의 시험이 끝나고 나서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세례, 광야의 시험, 복음 전도 이 순서로 진행되는데요. 마가복음의 스타일 대로 아주 간결하게 그 내용을 전합니다. 오늘 설교는 세 가지 내용 중 세례와 복음 전도를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인 광야의 시험을 중심으로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세례는 뜻을 세우는 것이다
우선 처음 언급된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만, 오늘 설교에서는 세례를 예수님이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서 그 뜻을 세운 사건으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 점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이후 하늘에서 들려온 메시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물 밖으로 나오시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기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알려줍니다.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로 이 땅에 오셨음을 말합니다. 이 사실로 인해 예수님은 자신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이 나처럼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음을 알려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온 세상이 구원받는 길이고, 이 길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받으신 메시아로서의 소명이라 생각하셨습니다. 따라서 세례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서 하나님께 소명을 받아 자신의 뜻을 세운 일입니다.
뜻을 세운 뒤 곧장 찾아온 광야의 시간
그런데 이렇게 뜻을 세웠다면, 곧장 세상으로 나가서 그 뜻을 바로 이루어 내는 것이 누구나 원하는 바 일 것입니다. 심지어 그 뜻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면, 마땅히 그 일이 평탄하게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이후 곧장 성령에 이끌리어 세상이 아닌 광야로 가셨습니다. 뜻을 세우자마자 눈앞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시험과 고난이었습니다. 그것도 심지어 성령 하나님이 그렇게 내모셨습니다.
광야는 다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하는 나만의 고통을 마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고통이 찾아오면, 반드시 고통받는 자신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고통스럽기에 왜 내가 고통받아야 하는지 스스로 묻는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는 자신을 응시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면서 나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해 가는 곳입니다. 또한 내가 세운 뜻을 이룰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물음의 방식이 시험과 고통으로 찾아옵니다. 그 어떤 어려움에도 처음 세운 뜻을 꺽지 않고 견딜 수 있는지 광야는 우리에게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도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뜻을 세우지 않았다면, 광야의 시험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뜻을 세우지 않더라도 인간이 마땅히 겪게 되는 생로병사와 같은 일반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이런 고통들은 인간사 누구나 지나가는 일이라 생각하고 무시하고 피하곤 합니다. 그래서 고통이 주는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뜻을 세울 때 겪게 되는 고통은 다릅니다. 필연적으로 고통이 주는 이유를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러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잖아. 내가 이런 일을 겪는 것은 부당하지 않는가 하며 반드시 스스로 묻습니다.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
기독교 변증가인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서문에서 루이스는 고통이 어떻게 문제가 되는지를 알려줍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 선하신 하나님이 만든 세상은 좋은 곳이라 믿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문제가 된다고 루이스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이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생긴 낙관적인 기대와 사뭇 다른 냉혹한 현실이 상충될 때, 고통의 이유를 묻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통의 문제는 다름 아니라 이러한 모순에서 나온다는 것이지요.
그럼 이렇게 생각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진지한 문제가 되고 유의미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역설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고통이 문제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사랑받는 아들이었기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광야로 성령이 내몰아 버린 것입니다.
고통이 가진 선과 악의 양면성
루이스는 고통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고통은 모든 악 중에 유일하게 살균 소독된 악입니다. 고통에는 그 본성상 증식하는 성향이 없으므로 고통이 끝났다면 자연스럽게 기쁨이 뒤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루이스의 말대로 고통은 좋은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게 일반적인 악의 경우는 악이 악을 낳기에, 그냥 그대로 두면 결국 썩어 버립니다. 그러나 고통은 악이지만 그대로 둔다고해서 썩지 않습니다. 고통은 기한이 있어서 결국 사라져 버린다고 했습니다. 왜 기한을 주었는가 하면, 고통은 비록 악이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선함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고통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드리고 면밀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통이 주는 아픔만이 아니라 그 뒤에 따라오는 선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이 광야에 있을 때 구체적으로 어떤 시험이 있었는지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단지 광야의 시간 동안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면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때론 천사들이 와서 시중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광야의 고통은 들짐승처럼 지내야 하는 냉혹한 처절함이 있지만, 반대로 천사들이 와서 시중드는 예기치 못한 기쁨도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고통이 주는 유익을 얻으려면, 이 둘을 동시에 보고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사단이 하는 역할
성령이 광야로 예수님을 내모셨지만, 광야에 들어가서부터는 40일 동안 사단에게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의 고난을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그 고난을 수행하는 것은 사단입니다. 그렇다면 악마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광야에 들어온 자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자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 메시아로서 하나님께 받은 그 뜻을 수행할 수 있는지 평가하는 시험관의 역할을 했습니다. 욥의 경우라면, 욥이 정말 하나님의 말대로 흠이 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참된 의인인지를 확인하려 한 것입니다.
