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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장 13~22절
13 유대 사람의 유월절이 가까워져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14 그는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걷어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7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18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20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에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구요?"
21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그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서,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가나 혼인 잔치의 항아리
오늘 본문은 성전청결사건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말씀입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공생애 후반 십자가 사건 직전에 있었던 일로 기록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공생애 초기 가나의 혼인 잔치 바로 뒤에 있었던 비교적 공생애 초기에 있었던 사건으로 기록합니다. 요한복음을 기준으로 본다면 이러한 본문 위치로 인해, 성전청결사건은 가나 혼인 잔치의 말씀과 연속성에서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듯합니다. 그럼 간략하게 가나 혼인 잔치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가나 혼인 잔치는 요한복음에 나온 첫 번째 기적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놀라운 기적으로 인해 가려질 수 있는 이 사건의 핵심은 사실 유대교의 형식주의와 율법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물이 포도주로 변한 곳인 항아리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 집 마당에 여섯 개의 항아리가 있었다고 하지요. 이 항아리들은 모세 율법의 해석인 장로의 유전으로 알려진 미쉬나를 상징합니다.
유대교에는 토라, 미쉬나, 탈무드 모두 세 가지의 중요한 경전이 있습니다. 모세 오경인 토라를 해석하여 일상생활의 가르침을 담은 율법서를 미쉬나라고 부릅니다. 농사, 안식일과 명절, 결혼이나 이혼, 민형사법과 식사와 정결과 관련된 여섯 가지의 일상 영역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여섯 개의 돌 항아리는 바로 미쉬나의 여섯 가지 주제를 상징합니다. 6개의 주제에 따라 63개의 소단위 항목에 524개의 장으로 이루어졌는데,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토세프타라고 해서 추가적인 세부 지침이 늘어나면, 지켜야 할 율법의 양이 늘어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계속 추가할 수 있었는데, 이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처럼 해석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종종 힘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장치로 악용되기도 하고, 반대로 힘없는 자들에게는 감당 못할 큰 짐이 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가 지나치게 형식화되고 율법화된 것이 바로 미쉬나의 영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비워진 항아리는 율법의 참 뜻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미쉬나의 위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혼인 잔치도 바로 회칠한 무덤처럼 참된 진리와 기쁨이 사라진 율법으로 짓눌린 당시 시대의 사람들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은 비워진 항아리에 물을 채워 새포도주로 변화시켜서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기쁨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느끼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제사 의무
이렇게 가나 혼인 잔치의 사건이 일어난 다음, 때마침 유월절이 다가오게 되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게 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 남자들은 매년 3번, 3대 절기인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마다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부근 20마일 이내의 사람들은 반드시 3번 방문해야 했고, 팔레스타인 전역의 유대인들도 최소한 유월절 한 번은 예루살렘을 방문해야 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의 경우 어느 땅에 머물든지 적어도 생애 한 번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절기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경우 일 년에 한 차례는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유월절에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3차례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학자 예레미야스는 유월절의 경우 예루살렘에 모여든 순례자 숫자가 대략 12만 5천에서 15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측합니다. 아마 장정들의 숫자일 가능성이 높고, 여자와 아이들과 노인들까지 합치면 수십만에 이르는 규모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라 대부분 예루살렘 성밖에 천막을 치고 유숙을 했습니다. 이들이 유월절에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양의 숫자만 약 25만 마리에 달했을 것으로 보아, 당시 시대의 규모로는 실로 큰 규모였을 것입니다.
