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사기

사사기 1장 1절-10절 소명이 사라지면 천국도 지옥이 된다

by 알렉스강 2024. 5. 14.

https://www.youtube.com/watch?v=zsVXQs1QspA

 

 

사사기 1장 1절-10절 새번역

 

1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 여쭈었다. "우리 가운데 어느 지파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워야 합니까?"
2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유다 지파가 먼저 올라가거라. 내가 그 땅을 유다 지파의 손에 넘겨 주었다."
3   그 때에 유다 지파 사람들이 자기들의 동기인 시므온 지파 사람들에게 제안하였다. "우리와 함께 우리 몫으로 정해진 땅으로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을 치자. 그러면 우리도 너희 몫으로 정해진 땅으로 함께 싸우러 올라가겠다." 그리하여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와 함께 진군하였다.
4   유다 지파가 싸우러 올라갔을 때에, 주님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셨으므로, 그들은 베섹에서 만 명이나 무찔렀다.
5   그 곳 베섹에서 그들은 아도니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무찔렀다.
6   그들은 도망치는 아도니베섹을 뒤쫓아가서 사로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라 버렸다.
7   그러자 아도니베섹은 "내가 일흔 명이나 되는 왕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라 내고, 나의 식탁 밑에서 부스러기를 주워서 먹게 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가 한 그대로 나에게 갚으시는구나!" 하고 탄식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끌려가서 거기에서 죽었다.
8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치고 점령하여, 그 곳 주민을 칼로 죽이고, 그 성을 불태웠다.
9   그 다음에 유다 자손은 산간지방과 네겝 지방과 낮은 지대로 내려가서, 거기에 사는 가나안 사람과 싸웠다.
10    유다 자손은 헤브론에 사는 가나안 사람을 쳤다. 헤브론은 전에 기럇 아르바라고 불리던 곳이다. 거기에서 그들은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무찔렀다.

 

Moses and the Messengers from Canaan, Giovanni Lanfranco, oil on canvas

 

 

어두운 시대를 이겨내는 유일한 힘인 소망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의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시대가 어려울 때, 신앙인들은 구약의 사사기 시대와 같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믿음이 흔들리고, 교회가 어려움에 처할수록 그렇습니다. 사사기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여러 시간들 중 어느 때보다 더 어둡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이름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서 그리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잘 될 때도 있지만 잘 안될 때도 있습니다. 몇몇 분들은 어릴 적 부모님이 사업이 잘 되다가 갑자기 망해서 가족이 어려움을 겪은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가난해도 가족이 화목하면 괜찮을 텐데, 가난하면 이상하게도 가족이 싸우게 됩니다. 돈이라는 안전장치가 사라지니 본심이 드러난 것일까요? 어쨌든 힘드니깐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어도 한 가지만 있으면 가족이 한 마음이 되어 견뎌낼 수 있습니다. 바로 소망입니다. 만약 소망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소망만큼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는 소망이 참으로 강조됩니다. 이 땅을 살아가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권면합니다. 만약 소망이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 기독 신앙이 아닙니다. 아무리 비관적이거나 어려운 일이 있어도 결국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르칩니다. 십자가를 말할 때에도 십자가만이 아니라 부활을 함께 말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십자가 이후에 부활이 있음을 소망함으로 우리는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대와 다른 가나안 땅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따라 애굽을 벗어나 민족의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가혹한 바로의 압제를 벗어나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광야는 애굽의 삶보다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고 잘 곳도 없었습니다. 머물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동해야 했습니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을 매번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을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을 붙들고 광야 40년 생활을 버텨서 결국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가나안 땅은 소망한바 그대로 풍요롭고 행복만 가득한 곳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반대였습니다. 평안하지 못하고 안녕치 못했습니다. 히브리어로 샬롬이란 말이 있지요. 평화를 뜻합니다. 샬롬의 반대말이 무엇이겠습니까? 히브리어로 미카마מלחמה, 우리말로 전쟁입니다. 말 그대로 삶이 전쟁이었다는 것입니다. 광야는 마음이라도 편했는데, 어느 한 순간도 편하지 못하니 이게 뭔가 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심경이 어떠했을까요? 한마디로 낚였다, 속았다, 당했다 생각했습니다. 설마 했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할 수 있나 하며 원망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로 광고를 보고 상품을 구입하죠. 광고의 내용이나 사진을 보면 무척 좋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꼼꼼한 분들은 댓글도 살펴보며 나쁘지 않은지 확인을 하지요. 그렇게 구입을 했는데, 아 역시나 아니라 다를까 별로였습니다. 댓글도 알바였네. 만약 반품도 되지 않으면 어떨까요? 그냥 돈과 시간을 날린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 땅 들어왔는데, 이곳이 천국인 줄 알았는데 별거 없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

