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kot5Ew3Ijjk&t=1150s
요한복음 6장 36절-50절 새번역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내게로 오는 사람은 내가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그것은,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40 또한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살릴 것이다."
41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으므로,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면서
42 말하였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알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가?"
43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서로 수군거리지 말아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나는 그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살릴 것이다.
45 예언서에 기록하기를 '그들이 모두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하였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은 다 내게로 온다.
46 이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 외에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만이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생을 가지고 있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
50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은 이러하니, 누구든지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생명의 빵인가 세상의 빵인가
요한복음 6장을 읽으면 예수님과 무리와의 대화가 마치 다른 차원에 속한 사람들의 대화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말씀하시지만, 무리들은 예수님을 세상의 빵으로 여기며 집착합니다. 동상이몽이랄까요? 완전히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6장 후반부를 보시면,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다가 도저히 안되니 떠나갑니다. 60절과 66절입니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기를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 때문에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예수님과 무리와의 대화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는 말이 뭔지 모르겠다는 것과 그리고 제자 중 일부와 무리들이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머물러 있다가, 결국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되자 기대한 것과 다르고 감당이 안되니 다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수군거리다, 공귀조γογγύζω
앞서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통해 구원의 참 의미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거지 떼처럼 몰려들며 생존을 위해 세상의 빵을 구하러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호구 만났다 생각하며 뜯어먹고자 작정하며 달려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늘의 빵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리들을 안타깝게 여기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의 떡을 구하는 데 집착했습니다. 이 땅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41절을 보면 사람들이 수군거렸다고 말합니다. 수군거리다로 번역된 헬라어 '공귀조γογγύζω'는 비둘기의 울음소리에서 유래한 동사로, '불평하다, 투덜거리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불평과 불만을 통해 타인을 중상모략하거나 비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타락한 인간 본성을 묘사하면서 대표적인 모습으로 수군거림을 말합니다. 로마서 1장 29절입니다. “사람들은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수군거리는 자요,” 그리고 구약에서도 수군거리는 것은 일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불신의 병이기도 합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물이 떨어지자 모세를 원망한 경우와 민수기에서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원망한 사례가 있습니다. 마실 물이 없어 죽게 되었다는 것과 약속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며 불만 불평한 것입니다. 이러한 원망이 일종의 수군거림입니다. 예수님을 좇아온 무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의 떡에 관해 이야기하시는 예수님께 불평과 불만, 원망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43절 말씀에서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반복해서 생명의 떡이신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이다
무리들은 왜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수군거리기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36절에서 힌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 일단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는다 했는데, 예수님을 세상의 떡으로는 믿을 수는 있지만, 하늘의 떡으로는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떡 영생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힘이므로, 보이지 않는 영생을 약속하는 메시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무리들이 요구하는 세상의 힘을 조금이라도 제공하셨다면,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외롭게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모두 떠나고 어머니와 몇 명의 여자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만 함께 했지 예수님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십자가가 세상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이유는, 십자가가 세상의 힘과 무관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세상의 힘과 연관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외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힘과 무관하기에 배척받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선택하기 마음먹었다는 것입니다. 이걸 빨리 깨닫는 게 복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여전히 예수님을 세상의 떡을 주러 오신 분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높은 곳에 올라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목표에 치중합니다. 이 오해를 내려놓지 못하면 결국 자기 스스로 시험에 듭니다. 가롯 유다를 보십시오. 예수님에 대한 배신이 그냥 나왔겠습니까? 유다는 3년이나 고생시키며 따라다니게 해 놓고서는 자기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예수님을 보며, 본인이 오히려 예수님께 배신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생명의 빵을 먹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37절 말씀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내게로 오는 사람은 내가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온 사람은 아버지께서 주셨다, 즉 하나님의 선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이지 않는 영광, 세상의 힘과는 무관한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도 사실은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하나님의 선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오늘 말씀 이후에 무리들은 다 떠났고, 제자들 중 일부도 떠났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남아 있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결국 예수님을 3번 부인하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시니이다 고백한 것도 베드로 본인이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고백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결국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은혜로 인해서 깨달아진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내린다는 말입니다.
