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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장 6절-19절
6 나는,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택하셔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인데, 아버지께서 그들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7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으며,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참으로 알았고,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
9 나는 그들을 위하여 빕니다. 나는 세상을 위하여 비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하여 빕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10 나의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나의 것입니다. 나는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습니다.
11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12 내가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는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 다만, 멸망의 자식만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13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내가 세상에서 이것을 아뢰는 것은, 내 기쁨이 그들 속에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나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5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17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19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위하여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위한 기도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하신 고별 설교 중 마지막 기도에 해당합니다. 기도문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처음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 두 번째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 마지막은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될 우리와 같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정확하게 두 번째,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제자들을 가리켜서 예수님은 그들이라 부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스무 번이나 그들이라 부르며 각별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이들이고, 에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이들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전하고 지킨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신다는 것이지요. 마치 목자 없는 양들을 이리 떼 속에 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도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세상과 다름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은 그리스어로 말하면 코스모스κόσμος로, 온 세계, 보이는 모든 피조물을 말합니다. 세상 피조물 중에서 예수님을 아는 유일한 자가 바로 그들인 제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했던 세상은 예수님을 아는 이유로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이지요. 그런 세상 중에서 그들을 택하여 구별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들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사실은 말로써 확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택하셨다는 것을 예수님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다고 하지요. 주셨다는 것은 택하신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택함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행동으로 확인됩니다. 택하신 자들을 구별하여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부탁을 드립니다. 제자들을 보전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전해 달라는 말은, 말씀을 지킨다고 했을 때 사용하는 동사인 테레오τηρέω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지킨다는 테레오τηρέω 동사는 머무르다 유지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 옆에서 늘 머무르시고 우리를 붙잡고 계신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는 말씀에 머무르고 말씀을 지키는 것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경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방식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받은 자로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세상과 구별되는 제자들이 누구인지 말할 때, 그들은 에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자라고 하지요. 말씀을 받아 지키는 것이 단지 율법이 아니라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말씀을 보게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때 결국 하게 되는 것이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사실 정작 중요한 것이 말씀을 읽는 것인데, 결국 할 일이 없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길이 하나님께 보호받는 것입니다. 마치 새끼 양이 멋모르고 길을 나섰다가 힘이 빠져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을 때, 그때 목자가 달려가서 어깨에 양을 메어서 들고 가는 것과도 같지요. 양이 지쳐서 주저앉아 가만히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되새김질입니다. 몇 시간 전 먹었던 위에 남겨진 음식물을 다시 끄집어내어서 되새김질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지요. 잠시 잊고 있었던 말씀을 다시 꺼내어 읽는 것입니다.
신명기 17장을 보면 왕이 될 사람에게 권면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면 이러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라고 했습니다. 먼저 군대를 두지 말아라. 군대를 믿고 백성들을 위험한 전쟁터로 이끌어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둘째, 많은 아내를 두지 말아라. 자기 쾌락만 추구하면서 백성들을 고생시킨다. 많은 은금을 두지 말아라 왕의 권력을 사용해서 자기만 부하게 하면 백성이 가난해지고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왕이 되어야 합니까? 율법서를 늘 옆에 두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 사람을 왕으로 세우라고 했습니다. 왕이 될 만한 사람은 야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 소명의식을 가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백성들이 복을 받게 됩니다.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제자의 정체성인 택함을 받았다는 것, 말씀을 받아 간직하는 것,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것, 이 세 가지는 모두 결국 소명을 받아 붙잡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소명 의식이야 말로 제자의 근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에 남겨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아와 같이 돌보지 않고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무책임하게 자기는 세상을 떠나버리고 제자들은 고생시키려고 이 땅에 남겨둔 게 아닙니다. 소명으로 살아가고, 제자로서 소명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우정에 대해 말씀드렸지요. 나를 위해 희생한 친구가 부탁한 바를 이루는 것이야 말로 희생한 친구와 나를 명예롭게 하는 가장 큰 우정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라 보이시고 우정을 보이신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인 너희가 나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대신하여 이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이 땅에 버려둔 게 아나라 파송한 것입니다. 잘 알듯이 예수님 역시 이 땅에 보냄을 받아서 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우리 각자의 사명이 무엇인가? 물론 어떤 사람은 구체적인 직업으로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명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것이라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종종 나의 야망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 사명이 무엇이냐 하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자세와 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제자로서 모습을 보인다면 사명을 감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16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지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즉 제자인 우리는 이 세상에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 땅에 있으나 이 땅에 속해 있지 않는 것, 사실 무척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하면, 우리가 말씀을 받은 자로서 살아갈 때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금은보화보다 더 귀한 까닭이 무엇이냐하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확실하게 해 줍니다. 예수님을 아는 자로서 제자인 것이 드러날 때, 세상은 여지없이 바로 공격합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고난을 받을 때, 이기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에서 고난받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에 속한 자이기에 이 땅에서 고난을 받는구나,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설령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공격할 수는 있으나,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삶에 고난이 찾아올 때, 내가 이 땅에서 겪는 고통이 하나님께 버려진 결과가 아니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세상을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심지어 나를 미워하는 세상조차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이런 자각에서 나옵니다. 원수가 나를 공격하는 것도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사명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거룩을 성취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인 17절부터 19절까지를 보시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위하여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거룩을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종종 사명과 야망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이 땅에서 뭔가 대단한 일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인 진리로 거룩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인생에 야망이 아닌 참된 소명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을 성취하게 합니다.
