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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 15장 1절-8절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by 알렉스강 2024. 4. 27.

https://www.youtube.com/watch?v=eqbHVDjcvgQ&t=1086s

 

 

요한복음 15장 1-8절 새번역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말미암아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그는 쓸모 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The Red Vineyard, Painted by Vincent Van Gogh (1853-1890)

 

포도나무의 비유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14장에서 17장까지 이어지는 긴 설교의 한 부분입니다. 이사야 5장에 포도원의 노래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기름진 언덕에서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고,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포도원 한가운데 망대를 세우고 포도주 짜는 곳도 파놓고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기대와 달리 수확한 것이 들포도뿐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포도원 주인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포도나무라는 비유는 구약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에게도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도 구약의 경우에서처럼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말씀하십니다. 농부는 포도원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강수량이 적고 땅이 척박한 팔레스타인의 경우는 농부의 돌봄이 더욱 절실합니다. 거름만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물을 길러다가 부어주어야 합니다. 농부의 수고와 의지에 포도 농사의 승패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이 생존할 수 없듯이, 농부의 돌봄이 없다면 제대로 된 열매를 맺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성실히 수고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포도 농사 전체가 망친 것은 아닙니다. 같은 포도나무에 자라난 가지임에도 누구는 열매를 맺고 누구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 버려진다는 했습니다. 설령 포도 농사가 풍년이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저주받아서 심판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포도나무에 있다고 해도 저주를 받는 사람이 있고 축복을 받는 사람이 있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는 이사야의 포도원 노래보다 더 과격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차별하는 것으로 들리는 이 비유가 당시 이야기를 듣던 몇몇 사람들에게 불편했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포도나무와 같은 넝쿨나무의 경우 나무와 가지가 정확하게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가 나무이고 어디까지가 가지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나무와 가지는 서로에게 속해 있고 연결됨으로써 한 생명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와 가지인 우리는 한 생명을 공유하는 하나의 포도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많고 다양한 가지가 있더라도 그 가지 하나하나가 포도나무에 연결되어서 한 생명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포도 열매

 

머무르다, 메노μένω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모두 같은 한 생명임에도 불구하고 가지마다 열매의 차이가 생겨난다는 것이지요. 가지마다 열매의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머무르다, 지키다, 지속하다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로 메노μένω라는 동사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신약에서 총 118번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 67번, 오늘 본문에서는 11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머무른다는 것은 단순히 외견상으로 붙어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포도나무와 충분히 내적으로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의 원줄기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고 가까이 있으면서,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땅의 영양분을 충분히 받는다는 것입니다.

 

넝쿨나무인 포도나무의 가지는 뻗어나가려는 성질이 강합니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멀리 뻗어가려고만 합니다. 포도나무를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포도열매가 맺히는 가지들은 비교적 덜 뻗어나간 것들이 많습니다. 가지가 굴고 마디 사이가 적절한 간격을 같습니다. 반대로 열매를 잘 맺지 못하는 가자는 지나치게 가지가 생장해서 마디의 간격이 넓을 경우입니다. 이 마디가 중요한 것은 열매나 잎이 새롭게 나는 부분이 싹눈이라 하는데, 각 마디에 싹눈이 위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디를 생명의 단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디가 없으면 싹이 터서 열매가 나지 않지요. 그리고 반대로 마디가 짧으면 잎만 무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지치기나 잎을 정리해 줘서 열매로 양분이 가도록 해야 합니다.

 

마디가 있다는 것은 생명에는 한계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지나쳐서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자랄 만큼 자란 다음 멈추고 그리고 또 허락되면 그만큼 자라나는 것입니다. 생명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 때에만, 적절한 크기의 마디를 가지게 되고 결국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각자 주어진 삶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늘 성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론 잠시 멈추어 서는 성숙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가 있듯이 생명과 죽음은 늘 함께 합니다. 좋고 나쁨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이러한 통찰이 있을 때,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떠나지 않고 가까이하여 머무를 수 있는 것입니다. 뻗어나간다고 해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그릇의 크기를 알고 그 그릇을 채우는데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인생에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용어. 다이어그램 © 2009, VinoDiary.com

 

