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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 12장 20절-33절 초월과 생명에 이르는 길

by 알렉스강 2024. 3. 17.

https://www.youtube.com/watch?v=R5-XOwWggZk&list=PLh4-9uGANmwqQ-_1lMojr-OaWAKWpjfpf&index=11

 

 

요한복음 12장 20~33절 새번역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이 몇 있었는데,

21   그들은 갈릴리의 벳새다 출신인 빌립에게로 가서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22   빌립은 안드레에게로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은 예수께 그 말을 전하였다.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25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26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나의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 주실 것이다."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때를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내가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 때에 왔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29   거기에 서서 듣고 있던 무리 가운데서, 더러는 천둥이 울렸다고 하고, 또 더러는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 하였다.

3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깨우치시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깨우치시려는 것이다.

31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날 것이다.

32   내가 땅에서 들려 올라갈 때에, 나는 모든 사람을 나에게로 끌어올 것이다."

33   이것은 예수께서 자기가 당하실 죽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암시하려고 하신 말씀이다.

 

The Greeks sought to meet Jesus.

 

헬라인이 뵙기를 청함

오늘 본문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셔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6절에 따르면,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인 줄 생각났더라고 말합니다. 그때에는 별 의미 없이 생각하고 지나갔었는데, 지나고 보니 매우 중요한 말씀임을 깨닫고 기억을 되살려서 복음서에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물론 모든 말씀이 다 소중하겠지만, 오늘 본문은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시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하러 올라온 헬라인이 몇몇이 있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은 유대교에 매료되어 개종을 한 헬라인으로 보입니다. 성지순례차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우연찮게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러 올 정도로 진리에 대한 열정이 컸기에, 이왕 온 김에 당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던 랍비인 예수님을 직접 뵙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빌립을 찾아가 뵙기를 청했는데, 그 까닭은 빌립이 헬라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그 이름이 히브리 이름이 아닌 헬라식 이름인 것으로 보아, 다소 출신이었던 바울처럼 태어난 곳이 소아시아나 아니면 그리스 본토인 듯합니다. 따라서 빌립은 예수님의 제자 중 헬라어를 가장 잘 구사했을 것입니다. 빌립은 자초지종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께 나가 헬라인 몇 명이 뵙기를 청한다고 드렸습니다. 빌립의 이야기를 들으신 후 예수님이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St. Philip, by Peter Paul Rubens, from his Twelve Apostles series, 1611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3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빌립이 예수님의 말을 들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제야 드디어 예수님이 팔레스타인을 넘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시는구나.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될 것이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입니다. 개인의 성공으로의 영광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메시아의 구원 역사로서 십자가에 죽을 때가 왔음을 알리신 것입니다. 지난주 살펴본 요한복음 3장 말씀에 따르면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하늘에 높이 들리는 때입니다. 인자가 하늘에 높이 들리는 것은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 설교에서 하늘에 높이 들리는 것이 어떻다고 했습니까? 마치 하늘로부터 내려온 뱀이나 사냥개가 무는 것처럼 하나님께 물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로부터 물려야지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어떻게 느껴집니까? 하나님께 당하거나 배신당하는 것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이 땅에서 잘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기에, 하나님이 그 누구보다 잘 대해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십자가라는 죽음으로 끌고 가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이 영광 받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이지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리고 25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시죠.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토록 보존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두 구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논리적으로 살펴본다면, 전형적인 이율배반의 문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율배반은 두 가지의 모순된 명제를 하나로 만들어서 그 결과로 역설을 도출하는 방식입니다. 죽는다와 산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 보존하는 것과 잃어버리는 것, 이렇게 상반되는 모순 명제를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어서 역설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율배반은 하나님이 예수님이나 우리에게 대하는 방식과도 같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미워하고, 아끼는 사람일수록 방치하거나 마구 대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율배반의 이유, 생명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율배반을 통해 역설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시는가 질문할 수 있겠지요. 앞선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사랑하지만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바로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왜 역설적으로 우리를 대하시는가? 사랑할수록 잘 안 해주시는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생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죽어야지, 많은 생명이 살아나고, 생명을 미워해야지 생명이 보존된다는 것입니다. 죽으면 산다는 것이지요. 결국 하나님의 목적은 생명에 있습니다.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사랑하는 자들을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생명은 하나님의 맨 처음 관심사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도 생명 때문입니다. 창조 사역 때, 하나님이 하신 행동은 무엇보다 영적인 생명 활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도 생명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도 생명입니다. 창세기에서 창조를 시작하시기 직전 하나님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하나님의 영이 물 위를 움직이고 계셨다라고 말하지요. 그리고 신약의 창세기라 할 수 있는 요한복음 1장 서두에서 창조 사역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이셨다. 창조된 것은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이처럼 요한복음에서도 창조 행위를 생명과 영적인 빛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인간의 가장 강력한 욕구를 식욕, 수면욕, 성욕이라고 하지요. 이 세 가지 모두 생존 본능, 즉 생명에 대한 욕구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 생명의 욕구가 있는 만큼, 또 다른 욕망이 있어요. 바로 초월적인 것에 대한 욕망입니다. 종교적인 체험이나 초월적인 현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집니다. 문제는 초월적인 것이 눈에 보이지 않잖아요. 그래서 우리 인간은 초월적인 경험들을 단순히 추상적으로 남겨두지 않고 구체적인 현실 세계로 가져오려고 합니다. 초월적인 것에 대한 욕망과 그에 따른 경험을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주로 우리가 살아가는 창조 세계가 번영하는 것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자면, 내가 하나님을 믿었더니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초월적인 경험이고, 복을 받는 것이 바로 창조 세계의 번영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뒤 하신 말씀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의 창조활동으로 피조된 우리 인간이 누릴 마땅한 복이 바로 생명의 번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창조 사역의 결과 생명체로 지어진 사람은 성장하고 번식하고 번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영적인 활동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 결과 당연히 우리의 생명이 번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Life Transcendent is a painting by Debbie Lewis

