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77htAdNdPyE&list=PLh4-9uGANmwqFFDrtikFvFalZUeQ0Qldc
사사기 1장 22절-36절 새번역
22 요셉의 집안 역시 베델을 치러 올라갔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다.
23 요셉 가문이 베델을 정찰하였는데, 그 성읍 이름이 전에는 루스였다.
24 정찰병들이 그 성읍에서 나오는 한 사람을 붙들고 말하였다. "성읍으로 들어가는 길이 어디인지 알려 주십시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25 그 사람이 정찰병들에게 성읍으로 들어가는 길을 일러주니, 그들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을 칼로 무찔렀다. 그러나 그 남자와 그의 가족은 모두 살려 보냈다.
26 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으로 가서 한 성읍을 세우고, 그 이름을 루스라 하였는데, 오늘날까지도 그 이름으로 불린다.
27 므낫세 지파가 벳산과 그 주변 마을들과, 다아낙과 그 주변 마을들과, 돌과 그 주변 마을들과, 이블르암과 그 주변 마을들과, 므깃도와 그 주변 마을들에 사는 주민을 몰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들은 그 땅에서 살기로 마음을 굳혔다.
28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강성해진 다음에도 가나안 사람을 모조리 몰아내지 않고, 그들을 부역꾼으로 삼았다.
29 에브라임 지파가 게셀에 사는 가나안 사람을 몰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이 아직도 게셀에서 그들 가운데 섞여 살고 있다.
30 스불론 지파가 기드론의 주민과 나할롤의 주민을 몰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살면서 부역꾼이 되었다.
31 아셀 지파는 악고의 주민과 시돈의 주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벡과 르홉의 주민을 몰아내지 못하였다.
32 아셀 지파가 그 땅의 주민인 가나안 사람과 섞여 산 까닭은,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33 납달리 지파는 벳세메스 주민과 벳아낫 주민을 몰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인 가나안 사람과 섞여 살면서, 벳세메스와 벳아낫 주민을 부역꾼으로 삼았다.
34 아모리 사람은 단 지파 자손을 힘으로 산간지방에 몰아넣어, 낮은 지대로 내려오지 못하게 하였다.
35 그리고 아모리 사람은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살기로 마음을 굳혔으나, 요셉 가문이 강성하여지니, 그들은 요셉 가문의 부역꾼이 되었다.
36 아모리 사람의 경계선은 아그랍빔 비탈에 있는 바위에서부터 그 위쪽이다.
장자 에브라임 지파
오늘 본문은 사사기 1장 후반부 말씀입니다. 전반부에서 이스라엘의 영적 장자인 유다 지파의 활약을 보았습니다. 스스로 전쟁을 치를 수 없었던 시므온 지파와 겐 족속을 도와 가나안 정복의 사명을 감당하는 리더십을 보였습니다. 특히 갈렙과 그 사위 웃니엘이 소명에 충성하자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명과 복이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두가 다 소명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현실과 타협하고 안주함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에브라임 지파를 중심으로 나머지 지파들이 벌린 가나안 정복 전쟁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들이 치룬 가나안 정복 전쟁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럼 에브라임 지파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적인 장자 유다 지파와 비견되는 지파가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둘째 아들입니다. 르우벤이 장자로서 자격을 잃은 후, 야곱에게 장자로 인정받은 이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라헬의 난 자식 중 맏이이기도 하고, 그리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야곱의 가족을 안전하게 애굽 땅 고센으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요셉이 어릴 적 꾸었던 꿈처럼, 집안의 가장 큰 자로서 모든 형제들에게 절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요셉이 가진 야곱의 집안의 장자 지위를 에브라임이 물려받은 것입니다. 요셉에게 므낫세라는 첫째 아들이 있음에도 에브라임이 장자 지위를 물려받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야곱은 생애 마지막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면서, 두 손을 교차해서 축복합니다. 장자권을 상징하는 오른손을 에브라임에게, 그리고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에 얹고서 축복을 하였습니다. 요셉은 깜짝 놀라서 손을 다시 바꾸려 하였지만, 야곱은 이것이 옳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뜻임을 각인시킵니다. 요셉도 더는 말을 못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릅니다. 이로서 에브라임은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나를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인데, 아마도 요셉이 애굽 땅에서 총리가 된 후 축복 가운데 낳은 자식이었을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이름 그대로 많은 축복을 받습니다. 가나안의 중심 요충지이자 기름진 땅을 배정받았습니다. 많은 것을 받았다면 많은 것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주신 까닭은 장자로서 소명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에브라임 지파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육적인 장자권은 아버지 요셉을 통해 받아 왔지만, 집안에 실질적인 장자로서 책임을 다하여 얻게 되는 진정한 영적 장자권은 얻지 못했습니다.
