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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9장 17-30절 새번역
17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데로 가셨다. 그 곳은 4)히브리 말로 골고다라고 하였다.
18 거기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아서, 예수를 가운데로 하고, 좌우에 세웠다.
19 빌라도는 또한 명패도 써서, 십자가에 붙였다. 그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 라고 썼다.
20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도성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유대 사람이 이 명패를 읽었다. 그것은, 5)히브리 말과 로마 말과 그리스 말로 적혀 있었다.
21 유대 사람들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십시오" 하였으나,
22 빌라도는 "나는 쓸 것을 썼다" 하고 대답하였다.
23 병정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뒤에, 그의 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서, 한 사람이 한 몫씩 차지하였다. 그리고 속옷은 이음새 없이 위에서 아래까지 통째로 짠 것이므로
24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이것은 찢지 말고, 누가 차지할지 제비를 뽑자" 하였다. 이는 6)'그들이 나의 겉옷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다' 하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병정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
25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서 있었다.
26 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27 그 다음에 제자에게는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부터 그 제자는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
28 그 뒤에 예수께서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7)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29 거기에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해면을 그 신 포도주에 듬뿍 적셔서, 우슬초 대에다가 꿰어 예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서, "다 이루었다" 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유일한 상징으로서 십자가
우리 개혁교회는 유일한 상징으로 십자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과 달리 십자가만을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상징으로 남겨두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겠지요. 그래서 십자가 목걸이나 장식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지금은 은근히 자랑으로 여겨지는 십자가가 원래는 모든 사람들이 꺼려하는 표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형벌은 당시 인류가 고안한 가장 끔찍한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극도로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죽음을 늦추어서 서서히 죽게 만드는 너무나 잔인하다 여겨진 형벌입니다. 로마인들도 극단적 경우가 아니면 십자가의 형벌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유대 전통에서도 범죄자를 나무에 달려 죽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죽음이라 여겨질 때 나무에 달아 본을 보인 것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는 신명기 21장 23절 말씀에 이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십자가라는 나무에 달려 죽었다는 것은 받아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운 기독교의 복음의 메시지는 비아냥거림과 냉소거리에 불가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말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십자가는 유일한 진리의 상징이 되었을까요? 이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공생애와 그 사역이 전적으로 십자가에 맞춰져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이 땅에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십자가를 인정하지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복음의 목적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연약한 것일까?
이와 달리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시각은 십자가가 연약함과 추함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며 부끄럽게 여기며 싫어합니다. 철학자 니체의 경우 십자가로 인해 인간의 의지가 나약해지기에 악하다 보았습니다. 십자가가 불러일으키는 공포로 인해 사람들이 노예도덕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저항할 줄 모르는 무능력한 바보의 자기 합리화와 자기변명일 뿐이라 비판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인지,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 중 다수는 자신을 약하게 만드는 십자가가 싫어서 기독교를 떠납니다. 강한 자아로서 나 자신이 스스로 서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인해,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십자가가 부담스러운 짐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중 어떤 이들은 십자가를 생각하면 자신의 실패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가슴이 납덩이처럼 누르듯 답답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말이 화가 난다고 합니다. 결국 자신이 나약해지고 초라해지는 것 같아 교회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연약함이 아닙니다. 십자가로 인해서 자신의 주체성이 약화되었다면, 십자가를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주체적이었기에, 죽음을 건너는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십자가가 연약함으로 느껴진다면, 자신의 연약함이 투사된 것일 뿐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약함은 인간의 어떤 강함보다 더 강력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십자가는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연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이 타의에 의해서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빌라도의 비겁함에 의해서, 둘째는 제사장의 시기에 의해서, 셋째는 가룟 유다의 배신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기를 예수님은 타의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길 선택하셨습니다. 목숨이 위급하다 여겨진 순간 제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유월절 예루살렘행을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몇 차례 예고하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단순히 외적인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향해 나가셨던 것입니다.
