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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 10장 11절-18절 내가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by 알렉스강 2024. 4. 21.

https://www.youtube.com/watch?v=Z3ZEjJKCCAM&t=1024s

 

 

요한복음 10장 11~18절 새번역

11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들도 자기의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가 들을 물어가고, 떼를 흩어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14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들을 알고, 내 들은 나를 안다.

15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

16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들이 있다. 나는 그 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떼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내 목숨을 기꺼이 버리기 때문이다.

18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Ethiopian Portrayal of Christ as the Good Shepherd Bibliotheque National. Paris, France

 

선한 목자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양이라면, 그 양을 돌보는 사람인 목자가 있고, 그 목자가 매우 좋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좋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나를 예뻐해 주고 잘해주기만 하면 좋은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은 양이 예뻐서 먹을거리를 던져주거나 한참을 보고 쓰다듬어 줄 수 있지만, 그 양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단지 잠시 잠깐 잘해주었다고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좋은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며, 짐이 있다면 함께 책임을 져 주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라 말씀하시면서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와 양들의 관계는 아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서로가 책임을 지고 돌보아주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이런 관계가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부모와 자식 관계이지요. 예수님께서도 이어지는 1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지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선한 목자가 양들과 맺는 관계는 부모 자식과의 관계처럼 서로를 알면서 책임을 지는 사이라는 말입니다. 아는 것과 책임을 지는 것이 같다는 것을 전문가를 예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문가는 한 분야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권위자가 해당 분야에 대해 발언할 때 권위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권위를 가지는 만큼 당연히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잘 알면 알 수록 책임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각각 안다

그렇다면 좋은 목자는 책임을 진다는 것인데요. 예수님은 선한 목자의 특징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선한 목자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먼저 선한 목자의 첫 번째 특징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서로 서로 알아본다는 것은 그 친밀함이 깊다는 것입니다. 서로 알아볼 때 나타나는 것은 상대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목민들이 양을 칠 때,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양의 숫자가 200마리를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에서 집어넣거나 밖으로 내어올 때, 한 명 한 명 양들의 이름을 부르며 확인한다고 합니다.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범위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양의 숫자인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휴대폰에 연락처를 살펴보십시오. 사람마도 차이가 있지만 특별한 사람 아니고서는 대게 알고 지내는 사람들의 숫자가 이백 명을 넘지 않습니다.

 

Good Shepherd, help me to follow You faithfully by Rosary.Team

 

그리고 목자들은 양의 이름을 지을 때, 그 양이 갖고 있는 약점으로 부른다고 합니다. 약점으로 부는 것은 그 양의 특징을 잘 살피고 있다는 것이지요. 좋은 목자는 양을 한 집단으로 보지 않고 개별적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교회 적절한 교회 크기에 비교하곤 합니다. 목사가 목자로서 양인 성도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닐까라는 것이지요. 성도들의 삶의 형편을 알고 살필 수 있는 만큼이 적절한 교회의 크기라는 말입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대형교회로 급성장한 담임목사님이 교회 근처 식당에 갔는데, 음식이 맛있어서 주인에게 식사가 참 좋다고 칭찬하면서 전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나오시라고 권유하는데, 그 주인이 하는 말이 목사님 제가 그 교회 3년 차 집사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좋은 목자로서 책임이 개별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비단 교회 사이즈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 집단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개별적으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서 대할 수 있습니다. 목적이 될 때 책임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잘 나옵니다. 목자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위험에 내버려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가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목자가 손해를 볼 각오로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까닭은 양들을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양을 안전하게 돌보는 자신의 목적이자 사명을 감당하고자 모든 양 한 마리 한 마리가 다 소중하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는 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다음으로 책임을 지는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말씀에 따르면 선한 목자가 자기 목숨까지 바친다고 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양들을 보호하는 선한 목자는 누구일까요?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양들을 지키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 재산이기 때문에 그럴까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아무리 귀하더라도 자기 목숨만 하겠습니까? 만약 자기 목숨을 걸었다면 자기 의지와 관련 없이 생겨난 사고사라든지 타의에 의해서 생겨난 일일 수 있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를 리더와 집단의 관계로 생각한다면, 만약 집단을 위해 희생하는 리더가 있다면 좋은 일이지요. 그런데 정치를 보면 그런 리더를 좀처럼 만나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집단이 리더에 대해 가지는 일종의 기대라 볼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집단은 항상 왕을 원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로 이민족이 쳐들어와서 고통을 받을 때면, 자신들에게 왕이 없어서 이렇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계속해서 왕을 달라고 요구한 끝에 결국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성경의 경우를 볼 때, 집단이 왕을 요구하는 것은 자신들을 지키고자 하는 보호심리에서 작동합니다. 군중을 하나로 모아서 힘을 갖추어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은 핑계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 되셔서 직접 다스려주시길 원했습니다. 이후에 사람의 왕을 원한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일종의 신앙의 위기와도 같습니다.

