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1j00QksGgMw&t=180s
요한복음 20장 1-18절 새번역
1 주간의 첫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무덤으로 갔다.
4 둘이 함께 뛰었는데,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
5 그런데 그는 몸을 굽혀서 삼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도 그를 뒤따라 왔다. 그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삼베가 놓여 있었고,
7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그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한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8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9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10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11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다른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자여,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15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1)히브리 말로 "라부니!" 하고 불렀다.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18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
막달라 마리아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에서는 마리아 단독으로 목격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공관복음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여인들이 함께 부활을 목격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처음 봤으니 본인에게도 영광이고, 교회사적으로도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오랜 시간 동안 막달라 마리아는 기독교 전통에서는 무시된 인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로서 향유를 부은 여인이다, 거지 나사로의 동생인 마리아다, 그리고 이전에 간음하다 잡혀 온 죄지은 여인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유심히 읽어만 봐도 이 셋 다 막달라 마리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언급한 첫 구절은 누가복음 8장 초반에 나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옆에서 항상 동행하며 섬긴 여인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의 한 명입니다. 누가복음 8장 2절과 3절입니다.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도 동행하였는데,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 성경 기록으로 보아 대략 대여섯 명의 여인들이 예수님의 일행을 지근거리에서 도운 것입니다.
여인들이 자신의 가정도 놔두고 여자 혼자 단독으로 재산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면, 아마도 그 신분이 과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교적 가정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만큼 예수님의 제자만큼 예수님과 가까이 지내면서 뒤에서 생계를 보조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비단 가사 일만 했겠습니까? 이들도 제자들만큼 예수님 옆에서 가까이 지내며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어쩌면 제자들 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을 더 정확하게 기억하지 않았을까 여겨집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동행하며 섬긴 여인 중 가장 유력한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이름에서 보아 대단한 인물로 추정됩니다. 막달라라는 말의 뜻은 아람어로 독수리라는 뜻도 있고, 그리고 큰 성벽을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막달라는 위대하다는 의미가 있어서, the great maria, 위대한 마리아라고 불리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외경에서 마리아 복음서가 있을 정도로 초대 교회에 큰 영향력이 있었고, 다른 외경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외경의 기록을 살펴보면 특히 베드로와 갈등 관계로 자주 그려집니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왜 우리에게는 말하지 않고 막달라 마리아에게만 사적으로 이야기하셨느냐며 불만을 터트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여성은 생명을 얻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막달라 마리아를 우리로부터 떠나보내도록 하자고 사람들을 선동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분명히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부터,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신 이후 초대 교회가 세워질 당시 베드로와 쌍벽을 이루는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인류 역사에서 여성 폄하로 인해 저평가되고 무시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제도화되자, 교회는 특별히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교회 여성 지도자들을 지웠습니다.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는 남성 위주로 쓰인 기독교 역사 잊힌 신앙의 위인입니다.
빈 무덤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유월절 안식일이 끝난 후 새벽 일찍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된 아리마대 사람이 소유한 동굴 무덤으로 향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굴을 막고 있었던 큰 바위가 움직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막달라 마리아는 다급한 마음으로 무덤 안을 들여다보지는 않고, 그 길로 바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로 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한 명의 제자와 베드로가 달려갔는데,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제자가 먼저 도착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제자 요한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데, 저자 자신이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요한이 가장 먼저 도착한 것입니다.