 

생명의 다양한 측면

그런데 문제는 창조세계에서의 생명의 번영을 우리가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가 기복신앙으로 이어집니다.  이 오해는 생명을 단순히 생물학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생명의 번영을 하나의 개체가 성장하고 번식하는 것으로 국한짓는 것입니다. 물론 생물학적인 번영이 틀린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한 개체만이 아닙니다. 생명은 서로 의존하고 상호작용합니다. 그 결과 생태계가 있지요. 이 생태계 속에서 생명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존엄성이 있어서 존중과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보다 많은 생명이 존중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생명이 번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 개체의 번영을 넘어 생태계 안에서 더 많은 생물의 다양성을 가지는 것이야 말로 더 큰 의미에서 진정으로 생명이 번영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생명은 영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생명은 육체에서 끝나지 않고, 생명이 활동하면서 그 활동에 따른 의식과 정서, 그리고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측면은 생명의 한 측면이자 일부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초월적 행위가 생명으로 나타날 때에는 이 모든 차원에서의 번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육체적 행위는 고작해야 생물학적인 번영에서 끝나지요. 그것도 한 개체만의 번영으로 끝납니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보면, 그것은 번영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모두 다 쇠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생명의 번영은 창조 세계 전체의 영적인 번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카르모루페χαρμολύπη

앞서 하나님이 이율배반을 통해 모순과 역설로 우리를 대하시는 이유가 생명에 있다 말씀드렸습니다. 이율배반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율배반이 생명에 영향을 끼칠까요? 이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율배반을 잘 설명하는 단어가 있는데, 그리스어로 카르모루페χαρμολύπη라는 단어입니다. 그리스어로 카라χαρά인 기쁨과 루페λύπη 슬픔의 합성어로,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느껴지는 복합한 감정을 나타냅니다. 영어로 하면, bittersweetness라고 하지요. 우리말로는 달콤씁쓸함이라 번역할 수 있습니다.

