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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장 5-15절 새번역
4 내가 너희에게 이런 일들을 말하여 두는 것은, 그 일들이 이루어지는 때가 올 때에, 너희로 하여금 내가 한 말을 도로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다." "또 내가 이 말을 처음부터 하지 않은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내가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오늘 본문은 고별 설교 중 보혜사 성령에 관한 말씀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모두 당혹해하고 있었습니다. 근심하는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은 자신을 대신하여 그들을 이끌 보혜사를 보내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고 무책임하게 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을 보시면,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승천 이후 제자들은 곧 오실 것이라 생각하고 죽기 전에는 오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재림은 기대와 달리 계속 늦어졌습니다.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일까요?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요한복음 14장 18절 다음 구절인 19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분명히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승천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이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으로 다시 오신 것입니다.
성령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예수님이 영이시기에, 세상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경험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신 것은 제자들이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홀로 남겨두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언제나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함입니다. 성령을 보내겠다는 것은 예수님이 영으로 곧 다시 오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언젠가 있을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함께 나타날 전우주적 재림은 남아 있지만, 각 개인마다 경험하는 성령의 임재를 통한 영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이미 성취된 것입니다. 먼 미래에 있을 전우주적인 재림을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지금 당장 성령이신 예수님의 영과 마주하여 재림을 경험하는 것이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중요하고 유익하다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날마다 경험하는 것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재림하신 예수님을 매번 만나는 시간입니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를 물으며 의논하고 뜻을 구하고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특히 세상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아는 것만으로도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영이 함께 하기에 예수님을 미워하는 세상은 제자들을 더욱더 미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예수의 제자가 겪게 되는 필연적인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성령님을 날마다 만나지 않는다면 온전히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는 사자와 같이 덤벼드는 세상의 공격에 필히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보혜사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예수님은 성령을 보혜사라 부릅니다. 보혜사는 그리스어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라 해서, 법정에서 대신해서 말해주는 변호사를 말합니다. 마태복음 10장 후반부를 보시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의를 당부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공회에 넘겨서 재판을 받게 하고, 회당에서 매질하고 내어 쫓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방 총독들과 여러 나라의 왕들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 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미리 생각하거나 걱정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때 말을 하게 하는 이는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보혜사가 해야 할 말을 생각나게 하여 답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보혜사 성령은 우리를 대변하시긴 하지만, 대변하는 내용이 예수님에 대한 증거라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과 2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위하여 증언하실 것이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사실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을 대변하는 변호사로서 온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고소당하여 정죄당할 때, 우리는 피고인으로 참여한 것이 아닙니다. 피고인은 예수님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법정에 세운 것은 예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증인으로 참석한 것입니다. 증인으로서 예수님을 증거 할 때, 바로 그때 보혜사 성령께서 증인의 입장을 변호하고 그 신변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이 땅에 증인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역할이 다름 아닌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실 그대로 증거 하는 것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에 문제가 찾아올 때, 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은 예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이 공격하는 것은 나를 공격하는 것도 맞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제자인 우리 성도들의 인생의 문제는 결국 예수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생의 문제를 풀 때에는 예수님을 중심에 놓고 해결을 찾아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문제의 당사자가 아니라 증인이기에, 성령이 시키는 대로 증거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문제의 진짜 당사자이신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죄와 의와 심판
오늘 본문에 보혜사가 하시는 일에 대해서 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세상의 고소, 또한 사단이 검사의 역할을 하면서 기소한 내용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의로운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분별하는 참된 심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중심에 두는 것이지요. 이것은 영적인 눈이 뜨일 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르게 깨달아야 할 죄와 의와 심판이 무엇일까요? 먼저 죄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세상은 죄를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죄책, 법에 따른 위반 행위를 죄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9절입니다. “죄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 예수님은 말씀으로 성육하신 분이기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받은 자로 살지 않고 말씀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예수님 영인 보혜사가 함께 할 수 없고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말씀이 없고 성령이 없다는 것은 동물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피조물이 아닌 것이지요. 피조물이 정상이 아닌 상태, 즉 말씀이 없고 성령이 없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땅에 속한 자로서 땅의 질서에 철저하게 맞추어서 땅의 축복만을 바라는 상태입니다.
다음으로 의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는 공정함이나 정의로움이 아닙니다. 10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의에 대해서 깨우친다고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너희가 나를 더 이상 못 볼 것이기 때문이요.” 아버지께로 가신 예수님을 더 이상 못 보는 우리가 성령으로 예수님의 영을 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의로움이란 보이지 않는 세계, 이 땅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영적인 시야를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로움은 이 땅을 추구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나라를 구할 때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하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우리의 시선을 둘 때, 바로 그것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의는 일종의 권한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권한이 아니라 영적인 권한입니다. 이 두 가지 권한 중 무엇을 사용할지는 우리 스스로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땅에 권한을 사용하는 사람은 땅에 속하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하늘의 권한을 사용하는 사람은 하늘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와 의와 심판 중 마지막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정확하고 분명합니다. 내가 땅에 속했는지, 아니면 하늘에 속해 있는지를 분명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의 수와 무게도 정확하게 재시는 분이시죠. 우리가 어떤 권한을 사용했는지,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한 치 오차도 없이 측량하십니다. 스가랴가 세 번째로 본 환상에서 어느 한 사람이 손에 측량줄을 잡고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넓이와 길이를 정확하게 잰 것과도 같습니다. 내 영혼의 도성 예루살렘을 얼마나 아름답게 지었는지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세상의 권한 vs 하나님의 권한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 너머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길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길을 나아갈 때에는 갈등이 일어납니다. 세상이 주는 고난, 인생의 풍랑이 우리를 쉬지 못하게 만듭니다. 때론 죽음의 위협을 당하기도 하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갈림길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몰라 허둥되기도 합니다. 그때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성령은 세상의 권한을 내려놓고 하늘의 권한을 사용하도록 사용하도록 하십니다.
