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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번역 요한복음 3장 13-21절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7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20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영적으로 거듭남에 대한 니고데모와의 대화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와 대화 이후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복음의 핵심 구절이라 여겨지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고 널리 알려진 터라 이 구절 하나에 집중하는 나머지 해당 본문 전체의 맥락을 놓칠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오늘 설교는 전체 맥락을 살펴본 후, 요한복음 3장 16절의 메시지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의 위치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 이후에 이어진 예수님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의 주제는 거듭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했는데, 이 말을 니고데모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을 자궁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 육적인 일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를 어리석게 생각하셨지요.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며 나무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하긴 내가 이 땅의 육적인 일을 말해도 믿지 않는데, 하늘에 속한 영적인 일을 말하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이해 못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생각하신 것입니다.
휩소테나이υψωθηναι, 들려야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서두인 13절과 14절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이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이 말씀은 앞서 영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를 위해서, 어떻게 하면 육적인 것을 넘어 영적인 것으로 초월할 것인지에 대한 일종의 방법과 과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자기 초월이라는 가르침을 주신 매우 중요한 말씀이지요.
여기서 핵심적인 표현은 들려야 한다는 단어입니다. 휩소테나이υψωθηναι라고 해서 하늘로 높이 치켜들어 올리다는 뜻인데요. 일차적 의미는 물리적으로 하늘 높이 올린다는 뜻이지만,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밝혀 보여주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광고처럼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시키기 위해서 높이 드는 것과도 같습니다.
사람의 아들 하늘의 아들
그럼 무엇을 보여주기 위함이냐 하면, 바로 인자라는 겁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왜 사람의 아들이라 자신을 칭했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요. 인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상투적인 표현입니다. 벌써 오랜 일이지만, 노태우 대통령이 대선 캐치 프레이즈로 자신을 가리켜 나는 보통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지요. 보통 사람이라 자신을 지칭한 것은 서민이나 일반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빗대어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역시 자신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 사람의 아들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왔고, 그리고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걸 들은 사람에게는 어떻게 들릴 수 있겠습니까? 나 역시 사람의 아들이니, 나도 예수님처럼 하늘에서 내려왔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후에 예수님처럼 하늘로 올라갈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바로 이점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너희들도 나처럼, 사람의 아들로서 하늘에서 내려왔음을 믿어라, 그리고 앞으로 하늘로 올라갈 것임을 믿으라 하신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아들과 같은 평범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하늘의 아들로 살아가야 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이 하늘의 아들로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보여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3절 말씀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는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로 보일지라도, 하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올라가는가가 핵심 포인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놋뱀 사건의 예를 드시는 거예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하늘의 아들로 이 땅에 내려와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다는 겁니다.
놋뱀 사건
그렇다면 놋뱀 사건을 살펴봅시다. 놋뱀 사건은 비교적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마지막 후반부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지난 40년간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 백성이 신 광야의 가데스 므리바에 이르렀을 때, 물이 부족하다고 또다시 불평을 합니다. 광야의 훈련에도 불평을 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이 솟아나게 했습니다.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모세와 아론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죄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데스를 떠나 에돔 땅 변경에 있는 호르 산에 이르렀을 때, 먼저 모세의 형 아론이 호르산 정상에 올라가 죽게 됩니다.
호르산은 에돔과 가나안 땅의 경계로, 이 산을 넘어 북쪽으로 곧장 올라가면 브엘세바를 거쳐 가나안 남부 지역을 곧장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길을 지나가려면, 동북쪽에 위치하여 이 길을 관리하는 에돔 왕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지정학적 요충지인 이 길을 아다람 길이라 하는데, 별칭으로 왕의 대로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에돔 왕이 이스라엘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길을 가로막아 선 것입니다. 이후에 이 일로 이스라엘과 에돔은 조상이 같은 형제임에도 원수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비판할 수 없는 것은 에돔 입장에서는 볼 때, 수백만의 난민이 자기 땅을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의 경우 임진왜란의 명분으로 일본이 명을 친다고 해서 길을 열어달라고 했지요.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눈앞에 가나안을 두고 홍해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서 에돔을 비켜서 멀찌감치 돌아가는 길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38년 전 출애굽 했을 때에도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떠나왔지요. 바로 그 장소와 같은 곳입니다. 또다시 돌아가는 겁니다.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워서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릅니다. 이제 들어가면 할 수 있다고 의욕이 가득한 상태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길을 막아 선 에돔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노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물도 없고 음식도 없는 광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한 것입니다. 빠르면 걸어서 보름 만에 갈 수 있는 길을 돌아서 또다시 여정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광야의 길을 걸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광야로 다시 되돌아가기
이게 이런 기분인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두고 기도한 것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한 십 년을 기도했다고 해봐요. 인내하고 견디고 참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다 되어서 이루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복병을 만나서 그 일이 뒤엉켜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그게 치명적인 것이 되어서 눈앞에 이루어지는 것을 놔두고 포기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또 십 년을 그렇게 기다려야 하는가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면, 그때 나도 모르게 어떤 말이 나오겠습니까? 속으로 욕이 나오는 거죠. ‘아이 씨, XX’ 다 된 밥에 잿 뿌리는 것이고, 이제는 살 수 있겠다 싶을 때, 또다시 죽을지 모르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죠.
