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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 19절-31절 새번역
19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21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7 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28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29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30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31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쌍둥이 디두모 도마
오늘 본문은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의심 많은 제자라 불리는데요. 사실 도마만이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한 게 아닙니다. 제자 모두가 그랬습니다. 도마만이 의심자라 몰리는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사실 당시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부활은 누구나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영혼만이 아니라 그 육신이 부활하셨다는 것, 즉 그 몸에 창자국이 있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었으며, 후에는 물고기와 떡으로 식사도 드셨다는 것이 오늘 과학적 기준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부활하신 육신의 몸이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일은 더 상식 밖의 일입니다. 제자들이 문을 닫고 있었음에도, 그 가운데 갑작스럽게 나타나시는 장면은 도저히 우리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도마의 의심은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어쩌면 다른 제자들보다 용기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정직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외에도 요한복음에 도마가 등장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시고자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할 때, 제자들이 두려워하며 머뭇거리자 도마가 솔직하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며 나서는 순간입니다. 당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한 말이라 해석할 수 있지만, 어쨌든 이 말을 보더라도 도마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 매우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인 듯합니다.
도마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란이 많았습니다. 성경은 도마를 소개할 때, 쌍둥이라 불리는 도마라 말합니다. 도마란 이름이 원래 아람어로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쌍둥이 동생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요한복음에서 사랑하는 제자라 불리는 제자 요한의 쌍둥이 동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이 정도로 가까운 형제라면 성경은 반드시 언급했을 것입니다. 도마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불분명하지만, 도마는 제자 중 그 행적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하지요. 실제로 인도 동남부 첸나이에 가면 도마 교회가 있습니다. 시리아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도마는 인도 케랄라 지역에 일곱 교회를 세운 뒤 결국 72년에 인도 밀라포르에서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도마가 제자 도마인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습니다.
도마를 영어로 하면 토마스입니다. 토마스는 히브리어로 톰이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톰은 온전하다, 정직하다는 뜻입니다. 온전하다, 정직하다는 말을 사람에 대한 수식으로 사용되기도 하는데요. 구약의 인물 중 단 두 명에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과 욥입니다. 아마도 도마의 부모가 자신의 자녀가 아브라함이나 욥과 같이 온전하고 정직한 자가 되길 바라며 이름을 붙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름이란 게 그 사람의 성격을 대변하기도 하잖아요. 따라서 이름의 뜻으로 유추해서 생각해 본다면, 도마는 다른 제자들보다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앞서 살펴본 것처럼 매우 솔직하고 정직한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렇게 너무 솔직하면 불신의 모습으로 비치기도 합니다. 믿지 못하는 심정을 그대로 표현해서 그럴 것입니다. 따라서 오랜 시간 동안 도마는 불신의 아이콘으로 여겨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에게 솔직했던 도마는 억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오늘 본문으로 가봅시다. 예수님이 의심하던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옆구리에 난 상처에 손을 넣어 보라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후에 도마가 손을 넣었는지 넣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중요한 게 아닙니다만 오랫동안 논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가톨릭과 개신교는 차이를 보입니다. 가톨릭의 경우 진짜 만졌다고 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살아있는 육신임을 강조했습니다. 화체설이라 해서,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가 진짜 예수님의 피와 살이라고 주장하는데 인용합니다. 반대로 우리 개신교 전통은 도마가 만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신칭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본문으로 인용하고자 한 것입니다. 도마가 눈으로 보기는 했지만, 결국 믿음으로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댄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자 교리적으로 강조하는 포인트가 다른 것입니다.