44절에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하셨습니다. 타락한 죄인들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셔야만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헬라어로 '헬퀴오ἑλκύω'는 어부가 물고기를 그물로 끌어올릴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물고기 스스로 배에 오를 수 없듯이, 구원도 하나님의 끌어올림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진리의 세계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서부터 하늘로 끌어올리십니다.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하지요. 구원을 위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섭리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선만이 아니라 심지어 악까지도 이용하시면서 우리를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세우십니다. 우리가 계속 수군거리며 궁시렁거리고 불만 불평하고 불신하고 불순종하고 인내하지 못하더라도 하나하나 고쳐나가시면서 결국 하나님의 은혜의 그물로 끌어올리십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을 기어코 먹이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은 다 내게로 온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빵을 먹고 마신다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먹고 마신다" 말씀하신 이유는 음식이 우리의 기질과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된다"고 하지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채식을 주로 하는 사람들은 온순하고, 육식을 주로 하는 사람들은 호전적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잠언 23장 20절에서도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쨌든 먹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체질이 있고 그 체질에 맞는 음식도 있기도 하지요. 결국 먹는 음식이 음식이 우리의 형질과 기질을 결정하고, 정신과 영혼까지 영향을 준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의미를 생각해 보세요. 예수를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의 형질, 기질, 성품, 정신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자신을 희생하여 죄인들을 살리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먹음으로써 그의 형질과 기질과 정신이 우리 것이 되고, 그의 성품이 우리의 성품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45절 말씀입니다. "예언서에 기록하기를 그들이 모두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하였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은 다 내게로 온다." 하나님이 우리를 끌어올리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게 하십니다.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설득하시고 이끌고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길 힘써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은 그물망에서 우리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잘 배우시길 소망합니다. 잘 배우는 것은 동시에 잘 가르치는 것과 함께 일어나는 구원 사건입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 성령이 깨우치는 바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우리는 온전히 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생명의 빵을 먹도록 선택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행위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믿음도 있어야 하고, 말씀에 순종도 필요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썩어가는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육신의 한계를 분명히 자각하고, 이 육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 삶에서 나타나게 되며 서서히 우리 존재를 집어삼키게 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의 살과 피를 지속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살과 피가 우리의 유한성을 영원으로, 우리의 불완전함을 온전함으로, 우리의 부정함을 거룩함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만나는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일 뿐이다
계속 오해하는 제자들을 깨우치고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가르치셨습니다. 출애굽 때, 그들의 조상이 먹었던 만나에 참된 의미를 깨우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나를 먹은 사람들은 잠시 배를 채웠을지 모르지만, 다시 배가 고파졌고 결국 그 육신 모두 죽었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결국 이 땅에서 우리 육신이 먹는 양식은 그게 밥이든 빵이든 만나든 고기든지 간에 결국 배가 고프게 되어 있고, 결국 육신은 병들어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중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으면서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으로 받아먹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신약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바로 그럴 때, 만나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떡을 먹게 하는 참된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만나를 먹는다고 해서 세상 살아가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거나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결핍과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을 보여줌으로, 결국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나게 되는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일종의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인 방편입니다. 강을 건너가서 진리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지 강을 건너게 해주는 만나에 집착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 백성들이 이 만나로 이 땅에서 세상 사람들 보다 배부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나 많이 주셔서 부자 되게 해 주세요. 만나 많이 먹고 힘을 가셔서 세상 영광 얻게 해주세요. 이런 어리석은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도 그날에 주신 것으로 족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나를 주실 때도 딱 그날만큼만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다음 날 것까지 미리 거두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날 주신 은혜만으로도 하루하루를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음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족한 만큼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는 한이 없지만, 내 욕심을 끝없이 채우고자 한 없이 주시진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다음 날 것까지 미리 거두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내일을 준비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추가로 거둔 만나는 썩어서 냄새가 납니다. 만나는 욕심부리면 헛수고입니다. 오히려 썩어지기에 손해입니다. 그러니 욕심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내게 주신 양만큼 소중히 여기고 그만큼 잘 먹으면 됩니다. 좀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내일 주실 은혜가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서 약간의 허기를 참으면서 다음 날을 맞이합니다. 그러면 다음 날 내려주신 만나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만나를 배 터지도록 먹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다음날 아침 일찍 나가지 않습니다. 게으르게 되고 만나에 대해서 금방 실증을 내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은 배가 부르면 진리로 나가지 않습니다. 죄인인 우리는 세상의 배부름으로는 결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배부르면 딴생각하게 되고, 결국 다른 살 길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 백성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합니다. 그날 염려는 그날로 족합니다. 반대로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도 내일의 은혜는 내일 받는 것입니다. 그 날 은혜는 그 날로 족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하루 현재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는 말씀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입니다. 생명의 빵, 즉 만나를 매일 꾸준히 먹을 때 이 신뢰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 신뢰가 깊어질 때, 때로는 하나님이 나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 외에 의지하고 있던 것들을 버리게 하십니다. 건강이 약해지거나 사업이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나 징계로 보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 신뢰가 쌓인 다음 더 굳건하게 만들기 위한 시험입니다. 그때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고 또 인내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 시간을 잘 보낸 뒤 한 단계 더 넓은 신앙의 세계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꼭 이 단계까지 나아가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무리들은 광야의 만나를 세상의 배부름으로 오해하고 모세가 우리에게 준 만나를 달라고 하며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조상들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병이어 계속 일으켜줘도 너희들은 또 수군거리며 불만불평할 것이고 하나님 원망하고 죽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무리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만나를 통해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좇아 사는 삶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육신의 배부름을 위해 예수님을 찾는다면, 결국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우리 육신도 죽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을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세상에서 만사형통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예수를 믿음으로 세상 것들을 놓아가는 과정이 신앙의 여정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필요한 것을 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매일 주실 양식에 대한 필요를 구해야 합니다. 그걸로 족합니다. 그리고 성숙한 자녀라면, 그날의 필요를 구하기에 앞서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게 할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일 줄 믿습니다. 큰 틀에서 보자면,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떡으로 여기며, 그분의 살과 피를 먹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고 순종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가 나의 삶 속에 나타나도록 믿고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기도가 바뀌는 것입니다. 내 육신의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의 허기와 목마름을 채워주세요. 더 주님을 사랑하게 해 주세요.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자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의 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걸어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지어지는 과정에 필요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우리의 우선순위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 정말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생명의 빵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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