다시 홍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처음 출애굽 했을 때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어쩌면 더 강했을지 모릅니다. 왜 우리를 잘 살고 있는데 괜히 애굽에서 데리고 나와서, 결국에는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는 광야에서 죽게 만드냐고 원망했습니다. 만나도 이제 진저리 난다고 꼴 보기도 싫다고 투정 부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냐 하면 뱀을 보내셔서 뱀에게 물려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게 되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벌이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알고, 모세에게 자신들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놋으로 독사의 형상을 만들어 장대에 걸어놓으면, 누구든지 놋뱀을 보는 사람들은 살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 뱀에 물린 사람들이 그 놋뱀을 보면 살아났다고 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뱀을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합니다.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들어 올렸다고 했는데, 이 행위가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지를 잘 해석해야 하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는 장대에 달린 놋뱀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으로 해석하는데, 전형적인 구속사적 해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살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죽는다는 식으로 해석을 하지요. 물론 틀린 것은 아니지만, 다르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광야의 은밀한 필수품 뱀
우선 뱀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민수기 21장에서 불뱀으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세라프שָׂרָף입니다. 불로 태우다는 사라프שָׂרַף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신화에 등장하는 입에서 불을 품어대는 용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천사 중에 가장 높은 계급을 세라핌שְׂרָפִים이라고 하지요. 천사 중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존재입니다. 이사야서 6장에서 보좌 주변에서 얼굴을 감싸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단 루시퍼가 바로 세라핌의 장이었다고 하지요. 바로 이 타락한 세라핌이 또 다른 모습인 뱀으로 자신을 바꾸어서 에덴동산에서 있던 아담과 하와에게 다가간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고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원죄의 원흉입니다.
성경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생김새라든지 기어 다니는 모습, 그리고 뱀이 가진 독성으로 인해 우리 역시 일반적으로는 공포와 경계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이나 우리의 부정적인 이미지와 달리 고대 근동 지역에서 뱀에 대한 이미지는 긍정적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화에서는 뱀이 지식과 지혜의 상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특히 이집트의 경우 왕의 권력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지식과 지혜, 그리고 힘까지 뱀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리고 치유와 재생을 뜻하기도 합니다. 뱀이 자신의 가죽을 벗는 모습은 새로운 삶의 시작과 변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치유의 이미지로 인해 군의관 경우 병과를 표시하는 견장에다가 뱀의 상을 새겨 놓지요. 그리스 신화에서 아스클레피오스는 의료와 치유의 신으로, 때로는 뱀과 함께 묘사되기도 합니다. 뱀이 아스클레피오스의 몸을 감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곤 했는데, 이 뱀이 아스클레피오스의 기와 같은 것으로 사람들에게 건강과 치유를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긍정적인 이미지는 실재 삶에서 뱀이 매우 유용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척박한 광야와 같은 곳에서 살아갈 때 유용한 필수품이었습니다. 따라서 고대 근동에서는 뱀을 오랫동안 사육을 했습니다. 우선 뱀은 생존이 위급한 상황에서 유용한 식량 자원이었습니다. 뱀은 사람이 먹지 않는 작은 동물들을 먹이로 삼기 때문에, 크게 식량을 소비하지 않습니다. 음식이 다 떨어졌을 때, 마지막으로 뱀을 먹고 기력을 보충하여 사냥을 나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 뱀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꽤 많은 수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떨어졌을 때에도 뱀의 몸 안에 있는 수분을 먹어서 보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위험한 동물이 접근할 때, 뱀이 소리를 낸다든지, 그리고 뱀으로 인해서 쥐와 같은 위해한 동물들을 내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뱀이 치유의 상징이라 했는데, 실제로 의료 용도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독은 독을 다스린다고 하잖아요. 뱀의 독은 소염제나 진통제의 역할을 했고, 긴급한 상황에서 뱀의 독이 생명을 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뱀의 배신
따라서 민수기 21장의 놋뱀 사건과 관련하여 이런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르산에서 가나안으로 향하는 왕의 대로를 뒤로 하고 광야로 되돌아갈 때, 이들이 가장 먼저 챙긴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뱀입니다. 온갖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지만, 광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때 다시 광야로 들어가기 전 가장 먼저 챙긴 것은 뱀인 것이지요. 뱀을 최대한 많이 가져가야지 광야에서 무사하게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뱀은 부정적인 모습도 있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드러내 놓지는 못하지만 은밀하게 뱀을 챙기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바로 유용한 이 뱀이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을 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마지막까지 지켜줄 것이라 믿었던 뱀에게 오히려 물려서 죽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뱀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생존을 위해 내가 절대적으로 붙잡고 있으면서 은밀하게 섬기는 이 세상의 우상과 같은 것입니다. 모세가 놋뱀을 장대에 매단 것은 바로 이 뱀들을 밖으로 다 끄집어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 마지막에 나를 지켜줄 것이라 믿고 있는 뱀이라는 우상들을 드러낼 때에만, 참된 영적인 치유와 회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이 점을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유명한 말씀인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은 호르산에서 곧장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기약 없이 또다시 뒤돌아선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우리를 향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참고 인내하고 기다렸으나, 결국 내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우리 인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셔서 우리를 구원을 얻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과연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40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하며 광야 생활을 했음에도, 또다시 40년의 광야 생활을 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 그리고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전쟁터에서 다행히 작전을 마치고 돌아와 아 이제는 살아났구나 하며 안도한 자에게 다시 포화가 빗발치는 죽음의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가라고 명령을 받았을 때, 과연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 내게 진정성 있게 다가올까요?