시험하다는 말의 그리스어는 페이라조πειράζω입니다. 고대 그리스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선수로 선발되어야 했습니다. 경기를 감당할 신체적인 능력과 수행할 기술이 있는지의 여부를 따지고자 평가를 받습니다. 이렇게 평가를 받는 것을 바로 시험하다, 페이라조πειράζω라는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시험은 선수로 선택받은 자가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며 고통 가운데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받은 자로 선택되었다는 말해 주는 것입니다.
페이라조πειράζω는 자동사와 타동사 둘 다의 의미를 지닙니다. 타동사라면, 누군가가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지만, 자동사일 경우에는 내가 스스로 시험에 놓이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성경에서는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했다고 하지만, 결국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스스로 선택하여 광야로 향해 나아가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고통과 뜻을 세울 때 따르는 고통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생로병사의 고통은 내 의지와 관련없이 찾아오지만, 뜻을 세움으로 인해 생겨난 고통은 내가 원치 않는다면 내려놓거나 반대로 내가 원하면 감당해야 합니다.
어찌되었든 자의든 타의든 우리는 시험을 잘 통과할 수도 있고, 때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험은 시험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시험은 자신을 연단하는 훈련이 되기도 합니다. 시험이라는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뜻을 감당할 수 있는 자로서 시험에 참여한 자들이 그 자격에 걸맞은 자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단을 시험 감독관으로, 때론 훈련 감독관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리워야단 Leviathan, 베헤못 Behemoth, 지즈 Ziz
고대 근동의 설화들을 살펴보면, 전설적인 괴물 3가지가 나옵니다. 바다의 리워야단 Leviathan, 육지의 베헤못 Behemoth, 하늘의 지즈 Ziz입니다. 이 중 리워야단이나 베헤못은 성경에서 시편이나 욥기에 등장합니다. 이 괴물들은 모두 다 각자 자기가 속한 영역에서 신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바다와 육지, 그리고 하늘의 경계에 서 있으면서, 그 공간을 지탱하며 지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 영역을 뛰어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를 막아서고 방해합니다. 예를 들어, 바다에 강한 폭풍이 친다면 리워야단이 꿈틀거리며 일으키는 일이고, 그리고 땅에 지진이 났다면 베헤못이 움직이면서 흔드는 일입니다. 하늘에 천둥이 친다면 지즈가 일으키는 것이겠지요.
이들은 초자연적인 존재인 다이몬, 즉 사단에 비견되는 신화적인 존재입니다. 이들은 바다와 육지, 그리고 하늘에 개입을 한다면, 다이몬, 즉 사단은 인간의 정신이나 운명에 개입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신적 한계나 자신의 운명을 넘어서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단은 대번에 개입해서 그 한계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리워야단, 베헤못, 지즈도 자신에게 맡겨진 영역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람이 있다면, 놔두지 않고 곧장 공격합니다.
이 점을 뜻을 세우는 것을 관련지어 생각해 봅시다. 뜻을 세운다는 것은 자신만의 삶의 기준과 원칙을 세워서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어려움뿐만이 아니라 더 큰 어려움은 바로 정신적인 부분입니다. 변치 않는 한 가지의 방향을 향해 좌로 우로 치우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일입니다. 뜻을 세운 뒤 그 일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 고도의 정신력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그 뜻을 받드는 고결한 영혼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을 누가 막고자 하겠습니까? 바로 사단입니다. 바다에서 리워야단이 막아서고, 육지에서 베헤못이 막아서고, 그리고 지즈가 하늘에서 막아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있으실 때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고 하지요. 이 들짐승들이 광야에 살아가는 야생동물인 이리나 여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들과 함께 사이좋게 지냈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들짐승들을 리워야단, 베헤못, 지즈로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나오지는 않지만, 다른 복음서를 보면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세 가지 시험이 있었지요. 이 세 가지 시험을 내는 것도 각각 이들이 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시험은 돌을 빵으로 만들라고 했지요.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혜에 대한 시험입니다. 바다가 상징하는 것이 지혜이기에, 첫 번째 시험은 리워야단이 한 것입니다.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했습니다. 뛰어내릴 때, 천사들이 와서 돕는지 보자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권세를 잡은 지즈가 준 시험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시험은 높은 산 꼭대기에서 산 밑 세상 모든 영광을 보여주며, 나에게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땅의 모든 영광으로 유혹한 베헤못의 시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네 번째 시험
우리가 잘 알듯이 쉽지 않았던 이 시험들을 예수님은 다 이겨내셨습니다. 그렇다면 광야의 시험이 다 끝난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광야의 시간이 끝나도 여전히 한 가지의 시험이 더 남아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14절의 말씀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요한이 잡힌 뒤에'라는 말씀입니다.