성인 남자들이 제사를 지내려 성전에 들어올 때는 속전이라 불리는 성전 세를 내야 했습니다. 성전세로 은 반 세켈Shekel을 내게 되어있는데, 반 세켈은 당시 노동자의 이틀 치 임금에 해당하는 돈으로 약 2 데나리온 정도 됩니다. 그런데 데나리온은 로마의 화폐로 황제의 얼굴을 새겨져 있었기에, 하나님께 드리기에는 불경하다 여겨져 성전에서 사용되는 세켈로 돈을 받도록 했습니다. 당연히 돈을 환전해야 했는데, 환전 수수료가 20%를 넘었다고 합니다. 이 수익이 고스란히 대제사장들의 손에 들어가, 당시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유대 종교기득권자들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제사에 사용되는 동물은 결점이나 흠이 없고 완전해야 했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전 희생 제물을 심사하도록 했는데, 바칠 제물에 대한 심사비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심사비도 문제이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 누구도 이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고 거부당했습니다. 거부한 이유는 제사의 바칠 제물을 성전 안에서 구매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제물로 드려지는 비둘기, 염소, 양과 같은 동물들을 일반적인 가격보다 몇 배 비싸게 팔아 부당한 수익을 올리고자 한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사를 지내는 것은 매우 부담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의무를 행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종교가 행사하는 폭력입니다. 율법이라는 기준을 정해놓고 그 기준에 못 미친다면 저주받았다고 해버리는 공갈 협박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마케팅 기법과도 비슷합니다. 뭔가 비교 우위를 정해 놓고 내가 제안하는 것을 사면 너도 우월해질 거라 암시하는 것입니다. 만약 거부한다면, 너는 열등한 채로 남아 있을 것이라 은연중 무시하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 상대를 내 의사에 따라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정결법 논쟁
율법으로 정죄하는 문제와 관련해 생각해 볼 성경 본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바리새인과 많이 논쟁하셨는데, 그중 가장 큰 이슈였던 정결법에 관한 문제입니다. 당시 고위직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부터 갈릴리로 찾아왔습니다. 와서 보니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문제이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실부터가 문제였습니다. 특히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먹었습니다. 미쉬나에 따른 장로의 유전에 의하면 정결법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손 씻음을 히브리어로 하면 네틸라트 야다임이라고 해서 출애굽기 30장 19절에 따른 율법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물로 그들의 손과 발을 씻을 것이다.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물로 씻어야 죽지 않는다. 그들이 나 주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려고 제단으로 가까이 갈 때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 원래 토라의 손 씻기 규례는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제사를 지낼 때 행해야 할 율법이었습니다. 성전 물두멍에는 나틸라라는 도구가 있는데, 큰 국자 같은 것입니다. 이것으로 물을 떠서 손을 씻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미쉬나에서는 일상생활에 적용했습니다. 손 씻기와 관련된 많은 규칙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4가지는 반드시 지키도록 했습니다. 식사하기 전과 후에 손을 씻기, 기도하기 전에 손 씻기, 제사장이 축복하기 전에 손 씻기, 자고 나서 일어난 다음 손 씻기입니다. 이 4가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식사하기 전 후에 손 씻기입니다. 왜냐하면 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먹는 것은 근동 아시아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아랍 사람들은 할랄이라고 하고, 유대인들은 코셔라고 하지요. 이것은 자신들의 정체성과도 같습니다. 예를 들어 돼지고기를 먹으면 지옥에 간다라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있습니다. 특히 손을 씻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더러운 죄악들이 음식과 함께 입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음식이 아무리 정결해도 손이 부정하면, 다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 엄격하게 이어졌는데요. 따라서 유대인들은 손 씻기에 강박관념이 있습니다. 최소한 하루에 9번은 손을 씻고요. 한번 씻을 때에도 3번 이상은 씻어야 합니다. 물론 손 씻기와 같은 정결규례가 위생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친 것은 맞습니다. 예를 들어 중세 시대에 흑사병이 유행할 때, 유대인 집단 지역에는 비교적 양호했다고 하지요. 이게 유대인들이 손 씻기를 워낙 철저하게 한 것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다른 인종들에 비해서 청결하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유대우월론적 사고입니다. 유대인의 손 씻기에 대한 강박관념을 지적하며, 오히려 위생적 손 씻기가 아닌 종교적 손 씻기에 집착한다고 비판받습니다.
