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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 3장 1절-8절 위로부터 태어난 자는 고난 중 소명을 붙잡는다

by 알렉스강 2024. 5. 26.

https://www.youtube.com/watch?v=qVP-YdGo2c4&t=2048s

 

 

요한복음 3장 1절-8절

1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 사람의 한 지도자였다.
2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5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
7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8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Christus und Nicodemus, by  Fritz von Uhde  (1848–1911)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두 가지 질문

오늘 본문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이자 산헤드린 공의회의 지도자인 니고데모는 어느 날 밤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과의 대화치고는 매우 단도직입적입니다. 이렇게 본론으로 곧장 나아간 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이기도 한 자신의 문제로 인해 매우 간절하고 진지했으며, 예수님 역시 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입니다. 본문에 구체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니고데모의 첫 대화 뒤에 이어지는 생략된 질문이 있습니다. 3절에 이어진 예수님의 대답으로 유추해 볼 수 있는데요. 바로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두 가지 질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와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인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 두 가지 질문은 비단 니고데모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신앙인으로서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관심사입니다. 먼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갈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대단히 좋은 곳이기에, 당연히 거기에 합당한 사람이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냐며, 충분한 공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러한 공적이 있거나 그곳에 합당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대체로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며,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집니다.

 

반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는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이신칭의라 부르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기도 합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믿음으로 의롭다 칭해지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가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죽음이라는 두려움 앞에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그럼 그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일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일까?

이 질문의 대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악인이 아닌 의로운 사람이 가는 곳이기에 당연히 좋은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누렸던 것은 기본이고,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릴 수 있고, 하지 못한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롭고 풍요로운 곳이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이 무한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이상 세계를 꿈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 세계는 죽음 이후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이룩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AI나 로봇, 생명공학을 통해 추구하는 목표도 그러합니다. 모든 것을 알고 통제하며 육체가 병들지 않고 영원히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으로 상상을 통해 이미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구현되기도 합니다. 굳이 죽음 이후를 생각하지 않고, 상상으로 존재 가능한 세계로 가정해 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우연찮게 영생불사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늙지 않고 젊음을 유지하여 지식과 경험이 쌓아 많은 부분에서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남들이 한 번 살아갈 인생을 수십번 반복해서 하고 싶은 일들을 다 해보고 누릴 수 있는 모든 쾌락을 누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주인공의 삶은 해피엔딩으로 끝났을까요?

 

처음에는 인생이 무척 즐거웠겠지요. 그러나 즐거움은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사랑하는 친구들과 가족들은 모두 떠났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매번 계속해서 이별의 슬픔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해보았기에 더는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겠지요. 결국 허무가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끝없이 반복하고 지속된 허무감을 멈출려면 누군가가 자신을 죽여줘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죽음을 원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알고 누리더라도, 행복은 다른 문제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외부의 조건이 아니다

영화나 소설의 교훈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가 막연히 상상으로 그린 이상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는 그 누구도 정확하게 무엇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영화나 소설에서 가정한 무한히 지속되는 것에 더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지 않고 전쟁이 없고 불행도 없는 곳이라는 조건을 추가할 수도 있겠지요. 슬픔도 눈물도 고통도 없이 계속 행복한 삶이 이어질 것이라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천년만년 살아간다면 정말 행복할까요?

 

물론 상당 부분 만족하고 꽤 오랫동안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분명 언젠가는 지루해할 것입니다. 인간은 이미 그런 상황을 경험해봤습니다. 에덴동산에서 그렇게 지루해하다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호기심에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것이 인간 아닙니까? 변덕스럽고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완벽한 외부 조건을 가진 곳에 있다 하더라도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생각과 태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세간에 매우 유행했던 말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지옥, 지루한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대전에 처음 왔을 때, 한 친구가 저와 반대로 대전에서 살다가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만나서 서울에서의 정신없는 삶과 여유로웠던 대전의 삶을 비교하면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대전은 지루한 천국이고 서울은 재미있는 지옥이라는 것이지요. "나는 재미있는 지옥을 갈 테니, 너는 지루한 천국에서 살아라"라고 했습니다. 두 곳을 비교하며 이런저런 장점과 단점을 재미있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가야 할까요, 아니면 지옥에 가야 할까요? 아마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지옥에 가야 하겠지요.