 

χαρμολύπη

 

이율배반은 오랫동안 철학적인 주제였습니다. 이율배반을 통해 모순 형용으로 그려지는 역설적인 모호함에 인생의 진실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이렇게 둘로 딱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존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항상 달콤함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씁쓸함도 있습니다. 기쁜 순간 눈물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 극한의 기쁨에서는 왠지 모를 슬픔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극심한 고통 가운데 왠지 모를 희열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이중적인 감정을 동시에 경험할 때, 모든 것이 덧없다는 것을 느낀다고 합니다. 기쁜 게 더이상 기쁜 것이 아니고 슬픈 게 더이상 슬픈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짜피 인생이란 기쁨과 슬픔은 늘 있기에, 사람들은 기쁨과 슬픔을 넘어선 더 높은 깨달음, 즉 진정한 아름다움이나 좋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갈망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바로 초월에 대한 갈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로 이끄는 힘인 것이지요. 예를 들어 대 스토아 철학의 경우, 나 자신을 자극한 외부 사건에 대해서 판단 때, 카르모루페χαρμολύπη, 즉 달콤씁쓸함이라는 이중적인 감정의 태도를 취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렇게 복합적인 감정을 가져야지 외부에 흔들리지 않고 내면의 균형과 평온을 찾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남다른 고사성어≫ 본문 내 이미지

 

새옹지마

이러한 권면은 서양에만 있지 않습니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옹지마라는 유명한 고사가 있지요. 변방의 한 늙은이의 말이라는 뜻이죠. 고사에 나오는 노인은 인생이 때로는 복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화가 되기도 하기에, 매사에 늘 이중적인 감정과 태도를 취했습니다. 자신이 아끼던 말 한 필이 도망가자, 사람들이 찾아와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니, 노인이 글쎄요 하면서 이 일이 복이 될지 어찌 알겠소라며 낙심하지 않습니다. 이후 노인의 예견대로 도망나간 말이 많은 야생마를 끌고 와서 노인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축하한다고 하니, 이번에는 노인이 글쎄요 하면서 이 일이 재앙이 될지도 모르지요 라며 덤덤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놀랍게도 이번에도 역시 노인의 예견대로 되었습니다. 노인의 아들이 야생마 중 좋은 놈 하나를 타고 나갔다가 낙마하여 다리를 크게 다쳐 절음발이가 되었지요.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하나 하며 슬퍼하며 노인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노인이 다시 글쎄요 하면서, 이것이 다시 복이 될지 어찌 누가 알겠습니까라며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라 다를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얼마 뒤 나라에 오랑캐가 쳐들어왔습니다. 변방에 위치한 마을이라 젊은 남성 대다수가 징집되어 전쟁에 나가 죽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 역시 큰 부상으로 장애를 입었습니다. 노인의 아들은 다리를 다친 것이 오히려 약이 되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제야 사람들이 노인이 왜 그리 모든 일에 덤덤했는지 알게 되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후로 어려움이 있거나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연수를 자극하는 측은지심

새옹지마의 고사에서 보듯이 노인이 취했던 카르모루페χαρμολύπη, 달콤씁쓸함이라는 덤덤한 태도는 초월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인생에 큰 지혜를 가져다주어서 결국에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 것입니다. 즉 이중적인 감정을 가진 태도와 자세는 우리에게 초월과 생명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 사실과 관련하여 최근 뇌신경 과학에서 이루어진 인간의 도덕심과 관련된 연구 하나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뇌에는 연수라는 한 부위가 있습니다. 연수는 주로 인간의 생명 유지와 관련된 근본적인 본능을 담당합니다. 심박동, 혈압, 호흡 소화와 같은 기본적인 부분입니다. 우리 육체와 관련하여 가장 원초적인 부분을 조절합니다.