포네라πονηρά, 코이노오κοινόω
손 씻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명쾌합니다. 제자들을 비난하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지요. 마가복음 7장 23절이지요.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육적으로 보자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맞지요.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반대라는 것입니다. 죄는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실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두 가지 표현인데 먼저 악이라는 말과 더럽힌다는 말입니다. 원래 그리스어로 악은 일반적으로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궁술에 비교하여 악이란 과녁에서 벗어난 것으로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악을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가 아니라 포네라πονηρά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근심이나 고통을 뜻하는 포노스πόνος에서 왔습니다. 근심과 고통을 지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고통을 내가 지고자 한 것이 아니라 남이 지운 것입니다. 따라서 하마르티아가 자발적인 죄라면, 포네라는 타의적인 죄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강제적으로 자신이 져야 할 짐을 떠넘기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악을 포네라πονηρά라고 했을 때, 자발적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에게 부과하여 억지로 한 것은 다 악한 것이 됩니다. 이것을 정결법 논쟁에 적용하자면, 누군가 교리나 율법으로 부과한 것은 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 왜 남이 강요한 것을 하는 것이 악이 될까요? 남이 강요한 것은 나에게 마음속으로 우러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시킨 것을 따라 하게 되면, 나라는 정체성이 사라져 버립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우리 인생 각자에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더럽게 한다는 동사의 경우 그리스어로 코이노오κοινόω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더럽게 하다는 뜻도 있지만, 원래의 의미는 공유하다, 공동으로 사용하다, 일반화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같이 함께 사용하는 물건일수록 빨리 더러워지고 망가지잖아요.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 온 듯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포네라πονηρά와 연결 지어 생각해 봅시다. 남의 강요와 억압에 의해서 자신의 개성을 잃어버리고, 흔히 볼 수 있고 다 똑같이 되어버린 것은 타락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더러운 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동의하지 않은 것을 억지로 할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발적이지 않고 기쁨으로 하지 않는 것은 결국 괴로움이고 나 자신을 속이는 위선이라는 죄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더럽게 하는 것이고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거룩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나의 내면에서 내가 정말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신명 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인 신명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사와 달리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유 의지이죠. 기계적으로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판단하고 선택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더 큰 죄를 저지르는데, 우리 스스로가 자유 의지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각자의 고유성을 망각한 채, 세상이 부여한 기준이나 남들의 시선과 강요에 길들여져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이 만든 율법을 어기는 것보다 더 악한 것입니다.
율법의 참된 목적
이 점은 율법의 참 의도와도 연결됩니다. 인생은 마치 항해와도 같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저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 있을 항구로 가는 것입니다. 목적지로 안전하게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지도입니다. 만약 지도가 없다면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거나 암초를 만나 좌초하게 됩니다. 그런데, 율법이 무엇입니까? 지도와 같습니다. 여러 믿음의 선진들이 자신의 경험과 깨달음을 성령의 감동감화를 통해 다음 세대에 전달한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이 성경을 따라 인생을 항해하면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율법 토라는 히브리어 야라יראה라는 명사에서 왔습니다. 야라יראה는 궁수가 과녁에 화살을 쏴서 명중시키는 것을 묘사한 말입니다. 명중된 지식만이 참 지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토라는 그 율법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인생의 과녁에 화살을 명중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내가 가고자 하는 항구인 도달할 수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지도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무지가 아닙니다. 토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무지입니다. 그런데 이 무지가 가장 큰 악이 됩니다. 그리고 지도를 알더라도 지도로 가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오만해지면 이렇게 어리석어집니다. 지혜로운 듯 보이나 실상은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합니다.
시편 19편 7절 말씀에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의 교훈은 완전하여서 사람에게 생기를 북돋우어 주고, 주님의 증거는 참되어서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준다.’ 한마디로 율법은 사람을 살리고, 그리고 깨우쳐 온전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각자 인생들 한 영혼 한 영혼에 말씀이 담기게 되면, 우리의 영혼이 소생케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타나는 특징이 뭐냐면, 바로 인생에 갈 길을 알지 못하는 나에게 마땅히 내가 가야 하는 길을 알려주어 그 길로 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바로 율법의 참된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예수님은 바로 이 율법을 대표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이러한 근본적인 목적을 상실하여, 오히려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주범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전정화사건 또는 성전청결사건으로 주로 지칭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성전을 청소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손 씻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다른 것에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하게 정화해서 다시 사용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정화라는 말은 더러워지긴 했어도, 본질이 변하지 않았기에 그 부분만 제거하고 깨끗이 청소하면 예전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폐지는 역할이 끝났다는 것이지요. 성전이 폐지되었다는 것은 이제는 더는 성전이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기에, 성전 제사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선언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강하게 말하자면, 예루살렘 성전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증거가 바로 19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지요. “이 성전을 헐라!”