사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실망했다면, 이들이 어리석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역사 공부를 잘했어도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생각해 봅시다. 아브라함은 내 아비 친척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땅과 자손을 줄 것이라 약속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에 따라 도착한 곳이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서 아브라함은 본처인 사라의 배에서 난 약속의 자식은 단 하나 이삭이었습니다. 땅도 자신과 아내의 무덤으로 쓰기 위해서 헷족속 에브론으로부터 은 사백 세겔로 산 막벨라 굴 하나였습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땅과 자손으로 가나안에 들어간 복을 생각한다면,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께 속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땅과 자손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도착해서 여러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면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노년에 가나안 여러 족속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됩니다. 아브람이 원래 이름이었으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이름대로 많은 나라와 민족의 아버지가 됨으로 인해서 영적으로 볼 때 많은 땅과 자손을 가진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참된 목적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곳 가나안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으로 부르신 것은 그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이 소명은 다름 아니라 광야에서 맺어진 시내산 언약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다른 민족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특별한 은혜가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하지만, 쌍방의 약속이라 이스라엘 백성도 감당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통로가 된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민족을 축복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받은 민족으로, 그것을 지켜 행함으로 거룩해야 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세우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야 하는 곳이 가나안 땅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두 가지 임무가 감당해야 했습니다. 첫째는 가나안 땅에 거하는 이민족을 쫓아내어야 했습니다. 바로 정복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가나안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배운 바 대로 광야의 삶을 잊지 말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임무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가피하게 가나안 족속과 더불어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들의 문화와 풍습에 영향을 받고 부족한 부분들은 배우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유목민이었기에 농경문화에 익숙한 가나안 족속의 농사법을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의도는 이해가 되지만, 농사가 풍년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가나안 풍습에 녹아져 있는 이방신을 자연스럽게 숭배하게 됩니다. 이방신 중 대표적인 것이 바알과 아세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기의 기간 동안 각자 자기가 사는 곳에 산당을 세워서 세상의 복을 빌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나, 사실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던 것입니다.

 

땅 분배와 유다지파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때 7년 간 정복 전쟁을 벌입니다. 이후에 가나안 주요 거점지를 차지한 후 땅을 분배받게 됩니다.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각 지파를 대표하는 족장이 모여서 제비 뽑기로 할당된 영토를 받게 됩니다. 땅을 받은 다음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배분받은 땅을 차지해야 했습니다. 점령하는 것을 잘하는 지파가 있고, 잘 못하는 지파가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따르면 12지파 중 가장 잘 한 지파는 유다지파입니다. 유다지파는 많은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배분받은 땅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유다지파도 성공하지 못했다면, 다른 지파는 어떠했겠습니까? 못했으면 못했지 더 힘들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베냐민 지파 경우는 여부스 족속이 거하는 성읍 예루살렘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6절을 보시면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치고 점령하여, 그곳 주민을 칼로 죽이고, 그 성을 불태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자기에게 배분된 땅이 아님에도 유다지파는 예루살렘을 점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는 그 예루살렘을 차지하지 못하고 여부스 족속에서 내어주고 만 것입니다. 결국 예루살렘 완전 정복은 다윗 시대에 이르러 가능했습니다.