요셉 가문의 벧엘 정복
오늘 본문을 보시면 에브라임 지파의 정복 전쟁 이야기가 나옵니다. 형제는 위대하다고 해야 할까요? 에브라임은 형제 므낫세 지파와 함께 벧엘 전투를 치르러 올라갑니다. 다른 지파들이 부러워할만하지요. 성경은 이것을 요셉 가문이 올라갔다고 말합니다. 지파가 아니라 가문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벤네이בְּנֵי가 아니라 베이트בֵית인데, 영어로 표현하면, sons가 아니라 house입니다. 이게 급이 다른 것입니다. 지파가 아니라 가문이라 말한 것은 요셉 형제들은 마음만 먹으면, 둘이 합하여 따로 자신들이 한 족속이나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대단한 집안을 가리켜 명문 가문이라는 말을 쓰잖아요. 가문의 영광을 받은 지파입니다.
벧엘 정복 전투도 하나님은 축복해주십니다. 22절을 보시면, 이들이 힘을 합하여 올라가니 야훼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이미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그냥 올라가서 차지하면 됩니다. 그것도 가나안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지 벧엘입니다. 야곱이 형을 피해 집을 떠날 때, 하나님께 복을 빌었던 곳이고,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다시 가나안에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정착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중요하고 상징적인 장소를 배정받고 정복하러 가는데 얼마나 기세 당당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세와 힘에 비해서 전투하는 모습이 좀 폼이 나지 않습니다.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지 못해서 허둥되었던 것입니다.
벧엘을 정복하기 위해 사람을 의지하다
입구를 찾지 못했다면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그냥 처음 기세로 성벽을 넘어 타고 진격하거나 아니면 신중하게 하나님께 물어보면 되는데, 성에서 나오는 사람을 붙잡고 어디로 들어가면 되는지 물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그 사람이 성읍에 대한 정보를 주어서 벧엘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보를 받는 대신 이 사람과 가족을 벧엘에서 안전하게 떠나게 해 주겠다고 약속을 한 것입니다. 벧엘 정복 전투는 가나안 입성시 처음으로 치룬 여리고성이 경우와 비슷한 모습이긴 합니다. 이것을 그냥 비판 없이 보면 여리고성 전투처럼 정탐꾼을 활용해서 지혜롭게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맥락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여리고성의 경우 정탐꾼들이 성 안으로 직접 침입을 합니다. 그리고 정탐꾼에게 정보와 안전을 제공한 라합이 직접 나서서 적극적으로 도와줍니다. 라합은 애초에 여리고가 망할 줄 알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구원받길 원했습니다. 이후에 라합은 이스라엘 유다 지파의 남자와 결혼하여서,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경우는 여리고 성의 라합과는 다릅니다. 이 사람은 애초에 귀순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안전을 보장받은 다음 가나안의 강력한 족속 중 하나인 헷 족속에게로 가서 루스라 불리는 또 다른 성을 세웠습니다. 루스는 벧엘의 다른 말로, 이 사람은 벧엘을 재건한 것입니다. 이것은 벧엘이 완전히 이스라엘의 손에 넘어간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한 사람을 살려준 것이 비롯 사소한 일로 보일지 모르지만, 가나안 사람을 모두 다 내쫓아 버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완전히 순종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소명에 태만한 에브라임 지파
에브라임 지파는 벧엘을 점령한 이후로는 특별히 눈에 띄는 정복 전쟁을 벌이지 않습니다. 전략적 요충지이며 풍요로운 땅인 벧엘과 그 인근만 점령했을 뿐 다른 땅을 점령하는 데는 매우 태만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지파를 도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요셉 가문 중 므낫세 지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도 전쟁을 치르는데, 이들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는 기록이 27절, 28절, 29절에 걸쳐 3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을 하나도 살려 두지 말고 진멸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소명에 태만한 자세로 임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문제가 생깁니다. 27절 후반부를 보시면, 가나안 족속 사람들이 그 땅에서 살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말합니다. 이제 완전 정복이 어렵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책임입니다. 처음부터 완전히 몰아낼 각오를 했으면, 가나안 족속은 버티지 못하고 떠나갔을 것입니다. 강하게 보이던 상대가 약하게 나오고 나름 여지가 생기니 버티면 되겠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나름 가나안 사람들도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볐을 것입니다. 요셉 가문 입장에서는 이렇게 갑자기 상대가 강하게 나오니깐 오히려 주춤하게 된 것입니다. 상대가 죽기 살기로 나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럼 나는 아예 살기를 포기하면 됩니다. 죽으면 그러면 이깁니다. 사실 이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내는 방식입니다. 