요한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몸을 굽혀서 동굴 안을 살펴보니 예수님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삼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음으로 베드로가 도착했는데, 베드로는 저돌적인 성격대로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직접 확인을 했고, 예수님의 머리를 싸매었던 수건이 잘 정리되어 있던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고 어리둥절하다가 막달라 마리아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만 확인하고 그냥 내려가 버렸습니다. 이걸 보면 제자들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돌아가신 선생님의 무덤이 훼손되고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입니다. 설령 슬픔이 올라오지는 않더라도, 우리 예법이라면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곡이라도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반응도 없이 자신들이 머물러 있던 곳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제자들이 내려가고 난 뒤 그제야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다시 도착했습니다. 제자들도 영문을 모른 채 아무런 대책 없이 내려간 것을 보고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혼자 남아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울다가 어느 순간 자신도 궁금했는지, 직접 확인해야겠다며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그곳에는 제자들과 달리 천사 두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랐을까요.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무엇인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 중 하나가 말을 걸었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이에 마리아는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다음 마리아는 다시 뒤로 돌아섰는데, 그 사이에 누가 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아마도 동산지기가 찾아온 거라 생각하고 있는데, 그 사람 역시 마리아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그러자 마리아는 동산지기가 옮긴 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 갔거든, 어디에다 두셨는지를 말해 주십시오. 내가 그분을 모시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마리아야 하고 불렀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에 바로 본능적으로 “라브니!”, 즉 선생님이라 불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반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예수님에 몸에 다 손을 데려고 팔을 내밀었던 것 같은데, 바로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이 장면에서 먼저 생각해 볼 부분은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의 차이입니다. 마리아는 제자들과 달리 무덤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천사를 볼 수 있었고, 그리고 결국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태도 중 매우 중요한 자세입니다. 성경을 볼 때에도, 기도를 할 때에도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냐 말한다면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충분히 머물러 있을 때에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의 시구 중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지 그것이 지닌 장점과 매력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적인 매력뿐만이 아니라 그 내면에 감추어져 있었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긍정 심리학의 창시자인 마틴 셀리그만이라는 분이 계시죠. 행복의 조건을 이야기하면서, 정서적인 즐거움만이 아니라 몰입을 통한 삶의 의미를 추구하라고 조언합니다. 사람이 단순히 즐거움만을 추구하면, 즐거움은 일시적인 행복만을 줍니다. 사람은 실증을 잘 내기 때문에,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질리게 되고, 재미있는 여행을 다녀도 그 기간이 지속되면 힘들어져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제안하는 것이 몰입입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면서 어떤 활동에 빠져든 동안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깊은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몰입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지향하는 목표를 세워 그것을 달성하고자 일관적인 행위를 지속할 때 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몰입의 태도를 제자들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가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지요. 예수님의 무덤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자마자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마리아는 빈부덤의 장소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해서 머물러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명확하다고 생각됩니다. 바로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했는데, 반대로 이런 글귀가 있지요.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이 말은 조선 정조 때의 문장가 유한준이 남긴 명언을 토대로 유홍준 교수가 구절을 좀 고쳐서, 문화유산을 보는 자세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머물러 있었고, 그리고 머물러 있으면서 오래 보았기에 더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보지 못한 것까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영적인 존재인 천사들도 보았고, 무엇보다 죽음과 육신의 한계를 넘어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집착하지 않고 사랑하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고, 마리아는 즉각적으로 ‘라보니’로 대답한 장면은 전형적인 사랑하는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화와도 같습니다. 생이별 뒤에 극적으로 만나는 연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처음에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했지요. 그런데 음성을 듣자 예수님인 것을 알아챘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목자는 그 양의 이름을 부른다고 했습니다. 바로 목자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양인 막달라 마리아를 부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저자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 있었던 사건에서 요한 자신이 등장한 부분에서 본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제자, 또는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이 어느 제자들보다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요한만이 아니라 마리아도 그중 한 명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자, 마리아는 예수님을 부르면서 손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내게 손대지 말아라 하셨습니다. 원어로 하면, ‘메 무 하프투Μή μου ἅπτου’라는 말이에요. 하프투ἅπτου’는 만지다 접촉하다는 뜻인데, 매달리다 집착하다는 뜻도 있어요. 그래서 말아라, 손대지 말라고 번역도 되지만, 나에게 집착하지 말아라 라는 번역해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마리아야 나를 집착하지 말아라, 집착하는 것은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렇게 집착해서는 결코 네가 간절히 만지고 싶은 나의 몸은 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고 보는 것은 허락되지만 몸을 만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복음서의 장면이 있습니다. 어느 여인이 예수님이 잡히시기 며칠 전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향유를 부은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아름답다고 하셨지요.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을 이 여인에게 해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여자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성의 기준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여자들은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막달라 마리아나 향유 부은 여인 모두 진리이신 예수님에게 근접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한하고 변화하는 진리를 포착하는 방법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이 향유 부은 여인이 예수님께 쏟아부은 것이 기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여인이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진리이신 예수님을 포착하고자 한 행동이 자신의 전부라 여겨진 기름을 쏟아 부은 것입니다. 기름은 딱딱하게 굳어진 고체와 다르고, 그리고 점액성이 전혀 없는 물과도 구분됩니다. 만약 물을 쏟아부었다면 그냥 다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고체는 딱딱해서 무한한 진리이신 예수님을 담기에는 적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름은 점액성이 있어서 유연성을 가지고 진리이신 예수님 표면에 달라붙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름을 부은 행동은 무한 중 무한, 도저히 우리의 이성과 능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포착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손으로 붙잡고자 한 것은 향유 기름이 아니라 고체로서 붙들고자 한 것과 대비할 수 있습니다. 