자발적 선택과 책임으로서 십자가
따라서 십자가는 니체가 말하는 노예도덕이 아닙니다. 타의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매우 의지적인 자발적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믿을 때에도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는 의무여서는 안 되고,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필연적인 선택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의무로 여기는 사람들은 짐처럼 부담되고 불편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가 부끄러워지는 것입니다. 자기 연약함이 십자가에 투영되기에 싫은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는 우리의 연약함을 들추어냅니다. 십자가는 자신의 죄에 형벌이기도 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나무 위에 매달아 놓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십자가에서 드러난 것은 예수님의 죄가 아니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지키고자 비겁하게 무죄한 예수님을 못 박았고, 가룟 유다는 탐욕과 배신으로 예수님을 못 박았습니다. 우리도 십자가가 부담스러운 것은 내가 십자가를 질만큼 능력이 없음을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인해 드러나는 실존의 한계야 말로 바로 우리의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도 이것을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자신의 비겁함과 과오를 피하기 위해서 손을 씻으며 자신은 책임이 없다며 유대 백성에게 책임을 돌렸습니다. 가룟 유다도 배신한 이후 대가로 받은 은 삼십 세겔을 성전 대제사장을 향해 던져 자신의 실수를 부정하려고 했지만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십자가 앞에서 늘 우리 자신의 한계를 직면한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찬송가 중에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라는 오랜 흑인 영가가 있습니다. 그 질문 거기 네가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우리도 거기에 있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내가 대신 십자가에 달리진 못해도 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유다 백성처럼 군중 심리로 단순히 구경꾼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처럼 사두개인처럼 예수님을 죽이고자 음모를 품고, 계획을 세우고, 배반하고, 흥정하고, 넘겨주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그 모든 일에 가담자로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한 자들에게만,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책임에 대해 자기 몫을 감당할 준비가 된 사람만이 그 은혜에 대한 자신의 몫을 주장하며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자기 한계에 대한 직면과 인정, 그리고 그 상황에 대한 주체적인 결단과 선택, 그리고 그에 따르는 책임과 행동을 반드시 수반합니다. 이 점을 생각하지 않고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가 아닌 십자가 뒤에 있는 면책과 은혜만을 누리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니체가 비난한 노예도덕으로서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고, 자기 책임을 면죄받기 위해 수단으로써 이용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유월절 성만찬
따라서 십자가가 현실 도피나 책임 회피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있었던 세 가지 사건을 돌아보도록 합시다. 첫 번째 유월절 성만찬 사건입니다. 잡히시던 밤 제자들과 떡과 포도주를 나누신, 우리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예식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으로 여겨지는 떡과 피로 여겨지는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우리가 삶 속에서 계속해서 상기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있어서 우리가 감당할 책임과 행동이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만찬에서 주신 떡과 포도주를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어린양이 되어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이 갱신되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옛 언약이 아니라 새 언약이라 말하는 것은 돌이나 문서에 조문으로 기록한 외적이거나 형식적인 규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안으로 가져와 새겨놓은 내적인 규례로서,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통해 먹고 마신다는 것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내면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내면화되지 않은 십자가는 또 다른 우상일 뿐 진정한 십자가가 아닙니다. 외면화 된 규례에 따른 책임이라면 결국 종처럼 억지로 시켜서 하는 행동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두 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동산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사건을 오해하는 것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피하고 싶었다고 해석하거나, 강요에 의해서 죽임 당하신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자신의 목숨을 구걸한 것이라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격한 감정을 토로하신 것은 바로 자신 역시 십자가를 더욱 깊이 받아들이고 내면화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슬픔이나 두려움으로만 사로잡히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원한대로 피할 수 있지만, 아버지의 원함이기에 선택한다는 자신의 의지적인 행동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엄중함, 심지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버려질 것에 대한 그 십자가의 무게에 대해 직면하고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깨닫기 위해 살펴볼 장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절규하실 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면서 하늘을 뒤덮고 있는 흑암 속에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의 이 외침은 인간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친히 감당하신 예수님은 그 순간 자신의 영혼조차도 하나님에게 철저히 버림을 당하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인 칼뱅은 이 장면을 주해하면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육신만이 죽지 않고 그분의 영혼까지도 죽으셨다 말합니다. 예수님의 육신만 죽으셨다면, 그 죽음은 유효한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그 고통스러운 분리를 통해서 영혼마저 찢어지는 것을 경험하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가 무게가 얼마나 큰 지를 말해줍니다. 십자가는 두 개의 나무 기둥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성인 남자를 몇 날 며칠 달아 놓기 위해서는 튼튼해야 하기에, 가로 세로 합쳐서 100kg까지도 나갔다고 합니다. 사실 이 정도 무게라면 보통 사람이 짊어지고 가기에는 벅찹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 십자가의 무게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에 무게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조롱과 수치, 살결이 찌져저 피가 쏟아져 내리는 고통의 무게를 감당하셨습니다.