 

 바리새인이자 산헤드린의 의원 니고데모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주인공인 니고데모를 생각해 봅시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자 산헤드린 공의회의 원로로서, 당시 유대 사회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지금까지 믿고 추구한 삶의 목적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회의입니다. 오랫동안 유다를 회복할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붙잡으며 이스라엘이 꿈꾸어 온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달려왔지만, 여전히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조국의 문제로 인해 깊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실존적인 고민도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존경을 받고 권력을 누리던 니고데모는 자신의 기득권과 명예가 유효기간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졌던 유대 사회의 기득권도 결국 로마라는 세상 권력의 지배 아래 있음을 절감하게 되었고, 뭔가 새로운 탈출구를 찾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이 한계를 돌파해 볼까 생각하며 찾아온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라 부르는데요. 자신이 유대 최고의 랍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랍비로 부른 것은 예수님의 학식이나 권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랍비라 부른 이유는 예수님이 다른 랍비들과 달리 특별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베푼다는 것입니다. 굶주린 백성을 배부르게 하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행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나사로가 살아나는 일들이 유대 곳곳에서 일어난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니고데모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의 결핍과 한계를 해결할 수 있는 기적으로 가득 찬 완벽한 이상 사회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으로 이러한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이런 시도는 결국 하나님 나라를 오해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마치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 세계로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이상 세계를 세우기 위해 이 땅의 문제를 이 땅의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한 것입니다. 철저히 땅의 기준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이상적이라 할 지라도 이 땅의 나라이지 하나님 나라는 아닙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의 기준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육이 아닌 영으로 난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의 육적인 외부적인 조건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의 기준으로 봐야하기에,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누가복음 17장을 보시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올 것인지 물어봅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서 니고데모가 했던 질문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은 먼저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문화, 정치, 제도, 기술과 같은 외적인 조건 속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중요하니깐, 마음을 잘 다스리면 되겠다 생각하지만, 그것으로 되는 것이 않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욕망을 내려놓는 것만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물론 마음이 중요하지만, 단지 마음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마음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했을 때, ‘너희’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한 개인의 마음 안이 아니라 너희들 가운데 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각자의 마음에 임하지만, 나에게만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함께 공유하는 것이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 함께 임하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사막 교부들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수도자가 기도 중에 큰 깨달음을 얻고 스승에게 찾아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기도 중 드디어 내 모든 욕심을 다 버릴 수 있었습니다. 나의 자아는 다 죽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습니다. “그래, 너는 죽었을지 몰라도 사탄은 죽지 않았다. 여전히 살아서 너를 괴롭힐 것이다. 자만하지 말고 조심하여라.” 이는 아무리 마음의 욕심을 버린다 해도 완전히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나 자신만 욕심을 버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은 함께 살아가기에 주변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마음의 문제만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럼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오늘 본문 3절에 나온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보겠습니다.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지요.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거듭남이라고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진 말이지요.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니고데모는 다음과 같이 반문합니다. 4절입니다.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니고데모는 여전히 예수님의 영적인 대답을 육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것처럼, 영을 육으로 이해하려고 하니 예수님의 말이 들려지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엉뚱한 소리 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여기면서 농담조로 말했을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딴소리를 한 것이 아닙니다. 니고데모가 원했던 정확한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니고데모가 깨우치길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을 육이 아니라 영으로 깨닫길 기대하셨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다시 태어난다는 말을 어떤 의미로 하신 것인지 살펴봅시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그리스어로 게네테 아노텐γεννηθῇ ἄνωθεν이라 합니다. 다시라고 번역한 아노텐ἄνωθεν은 다시 또는 새롭게 라는 뜻도 있지만, 위로부터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뜻도 있지만, 다시 태어나더라도 어머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즉 영적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태어난다 라고 했을 때, 그리스어로 게네테γεννηθῇ는 문법적으로 수동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태어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태어나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서 태어납니다. 심지어 위로 태어나는 것은 육이 아니라 영이기에, 더더욱 내가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 태어나게 하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이 말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서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오해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자신의 힘으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위로부터 하나님의 힘으로 세우는 곳입니다. 내가 세울 수 있다는 사람들은 사실 하나님 나라를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니고데모도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생각하여 회의를 가졌기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약했습니다. 군대도 힘도 돈도 없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로마를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군사나 힘이나 돈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육으로 세우거나 칼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선물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상과도 같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자격 없는 자에게 조건 없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자격이 없는 자라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 없는 자라는 것은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격 있는 자에게 선물을 주지요. 능력이 있고 성공한 사람에게 상을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반대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땅의 기준으로 볼 때 능력이 없는 자, 실패한 자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선택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실패와 고난이 필연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성공과 번영만 누린다면 결코 우리는 영적인 눈을 뜰 수 없습니다. 이 땅으로부터 그 어떤 선물 하나도 받을 수 없을 만큼 무시당하거나 대우를 받지 못할 때, 그때 하나님은 땅을 대신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내 힘과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조건 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선물을 받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이 아니라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십니다. 하늘에 속한 자로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주십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다시 태어나야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을 니고데모가 이해하지 못하자, 예수님은 다른 방법으로 알려주십니다. 5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여기서 물은 이 땅에서 우리가 겪는 고난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했던 홍해의 물이 고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또한 물세례가 우리의 옛 자아인 육신의 죽음을 말하듯, 우리가 이 땅에서 죽을 만큼 고난을 겪을 때, 그때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주십니다. 죽기 바로 직전에 살려주셔서, 세상을 부끄럽게 하고 우리를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홍해를 갈라서 죽음을 넘어가게 해 주시고 세상 원수인 애굽의 군대는 물에 빠져 죽게 만드십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땅에서 고난을 받는 다고 해서, 반드시 모두 다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함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주권과 의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앞서 다시 태어난다고 했을 때, 이 동사가 문법적으로 수동이라고 했지요. 위로 부터 나는 것은 결코 내 힘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마음을 비운다고 해서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증거 하기를 하나님이 택하신 언약 백성만이 위로부터 태어납니다. 하나님과 계약 관계를 맺은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계약을 맺어 언약 관계에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가 내 입으로 계약을 맺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선택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 수 있는 분명한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소명입니다. 그 사람의 삶과 행동이 소명을 따라 충실하게 살고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언약은 쌍방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백성을 이 땅에서 보호하는 것이 의무이고, 그리고 선택받은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 그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는 조건 없는 선물이지만, 그것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한가지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물과 성령은 고난과  소명이다

