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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사사기 2장 11절-23절 소명에 집중할 때 인생의 저주받은 패턴을 깰 수 있다

by 알렉스강 2024. 5. 23.

https://www.youtube.com/watch?v=z6bpbxaKvKc

 

 

사사기 2장 11절-23절 새번역

11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 신들을 섬기어,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행동을 일삼았으며,
12   이집트 땅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신 주 조상의 하나님을 저버리고, 주위의 백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따르며 경배하여, 주님을 진노하시게 하였다.
13   그들은 이렇게 주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
14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분노하셔서, 그들을 약탈자의 손에 넘겨 주셨으므로, 약탈자들이 그들을 약탈하였다. 또 주님께서는 그들을 주위의 원수들에게 팔아 넘기셨으므로, 그들이 다시는 원수들을 당해 낼 수 없었다.
15   그들이 싸우러 나갈 때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맹세하신 대로, 주님께서 손으로 그들을 쳐서 재앙을 내리셨으므로, 그들은 무척 괴로웠다.
16   그 뒤에 주님께서는 사사들을 일으키셔서, 그들을 약탈자의 손에서 구하여 주셨다.
17   그러나 그들은 사사들의 말도 듣지 않고, 오히려 음란하게 다른 신들을 섬기며 경배하였다. 그들은 자기 조상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걸어온 길에서 빠르게 떠나갔다. 그들은 조상처럼 살지 않았다.
18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돌보시려고 사사를 세우실 때마다 그 사사와 함께 계셔서, 그 사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하여 주셨다. 주님께서, 원수들에게 억눌려 괴로움을 당하는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19   그러나 사사가 죽으면 백성은 다시 돌아서서, 그들의 조상보다 더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르고 섬기며, 그들에게 경배하였다. 그들은 악한 행위와 완악한 행실을 버리지 않았다.
20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노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과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21   그러므로 나도,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도 남아 있는 민족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더 이상 몰아내지 않겠다.
22   이렇게 하여서, 이스라엘 백성이 나 주가 가르쳐 준 길을 그들의 조상처럼 충실하게 걸어가는지 가지 않는지를 시험하여 보겠다."
23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을 얼른 몰아내지 않고, 그 땅에 남아 있게 하셨으며, 여호수아에게도 그들을 넘겨 주지 않으셨던 것이다.

 

Samson

 

이스라엘 백성의 저주받은 패턴

사사기에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이는 저주받은 패턴이 있습니다. 네 단계로 이어지는데, 범죄, 형벌, 탄식, 구원이라는 순환고리입니다. 이 패턴은 단순히 반복되는 것만이 아니라, 주기가 반복될수록 그 강도가 세어집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빨리 끊어내어 벗어나는 것이 중요할 텐데, 문제는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전에 겪은 일을 망각하고 또다시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의 잘못과 그로 인한 고통, 그리고 그 가운데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니깐 또다시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사사기 전체에서 2장 이후로 이 패턴이 6번이나 반복됩니다. 숫자가 6이라 함은 인간과 짐승의 숫자로 이 땅을 의미합니다. 이 땅에서의 인간의 삶이 결국 이 어리석은 순환의 패턴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겠지요.

 

범죄를 저지르고 형벌을 받고, 이후에 탄식한 다음 구원받는 과정이 챗바퀴처럼 반복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다시는 넘어지지 않겠다 다짐하지만, 또 다시 넘어지는 연약한 우리의 신앙생활의 단면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연약해서만일까요?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르듯, 변덕스럽고 신실하지 못한 우리 인간의 악한 본성일 것입니다. 사람이 들어갈 때 다르고 나갈 때 다르다고 하지요. 다급할 때에는 완전히 엎드려 꿇었다가도 위기를 벗어나면 언제 그랬는가 하는 게 사람의 심보입니다. 이게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어떤 반복적인 죄의 패턴 속에 있습니까? 우리 자신을 한번 살펴보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내버려 둠이다