 

이 부분은 앞서 책임을 이야기하면서 언급한 개별적 주체성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다스린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누가 다스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직접 다스릴수록 다른 무언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체적으로 삶을 결단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만약 혼자의 힘으로 부족하다면 때론 서로 힘을 합치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신다는 것은 집단에 의존하거나 타인에 의존하는 삶이 아닙니다. 반대로 어떤 한 사람이 왕이 되어서 자신들을 통치하기를 원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의존하거나, 아니면 왕이 세운 시스템에 의해서 보호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는 안정감을 줄 수는 있으나 자신의 개별적 주체성은 약화가 됩니다.

 

그런데 대중들이 왕을 세우고 나면 소위 집단과 우두머리 사이에 정치적 역학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서로 간의 기대가 있기 때문에 희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두머리는 집단으로부터 이익을 취하려고 하고, 반대로 집단은 우두머리에게 희생을 요구합니다. 오늘날 정치 사회적인 문제를 돌아보면, 항상 이 부분이 갈등이 되어 왔습니다. 양과 목자로 이 관계를 비유하자면, 양들은 자신들의 양털을 깎아 바쳐서 목자를 배부르게 한 뒤에, 목자에게 너는 우리를 위해 죽으라고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리더의 자리는 결국 희생의 자리, 죽음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겠지요.

 

어느 대형교회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목회를 하시면서 늘 병치례로 고생 하신 분이신데, 다른 교회에 부흥회에 초대받아 가시면 종종 내가 아프면 아플수록 성도들이 좋아하고 교회가 부흥하더라고 말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아프시지 않고 그저 건강한 그 교회 목사님은 좀 민망해하기도 했다고 하지요. 실제로 교인들은 자신들의 목사님이 고난을 당하여 아프거나 역경이 찾아올 때면, 왠지 뿌듯하고 뭔가 기대가 된다는 이야기를 하지요. 물론 이 말들이 신앙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시련과 고통이 필요하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집단이 리더의 희생을 바라는 기대와 그로 인한 결과의 한 가지 예라 생각이 듭니다.

 

ALFRED SOORD PAINTING "THE LOST SHEEP"

 

희생을 강요받는 리더

인간사가 있는 한 집단이 있으면 항상 리더가 있어 왔기에, 집단이 리더가 희생하기를 바라는 기대는 불가피한 일입니다. 어찌 되었든지 바람직한 리더는 뭔가 희생을 해야 하고 집단을 위해서 뼈를 깎고 살을 깎는 것으로서 결국 모두를 잘 되게 하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왜곡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리더가 위선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겉으로는 희생하는 척하나 사실은 자신의 배를 불리는 것에 집중하는 경우이지요. 정치인들이 내로남불 하고 언행이 불일치하는 경우입니다. 집단들은 한번 속지 두 번 속냐고 하지만, 사실 대중이 어리석다고 늘 속는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집단이 일방적으로 한 명의 리더를 희생제물로서 세우는 것입니다. 네가 희생해야 우리 모두가 산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닐 것 같지만, 이런 일은 인간사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모두가 함께 지지 않고 어느 한 사람에게 전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시고 계실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쉽게 간과하고 넘어가는 구절이 있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타의에 의해서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의 무능함, 대제사장의 간교함, 빌라도의 무책임성, 대중들의 무분별함이 예수를 죽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밝혔듯이 스스로 선택해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에게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고, 강제할 수 없는 자발적인 권한으로서 감당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리더는 죽는시늉만 하는 것이 좋은 리더가 아니고, 남에게 떠밀려서 죽는 것도 좋은 리더가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가 선택해서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를 생각할 때에도 마찬가지이죠. 선한 목자, 좋은 목자를 생각할 때, 그저 잘해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주체적으로 선택해서 행동하여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이 바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목자를 떠올릴 때, 어릴 적 성화에서 본 어린양을 품에 안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그저 부드럽기만 한 목자인 예수님을 떠올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좋고 선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고집이 있을 만큼 주체적이고, 그리고 자기가 결단한 것에 대해서 강인하게 책임을 지는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에게 나오는 이미지라 할 수 있습니다.

 

The Good Shepherd, c.300–350, at the Catacombs of Domitilla, Rome

 

구약의 목자들

구약에서도 이러한 좋은 목자의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모세와 다윗입니다. 이 둘은 한 때 실제로 목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는 왕궁에서 쫓겨나 미디안 광야로 가서 장인 이드로 밑에서 목자로 삶을 살았습니다. 무려 40년 동안 광야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면서 자기 주체성을 쌓았습니다. 모세는 누구보다 자기 정체성에 혼란을 겪은 사람입니다. 혈통은 히브리인이지만, 살아온 환경은 애급 왕실의 적자로 자랐습니다. 내가 히브리 사람인지, 아니면 애굽 사람인지 혼동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경비병을 죽이는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을 찾으러 광야로 갔습니다. 광야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그는 새로운 정체성을 찾았습니다.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모세라는 이름의 뜻처럼 물에서 건저 낸 사람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할 자로서 자신의 주체성을 확고히 했습니다.