복음관상기도라는 영성훈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와 관련된 말씀을 읽고, 상상력을 통해서 그 장면을 떠올리며 제삼자가 되어서 관찰하든지 아니면 연극처럼 등장인물이 되어서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가지고 이 기도를 몇 차례 해본 적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 도마가 되어서 본문 안으로 들어갔는데요. 네 손가락을 내밀어서 내 몸에 난 상처에 손을 넣어보아라는 말씀에 따라 제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첫 번째 기도에는 손을 넣어 보았어요. 어떻게 보면 겁도 없이 손을 찔러보았는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실 아무 반응이 없지요.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몇 년이 지나서 같은 본문으로 기도를 했는데, 그때에는 손을 데려고 하는데 댈 수가 없더라고요. 예전에 생각이 나면서 상처에 손을 데면 덧나는데, 내가 못할 짓을 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지켜만 보고 있다가 기도에서 나온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본문을 가지고 기도하셨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이 본문으로 복음관상기도를 해본 몇 사람에게 물어보니 각자 다르더라고요. 어떤 사람은 호기심에 찔러보는 사람이 있고요. 반대로 쉽사리 손을 데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것으로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말하는 분도 있어요. 친하면 손을 댈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손을 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자의적인 해석이고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듯해요. 그런데, 제가 드렸던 두 번의 기도, 손을 댈 때와 대지 않을 때 두 번의 경우를 돌아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에수님의 성흔이죠. 몸에 난 상처가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오랜 시간 집중해야지 그 상처를 제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상처가 저에게는 큰 부담감이었던 것 같아요. 일종의 죄책감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그리고 예수님의 상처가 저의 상처처럼 여겨져서 수치감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따라서 기도를 하면 할수록 죄책감과 수치감으로 얼룩진 상처에 손을 댄다는 게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보고 믿는 믿음 VS 보지 않고 믿는 믿음
사실 도마가 손으로 만졌는지 만지지 않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 핵심은 도마가 의심을 했고, 그 의심의 과정 속에서 예수님의 몸에 난 거룩한 상처인 성흔을 마주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심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의심했기에 그 상처와 마주 하며 볼 수 있었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만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의심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의심이 없었다면, 도마는 믿음의 길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도마는 의심했기에 다른 제자들과 달리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만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한 후 진정으로 나의 주님이라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의심은 일종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회의하고 그 몸에 난 상처에 대해서 의심하고 하는 과정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도마의 고백이 있은 이후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지요.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씀으로 인해 사람들은 도마의 의심을 부정적으로 보며, 도마의 고백을 낮추어 평가합니다. 안 그래도 의심이 많은 것도 문제인데, 보고 믿었기에, 도마의 믿음은 낮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보다로 사용된 동사가 시제가 다릅니다. 앞에서 보아서 믿는다고 했을 때보다는 완료 시제고, 안 보고 믿는다에서 안보다의 동사는 진행형 시제입니다. 이렇게 시제를 구분한 까닭은 믿음이 두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믿음은 보고 믿는 것과 안보고 믿는 것 두 가지 중 하나만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믿음은 보고 믿는 것으로 시작해서 안보고 믿는 것으로 나아가, 결국 믿음의 단계가 더 깊어져야 한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그렇다면 보고 믿는 것과 안보고 믿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우선 사람이 보지 않고 믿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맹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맹신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이 필요합니다. 보는 방법을 바꾸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야 말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하겠지요. 이 눈은 사실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습니다. 바로 육의 눈이 아닌 영의 눈입니다.
영지를 그리스어로 하면 그노시스라 해서 알다, 즉 지식이란 뜻이 있습니다. 안다는 것은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외부에 있는 것을 아는 것이 있고요. 그리고 그 외부의 대상이 내 삶의 일부로 들어와서 친숙해져서 내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외부의 경험이 아닌 내부의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노시스는 바로 내부의 경험으로서의 앎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말씀이나 기도를 반복하지요. 이 반복을 통해서 상기하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외부에서 경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부 경험으로 끌어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외부의 경험이 내부의 경험이 되면, 외부에서 경험했을 때와 달리 내부에서 보이는 것들이 생깁니다.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체험하고 알아가는 것입니다.
영지는 바로 후자의 앎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단어 중 지식을 뜻하는 야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야다도 내부 경험으로서의 앎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안다고 했을 때에도, 그 안다는 것이 내적인 관계가 깊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 전통에서는 진정한 앎은 야다로서의 앎, 즉 내적인 지식이 중요하다 여겼습니다. 이렇게 내적인 앎이 될 때에만,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지행합일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여겼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참된 앎은 외부의 경험이 아니라 내적인 경험이 될 때 얻어진다고 본 것입니다.
