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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 9-17절 새번역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15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의 한가지 유형인 필리아Philia 우정
좋은 친구를 가지셨습니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있습니까? 사실 이 둘은 같은 것이지요. 우정은 한 개인만의 덕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공유하는 덕입니다. 그래서 서구 철학자들은 우정은 매우 고귀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우정은 사랑의 한 종류이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랑을 4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에로스Eros, 스토르게Storge, 필리아Philia, 그리고 아가페Agape입니다. 에로스는 성적인 욕망에 따른 사랑이고, 스트로게는 혈족이나 가족 간의 사랑입니다. 아가페는 무조건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필리아는 우리가 오늘 주목하는 우정에 해당됩니다.
인간의 본능적 욕구에 가까운 에로스나 스토르게 보다 필리아나 아가페가 보다 높은 도덕적인 가치를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가페의 경우 우리 기독교에는 하나님의 사랑이라 말했습니다. 그만큼 구현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아가페는 오랜 시간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한 개인이 가지는 내적인 품성이라 보았습니다. 어떤 특정 대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온 세상을 향해 자비심과 박애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필리아는 한 개인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필리아는 특정한 대상이 있고 그 대상과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함께 가질 때 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들은 아가페보다 필리아에 더 주목하고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라 여겼습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를 워낙 강조해서 비교적 필리아가 간과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셨다고 하지요. 그 계명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우정을 뜻합니다. 우정이야 말로 기독인들이 성취할 큰 덕목인 것이지요. 따라서 아가페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필리아, 즉 우정을 이루 나가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면서 이 땅에서 마땅히 실천해야 할 사랑의 방식일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다
그렇다면 우정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세 가지로 보았습니다. 놀기 위한 친구, 쓸모 있는 친구, 그리고 덕을 위한 친구로 구분했습니다. 마지막 덕을 위한 친구가 완벽한 우정이지요. 이러한 진정한 친구는 두 몸에 하나의 영혼이 깃든 상태라 말했습니다. 같은 감정, 같은 생각, 같은 의지를 가지는 것이지요. 친구는 또 다른 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기에, 우정은 자기애에서 출발한다고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는 말씀이 있지요. 이 말은 당시 그리스의 유명한 격언으로, 많은 이들이 친구를 위한 희생을 인간이 보이는 최고의 덕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이 가능한 까닭은 우정이 자기를 사랑하는 힘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쟁 중 동료의 아내를 부인으로 맞이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전쟁 중에 사망한 동료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긴 하지만, 그 동기가 전쟁에 나간 동료 간의 깊은 우정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사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군대 내에 동성애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서로 보호하려는 동기로 인해서 전장에서 용맹함을 드러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의 애인이 나를 지켜주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이후에 그 가족들을 돌보아 주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그리고 동료의 가족을 돌보는 것만이 아니라 먼저 죽은 동료가 하던 일을 계승하여서 그 일을 완성해 주는 것으로 명예롭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라 했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친구의 계명을 나의 계명으로 여겨서 이것을 지켜 행하여 완성함으로써 서로를 명예롭게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좀 지난 영화이긴 하지만, 전쟁 영화 중 수작으로 뽑히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밀러 대위를 포함한 여덟 명의 병사들에게 특수 임무가 주어집니다. 참전했던 네 형제들 중 위로 세 명이 전사하고 생사가 불명한 막내 라이언이라는 일병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단 한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여덞 명이 위험을 감수해야 할 상황에서 대원들은 갈등합니다. 과연 라이언 일병 한 명의 생명이 그들 여덟 명의 생명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인지 끊임없는 혼란에 빠집니다. 찾아가는 길 몇몇 대원들이 전사하고 마침내 극적으로 라이언 일병을 찾아냅니다.