 

뇌의 구조와 역할

 

그런데 연구에 따르면 때로는 연수가 심리적인 의식과 관련하여 반응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곤란에 빠진 걸 볼 때입니다. 측은지심이라고 하지요. 철부지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우물로 기어갈 때, 아이를 살리고자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감정이 바로 카르모루페, 달콤씁쓸함과 같은 이중적인 감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타인의 곤경으로 인해 슬프면서, 한편으로 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기쁨이 함께 발생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이중적인 복합 감정이 인간의 생명 유지와 관련된 본능과 비슷하여, 결국 인간의 생명 유지의 중추인 연수를 자극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연수를 잘 자극해서 훈련한다면, 인간의 생명 유지와 관련된 근본적인 본능을 활발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죠. 평소에 달콤씁쓸함과 같은 이중적인 감정과 태도를 잘 훈련한 사람은 측은지심이 강하고, 초월과 생명에 대한 갈망이 클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분법적인 틀을 벗어나기

그런데 이중적인 감정과 태도를 취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나누어진 이분법적인 틀에 더 익숙합니다. 기쁜 것은 기쁜 것이고, 슬픈 것은 슬픈 것이지, 함께 있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지요. 신앙의 태도도 그렇지요. 이 땅은 이 땅이고 하늘은 하늘이지, 하늘이 이 땅에 내려와 있는 것을 이해를 못합니다. 반대로 땅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초월, 영적인 것에 대해서 무지하지요. 그래서 예수님 말씀처럼 하늘에서 풀면 땅에서도 풀리는 일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헬라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그리스 철학에서 진리를 찾는데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대표적인 그리스 철학이 이원론이지요. 완전히 선한 이데아와 이와 반대되는 타락하고 왜곡된 이 세상으로 구분합니다. 물론 이런 구도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죄성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자신들도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구분하여 판단하고자 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이분법적인 틀 안에 있으면 사람이 어떨까요? 이 땅과 육체는 모두 악하고 타락한 것이기에 믿을 수 없다는 불신 가운데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불신은 자연스럽게 현실 논리로 이어집니다. 인생은 치열한 생존 경쟁이고 정글의 법칙이 작동하기에, 적자생존, 승자생존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까지 나만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육체적인 생존 본능만 남은 것이지요. 아무리 끝까지 살아남아 잘 먹고 잘 산다고 해도 나 혼자만의 생존이고 육체적인 번식에서 끝나고 맙니다. 사실 하등 동물과 다를 바 없는 것이지요. 결코 하나님의 생명, 즉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참된 생명을 얻을 틈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기준으로 선악을 구분하여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보는 인간의 죄성을 해결하시고자, 이데아라 할 수 있는 하늘로부터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타락한 이 땅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허무시고, 우리 인간 스스로가 만든 선과 악의 기준을 허무신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늘 이스라엘 백성을 당근과 채찍 두 가지를 동시에 사용하셨습니다. 광야에 있을 때, 슬픔 밖에 없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안전하게 지켜 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는 기쁨을 주셨습니다. 가진 땅이나 거주할 집은 없지만, 그 누구도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하거나 해하지 못했습니다. 광야에 있을 때 결국 그들의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광야에서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슬플 때 기뻐할 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반대로 가나안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나안은 기쁨의 공간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에서 기쁨만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잊고 있을 때면, 하나님은 이민족을 보내어서 끝까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셨습니다. 기쁨에만 있도록 놔두지 않으셨습니다. 기쁠 때 슬퍼할 줄 아는 것을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십자가 부활과 하나님의 뜻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가 기독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핵심을 말하자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만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을 경험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이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실 이것 역시 카르모루페χαρμολύπη, 이중적인 감정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나의 길 가운데 모든 것이 다 십자가와 부활이 있음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십자가가 있다고 슬퍼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있다면 부활이 있기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만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항상 부활에 앞서 있습니다. 그렇기에 마냥 기뻐하지 않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슬퍼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의 태도와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 결국 부활에 동참하는 우리 기독 신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걸 보고, 뭐 그렇다면 어려운 것이 아니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단지 우리 생각을 바꾸면 되지 않는가? 