따라서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했을 때, 앞서 말씀드린 대로 물은 이 땅에서 겪는 고난이고, 성령은 우리가 이 땅에서 성취해야 할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난과 소명, 이 두 가지가 바로 우리를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 때가 있지요. 어떤 분은 내가 거듭났다고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이 땅에서 고난 없이 살아가며 먹고 마시는 것에 뜻을 두었던지, 아니면 하나님의 주신 소명을 이루는 데 내 마음을 쏟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8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 눈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사람이 바람처럼 보입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위로부터 왔기에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받은 사명이 세상이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 참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조롱하고 무시할지라도 그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위로부터 속한 자로 하나님 나라라는 그 놀라운 은혜와 선물을 맛보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고난 중 소명을 붙잡을 때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이름의 뜻이 백성들을 정복한 자라는 아주 비범한 이름을 가졌습니다. 당시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유대 안에서 3대 명문가에 자녀로 태어나 고귀하게 자랐다고 합니다. 탁월한 랍비로 존경받았으며, 산헤드린 공의회 원로로 정치적인 권력까지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런 세상의 조건으로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니고데모의 참된 소명이 아니었습니다 다 육적인 껍데기였습니다. 니고데모는 평생 큰 어려움 없이 살았지만, 삶을 마무리할 시간이 되자 번뇌가 찾아왔습니다. 유대 전통에 따라 율법에 가르침에 성실하게 살아온 나의 삶에 과연 하나님 나라가 있었는지 자문하였지만, 죽음이라는 두려움, 인생이라는 허무함 가운데 무너져 내렸던 것입니다.

 

밤 중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예수님을 찾아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묻고 있는 니고데모는 분명 자신에게 주어진 참된 소명을 따라 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모른 채 길을 헤매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고 몰래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들은 소명을 따라 살아가지 않는 것이 고통입니다. 니고데모의 잠 못 이루는 고통은 바로 소명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택받은 자의 숙명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사실을 간파하시고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네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지금이라도 이 땅에서의 고난을 마땅히 여기고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붙잡고 나아가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 나라가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니고데모의 삶에 있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고난이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소명도 없이 이 땅에서 고난만 받으며 끝나는 인생입니다. 선택받지 못한 이 땅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인생이 누구입니까? 소명이 있음에도 소명을 붙잡지 않음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입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인생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오직 소명만을 붙잡으며 그 누구보다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 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