그런데 바로 이 순간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뱀을 장대에 달아 하늘로 들어 올리는 것, 즉 자기 초월로 향하는 방법인 것이지요. 우리는 평소에 말씀도 일고 기도도 하고 하지요. 그런데 그것이 효력이 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쌓여서 결국 한 순간, 중요한 모멘텀에 결정이 됩니다. 그 순간은 바로 내가 마음속 깊이 품고 있었던 뱀을 내놓아야 할 때입니다. 나를 살려줄 것이라 믿었던 뱀에게 생각한 바와 달리 오히려 내가 물리게 되어 죽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때는 방법이 없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그 뱀을 내 속에서 끄집어내어서 하늘로 들어 올려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소중한 뱀이셨던 예수님
이것이야 말로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는 것과도 같습니다. 제자들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성공과 승리, 번영을 예수님에게 투영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와 같은 인생 가운데 자신들에게 뱀이 되어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움이 되어주지 못할 망정 역설적으로 그들을 물어 버렸습니다. 수제자 베드로의 경우는 그렇게 하지 말라며 강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에게 이 뱀 사단 새끼야라는 욕을 얻어먹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긴박한 순간, 바로 결정적인 순간이 이르자 사람들은 예수님이 너의 뱀이지 않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질문에 나의 뱀이 아니라며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자신의 진심을 말한 것일 수 있습니다. 나의 뱀이라면 나를 물어버릴 까닭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먼저 배신한게 아닌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 뱀은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한 때 나의 우상이 이제는 나의 수치가 되어서 처참하게 십자가에 매달린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인정하고 골고다 그 언덕으로 나아가 바라보는 것이야 말로 자기 초월의 길로서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깨달아야 했습니다. 바로 그렇게 믿고 있었던 자신의 뱀이었던 예수님이 사실은 거짓된 자신들의 허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장대 위에 높이 올려진 놋뱀처럼 십자가에 높이 들린 자기 자신의 허상을 바라보는 것을 피하면, 결국 애굽이라는 거짓 유토피아에 빠져서 광야의 현실을 부정하며 늘 숨고자 할 것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갈 길만을 찾으며 어둠을 더 선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19절과 20절에 이렇게 말하지요. ‘19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20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풀이하면 이와 같습니다. 심판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주가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빛이 왔지만, 빛을 인정하지 않고 어둠을 더 좋아하고 거기에 머물고 있는 것 자체가 바로 심판이자 저주입니다. 끝까지 자기의 뱀을 내어 놓지 않고 어두운 장막 가운데 살아가다 그 뱀에게 물려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와 놋뱀을 보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고 끝까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어둠 속에서 자기 우상 뱀에게 물려서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 물리는 축복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어차피 뱀에게 물릴 바에 세상 우상이 아니라 예수라는 뱀에게 물리는 게 복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에게 물린 사람은 그 독이 독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뱀의 독이 약이 되는 것처럼, 어둠에 머물지 않고 빛으로 나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우상이라는 뱀에 물리면 사람은 더욱더 어둠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물린 사람은 진리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구절인 2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를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진리를 행한다고 하면, 많은 책을 읽으며 지식을 쌓고 지혜를 가지는 것이나 아니면 의로운 일을 행하며 자선이나 봉사로 남을 돕는 일이라 생각한다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행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께 물리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이 땅이라는 현실 가운데 그토록 믿던 하나님에게 배신당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물리고 하나님께 당해야지만,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배신하거나 거짓말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물었다고 했지만, 사실은 우리가 착각을 한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육으로 거듭난 것과 영으로 거듭난 것을 오해했듯이, 우리는 계속해서 육적인 축복과 영적인 축복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 오해를 바탕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적으로 복을 주는 것을 본다면, 마치 육적으로는 하나님께 배신당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었던 예수님이 나를 물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이 땅에서 십자가로 끌고 가는 것이지요. 그래야지만, 우리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살아가시면서, 천국의 사냥개와 같은 하나님께 물리거나 당했다는 마음이 드십니까? 축복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내가 진리를 행하며 빛 가운데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 세상의 우상이라는 뱀에 물리지 않은 것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길 바랍니다. 헛되고 썩어버릴 세상 우상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물어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파트너로 생각하시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영광입니까? 사실 이렇게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잘 납득이 되진 않지요. 사랑할수록 막대하신다는 것 같잖아요. 독생자 예수님에게도 하나님은 죽게 내버려 두셨지요. 이것을 우리는 쉽게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친구 삼으셔서 사랑하시는 방식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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