비나בִינָה와 호크마חָכְמָה
히브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앎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지식을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분석하고 식별하는 지식인 비나בִינָה와, 또 다른 하나는 직관적인 지식인 호크마חָכְמָה입니다. 비나는 논리적인 추론의 과정을 거친 앎이고, 호크마는 한 번에 주어지는 앎으로, 지혜라고 부릅니다. 참된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비나와 호크마 둘 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순서가 있습니다. 외부의 경험을 내부의 경험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추론과 분석과 같은 비나의 과정을 계속 진행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이 수련과도 같습니다. 인내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반복하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계속해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호크마, 즉 지혜가 딱 주어지듯 생겨나게 됩니다. 일종의 깨달음과 같은 것입니다.
호크마는 어디에서 떨어져 내려온 듯하나 사실은 내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모르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발견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지혜는 내 안에서 나온 것이기에,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합니다. 무엇보다 내 안에 있는 나의 참모습, 즉 이전에 알지 못했던 내가 누구인지를 새롭게 깨닫게 해 줍니다. 외부의 경험을 내부의 경험으로 끌어오는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이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외부의 경험을 내부의 경험으로 끌어오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앞서 언급했던 도마의 의심처럼, 논리적인 추론과 분석을 반복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기도라 말씀드릴 수 있겠지요. 기도를 통해서 나의 내면으로 몰입하는 과정을 반복해서 진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도라는 게 뭔가 종교적인 형식이나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성경을 읽는다든지, 아니면 좋은 책을 읽는 것도 됩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일기를 쓰기도 하지요. 자신의 삶에 대해서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입니다. 거시적인 것보다는 미시적인 것이지요. 나를 둘러싼 이 세상의 모든 작고 연약한 것들을 소중하게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상처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분석한다고 해서,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기에, 오히려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을 먼저 살피고,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보듬고 위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태도를 갖추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과정 끝에 불현듯 깨닫게 되는 참된 나 자신도 뭔가 대단한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다가 보이는 것이기에, 물론 영적인 것이라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에 내놓아 겉으로 보기에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입니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로서 이 땅에 와서 내가 마땅히 감당하고 살아가는 나의 삶과 존재 그 자체인 것이지요. 따라서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을 가치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크고 작든지, 하나님이 주신 뜻으로 여기며 그것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된 나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다고 해서 이 땅에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새로워진 것은 내 마음이지 외부의 다른 무엇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뭔가를 바꾸고 싶다면 작은 것부터라도 하나씩 하나씩 꾸준히 해나가면 됩니다. 그치지 않고 반복하면 결국 내 마음도 바뀌고 외부의 환경도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도마복음
도마복음이라고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위경이라 거리감이 있을 수 있지만, 도마복음을 마냥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의 초기 어록과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잘 아는 일반적인 복음서와 달리 이야기식으로 전개되는 구조가 아니라 백개가 넘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록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 어록들이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과 매우 유사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전해줍니다. 그중에서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한 가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도마복음 어록 중 19번째 말씀입니다. “자신이 존재하기 전에 존재하는 자는 복이 있다. 만약 너희들이 나의 제자가 되고 나의 말이 듣는다면, 이 돌들이 너희들을 섬길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천국에 여름이든 겨울이든 잎이 떨어지지 않는 다섯 그루의 나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아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내용을 보시니 난해하지요. 기존 복음서와 비슷한 문장도 보이실 것입니다. 그 중 존재하기 전에 존재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주목해 봅시다. 존재하기 전에 존재했다는 것은 태어나기 전, 즉 육신 이전에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와 유사한 말씀이 복음서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58절과 59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돌을 들어서 예수를 치려고 하였다.” 도마복음 말씀과 비교하면 이렇습니다. 존재하기 전에 존재하는 자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는 말씀과 대응되고요. 그리고 돌들이 너희들을 섬길 것이라는 말씀은 반대로 사람들이 돌을 들어서 예수님을 치려고 한 것과 연결됩니다.
존재하기 전에 존재한다는 말은 사실 히브리 사람들의 신관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조상인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본 뒤,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보잖아요. 그때 하나님은 자신을 에고 에미미, 내가 있다고 말씀하셨죠. 이것이 히브리어로 하면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אֶֽהְיֶה אֲשֶׁר אֶֽהְיֶה 입니다. 여기서 있다, 되다라고 번역되는 존재 동사의 시제가 단순 미래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직역을 하면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나는 무엇이든 될 것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시간과 환경에 영향 받지 않고 초월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바로 존재하기 전에 존재하는 분이시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실 때, 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를 신약의 언어인 그리스어로 에고 에이미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도마복음에서는 예수님 자신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것을 깨닫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존재하기 전에 존재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지요. 이 말씀은 우리가 영적으로 육체 이전에 존재했다는 말도 되지만, 육체로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내게 주어진 것이 있으며, 그것을 내 안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본성, 즉 영혼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앞서 말한 지혜인 호크마인 것입니다.