포도나무 생명 공동체

그래서 농부는 멋모르고 뻗어나가기만 하는 가지를 결국 잘라버리지요. 전체 포도나무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입니다. 마태의 법칙이라고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가진 자는 더 가지고 없는 자는 가진 것도 빼앗기게 된다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에 따라 열매 맺을 가지에 양분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너무 가혹하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살려야 하지 않는가 생각하는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은 상한 갈대도 꺽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좋은 분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하시는 까닭은 그 기준이 생명에 있기 때문입니다. 양질의 포도열매를 많이 수확할 수 있는 방법이 가지치기입니다. 그래야 더 많은 생명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지치기당하는 경우 억울할 수 있지만, 농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더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 포도 농사 전체를 생각한 행동입니다. 앞서 포도나무와 가지가 한 생명체로 연결되었듯이 포도원의 포도나무도 한 그루만이 아닙니다. 포도원 전체의 포도나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농부의 시선은 바로 생명 공동체 전체를 향해 있습니다. 생명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개체로 생각할 수 있으나, 사실 생명은 전체로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개체인 한 생명체만 해도 수십억만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 나온 포도 열매를 보더라도, 포도 한 송이에 여러 방울이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을 전체로 바라본다면, 생명의 대를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생명은 공동체를 이루고 그 공동체가 하나의 군집으로서 자신의 종을 자손을 통해서 이어갑니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그 아들의 아들로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입니다.

 

생명은 한 개체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생명은 대를 통해 이어집니다. 그렇기에 한 개체가 영원히 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생명 전체를 위해서 한 개체가 희생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만약 한 개체가 영원히 존속한다면, 그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기계인 것입니다. 기계는 한 개체가 영원히 존속할 수 있지요. 그렇다고 기계에게 생명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생명이란 필연적으로 삶과 죽음이 있고, 그 과정에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합니다. 그러니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개체가 아닌 전체로 바라볼 때, 불필요한 것에 집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개체의 살고 죽는 과정을 통해서 그 전체의 생명이 존속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부분적으로 살고 죽는 변화무쌍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 생명입니다.

 

따라서 변화는 생명의 본질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변화가 없다면 죽은 것입니다. 살아 있다면, 생명을 가진 것은 반드시 변합니다. 생명만이 아니라 인생과 세상 사가 그렇지요. 부한 사람이 계속 부한가요? 건강한 사람이 계속 건강한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없는 사람도 가지게 되고, 약한 사람도 강하게 됩니다. 살면 죽고, 반대로 죽으면 살기도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게 바로 생명이기도 합니다.

 

 

아이로ἀίρω와 카타이로καθαίρω

오늘 본문에서 가지를 잘라내다는 뜻을 지닌 표현으로 사용된 동사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아이로ἀίρω와 카타이로καθαίρω입니다. 이 두 단어 모두 칼로 무엇인가를 다듬거나 잘라내는 것을 뜻합니다. 둘의 차이는 철저히 또는 완전히라는 의미를 지닌 카타καθα라는 접두어를 사용해서 깨끗하게 제거해 버린다는 뜻을 가집니다. 두 단어가 사용된 문장을 살펴보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인 경우 아이로ἀίρω라는 동사를 사용해서 잘라낸다라고 번역하였고요. 열매를 맺는 가지의 경우 카타이로καθαίρω를 사용했습니다. 가지를 자르는데 차이가 나는 것은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인 경우는 대충 잘라서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열매 맺는 가지는 농부가 신경을 써야 합니다. 불필요한 잎이나 잔가지를 완전히 깨끗하게 정리해야지 열매로 양분이 잘 흡수되어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지 열매를 맺든 못 맺는 모든 가지는 농부의 손에 의해 칼을 받게 된다는 것은 똑같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이 다릅니다. 하나는 버림을 당하는 것이고, 하나는 더 잘 사용되기 위해 깨끗하게 손질되는  것입니다. 특히 아이로αἴρω는 잘라내다는 의미도 있지만 들어 올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열매를 잘 맺는 가지가 되도록 농부가 해가 더 잘 드는 곳으로 가지를 올리는 것입니다. 가지의 입장에서는 여름의 뜨거운 태양 빛을 맞는 고통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지에 대한 농부의 애정인 것이지요. 더 좋은 열매를 맺는 가지가 되도록 십자가 위로 매다는 것처럼 위로 들어 올립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는 가지의 경우에는 한번 잘려 나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열매가 있는 가지는 열매를 수확해야 할 때까지 계속해서 칼로 다듬어지고 손질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계속 부분적으로 가지와 잎이 잘리는 상처를 통해서 열매가 자라나는 것입니다. 오래된 가지일수록, 많은 열매를 맺는 가지일수록 농부의 손길을 받게 됩니다. 그 손길은 바로 칼을 받는 일입니다. 예수님과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 자신을 칼로 쪼개고 자름으로 내 안에서 열매가 더욱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스럽더라도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과정인 것입니다.