슬프고 기쁜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연습을 하면 되겠구나라며 쉽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은 이분법적 틀을 깨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어 열매를 많이 맺는 것, 자기 목숨을 미워하여 영생에 이르러 생명을 보존하는 일은 예수님 본인도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27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지금 내 마음이 괴롭다 했습니다. 이 때를 벗어나게 해 달라고 부탁해야 하나 고민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이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Agony in the Garden by El Greco, c. 1590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을 함께 감당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자신의 부르심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목적 없이 그냥 행복한 삶을 위해서 이중적인 감정 상태를 연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세상의 철학이나 다른 종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기도 합니다. 목적 자체를 이중적인 감정에 이르는 것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이 부르신 뜻을 향해 달려가고자 이 일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 속에서 슬플 때 기뻐할 줄 알며, 기쁠 때 슬퍼할 줄 아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 땅을 초월하여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법을 따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요셉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누구보다 더 롤러코스터와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그 사랑이 편애가 되어 결국 인생의 독이 됩니다. 형들에게 질투를 받아 죽기 직전에 건짐받아 노예로 팔려갑니다. 이후 애굽에서 운 좋게 군대장관 보디발에게 발탁되어서 집사로서 인정받아 괜찮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일이 역시 요셉을 비참하게 만들지요. 유능하고 잘 생긴 요셉을 본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자 거절하게 되고, 결국 모함에 빠져 지하감옥에 갇혔습니다. 요셉은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쁜 게 나쁜 것이 아니지요. 지하감옥의 삶이 나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왕의 최측근 신하인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몽해 주는 계기로 인해 결국 바로의 꿈을 해몽하여, 단번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삶을 보면서, 인생은 새옹지마야 역시 사람 인생은 알 수 없어 이렇게 교훈을 맺으며 성경은 끝을 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새옹지마보다 더 큰 시각으로 요셉의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대표적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시편 105편이 있습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야곱과 그 가족을 애굽으로 보내어 나그네로 살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거기서 번성하여, 결국 애굽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출애굽 하였다고 말합니다. 시편기자는 주어를 하나님으로 못박으며, 이 모든 일이 철저하게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들어가고 다시 출애굽하게 된 역사적 과정을 서술하면서, 시편 기자의 관심은 한 개인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한 민족이나 나라 다른 여타의 역사적인 흐름에 있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의 관심은 개인과 한 민족을 넘어 온 세계 역사를 이끄시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거대한 수레바퀴와 같은 하나님의 뜻에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눈으로 볼 때, 요셉은 단지 그 뜻을 이루는데 훈련받아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Marc Chagall, Joseph and His Brothers (from the Bible Series), 1958

 

따라서 시편 기자는 시편 105편 45절에서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요셉 한 인생을 보면 롤러코스터와 같고, 그리고 야곱 이스라엘 가족 전체를 보아도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그런 과정을 거친 이유, 즉 하나님이 슬픔이나 기쁨만이 아니라 슬픔과 기쁨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주시면서 각자 인생에 개입하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법을 따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할렐루야. 시편 기자의 결론은 단지 율법을 지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에 우리는 마땅히 그 뜻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뜻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삶에 어떤 고통도 감당할 수 있으며, 반대로 엄청난 세상의 복을 받아도 교만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걸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 받아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기쁨이 와도 슬퍼할 줄 아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슬퍼도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나를 이끌고 가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만들어 나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길이 험하고 지칠지라도, 심지어 편안하고 안락하게 걸어갈지라도 사실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이지요. 우리가 기쁘거나 슬프거나 관계없이,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 받으시고자 우리를 향하신 자신의 뜻을 이루시어 나아가시는 것을 믿읍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는 이중적인 감정과 태도를 훈련받으며, 결국 이 땅을 초월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