세상에서 어정정하게 살려고 하니깐 죽도 밥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28절 말씀을 보면, 심지어 이스라엘은 가나안 보다도 강성하게 된 이후에도 자신들의 삶의 안락과 유익을 위해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고 노역을 시켰습니다. 가나안 사람을 종으로 삼은 것은 남김없이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명보다 인간적인 계산이 앞서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타협과 불순종의 모습은 요셉의 가문뿐만 아니라 다른 지파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30절 이하를 보시면 가나안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다는 표현이 4번이나 반복됩니다. 장자로서 본을 보이지 않자 다른 지파들도 따라한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과의 공생
이러한 결정은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에서의 삶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가나안 족속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물론 인간 사회에서는 당연히 서로를 존중하고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썩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레위기 19장 19절을 보면, 너는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섞는 것을 금합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도 섞지 말라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완전히 지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완전히 지킬려면 입을 옷이 없고 먹을 곡식이 없을 것입니다. 신앙의 형식에 있어서 문화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전도를 위해서라도 동시대의 요구에 반응하여 함께 호흡해야 합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새로운 옷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외적인 부분들은 세상으로부터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합니다. 물론 문화적 요소와 본질적 요소의 구분하는 것은 어렵고 힘듭니다. 그리고 시대와 환경, 심지어 민족과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 타협하거나 섞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각 사람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결코 타협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소명은 가나안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을 모두 쫓아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여기서 타협하면, 이로 인한 책임을 이스라엘이 다 져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게 됩니다 그 징계가 사실 자신들이 뿌린 씨의 쓴 열매를 먹는 것입니다. 자기 세대뿐만이 아니라 대대손손 두고두고 후회하는 올무가 됩니다.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한 결과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의 우상들을 섬기게 되었고 영적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소명을 타협하고 세상 욕심과 섞으면 반드시 치명적인 문제로 돌아옵니다.
이 부분이 신앙의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세상과 어떤 부분에서 얼마만큼 타협할 것인가? 그리고 나름 기준을 정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배타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믿는 자들이 필연적으로 안고 가야 하는 짐입니다. 하나님과 언약 백성이 된 사람으로서의 운명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시내산 언약을 통해 제사장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혼인을 한 사이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신랑이신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으면 언약 백성의 경우는 계약 위반인 것입니다.
좋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사사기 1장은 요셉 가문 이외의 다른 지파들의 정복 전쟁을 소개하고 끝나게 됩니다. 먼저 아셀지파와 납달리 지파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요셉 가문처럼 강력하지 못했습니다. 분배 받은 땅의 일부분은 차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그 지역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가나안 사람들에게 쫓겨 변방으로 밀려난 것입니다. 이들이 받은 땅은 팔레스타인 중에서 가장 기름진 북쪽 해안가에 위치한 누구나 탐낼 만한 좋은 땅을 받았습니다. 처음에 분배받을 때에는 너무나 좋아했을 것입니다. 유다지파는 받은 남쪽 사막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차지하려고 하니깐 보통 일이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아셀 지파와 납달리 지파는 그 대가는 치르기는 싫고 힘든 것입니다. 그 땅을 차지하고자 수고하거나 노력하지 않은 것입니다.