거룩이 무엇인가요? 거룩은 히브리어로 코데쉬קדוש라고 합니다. 코데쉬는 부정하고 더러운 것과 분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부정한 것과 접촉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유지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제자인 우리를 공격하는 부정하다 여겨지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거룩을 세상과 구별된 것으로서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면, 점차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거나 배제하게 됩니다. 특히 세상에서 부정하다 여겨지는 것들,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이나 죄인이나 병자들과 거리를 두며 멀리하며 내쫓는 것을 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자기 자신이 세워놓은 기준으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하여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명을 따라 이 땅에서 거룩을 나타내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해봅시다.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은 유대교 전통에 충실하셨습니다. 토라의 계율을 따라 누구보다 금욕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과 구별된 모습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율법의 전통을 어기면서 관대함을 보이신 대상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세상의 기준으로 부정하고 열등하게 여겨진 사람들의 경우는 율법을 어겨서라도 그들을 위로해 주시고 함께 해 주셨습니다.
접근이 금지되었던 문둥병자에게 다가가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저주받았다 여기진 맹인을 위로해주시고 불치의 병자들이 오는 것을 막지 않으시고 치료해주셨습니다. 매국노라 여겨진 세리와도 함께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거룩하다 여겨진 안식일에도,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시며 이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붙여진 별명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룩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해 가셨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거룩한 자라고 인정받던 사람으로서, 스스로를 가리켜 의인이라 여겼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과 같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서는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한 의인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불법을 행하는 자이며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룩은 다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부정한 것들을 밀어내는 삶이 아니라 끌어안는 것이고, 미워하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와 이름으로 자기 기준에 못미치는 뭇사람들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것은 거룩한 행위가 아니라 위선이며 교만이라 본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살아간 것이 아닐까요? 세상과 구별되어 달라보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세상을 진실되게 살아가며 사랑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참된 거룩의 의미입니다. 사실 거룩은 관념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거룩은 삶이자 실천입니다. 내가 말씀을 받아 간직하며 직접 소명을 따라 살아가면서 경험을 해야 압니다. 그렇다고 내가 거룩을 내 힘으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나 구원이 우리 스스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인 것처럼, 거룩 역시 내가 노력으로 취득하는 자격이 아니라 거룩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정체성과도 같습니다.
용기와 지혜
거룩은 진리인 말씀으로 이루어지기에,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이에게 나타나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용기이고 또 하나는 지혜입니다. 용기란 무엇일까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용기입니다. 그럼 지혜는 무엇입니까?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람들을 보면 이 반대로 늘 하지요. 세상을 두려워합니다. 두려워하지 않은 것에 두려워하며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 버립니다. 바른 용기와 참된 지혜가 없는 사람들은 왜 이런 태도를 보이겠습니까? 나는 이 땅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속한 사람으로서 사람의 눈치와 세상을 의지하여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거룩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강한 자에게 비굴하지 않고, 약한 자를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였기에 예수님을 알고 믿었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죠.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 있으나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또 다른 권면이기도 합니다. 뱀처럼 지혜로운게 무엇입니까?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무서워해야 할 것을 구분하는 분별력입니다. 그리고 비둘기의 순결함이란 분별한 대로 행하도록 하는 힘과 용기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결코 죽지 않습니다. 우리를 공격하게 힘들게 할 수 있어도, 우리의 생명이나 영혼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받은 말씀을 끝까지 붙잡아 지키고 나아갑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말씀이라는 귀한 보화가 있음을 잊지 말길 바랍니다. 그 말씀을 가진 자라는 특권은 우리가 이 땅에 속하지 않았음을 구별하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8절 말씀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으며,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참으로 알았고,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기에,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인 줄 알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뭔가 기적처럼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만드는 도깨비방망이를 믿는 게 아닙니다. 중언부언하듯이 예수 이름을 외치면서 무엇이나 다 되는 것처럼 떡 나와라 굿 나와라 하면서 맹목적으로 믿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소명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거룩하게 합니다. 바로 이 말씀이 우리를 이 땅에서 있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게 하는 유일한 보화일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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