오늘 본문에서 성경기자는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급격하게 신앙이 쇠퇴했다고 말합니다. 불과 한 세대가 지났을 뿐인데, 그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과 같은 가나안 땅의 신들을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가나안에 동화되면서 영적 암흑기를 보내게 됩니다. 어찌 보면 이렇게 변할 줄 아셨는지, 하나님은 타락한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기 위해 가나안 땅에 많은 민족들을 남겨 두셨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남겨두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쫓지 않은 것입니다. 이들이 이스라엘의 원수와 대적이 되어 고통을 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는 단순합니다. 적극적으로 벌을 준다기보다는, 그냥 가만히 보고만 계시는 것입니다. 함께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바로 무관심이 형벌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는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전쟁에 나가게 되면 반드시 적군에게 패배했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고 그들의 노예가 되고, 그리고 이방 민족의 지배를 받아 고된 노역과 조공을 바쳐야 했습니다. 다시 애굽의 삶이 반복되었니다.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한 비참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

이렇게 고통을 당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슬피 울기 시작합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에는 가만히 있다가, 범죄로 인한 형벌이 시작되자 하나님께 탄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박과 고통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눈물로 부르짖으며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셔서 사사를 세워주십니다. 이 사사를 세워서 대적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냥 이스라엘을 버리면 되는데, 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일까요? 18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돌보시려고 사사를 세우실 때마다 그 사사와 함께 계셔서, 그 사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하여 주셨다. 주님께서, 원수들에게 억눌려 괴로움을 당하는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괴로움으로 슬피 부르짖는 이스라엘의 탄식을 들으시고 외면치 않으신 것입니다.

 

돌이킨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런데 여기서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합니다. 뭔가 문제가 생겨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이 된 잘못한  사람이 돌이키는 것이 맞지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경우는 언약에 있어 잘못한 쪽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악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돌이킨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일반적으로 회개를 돌이킴이라고 말하지요. 그럼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겉으로는 울며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회개한 것은 아닙니다. 19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사가 죽으면 백성은 다시 돌아서서, 그들의 조상보다 더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르고 섬기며, 그들에게 경배하였다. 그들은 악한 행위와 완악한 행실을 버리지 않았다.”

 

잠시 잠깐 돌아설 수 있으나, 하나님이 구원하시면 바로 다시 돌아서서 그 조상보다 더 타락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돌이켜 악한 행위와 완악한 행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탄식이 회개로 인한 부르짖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돌이켜 부르짖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고통으로 인해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결국 잠시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었다가 항상 뜻을 돌이켜 구원의 손길로 잡아주신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잘못한 사람은 가만히 있고, 잘못이 없는 사람이 힘과 돈을 쓰면서 해결하는 모양입니다. 바로 이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잘못한 사람이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언약 관계인 이스라엘이 약속에 충실하면 됩니다. 이것은 우리도 동일합니다. 인생의 문제가 찾아올 때,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충실하면 됩니다. 세상을 향한 나의 갈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고난이 찾아오면 어떻게 합니까?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부르짖습니다. 지금 당장 당하고 있는 고통이 감당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탄식하다가 그 고난이 지나면 또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죄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소명대로 살지 않으면 고난이 멈추지 않는다

인생의 고난이 지속될 때, 반드시 점검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다른 길로 걸어갈 때, 반드시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이 돌이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돌이켜야 합니다. 내가 완전히 돌이킬 때, 인생의 고난은 멈추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저주받은 인생의 패턴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소명을 따라 살아갈 때, 그에 따른 고난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의 고난은 고통이 아닙니다. 소명으로 인한 고난은 능히 감당할 수 있을뿐더러 오히려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소명을 따르지 않으면, 아무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온갖 좋은 것을 가지고 누릴지라도 참된 마음의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숙명과도 같습니다. 내가 돌이켜서 소명에 집중하면, 놀랍게도 지난 시간 나를 괴롭혔던 번뇌가 멈추게 됩니다. 결국 고난이라는 게 외부에 있지 않고 내 마음의 문제인 것을 알게 되지요. 소명에 집중하지 못했기에 마음이 괴로웠던 것입니다.