이 표현을 시간적인 순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요한이 할 일을 마쳤기에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드리는 사람에 따라 이 짧은 문구 안에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자신의 삶을 헌신한 세례 요한의 끝이 헤롯에게 잡혀 감옥에서 목이 잘린 것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었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의 마지막을 암시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주저함 없이 자신을 헌신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끝은 세례 요한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낫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마지막 시험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시험은 우리가 잘 아는 십자가에 형벌에 쳐해 져 죽는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과 선인의 고난
우리가 진지하게 우리 삶을 성찰해 보면, 사실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생각했던 기준이나 믿음과 이 세상의 현실과 맞지 않고 괴리가 생길 때입니다. 앞서 제가 C.S. 루이스를 인용하면서, 고통이 문제가 되는 것도 바로 이럴 때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법칙이 있지요. 바로 원인과 결과입니다. 이것을 인과응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팥 심은 데에는 팥이 나고, 콩 심은 데에는 콩이 나야 합니다. 이처럼 악한 행동을 하면 벌을 받고, 선한 행동을 하면 상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우리 기대와 달리 작동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또한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만들어 갑니다. 인과응보도 가장 보편적이면서 다수가 동의하는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의 방식이 무너지게 되면 매우 고통스러워집니다. 육신의 고통이나 외부의 공격도 물론 고통스럽지요. 그런데 그런 고통들은 고통을 체감하는 어떤 임계치가 있습니다. 그 임계치를 넘어서게 되면 사실 다 똑같아 집니다. 그리고 고통도 일종의 감정이라서, 이게 만성이 되면 잘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특히 우리의 심리는 각자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믿음의 기반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토대가 무너져 내리게 되면, 너무나 혼란스러워지고 고통스러워지는 것이지요. 토대가 없으니 계속 아래로 추락하는 것처럼, 존재 기반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옥을 무저갱이라고 하지요. 이걸 영어로 하면 Bottomless Hole입니다. 바닥 없는 구멍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존재가 흔들려 아래로 끝없이 추락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바로 지옥인 것이지요.
욥의 불만
욥의 경우도 보십시오. 욥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잖아요. 하루 만에 재산 다 잃고, 순식간에 자식도 다 세상 떠나 버리고, 몸에 종기가 나서 말할 수 없을 만큼 육체의 고통을 겪지요. 심지어 아내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인즉 참 쉽지 않은 일이고 보통 사람은 감당하지 못하지만, 욥은 거기까지의 고통은 다 견뎌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이 언제 폭발하는지 아십니까? 친구들이 와서, 이 모든 것이 니 죄로 인한 것이다. 네가 잘못해서 벌 받은 것이라는 말에 참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욥이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게 아닙니다. 욥의 문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자식들이 교만하여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지을까 봐 아침마다 번제를 드리면서까지 겸손히 착하게 살았는데, 하나님은 왜 그런 나에게 이런 가혹한 벌을 주시냐는 것입니다. 설령 나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왜 선인들이 고난을 당하고 반대로 악인들은 복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죽는 날까지 장수하고 그 삶은 평탄하고 날마다 재산이 늘어만 갑니다. 심지어 죽은 후에도 그 장례식에 가보면 사람들이 와서 줄지어 서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굳건히 믿고 있었던 세상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 방식이 무너져 버린 것이지요.
사단보다 더 지독하신 하나님
욥은 이게 너무 괴로우니깐 이런 말을 해요. 욥기 3장 20절부터 23절입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이런 사람들은 죽기를 기다려도 죽음이 찾아와 주지 않는다. 그들은 보물을 찾기보다는 죽기를 더 바라다가 무덤이라도 찾으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데, 어찌하여 하나님은 길 잃은 사람을 붙잡아 놓으시고, 사방으로 그 길을 막으시는가?”