함께 돌아가면 아무 문제없었을 것인데, 라이언은 다리를 사수해야 할 임무를 포기하기 않고 동료들과 끝까지 남아 싸우려고 합니다. 이대로 있으면 모두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밀러 대위는 자신의 임무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라이언과 함께 다리를 사수를 하게 됩니다. 전황이 불리했기에 팀원들이 한 명 한명 죽어나가고 밀러 대위 역시 위기에 처하여 총에 맞아 쓰러집니다. 다행히 아군의 공습으로 라이언 일병은 살아남게 되고요. 죽어가는 밀러 대위는 라이언에게 ‘꼭 살아서 돌아가, 최선을 다해 잘 살아야 해'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으로 시간이 흘러 노인이 된 라이언이 밀러 대위 무덤 앞에 찾아가서 말합니다. ‘매일마다 다리에서 하신 말씀을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잘 살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잘 살아왔다. 최소한 대위님 보시기에 나를 위한 희생이 헛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라는 말로 끝이 납니다.
이게 바로 우정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우정은 친밀함이 아닙니다. 생전 한 번도 보지 못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임무에 따라 우연히 만나게 되어서, 그 임무를 이루기 위해서 나는 죽더라도 너는 살아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상대가 살아야 하는 것은 내가 이루지 못한 일을 상대가 대신해서 이루어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다름 아닌 진정한 친구가 무엇이냐면, 친구에게 자신을 내어 주고, 자신이 직접 행동하는 것보다 친구가 행동할 수 있도록 원인을 제공하는 자가 진정한 우정을 보인 친구라는 것입니다.
희생을 통해 누군가에게 친구가 되어 주기
내가 해야 할 일을 타인이 하도록 하여 성취하는 것을 우정이라 한다면, 주인과 종 사이의 관계를 떠올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친구가 아닙니다. 친구는 나도 정말 하고 싶고 성취하고 싶은 일을 타인이 하도록 하여 성취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시키는 주인과 종 사이의 관계와는 다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15절에서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정이 자기애에서 시작되었다고 했지요. 자신의 덕을 쌓는 것을 친구에게 확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보다 사랑할 만한 존재가 되어서, 자기 자신에게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될 수 없다면, 다른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누군가로 하여금 내가 소망한 것을 성취하게 하는 것은 깊은 자기 성찰에서 비롯된다고 보입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희생할 만한 일이나 사람을 찾은 사람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발견한 사람으로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것입니다. 설령 자기 목숨을 버리더라도 아깝지 않은 것은 이 일을 행함으로써 자기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정신적으로 고양되고 도약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고 하지요. 이 포기가 바로 희생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헌신하여 거룩한 가치를 이 땅에서 이룩하고자 하는 지혜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 지혜와 용기가 바로 순교이고 제사인 것입니다.
이 본을 누가 보이셨습니까? 다름 아니라 우리 구주인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을 예수님은 누구보다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본인도 이루셨지만, 그 나머지를 우리에게 이루도록 위탁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친구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게 주님이 허락하신 놀라운 뜻이지요. 따라서 우리에게도 두 가지의 과업이 있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께서 위탁하신 일을 우리 삶에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도 예수님처럼 누군가가 나를 이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도록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도 해야 하고,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친구가 부탁한 일을 이루어가기
혹자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위탁받은 일을 성취하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올지 모릅니다. 나를 위해서 이렇게 목숨까지 버리면서 희생해 줬는데 부담감과 의무감으로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포도나무와 가지 사이의 관계에 이어진 말씀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머물러 있어라고 했지요. 머문다는 것은 서로서로 함께 거한다는 것이고, 상대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 일이 우정이라는 사랑의 모습으로 열매 맺어 성취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친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율법을 지키다는 그리스어 동사 테레오τερέω는 복종하다는 뜻 외에도 간직하다 머물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무감과 부담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로 인한 존재의 울림과도 같습니다. 친구의 희생으로 그 정신이 나에게 깃들게 되어서 내 힘만이 아니라 함께 그 일을 성취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에도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영인 성령이 내 안에서 일하시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16절에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선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친구로 선택한 것이라 예수님이 나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어릴 적 놀이를 할 때를 생각해 보면, 팀이나 짝을 잘 짜야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편을 먹는 것이 승패를 좌우한다 생각하여 늘 편을 고를 때 서로서로 싸우기도 자주 했습니다. 