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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 24절-35절 새번역
24 무리는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배를 나누어 타고, 예수를 찾아 가버나움으로 갔다.
25 그들은 바다 건너편에서 예수를 만나서 말하였다. "선생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
26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자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예수께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30 그들은 다시 물었다. "우리에게 무슨 표징을 행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당신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31 '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서, 그들에게 먹게 하셨다' 한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다 주신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참 빵을 너희에게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33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
34 그들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 빵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십시오."
3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은 이유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 이후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라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 배를 나누어 타고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예상한대로 그곳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났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좀 냉랭했습니다. 열심을 다해 따라온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섭섭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동기로 자신을 이렇게 열정적으로 따라오는지 물으셨습니다. 단순히 기적을 보고 따르는 것인지, 병 하나 고치려고 따라오는 것인지 알길 원하셨습니다.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은 이유는 오병이어를 보니 자신들이 먹는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병이라도 걸리면 덤으로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큰 꿈을 꾸고 로마 압제로부터 벗어나는 이상 사회를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오병이어를 경험했을 때처럼, 이들은 대책 없이 무작정 예수님을 쫓아왔기에 양식이 없어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놓고 직접 밥을 달라고 하기는 부끄러웠는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이나 그보다 더 큰 기적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작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것을 요구합니다. 기적은 마약과 같아서 더 강한 것을 원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기적은 관계를 건강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돈이 관계를 건강하게 만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을 돈으로 생각하면 관계는 어려워집니다. 돈이 사람의 관계를 깊게 하지 못하듯, 기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들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 필요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실컷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그 이유가 자기만족과 배를 채우는 것에 있었다면, 하나님 나라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들의 머리에는 땅의 일로 가득합니다. 나는 왜 하나님을 믿는가? 내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가는가? 그 출발점을 확인해야 합니다. 2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자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배부른 것에만 관심을 두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정작 예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기적도 결국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을 깨달아 누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을 위한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영생이 아니라 일에 초점을 맞추는 무리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예수님이 주시고자 한 영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일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28절에서 사람들이 묻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사람들은 율법적이고 자기중심적이어서, 자신이 뭔가를 해서 원하는 바를 얻는 데 익숙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배가 고팠고, 이번에는 오병이어처럼 그냥 공짜로 밥을 주시지는 않고, 아마도 무엇인가 예수님을 위해서 일을 하면 밥을 먹여주시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예수님이 주시고자 한 영생과 반대되는 생각입니다. 영생은 일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관계는 서로에 대한 신뢰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영생은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됨을 알게 하시기 위해,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아는지 물으셨습니다. 진짜 아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관계를 맺는 것이라 말씀하시며,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을 보시면 이 관계를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하나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는 아버지께 보고 듣지 않은 것은 한 마디로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당시 사람들이 이해했을까요?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들이 많은데,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을 리가 없습니다.