좋은 것을 받았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다른 사람도 좋아합니다. 좋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만큼 큰 희생이 필요합니다. 요즘 시대에는 학생들 누구나 의사가 되고 싶어 하지요.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고통을 참으려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비굴하게 행동합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테니 어디 안 쓰는 땅 조금 달라고 해서 셋방 살이를 한 것입니다. 눈에 보기에는 좋은 떡입니다. 겉만 번지르한 삶입니다. 기름진 땅에서 난 추수한 좋은 곡식은 가나안 이방 족속들이 다 먹고 아셀과 납달리 지파 사람들은 그저 쳐다만 보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셀과 납달리는 자기 그릇 이상의 땅을 배분받은 것입니다. 자기 그릇을 알고 그 그릇에 맞게 행동하는 것도 복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지요. 외국에 가면 좋을까? 제주도에 가면 좋을 것 같은가? 그런 좋은 곳에 살면 좋겠다 하고 이주를 하면 비싼 물가와 집세로 거지로 삽니다. 내 땅과 내 터전에서 주인답게 사는 게 더 좋은 것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은 최악을 최선으로 바꾼다
마지막으로 최악의 경우가 있습니다. 단 지파입니다.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이 거주하던 지역을 배분받습니다. 가나안에는 7개의 큰 족속이 있었습니다. 그중 아모리 족속이 대표로서 철병거로 무장한 강력한 족속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다른 말로 아모리 족속의 땅이라 불렀습니다. 이들이 너무 강력하기에 단 지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모리 족속은 단 지파에게 선제적으로 공격합니다. 단 지파를 산 위로 몰아서 고립시켜 버립니다. 단 지파 사람들은 지파 안에 작은 집안으로 나누어져 각각 산속으로 숨어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좋게 말하면 게릴라지, 화전민처럼 떠돌아다니며 먹을 것도 없이 비참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이게 가장 저주받은 경우입니다. 그렇게 좋은 땅도 아닐뿐더러, 그 땅에 마주한 세력이 너무나 강력했습니다. 단 지파는 하나님께 저주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을 제비 뽑았을 때에도 재수가 없다 생각했고, 실제로 마주하니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땅이 단 지파에게 주어진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번 생은 끝났다고 생각될지라도 소망을 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면 분명히 감당할 힘을 주십니다. 사명은 그 크기와 관련이 없습니다. 크든 작든 감당하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단 지파가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셨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삼손입니다. 삼손이 바로 단 지파 사람입니다.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영웅을 주셨습니다.
만약 단지파가 사명을 치르다 우리 다 죽자 했으면,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행하셨을 것입니다. 삼손 같은 이를 몇백 몇천을 보내시던지, 아니면 나머지 지파들이 우리 형제 하나가 사라질지 모른다 생각하게 만들어 단 지파를 돕고자 모두 몰려오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단 지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듯, 믿음을 가지고 뭐라도 행했어야 합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소명에 대한 문제입니다. 앞선 지파들도 소명이 흔들리니깐 인간적인 계산이 들어와서 적당한 타협을 하였습니다. 소명이 흔들리니깐 세상 욕심이 들어오자 바로 포기를 하였습니다. 결국 단지파는 자신에게 분배받은 땅을 떠나서 이스라엘 최북단 라이스라는 곳을 점령하여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후로 단 지파는 성경에서 그 흔적을 찾아보지 못합니다.
세상 욕심으로 소명을 내던지지 말라
정말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다가 실패하는 것과 지래 짐작하고 포기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실패해도 기다리면서 반복하면 됩니다. 가장 문제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고 게으르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세상이 우리의 목숨을 노릴 때가 있습니다. 신앙을 문제 삼아 죽이고자 덤빕니다. 그래서 정말 죽을 수 있습니다. 순교할 수 있습니다. 그때, 생명과 소명 이 둘만 남아 있다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소명입니다. 기꺼이 생명을 버림으로 우리는 저항할 수 있고, 저항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숨보다 더 중한 것이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명을 빼앗으려 한다면, 죽기로 작정하고 덤벼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의 별과 같은 참된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시대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하찮은 세상 욕심으로 신앙을 타협하고 소명을 내던집니까. 조금 편하자고, 좀 더 세상살이에 유익하다는 것으로 우리 소명을 옆으로 비켜 두거나 아니면 쓰레기 통에 던저 버리지 않습니까?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렇게 소명을 내어준다면, 그 뿌린대로 너무나 쓴 열매를 먹게 됩니다. 나만 아니라 우리 자손들도 먹게 되는 것입니다. 목숨보다 더 중한 소명, 나의 영원한 기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잡는 모두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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