 

유다지파는 가장 잘 못하는 지파와 함께 힘을 합쳐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유다 지파 사람들이 자기들의 동기인 시므온 지파 사람들에게 제안하였다. 우리와 함께 우리 몫으로 정해진 땅으로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을 치자. 그러면 우리도 너희 몫으로 정해진 땅으로 함께 싸우로 올라가겠다. 그리하여 시므온 지파가 유다지파와 함께 진군하였다.” 이렇게 유다지파는 시므온을 도왔습니다. 시므온은 유다지파가 움직일 때에만 힘을 내어서 자신들이 받은 몫을 차지했습니다. 사사기 시대를 지나면서 시므온 지파는 결국 유다 지파에 흡수가 됩니다.

 

여호수아의 부재

이렇게 서로 힘을 합쳐 도우면서 배분된 땅을 차지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 했으나, 이스라엘 지파는 한계에 부딪히자 포기한 듯합니다. 그리고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안정된 삶을 위해서 정착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수아 때 가졌던 믿음을 점차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여호수아의 부재라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부재는 단지 리더의 부재만이 아닙니다. 세대를 건너가면서 믿음이 단절된 것입니다. 이것을 사사기 2장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고 그 세대 사람들도 모두 죽어 조상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들이 죽은 뒤에 새로운 세대가 일어났는데,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

 

여호수아와 함께 한 세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믿음을 가진 세대였습니다. 광야의 세대입니다. 물론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실망시킨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들은 생생하게 자신의 삶으로 광야를 지나 가나안을 입성하는 신앙의 성취를 맞보았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세대가 지나자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맛을 잃은 소금이 된 것입니다. 이 정체성이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소명입니다. 모세를 통해 받은 율법을 통해 제사장 민족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이 소명을 잃어버리자 이스라엘 백성은 급속도로 쇠퇴해 간 것입니다.

 

말씀으로 소명을 붙잡아라

소명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우리를 보내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나타내실 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용하십니다. 그중 가장 정확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 당장 무엇이라 알 수는 없지만 궁극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기억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소명을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말씀을 배우고 기억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 말씀이지요. “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야훼이시다. 야훼 한 분뿐이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희 야훼 하나님을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너에게 명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 네 손에 매어 표를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문설주와 대문에 서 붙여라.”

 

이렇게 말씀에 집중하는 목적이 무엇인가요? 바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소명을 끝까지 붙잡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언제 불행한지 아십니까?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소명이 없으면 불행합니다. 아무리 지상 낙원이라도 소명이 없으면 무의미한 지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잠언 29장 18절에서도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하게 행한다" 했습니다. 여기서 묵시란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로, 이 땅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로 하나님 백성에게는 소명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소명이 없는 백성들은 방자하게 행하여 결국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소명

이것을 유다 지파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시므온 지파와 베섹이란 곳으로 싸우러 가서 아도니베섹이라는 이방 족장을 무찔러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그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라 버립니다. 사람이 아무리 힘이 있어도 엄지손가락이 없으면 물건을 잡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엄지발가락이 없으면 달릴 수가 없습니다. 모든 힘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은 바로 아도니베섹이라는 사람이 가진 족장으로서의 소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민족의 족장으로서 끝까지 지켜야 것입니다. 바로 한 민족의 정기인 소명의식을 잘라버려야지, 아도니베섹과 그 이방 족속은 가나안 베섹 땅에서 존속할 수 없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소명을 주셨습니다. 이 소명이 바로 가장 귀한 보화입니다. 어떤 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돈으로 누가 소명을 살려고 한다면 절대 팔지 마십시오. 생명을 위협하더라도 소명을 엿 바꾸듯 바꿀 수 없습니다. 소명이 사라지면, 천국도 지옥이 됩니다. 소명이 사라지면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소명을 잘 지켜 나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십니다. 각자 믿음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소명을 이루어 가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그리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소명이 사라지면, 하나님은 교회에 놔두신 성령의 촛대를 옮겨버리십니다. 우리 모두 함께 믿음으로 이 소명을 지켜나가며, 다음세대에 말씀을 통해서 소명을 잘 전수하는 믿음의 사람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