 

이러한 주체적인 자의식은 당대 최강국인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바로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의 시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불만 불평하며 자신의 리더십을 흔들어 놓을 때마다 한치도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모세는 자기의 배를 배불리 지 않았습니다. 본인도 얼마나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어 했겠습니까?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내려놓고 여호수아에게 모든 리더십을 양도한 뒤 이름 없이 사라졌습니다. 본인의 무덤조차도 남기지 않게 하여 자신을 우상화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서자와 같은 아들이었습니다. 형들과 달리 아들로 인정받지 못하고 들판에서 양 떼를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다윗은 홀로 시간을 보내면서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양들을 지키는 목자로서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 무서운 밤과 짐승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이 맡은 양들을 지키는 책임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시간 속에서 다윗은 그 누구보다 주체적인 책임감을 가진 자로 자랄 수 있게 되어, 결국 사울을 이어 왕을 세울 자를 찾던 사무엘에 눈에 띄게 되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에도 다윗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골리앗에게 분노하며 스스로 싸우기를 자청하여 나아가는 용기를 보입니다. 싸울 때에도 자신에게 맞지 않는 갑옷을 입거나 무기를 들지 않았습니다. 목자로서의 자기 정체성, 가벼운 가죽옷과 물맷돌을 가지고 나아가 거인 골리앗을 쓰러 뜨릴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람을 의지하고, 강한 무기를 의지했다면 결코 골리앗을 쓰러 뜨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후 다윗은 왕의 사위가 되어 승승장구할 줄 알았지만 자신의 기대와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더 강하게 몰아붙이십니다. 사울을 요동케 해서 미워하게 하여 광야의 길로 보내십니다. 다윗은 14년 동안 광야에서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사울과 이방 나라 왕들의 공격을 피해 다니면서 늘 죽음을 마주하며 철저한 홀로서기를 배워갑니다. 그 광야의 시간 동안 다윗은 갈곳 없이 자신에게 몰려든 사람들을 돌보며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을 돌볼 목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해 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거느리고 돌보던 사람들, 목자로 치면 자신의 양 떼들에게도 배신을 당합니다. 블레셋 왕 아기스의 요청으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어쩔 수 없이 출정하게 되지요. 자칫하면 이스라엘의 왕의 자격을 상실할 위기였지만, 블레셋 방백들의 불안으로 인해 다윗은 자기 동족과의 전쟁을 피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자신의 본거지 시글락이 아말렉에게 침략 당해 그 가족과 재산을 다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다윗과 전쟁에 나간 부하들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치러 나간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벌을 받아 이렇게 된 것이라 여기며 분노하고 돌을 처서 죽이고자 합니다. 바로 집단이 리더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순간입니다. 이때 다윗은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제자장만이 입을 수 있는 에봇을 가져오라 한 뒤 본인이 직접 입고 직접 하나님께 묻습니다. 아말렉을 쫓아가서 가족과 재산을 다시 건져낼 수 있는지 확인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구원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실 이것은 제사장 이외에 금지된 행동입니다. 신성모독으로 죽을 수 있는 일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에게 나아갈 때 제사장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직접 하나님께 묻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게 주어진 믿음과 확신으로 선택하고 행동하여 그 결과를 이루어내겠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왕이자 제사장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자기 목숨을 내어주며 양 떼를 구하는 목자로서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반드시 가족과 재산을 찾아올 것을 사람들에게 맹세한 것입니다.

 

David und Goliath (1888), by Osmar Schindler.

 

내가 죽을 것을 스스로 선택하라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예수님을 목자의 우두머리인 목자 장으로 소개하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참된 양이자, 참된 목자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히브리서 13장 20절부터 21절까지를 읽어보겠습니다.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려서 양들의 위대한 목자가 되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화의 하나님이 여러분을 온갖 좋은 일에 어울리게 다듬질해 주셔서 자기의 뜻을 행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자기가 기뻐하시는 바를 이루시기를 빕니다.” 위대한 목자이시자, 목자들의 장인 대목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끌 뿐만 아니라 온갖 좋은 일에 맞게 다듬질해 주셔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이루어주신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다듬질이란 말에 주목합시다. 다듬질은 옷을 펼 때 방망이로 두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맞을 때는 죽을 듯이 아프지만, 맞고 나면 너무나 깔끔하고 깨끗하게 그 옷이 펴지는 것입니다. 보통 노예들이 주인에게 두드려 맞지요. 사람에게 맞는 것은 주눅 들게 하고 자기 주체성을 읽게 하여 평생 종으로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맞는 사람은 반대입니다. 하나님께 맞는 사람은 주눅 들지 않습니다. 맞으면 맞을수록 다듬질의 옷처럼 깔끔하고 반듯하게 옷이 펴집니다. 자기 주체성이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내가 죽을지 살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명령이자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스스로 원해서 죽을 수 있는 상태, 바로 이것이 선한 목자로서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정도 될 때까지 다듬이로 두들겨 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누구도 의지하지 맙시다. 하나님만 의지합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주체적으로 살아갑니다. 나의 분명한 정체성을 드러내며, 그 정체성에 따른 나의 사명을 따라 내가 죽을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Elizabeth Jane Gardner Bouguereau, The Shepherd David, ca. 1895; Oil on canvas, National Museum of Women in the Ar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