이런 이유로 성전정화사건이 아니라 성전해체사건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집이었다면, 아마도 미쉬나를 뜻하는 여섯 항아리를 다 깨어 부서뜨렸을 것입니다. 제대로 역할을 하지 않는 항아리나 성전이나 모두 다 쓸모없는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처럼 성전에 대해서 해체하고자 선언 한 선지자가 있습니다.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는 어느 날 성전 문 앞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예레미야는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고위 제사장, 권력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온갖 불의와 가난한 자와 과부들에 대한 압제, 무고한 자의 피 흘림과 우상숭배, 도둑질, 간음을 그렇게 고발했습니다. 그들의 죄를 무조건 덮어주는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이 있는데 말라기입니다. 그 역시 타락하여 탐욕과 거짓과 불의가 가득한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드리는 예배에 대해 아예 성전 문을 닫으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예배를 받으실 리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말라기 때만 해도 예수님 시대만큼 타락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전의 본질적 기능은 작동하였고, 어떻게 보면 필요한 것은 성전정화였지 성전 해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성전은 정화의 대상이 아닌 해체의 대상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때, 곧 성전 해체의 때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나 말라기 선지자가 외친 성전 해체의 메시지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말한 대로, 남들이 말하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말하는 그런 거짓말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차원의 예배는 타인에게 의해 강요되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제사가 아닙니다. 나의 자유의지에 따른 나의 선택으로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나만의 고유성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성전해체사건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감히 생각지도 못할 불경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제사를 지낼 제물인 양과 소와 비둘기를 내쫓으시고, 환전상들의 돈과 상을 둘러엎으셨습니다. 장사치들을 향해, 이것을 걷어치워라 하시며,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감히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일을 하셨습니다. 만약 누군가 이렇게 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당하게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공포 마케팅 전략에 당해 떠밀리듯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고유성으로 스스로 선택한 거룩한 실존적 행동을 통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해체시키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의 성전을 세우기
예수님의 행동을 보자 사람들이 웅성웅성 되며 수군거렸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보니, 분명 뭔가 대단한 사람인 듯한데, 그렇다면 당신 자신을 증명할 표징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타인의 강요가 아닌 자기 자신의 삶으로 살아갈 경우 세상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너 스스로 너 자신을 증명해라고 하지요. 세상이 알아볼 수 있는 표적이라는 방식으로 너 자신이 대단한 사람임을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비아냥일 수 있습니다. 뭔가 영웅이 된 모양인데, 그럼 영웅에 걸맞은 행동이나 업적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서지 말고 너도 우리처럼 그냥 세상의 기준과 요구에 따라 살아라는 것이지요.
이 질문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이 이야기를 듣자 사람들은 성전을 짓는 데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당신이 이것을 사흘 만에 다시 세우는 것이 가능하겠냐며,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기에 생긴 우문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전은 눈에 보이는 이 땅의 성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각자의 고유성,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우리 영혼을 뜻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내면 안에 있는 영혼의 성전을 세우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성전에 홀려 정신 차리지 못하며 끌려다니기 급급합니다. 세상의 성전은 사람들의 말처럼 마흔여섯 해, 그 이상 몇 백 년 몇 천년 걸려 지어진 엄청난 무게감으로 우리 눈앞에 서 있습니다. 그 화려함과 웅장함에 압도되어서 우리는 나의 영혼의 성전은 잊어버리고, 그 세상 성전에서 종노릇 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세상 성전을 해체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거짓된 세상의 성전을 허무를 수 있다면, 너희의 참된 영혼의 성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각자의 고유성을 사흘 만에 세울 수 있으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성전이라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 이야기합니다. 네 일차적으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성전을 해체하시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주어진 사명에 따라 성령으로 영적인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그 성전이 바로 사도행전의 마가의 다락방의 성령의 역사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 역시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닙니다. 건물도 아니고, 사람들의 조직도 아닙니다. 그 교회는 주님이 세우신 당신 자신의 참된 몸입니다. 그 몸에 속한 우리도 마땅히 타인의 성전, 세상의 성전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나의 영혼의 성전을 세우는 일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기도하면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인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겠습니까? 바로 내가 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함입니다. 타인이 제시하거나 강요한 길도 아닙니다.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나 스스로 홀로 찾아야 합니다. 이 작업은 누구에게나 정답처럼 보이는 이 세상의 성전에 저항하고 해체하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때론 무모해 보이기도 하고, 그리고 외로운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항해를 할 때 지도와 나침판이 있듯이, 우리에게는 성경과 기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지도가 펼쳐지고, 기도를 하면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렇게 기도해 보면 어떨까요? 내가 원하는 것을 놓고 기도하지 말고,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시길 기도하면 어떨까요? 길을 알려주세요. 잠잠히 내면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내면을 바라볼 때, 잠잠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소동을 일으킨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험한 풍파를 만난 것처럼 요란할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장담컨대 반드시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믿고 실천하시면 됩니다. 만약 의심이 된다면 다시 기도하세요. 그럼 또다시 보일 것입니다. 그 길을 걸어갈 때, 반드시 우리는 나의 영혼의 성전에서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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