사람의 두 가지 유형
사람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땅만 쳐다보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동양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사람다운 사람을 군자라 하고, 사람답지 않은 사람을 비인이라 합니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짐승과 다름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역에서는 군자는 비인과 말을 섞지 말라고 했습니다. 괜히 관계를 맺어봤자 덕 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답지 못한 무리와도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도 못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을 잔혹한 분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성하십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자신에게 덕될 것이 없습니다. 말해도 깨닫지 못할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경우 아에 말을 섞지 않으실 텐데, 그래도 끝까지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30절을 보면, 역시 사람들이 전혀 이해를 못합니다. “그들은 다시 물었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표징을 행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당신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시고자 했는데, 사람들은 또 다른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신앙에는 제대로 아는 것과 바르게 믿는 것, 두 단계가 있습니다. 무리들은 이 두 가지 모두 불가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바르게 믿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 때, 진리 위에서 바르게 믿게 되고 결국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잘 되어야 신앙을 가질 때 건강한 인격과 삶이 형성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도 좋아집니다. 하나님께 사랑받았으니, 이 세상에서 연약한 자들을 돕고 사랑하며 화평을 이루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바르게 믿지 못한다면, 무리들처럼 몰려다니며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쫓아다니기만 할 뿐입니다.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을 반대하고 대적하는 일입니다. 결국 무리들이 한 일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일입니다. 이러한 무리의 특징을 순진무구하다고 말합니다. 좋은 말이 아닙니다. 순수한 악입니다. 무지하고 믿음 없고, 결국에는 자기 배를 채우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결국 이들이 원하는 바는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한 번만이 아니라 매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오병이어 기적을 한 번만 일으켰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당신이 모세만큼 위대한 지도자라면 출애굽 때의 만나처럼 매일 오병이어를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과 만나 사건
구약에서 가장 핵심적인 책을 꼽으라면 단연코 출애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을 이야기하기 위해 창세기가 있으며, 출애굽 이후에도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시내산 언약으로 하나님 백성이 된 이스라엘 민족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가 계속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로 보면, 출애굽은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애굽 종살이가 아니라 죄의 종살이가 문제입니다. 죄와 죽음의 사슬에 묶인 인생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잘 알듯이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향해 40년간 광야를 지나갑니다. 광야에서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애굽에서는 불가마 옆에서 편안하게 빵을 먹고 배부르게 고기를 먹었다고 했지만, 거짓말이었습니다. 당장의 어려움 때문에 노예 시절을 그리워한 것입니다. 사실 연약하고 이율배반적인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괘씸했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주신 것이 만나입니다.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보고 신기했는지,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뜻인 만나라고 불렀습니다. 만나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으로, 하나님이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적인 연구에 따르면 특별한 현상이 아닙니다. 지금도 일어나는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만나에 대한 두 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첫째, 식물에 기생하는 진딧물의 일종인 연지벌레의 분비물이라는 설입니다. 이것은 단맛이 나는 황색의 액체로, 6~7월경 주로 야간에 분비되어 아침에 하얗게 굳어지며 해가 뜨면 녹습니다. 지금도 시나이 반도에서 채취되어 아라비아인들에 의해 팔리고 있습니다. 둘째, 나무 수액이 굳은 것이라는 설입니다. 물푸레나무 만나라고 불리며, 열량은 낮지만 단맛이 강해 오늘날 당뇨 환자용 감미료로 사용됩니다.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만나는 특별한 초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일반적인 자연적인 현상으로도 설명될 수 있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시나이 반도 내륙에 살던 모든 사람이 아침마다 먹을 수 있는 자연 현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만나가 기적이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자연현상이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살아갈 때 유독 집중적으로 많이 나타났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만나를 오늘날 과학의 시선으로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만나 사건을 하나님이 일으키신 특별한 은혜인 기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광야의 모든 사람이 만나를 먹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총으로 인식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점이 우리 기독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만나 사건을 해석할 때, 만나는 단지 육신의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을 살리는 생명의 빵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나가 기적이냐 자연현상이냐 논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우리의 매일이 기적입니다. 굶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먹고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이름을 붙이는 삶