이 무게가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십자가가 왜 필요했는가 반문하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우리 인간의 한계와 연약함, 즉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이 얼마나 지독한지를 쉽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들을 하지요. 어차피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려면, 하나님이 그냥 무조건 용서하면 되지, 왜 그렇게까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극심한 고통이 따르는 십자가의 형벌로 감당하게 하셨는지 의문을 가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도 모르고 사랑도 모르며, 그리고 인간의 추악한 죄성을 간과한 무지에서 온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사람들이 죄의 심각성이나 십자가의 무게를 언급하길 꺼려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선택하고 감당해야 하는 책임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랍비가 이런 질문을 하나님께 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불행합니다. 이것은 몹시 불공평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하나님은 그 랍비를 꿈에서 요단강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이 요단강은 평소의 알고 있었던 요단강이 아니라 죽은 다음 이승과 저승을 건너는 그 강이었습니다. 랍비가 보니 사람들이 저마다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강을 건너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랍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들이 지고 온 십자가의 무게를 달아보아라." 랍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강을 건넌 사람들의 십자가를 모두 달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자신의 생각과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바로 큰 십자가도 아주 작은 십자가도 그 무게가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당황해하는 랍비를 하나님이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십자가를 줄 때, 누구한테나 똑같은 십자가를 준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웃으면서 가볍게 살고,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워하면서 쇠덩어리처럼 무겁게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은 결국 십자가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무게가 상대의 삶의 무게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비교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이 비교의 마음은 사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이 감당하신 십자가의 무게조차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기에, 자신의 십자가마저도 가볍게 여기다가 큰코다치는 것입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자유인이 아닌 종처럼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가며 그 무게에 짓눌려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책임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이 자유의지를 통해 에덴동산을 가꾸며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자유의지를 통해서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바를 무시한 채 하나님처럼 되고자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다른 책임을 지고자 한 것입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여 알게 되는 책임을 지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선과 악을 온전히 구분하여 그에 따라 한치에 오차도 없이 판단하는 심판관이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감당하실 수 있는 책임을 인간이 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먹은 이후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포기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래야지 선과 악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본성적으로 자유인이 아니라 종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이 죄의 대가를 스스로 치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그 책임을 바로 예수님이 모두 치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선과 악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 벗어난 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선과 악에 대한 책임이 사라진 이후에 우리가 마땅히 져야 할 몫이 남아 있습니다. 예전에 악이라 여기며 지기 싫어했던 인생의 짐입니다. 그리고 막연히 좋을 것이라 여겼지만 그렇지 않은 나의 인생 그 자체의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가진 자유의지를 온전히 사용하여서 신중히 선택하고 그에 따른 책임과 행동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나의 자유의지를 벗어나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에 따른 결과로 생겨나는 선과 악에 대한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며 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기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때론 이런 생각을 합니다. 처음 믿었던 때와 달리 요즘에는 십자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 않아. 내가 뭔가 문제일까? 신앙이 뜨거울 때에는 십자가를 생각하며 눈물도 흘리고 예수님의 고통도 공감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런 마음이 많이 사라짐을 느낍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왜 지셨는지 와 닫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 십자가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묻기도 합니다. 특별히 세상을 살아가면서 십자가의 삶을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것이 정말 필요하고 참된 길인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오늘 성금요 예배 때, 우리가 다시 눈물을 흘리거나 예수님의 고통을 느끼는 식의 감성적인 접근은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일시적인 감정은 진정한 깨달음을 줄 수 없고 진리로 우리를 이끌지 못하기에 의미 없습니다. 사실 기독교는, 그리고 성경은 늘 십자가를 증언하기에,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고난 주간만이 아니라 사순절만이 아니라 우리는 매번 십자가를 묵상합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면 할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알게 해 주며, 우리 자신의 한계와 죄성을 처절하게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은 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있지 않는가? 혹시 책임 회피나 현실 도피를 하지 않았는가 돌아봅시다. 우리가 치열하게 삶을 살아간다면, 십자가의 무게는 제대로 느껴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감당하신 고통도 어쩌면 제대로 느껴질지 모릅니다. 감정은 사실 뒤따라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뿐만 아니라 마땅히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거추장스러운 걸림돌 어리석게 보지 않고,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붙잡고 끝까지 나아갑시다. 그럴 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확실하게 경험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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