 

사사를 세우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이키고자 고난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사를 보내십니다. 강력한 신앙 지도자를 세우심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하셨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 생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야훼 신앙 안에서 백성들을 강력하게 이끌 신앙 지도자가 있을 때에는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만약 사사가 없을 때에는 믿음의 대열이 무너지면서 금방 타락하였습니다. 또한 사사가 있더라도, 사사가 온전치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은 했지만, 평화로울 시기에 말씀으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기드온이 있지요. 기드온은 미디안 족속에게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할 때, 이스라엘을 하나로 뭉쳐서 삼백의 용사만을 가지고 물리쳤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뒤,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달라는 유혹은 물리쳤지만, 탈취한 금고리로 에봇을 만들어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려 했습니다. 기드온은 말로는 왕이 아니지만 왕처럼 행동했습니다. 아내를 많이 두어서 아들이 칠십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중에 세겜에 있는 첩의 아들이 아비멜렉인데, 이 이름의 뜻이 내 아버지는 왕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이 아비멜렉이 기드온의 아들을 죽이고 왕노릇하려다가 이스라엘을 비극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세우더라도 한계가 있도록 하셨습니다. 사사조차도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의 저주받은 순환 패턴, 즉 범죄, 형벌, 탄식, 구원이라는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치 가나안 땅에 가나안 족속을 남겨두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돌이켜 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신앙에는 반드시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을 하지 않으면, 결국 더 심해지면 심해지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귀신의 경우처럼, 쫓겨나갔던 귀신이 자기 힘으로 그 집을 차지 할 수 없다는 걸 알자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 그 집을 점령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 심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경험하면 할수록, 더 크게 타락하고 우상에게 돌아갔습니다. 극은 극을 부른다고 이 극단의 상태는 더욱 심해집니다. 사사기가 진행될수록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은 더 심해지고, 사사들도 더 흠이 많아지고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사들이 가져오는 구원과 회복도 갈수록 제한적이고 더 약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사 시대 후반기에 나오는 사사들은 사사기 첫 시대의 사사에 비하면 사사라기보다는 세상에서 자기 공명을 떨치기 위해 나선 인간적인 영웅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사조차도 좀처럼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오늘 말씀에서 사사기에서 반복되는 패턴이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타락, 거듭되는 우상숭배, 그렇게 다른 신들에게 빠진 이스라엘을 생각하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왜 저러는 걸까? 왜 저렇게 징글징글하게 반복하는 걸까?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런 패턴을 반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다른 신들로 교체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 신들을 섬기고 동시에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바로 이러한 자기 취사적이고 혼합적인 신앙이 타협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러한 적당주의가 무서운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게 가장 쉽고 편하니깐 돌아오는 것입니다. 마치 고무줄을 탱탱하게 당기더라도 잠시 놓아버리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목적으로 두지 않고 도구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항상 도움과 기적만을 주는 부적과 같은 존재이길 원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개입하시는 주권자는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늘 팽팽하게 긴장된 고무줄처럼 살아가게 만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는 너무 부담스러운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을 항상 생각해야 하기에, 때론 손해를 봐야 하고, 욕심을 너무 부려서는 안 됩니다. 잠시 쉬는 것은 괜찮지만, 퍼질러 자거나 게으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원하시기에, 모든 영역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느슨해지면, 바로 그 틈을 사단이 놓지 않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다 풀어져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소명을 향해 줄기차게 달려 나가는 경주와도 같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은 이 믿음의 경주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되어 그것을 잡기 위해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다메색 도상에서 회심한 이후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서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세우긴 어려워도, 한번 놓쳐버리면 금방 무너져 버립니다. 모래성을 쌓지 마시고 반석 위에다 굳건한 믿음의 집을 지으십시오. 마지막 주어진 날까지 늘 깨어 있어서 하나님께로 돌이켜 달려간 믿음의 여정을 끝까지 완수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