차라리 죽이기라도 하시지. 죽지 않게 하시면서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걸 보면서, 하나님은 정말 우리가 한계를 넘어서려고 할 때, 막아서는 신화적 동물인 리워야단, 베헤못, 지즈보다 더 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들이 꼼짝 못 하게 막는 것은 그저 바다나 육지나 하늘인데,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 우리의 존재 자체를 어떻게 할 수 없게 길 잃은 사람을 붙잡아 놓으시고, 사방으로 그 길을 막으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사단보다도 더 독하신 것입니다. 프랜시스 톰슨의 시처럼, 하나님은 천국의 사냥개로,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지 한번 물면 절대 놓치않고 꼼짝달싹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삽의 깨달음
어떻게 이 문제의 답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구약의 지혜자들은 하나 같이 이 문제를 고민했지만, 그 중 특히 심각하게 고민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 다음으로 시편을 많이 기록한 아삽이라는 사람입니다. 시편 한 편을 이 문제를 놓고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바로 시편 73편입니다. 아삽은 시편 73편 1절과 2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왜 그랬겠습니까? 아삽도 이 땅을 살아보니 현실에서는 악한 이들이 너무나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아삽은 레위인으로 다윗의 3대 악장 중 하나였습니다. 찬양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하고자 할 때, 늘 마음에 이 문제가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공평하신가? 공평하지 않다면, 선하지 않으신데 어떻게 좋은 분으로 확신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아삽이라는 이름은 모으는 자라는 뜻을 가집니다. 아삽은 자신의 이름의 뜻대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여러 인생 케이스를 모아서 조사도 하고 연구도 하고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아삽은 시편 73편 16절과 17절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결국 아삽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임을 인정하였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그 삶의 과정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이 두 가지 부류의 사람에게는 각각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넘을 수 없는 티끌과 같은 인생
먼저 악인에 대해서 말합니다. 시편 73편 17절과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 악몽이 다 사라져 없어지듯이, 주님, 주님께서 깨어나실 때에, 그들은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결국 악인도 어쩔 수 없는 티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온갖 악한 방법으로 돈, 명예, 권력 다 가질지라도 그 끝은 한낮 먼지, 아침 안개와도 같아서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지요.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도 한 가지 벌이겠지만, 그건 확인해보지 못해서 모르는 것이구요. 중요한 것은 결국 떵떵거리는 악인도 죽음은 피할 수 없어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선인은 어떻습니까? 선인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1절부터 26절입니다. ‘나의 가슴이 쓰리고 심장이 찔린 듯이 아파도, 나는 우둔하여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다만,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늘 주님과 함께 있으므로, 주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잡아 주십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하니, 하늘로 가더라도, 내게 주님 밖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땅에서라도,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몸과 마음이 다 시들어가도,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에 든든한 반석이시요, 내가 받을 몫의 전부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사실 선인이나 악인이나 그 인생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땅에서 얼마나 잘 살고, 얼마나 복을 받을지, 그리고 반대로 어떤 고통을 겪으며 힘들게 살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그 사람이 악하고 선하고의 문제와 관련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에게는 단 한 가지 구분이 되는 특징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 잘 살든지 못 살든지, 길흉화복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것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나를 붙잡아 주시고,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 되시고,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삽이 말한대로 정말 이것 한 가지밖에 없는 거예요. 아 뭐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네. 뭐 나쁘지는 않지만 더 좋은 것을 기대했는데, 다른 게 없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관심도 가지지 않고 시시하다 말하더라도,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그 어떤 것으로 바꿀 수 없는 비밀이 되어야 합니다. 이 비밀을 자신의 숨겨진 보화로 여기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고통이 오더라도,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영원토록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것을 넉넉하게 이깁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복이 있는 사람이 되는 유일한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 광야에서 나오시자마자 이 비밀을 담아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이 복음의 메시지를 오늘 말씀의 의미를 담아 의역해서 이렇게 바꾸어보고 싶습니다. 어느 때든지, 어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은 뜻을 세우고자 광야로 들어가 시험과 고난을 당하는 사람과 변함없이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몸소 살아가시며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복음의 비밀임을 믿습니다.
'마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3장 20절-35절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집에 거한다 (1) | 2024.05.29 |
---|---|
마가복음 14장 1절-11절 신앙의 숭고함에 관하여 (1) | 2024.03.24 |
마가복음 8장 31절 - 38절 예측 불가능한 친구 (1) | 2024.02.21 |
마가복음 9장 2절 - 9절 높은 산 위에서 새하얗게 빛나시다 (1) | 2024.02.09 |
마가복음 1장 29절 - 39절 곧장 회당 밖으로 나와 홀로 기도하시다 (1) | 2024.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