좀 더 강하고 빠르고 힘이 있는 친구와 편을 먹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같은 이가 아니라 바리새인들을 자기 친구로 삼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율법을 다 지켜 왔던 부자 청년과 같은 이를 제자로 삼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식하고 힘이 없는 어부들, 그리고 비난과 멸시의 조롱거리였던 세리와 창녀를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상식적이지 않고 기대와 다른 선택을 예수님이 직접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런 선택을 하셨을까요? 바로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이 열매는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친구가 되는 것은 물론 쌍방이 서로 노력해야 할 부분이지만, 누군가가 먼저 희생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희생의 가치로 인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물론 희생으로 감격한 상대 역시 친구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노력 없이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희생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 선택한 이의 안목을 믿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생각하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두렵고 의심이 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아니라 나를 선택하신 친구의 안목을 믿는 것이지요. 특별히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안목을 믿는 것입니다.
영적인 친구를 맺는다는 것
마지막으로 영적인 친구를 맺는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정은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홀로 수행한다고 해서 성장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홀로 있어야 하고, 때로는 좋은 스승이나 친구를 통해서 성장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인데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젊을 때 주색에 빠져 있었다는 것은 유명하지요. 회심한 이후에도 여전히 세상의 명예와 여자에 대한 정욕으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혼자 해결하기보다는 자신의 제자이자 친구인 알리파우스와 네브리디우스와 함께 나누며 몸에 베인 습관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나눕니다.
훗날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회상하기를 그들과 함께 마음을 열고 자신의 고민과 욕망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어려워했던 영적인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신뢰할 만한 동반자와 지지자들을 통해서 얻는 위로와 용기가 너무나 소중하고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정의 가치입니다. 이러한 우정의 경험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심리적 안정감과 정서적 지지를 주어서, 결국 더 깊은 내면의 사색과 영적인 성장에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친구를 맺는 것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영적인 친구를 맺어야 하는 대상은 바로 내 안에 있는 나 자신입니다. 앞서 우정이 자기애에서 시작된다고 하면서, 무엇보다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될 수 없다면, 다른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할 때,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 자신입니다. 순간순간 나를 포기하게 만들고, 나를 넘어 뜨리는 것은 바로 내 안에 나를 조정하는 또 다른 나라는 괴물입니다. 이 괴물은 늘 패배의 쓰라림을 안겨주지요.
내면의 또 다른 나와 친구가 되기
우리는 내면의 나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내 안의 나는 무의식과 같이 나를 조정합니다. 욕망으로 부추기고, 게으르게 만들고, 타협하게 합니다. 그때마다 이 친구를 잘 타일러야 합니다. 타일러도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는 결국 희생이 필요할 때입니다. 나의 겉 자아를 속 자아를 위해서 죽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는 괴물이 아니라 온순한 양이되어서 말을 듣기 시작합니다. 죽은 겉 자아를 위해서 속 자아가 일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와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하는 것도 내 안에 속 또 다른 나와 친밀해지는 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하는 것이 그저 우리의 욕망대로 바라는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겉자아가 죽고 속자아가 더는 괴물이 아니라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양이 되어서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주님 대신 주님의 일을 이루는 놀랍고 엄청난 일입니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던 것처럼, 놀라운 연합의 신비이자, 우정을 통한 기적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친구가 되는 동시에, 우리는 누군가의 영적인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친구는 인간적인 친밀한 사귐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누군가를 선택하여 그를 위해서 기쁨으로 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너는 살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기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마치 진리가 대를 이어 가는 방식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역사하는 방식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진리가 살아서 역사하며, 조금씩 조금씩 이 땅 가운데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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