딱딱히 굳어진 고체의 형태로 예수님을 포착하려고 한다면, 물론 일시적으로는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으나,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님의 변화하시는 역동을 담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손으로 붙잡으려고 한 것은 육신이신 예수님을 붙잡을 수는 있어도, 결코 부활하신 영과 육의 통합적인 존재이신 예수님을 붙잡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관련하여 우리 인간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영과 육을 동시에 가진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를 우리는 예수님에게만 국한시켜 생각하는데, 사실 이것은 우리의 존재성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육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동시에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점을 요한복음에서도 깊이 고민을 한 듯합니다. 우리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믿기가 힘든 것과 달리, 반대로 예수님의 경우는 부활하신 그 몸이 육체성을 가지고 있는지가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주목하는 사건이 있지요. 바로 도마의 경우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증거 하자 도마는 내 눈으로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 보고,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있었던 문이 잠겨 있는 방 안으로 예수님이 갑자기 들어오셔서 평화의 인사를 전하며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도마는 직접 예수님 몸에 난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몸을 직접 손으로 만져 확인했다는 증언은 예수님의 몸의 부활의 사실성을 인정하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사실 더 큰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몸의 영적인 측면입니다. 도마에게 오실 때를 보면, 집에 문이 꽁꽁 닫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문으로 들어오시지 않고 벽을 통과한 건지 하늘에서 내려온 건지 모르지만 갑작스럽게 홀연히 나타나셨습니다. 육체의 몸이 있다면 어떻게 벽을 뚫고 들어가냐는 것입니다.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의 이성으로는 풀 수 없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참된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된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붙잡기 위해서는 몸을 만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몸을 만져서 도마가 믿게 되었다고 하지만, 도마는 사실 제대로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만진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을 만지는 것으로는 참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몸을 만지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만이 진짜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따라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 내게 손대지 말아라, 집착하지 말아라는 말씀이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붙잡는 방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이후에 마리아에게 부탁을 하십니다. “이제 너는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내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내가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내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줘라는 것입니다. 왜 이 이야기가 중요한 까닭은 앞서 초기 교회에서 베드로와 막달라 마리아와의 갈등이 있었다고 했지요. 이것은 마리아에게 먼저 베드로를 향해 손을 내밀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화해하고 사랑할 때에야, 그러면 너희가 부활한 나의 몸을 육체로서 만질 수 있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진실로 사랑하는 방법을 마리아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앞서 진리를 포착하는 방법이 오래 동안 머무르며 바라보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 대상을 사랑하기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계속 바라보게 되면 결국 보이지 않은 것이 보이게 되어서 그 대상을 더욱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내가 소유하고자 손으로 만져 버리면 어느 순간 보이지 않던 참된 실재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렇게 욕심을 부리면 결국에는 사랑할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소유가 아니라 참되게 사랑하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우리가 잘 알듯이, 마지막 가장 강조했던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에야만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참된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다는 본 것입니다. 사실 사랑과 부활의 관계는 신약에서 불쑥 등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부활을 하나님이 이 땅 가운데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나타내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약에서 유대인들이 부활을 생각했을 때 떠올렸던 사건이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부지불식간에 더운 낮 정오에 지나가는 나그네 세 명을 대접한 사건입니다. 그 행인 중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좋은 대접을 받으신 다음, 하나님이 축복을 내리시는데, 아브라함의 오랜 염원인 사라의 태에서 난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이 이삭이야 말로, 아브라함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인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나와 이해관계가 하나 없는 내게 유익을 줄 수 없는 이웃을 환대할 때, 경험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구약 토라의 핵심이지요. 신명기 6장 5절에서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으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이 무엇이지요? 토라 전체는 그것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 사랑의 계명만큼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서 나의 이웃 더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가르치고 그리고 실천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믿음 소망 사랑 중 으뜸이 사랑이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앞선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하신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뭔가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더라도, 부활을 경험하게 하는 사랑은 뭔가를 바라거나 기대해서가 아니라,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그냥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얻었던 것처럼,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는 부활은 그 부활을 경험한 자에게 생명이 부여되는 사건으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기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삶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유를 알 수 없이 행동하고 아무 이유 없이 괴롭히고 이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납득되지 않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자신에게 일어난 말할 수 없이 극심한 고통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받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받아 드렸습니다. 그러니 이유를 알 수 없이 행동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그냥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한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내 앞에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냥 바라보는 겁니다. 보면서 또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시간을 드려서 머물러 있으면서 그냥 바라보고 계세요. 그러면 보이기 시작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그 고통의 이유들이 보이고요. 또한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이라면, 의외의 모습, 나름의 매력과 장점이 보이기 시작해요. 그런데 이게 빨리 보이지 않아요. 감정 기분에 휩싸여 있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감정이 다 가라앉고 사라진 다음, 모든 편견이 없어지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사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보는 방법이기도 하잖아요.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지요. 나에게 손을 대지 말고, 형제들에게로 가라. 집착하지 말고, 사랑해라. 바로 진리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막달라 마리아가 행할 때, 육체로나 영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거룩한 성체를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죽음 이후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온전한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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