그런데 대게 사람들은 내가 영혼이 있다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지요. 그래서 육신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있다는 것을 모르기에, 죄책감도 없고 수치심도 없는 것입니다. 육체의 본성을 따라서 짐승처럼 살아가는 인생이 많은 것입니다. 겉으로는 문제가 없고 괜찮은 듯 보이지만, 결국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가다가 그 인생을 허비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영혼이 있음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인생을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도마복음에 따르면, 이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돌들의 섬김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돌들이 섬긴다는 것을 도마복음과 유사한 본문으로 말씀드린 요한복음 8장 말씀과 연결 지어 보면, 예수님이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돌을 들어서 예수님을 치려고 한 장면을 떠 올릴 수 있습니다. 즉 자신 안에 영혼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돌로 세례를 받는 것처럼 세상에서 박해와 핍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다섯 개의 나무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지요.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그런 우리에게 천국에서 여름이든 겨울이든 잎이 떨어지지 않는 다섯 개의 나무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천국의 다섯 개의 나무야 말로 진리를 깨달아 참된 나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는 자가 누리는 유일한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다섯 개의 나무가 무엇일까요? 이 다섯 나무는 당시 근동 고대인이 생각한 천국의 이상향과 관련이 있습니다. 세계의 7대 불가사의라 하지요. 당시 인류가 만든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 바벨론의 공중정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바벨론의 공중정원을 가리켜서 파라디조라 했습니다. 영어로 하면 패러다이스, 즉 천국입니다. 바벨론 공중 정원에는 바벨론이 식민 통치한 각 지역을 대표하는 다섯 개의 큰 나무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나무를 잘 키워서 계절 별로 나오는 열매를 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섯 개의 나무는 영원히 풍요로운 낙원의 삶을 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초기 기독교 교부 중에서 알레고리적 성서 해석으로 유명한 오리게네스는 이 다섯 그루의 나무가 우리 인간의 다섯 가지 영혼의 작용이라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나무는 생각을 뜻하는 사고의 나무, 두 번째 나무는 감정을 느끼는 감성의 나무, 세 번째 나무는 숙고하는 관상의 나무, 네 번째는 무엇인가를 깨달아 알아가는 지성의 나무, 마지막 다섯 번째는 추론하고 분별하는 이성의 나무라고 했습니다. 이 다섯 나무가 창조 이전부터 천국에 있어 왔다는 것이고, 그 나무가 다름 아닌 우리 내부 영혼 안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 사실을 깨달아 아는 사람은 이 다섯 나무로부터 사시사철 끊임없이 잎이 시들지 않고 풍성한 열매를 먹고 누린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다섯 나무는 창세기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 옆에 위치하여 우리를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나무 실과가 아닐까요? 그리고 시편 1편 복 있는 사람이 누리는 삶을 그려놓은 이미지, 즉 시냇가의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이 마르지 아니함과 같도다 하는 말씀과도 같은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누리는 복이 무엇일까요? 세상의 복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름 아닌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신 영혼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내 안에 있는 영혼을 잘 가꾸어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바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요. 우리 영혼 안에 있는 천국의 다섯 나무가 있음을 믿고, 그것을 매일마다 가꾸어 나가며, 때마다 주어진 영적인 열매를 맛보며 누리는 삶이 복되다고 한 것입니다. 진리에 이르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영혼의 일을 꾸준히 행하시길 축복합니다.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작은 일입니다. 일상에서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시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사명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가운데 나의 삶을 돌아보면서 내 안에 영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영적인 존재로 동물과 다르다. 동물이 아니라 한 인격으로 살아가게 하는 선한 양심을 따라 나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으로 생겨난 잘못된 죄책감이나 수치심이 아닙니다. 나의 삶과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 대한 건강한 책임감으로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참된 영적인 복을 누리시는 모두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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