 

Icon of Christ as the true Vine

 

말씀이라는 칼

본문 말씀 3절에 따르면 농부가 잘라내거나 손질하기 위해 사용한 칼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말미암아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좋은 열매를 맺는 가지는 농부에 의해서 말씀이라는 칼로 다듬어졌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마태복음 10장 32절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로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이처럼 예수님 곁에 머문다는 것은 말씀을 받는 것이고, 말씀을 받는 것은 결국 칼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 비결로 계속해서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7절 말씀에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되는 것이구나 뭐 어렵지 않겠다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좋은 열매가 맺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습니다. 말씀은 칼이 되어서 우리의 내면의 양심을 들추어냅니다. 그리고 밖으로 뻗어나가고 싶은 가지의 충동을 잘라버립니다.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머물다는 말은 사실 정확하게는 인내하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인내하는 것, 이 만큼 강력한 믿음의 여정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인내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며, 그 의미가 생명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끝까지 인내하고 머무를 때,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그 열매를 맺을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Vine Grower, 1628 (oil on canvas) by Cuyp, Jacob Gerritsz (1594-1651)

 

생명 가장 큰 기쁨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포도나무의 목적은 포도 열매를 얻는 것입니다. 결과인 열매가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도 열매로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결과 중심의 말이기보다는 목적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농부가 그 목적이 열매를 많이 맺는 것처럼, 하나님의 목적은 생명을 많이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8절 말씀에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아버지가 영광 받으실 것이고 너희는 내 제자가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는 기쁨과 만족을 줍니다. 이스라엘에서 포도는 주로 포도주를 담그는 데 사용한다고 하지요. 시편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포도주라 했습니다. 모든 열매가 그러하듯이, 특히 포도열매는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설령 고통이 있더라도, 나중에 상쇄할 수 있는 기쁨이 있다면 감당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생명입니다. 생명을 얻는다면, 그 과정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랬지만, 아이가 태어날 때 부모로서 가장 큰 기쁨을 느낍니다. 비단 아이만인 아니라 농사를 짓거나 화초를 키울 때에도 마찬가지죠. 싹이 터 올라 자라나는 과정을 바라보면 그저 흐뭇합니다. 바로 생명이 주는 기쁨인 것입니다. 생명이 왜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일까요? 우리가 신앙을 가지는 것은 진리를 믿는 것인데, 진리에 가장 근접한 가치를 꼽으라면 단연코 생명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생명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사역은 시작이 창조이고 끝이 구속입니다. 창조와 구속 모두 생명에 관심을 두고 일어난 일입니다. 생명을 만들고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이 성숙하면서 생명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나의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기 때문입니다.  이 관심은 생명에 대해 소중히 여기는 자세를 넘어서서,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지게 합니다. 우리 삶 자체가 생명이기에, 이런 통찰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삶의 지혜와 태도로 직결됩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생명이 넘처나는 풍성한 삶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관심도 생명입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생명과 그 생명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과 그 관계의 핵심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하나님과 사람을 이어주고,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 모든 피조물과 생명을 이어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생명의 근거입니다. 성경은 이 십자가를 증거 하면서, 생명의 근거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주님께서도 너희가 나에게 머물라, 그리고 나의 말이 너희에게 머물게 하라 하셨습니다. 생명의 근거인 그리스도, 즉 말씀에 머물 때,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맺을 열매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토기를 모양과 질을 선택하여 그 사용처가 어디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쉽게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우리 자신이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나 자신이 그에 맞게 적합하게 사용되기를 바라며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날마다 그리스도 말씀 안에 머물면서 그저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에 대해서 인내하며 충실하게 행할 뿐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열매를 맺는 유일한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