결국 이스라엘 백성, 즉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하는 일은 자신들의 삶과 역사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해석하고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단지 만나만이 아닙니다. 홍해 사건의 경우 과학자들은 조수 차나 지진 현상으로 설명합니다. 기둥과 구름기둥도 과학자들은 화산 폭발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이 모든 자연 현상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있음을 믿음으로 보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직 땅의 문제로만 해석하려는 세상을 향해,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영적인 일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상의 일에서 하나님이 하신 것을 발견하고, 그에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으로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만나의 뜻처럼,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영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섭리를 깨달아 이 땅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일종의 믿음 사건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입니까? 이름을 붙이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하나님을 닮은 자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이 일을 충실히 할 때 짐승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름을 짓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름은 존재를 담습니다. 그럼 손수 피조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영감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야 말로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깨달을 때, 모든 피조물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나게 되고 그 섭리에 따라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빵을 먹어야지 하나님의 섭리가 보인다
그렇기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빵을 먹어야 합니다. 생명의 빵을 먹지 않으면 하나님의 섭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육신의 빵만 구하면 결국 육신의 소유와 쾌락의 욕망에 잡힌 노예가 됩니다. 욕망에 사로잡혀 늙어 죽을 때까지 썩어 없어질 양식만 찾다가 인생을 끝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러면 우리가 생명의 빵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라 했습니다. 찾으라 찾을 것이라 했습니다. 하늘의 생명의 빵을 찾아야 합니다. 사실 이미 주셨는데,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먹을 수는 없습니다. 내가 먹고 싶다고, 내가 찾고 싶다고, 내가 구한다고 간구해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진리가 그렇습니다. 영적인 생명이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고, 예수님의 몸을 구해야지 생명의 빵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빵을 구하겠습니까? 배고픈 사람이 구하는 것입니다. 영의 배고픔을 아는 사람이 영의 양식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인생은 늘 배가 고픕니다. 먹어도 결국 배가 고픕니다. 그리고 배가 고픈 것처럼 항상 불만이 있습니다. 항상 불안합니다. 존재 자체가 불안과 두려움이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만드셨을까요? 영의 양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배고프지 않을까요? 불만이 없을까요? 불안하지 않고 우울하지 않을까요? 단지 건강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안 죽고 살 수 있는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을 먹어야 합니다. 빵은 밀가루로 만듭니다. 밥은 쌀입니다. 밀이나 쌀이나 모두 땅에서 납니다. 하지만 곡식을 내기 위해서 땅만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이 합니다. 하늘에서 비가 오게 하고, 하늘에서 햇빛을 내립니다. 햇빛과 비가 없으면 빵과 밥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먹는 빵과 밥이 사실은 모두 다 하늘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장 무엇을 먹을지 땅만 쳐다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때때로 햇빛 내려주시고 비도 내려주시는 하늘의 섭리를 깨달아, 결국에는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근본적인 결핍을 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 자녀 된 우리의 관계
이것은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밥을 달라고 합니다. 배고프다고 밥을 달라고 하면 부모는 밥을 줍니다. 부모는 자기 몸을 갈아서 자녀에게 밥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밥이다." 물론 모든 부모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부모는 있는 돈 없는 돈 다 내어주며 자녀를 먹여줍니다. 생명을 주는 행위를 부모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은 이를 모릅니다. 자식은 늘 부모가 주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이와 동일하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이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부모로 두고 우리는 그 자녀로서 살아갑니다. 하나님 자녀 중 누가 사랑받습니까? 하나님께 울부짖는 자입니다. 출애굽도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에게 압제받아 고통 가운데 울부짖을 때, 그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될 때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을 뻗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은 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출애굽 때에도 그랬고, 사사 시대에도 구원받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장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치명적인 연약함이지요.
그런데 자식은 언제 후회합니까? 부모가 죽으면 후회합니다. 살아계실 때 잘했어야 했는데 하며 자신을 돌이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이런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시고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참된 부모와 자녀 관계가 되도록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몸과 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게 하는 영원한 생명의 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자녀라면 하나님께 돈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달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양식을 먹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3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참 떡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여러분 모두 생명의 빵을 꼭 받아먹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어리석은 무리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몇 번이고 말씀하시고 기적을 보여주셔도 결국 깨닫지 못하고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고 들었지만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를 먹어도 결국 예수님을 먹지 못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사람답지 못한 무리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단순하게 들리지만 사실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몸이자 피인 그분의 말씀을 계속해서 먹고 마시면서 우리의 영혼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에 따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 깃든 하나님의 섭리가 보입니다. 그 섭리를 믿고 따르는 것이 바로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변화된 신분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 땅에서 살지만 우리 신분은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땅에서 살지만 땅에 묶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내 호적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의 호적도 바꾸러 다니는 것과도 같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 땅의 삶이 내 배만 채우는 욕망을 따르는 짐승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임을 보여주며, 이를 동경하며 따르도록 하여 그들 역시 땅의 신분이 아닌 하늘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복음을 온전히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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