이때, 외적으로 공격이 오는 듯 하나 우리 내면이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역사함과 동시에 악한 영이 함께 작용하기에, 우리 내면에 계속된 다툼이 일어납니다. 세상의 권한을 사용할지, 하늘의 권한을 사용할지 갈등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왜 옳으며, 이것을 앞으로 행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지난주 용기와 지혜가 무엇인지 말씀드렸지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용기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내적으로 갈등하는 과정은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이 과정을 무시하면,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속해 있지 않다고 하면서, 실상은 그 누구보다 이 땅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의 누룩인 위선에 물든 사람입니다. 이 땅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실상 이 땅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어려움이나 문제가 없다면, 바로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아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가만히 놔둔다면 뭔가 이상한 것입니다.
내적인 갈등은 삶의 십자가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라 했습니다. 내 양은 반드시 양의 문인 나를 통과한다 했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인 십자가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의 문을 거치지 않았다면, 양을 훔치러 담장을 넘어간 늑대와 같은 이들입니다. 물론 누구나 완벽할 수 없습니다. 위선적인 모습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자인 우리 성도에게는 십자가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십자가를 통한 내적인 갈등이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의 선한 양심을 깨우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지함으로 승리하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의 위선과 교만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 십자가
이 과정을 14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또 그는 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성령은 우리 안에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예수님께 무언가를 건너 받아서 우리에게 주신다고 합니다.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이 세상에서 부귀공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저주받았다 말하는 나무에 달려서 높이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예수님의 영광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십자가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땅의 권세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손과 발을 나무 십자가에다가 못 박아서 꼼짝 못 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을 이 땅이 아니라 하늘로 향하게 만드십니다. 우리의 영의 눈을 열어서 하늘의 권한만을 사용토록 하십니다.
우리는 나의 영광을 추구하는데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나의 영광을 추구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결국 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한편으론 성령의 삶을 살지만, 한편으론 악한 영의 삶을 살 수 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물론 전적으로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지 못하는 연약함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내 영혼이 누구의 주도권 아래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도권이 성령에게 있으면,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져도 결국 성령이 이끄시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어떤 목적을 두고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지를 살펴보면 그 사람이 누구의 주도권 아래에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무엇을 선택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일을 합니까? 어디로 가야 합니까? 확신을 달라고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지요. 물론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령께 주도권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을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나를 이끌고 가고 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세상의 일이라도 성령이 나를 이끌고 가신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악한 영이 이끌고 가면 나의 위선과 교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주신다
결국 보혜사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15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다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이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의 소유가 다 나의 것이라 하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 되신 것은 뜻에 있어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뜻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 뜻대로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보혜사 성령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은 우리에게 그 뜻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필요한 까닭은 우리의 삶의 목적과 이유를 알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결핍과 고통, 불만족한 처지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 모든 것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세상에 결핍을 채운 들 우리가 완전히 만족할 수 있습니까? 돈을 채운들, 권력을 채운들 우리는 더 목마를 것입니다. 나의 삶의 이유와 목적을 발견한다면, 그리고 이것이 절대적인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그 어떤 어려움과 결핍에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지식이 아니라 이끄시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너의 길은 이거야라고 문자적으로 미리 말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말해준들 그렇게 살아가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그 뜻을 따라 살아가면서 체득하는 것입니다. 인도하다는 말의 그리스어는 호데게오ὁδηγέω로 길이란 뜻인 호도스ὁδός와 이끌다인 아고ἄγω의 합성어입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자 인도하실 때에는 반드시 그 길을 따라 걷게 하십니다. 보혜사로서 옆에서 그 길을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아는 것보다 매 순간 그 길을 걸어가는 과정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이끄시는 길을 걸어갈 때 필연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인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을 광야로 이끈 것이 성령이듯, 성령은 우리 역시 세상이 고난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물과 불이 내리치고, 창과 화실이 공격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 죽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주님이 높은 산성 내 방패 되시기에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홍해를 건널 때 애굽 군대가 쓸려간 것처럼 우리 대신 악한 영이 물과 불로 쓸려갈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물맷돌에 쓰러진 골리앗이 자기 칼에 목이 베인 것처럼 세상 원수가 자기가 던진 창과 화살에 쓰러질 것입니다. 바로 이 과정을 거쳐야지 우리가 위선과 교만을 내려놓습니다.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세상의 권한이 아니라 하늘의 권한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 나의 영광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이 귀한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기쁨으로 걸어가시는 모두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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