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v6I7IsX9OWQ&t=1118s
마가복음 10장 2절-16절 새번역
2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를 시험하려고 물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4 그들은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이 계명을 써서 너희에게 준 것이다.
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이 말씀을 두고 물었다.
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는, 아내에게 간음하는 것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 가면, 간음하는 것이다.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는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16 그리고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다.
제자도의 핵심인 믿음은 일종의 신용credit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제자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한 감정이나 의지적 확신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믿음은 무지와 오해, 그리고 배척이라는 불신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확실한 지식을 바탕으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포용하며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belief"라기보다는 "credit"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 단어 "credit"은 우리말로 신용입니다. 우선 경제적인 의미를 떠올립니다. "신용을 준다"는 것은 상대방이 지금 당장 돈이나 물건을 소유하고 있지 않더라도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이를 갚을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즉, 상대방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용은 단지 경제적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가지는 사회적 지위에서 나오는 평판이나 명예와 같은 사회적 신뢰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평판과 명예는 그 사람이 오랜 시간 동안 보여준 공로를 인정해 주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두 가지 주제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결혼과 이혼,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와 어린아이의 관계입니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신용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본문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혼은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담은 일종의 계약이다
그럼 먼저,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릴 적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면 단순히 생물학적이고 성적인 관계로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결혼 적령기에 이른 남녀가 우연히 만나, 사랑이라는 모호한 감정에 빠져 결혼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육체적 본능에 따른 남녀의 만남을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이런 관계를 결혼이라고 한다면, 동물의 짝짓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실 인간의 결혼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종족 번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은 일종의 계약과도 같습니다. 서로의 공통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일부는 이것을 비즈니스 관계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성경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서도 결혼은 단순한 성적 본능에 의해 맺어지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결혼은 남녀 두 사람만의 계약이 아니라, 종종 두 가문 간의 계약이었습니다. 서로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루어진 조약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계약을 맺게 되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계약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결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따라서 결혼은 단순한 개인 간의 감정적 선택이 아니라, 서로 간의 신용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엄숙한 계약입니다. 결혼을 단순히 출산이나 성적 개념으로만 본다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부는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삶의 동반자로서 부부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계약적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서로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도록 하는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많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결혼을 하나님 앞에서 맺어진 신성한 언약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스라엘 원시 족장들의 결혼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런 점이 더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우선 아브라함과 사라의 관계는 부부가 되기 전에 이복남매였습니다. 창세기 20장 12절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사라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씀드리면, 나의 아내가 나의 누이라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내는 나와는 어머니는 다르지만 아버지는 같은 이복 누이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단순히 부부 관계가 아니라, 혈연적으로도 가까운 친족 관계였습니다. 이것이 좀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오늘날과 달리 고대 근동에서 이복남매나 가까운 친족 간의 결혼은 상대적으로 흔하고 허용된 관행이었습니다. 가문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재산을 보호하는 목적을 가진 것입니다.
이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24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자신의 종 엘리에셀을 보내 자신의 친족 중에서 이삭의 아내를 구하게 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홀의 아들인 브두엘의 딸입니다. 조카딸을 며느리로 삼은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며느리를 삼지 않고 원래 거주하던 하란으로 가서 며느리를 삼은 것 역시, 자신의 가문의 정통성과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행위에 대해 일차적으로는 아브라함이 무엇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해석을 합니다.
결혼은 땅을 결정하는 계약서이다
그런데 이점을 가나안 사람들의 입장에서 반대로 바라보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서 결혼이 가문과 가문이 만나 공동 이익을 위해 계약을 맺는 행위라 했습니다. 당시 시대에 가장 중요한 재산은 단연코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땅이 있어야 농사도 짓고 짐승도 키웁니다. 이 땅을 계속해서 지키는 것이 재산을 유지해 가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혼은 이 땅을 서로 계약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서로의 계약서라든지 담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혼을 통해서 함께 땅을 공유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주민이었던 아브라함은 가축이나 재산은 많았지만, 땅이 없었습니다. 동산은 많았지만 부동산은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화폐나 금융 시스템이 발달해서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치명적인 일입니다. 땅이 없는 사람은 일순간에 알거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땅을 얻기 위해서 무척 애를 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나안 사람들은 쉽사리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헷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서 막벨라 굴을 구입하는데, 이것도 그냥 얻은 것이 아니라 거듭 요청한 끝에 겨우 얻어낸 것입니다. 본인이 팔고 싶어도 불가한 것이 이방인인 아브라함에게 땅을 넘길 때에는 원로회를 거쳐서 재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로회의 허가가 떨어지자, 땅 주인인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무상으로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무상 제의를 거절하고 정당한 값을 지불하겠다고 고집합니다. 무려 은 사백 세겔을 주는데, 이 금액은 땅 크기에 비해서 지나치게 높은 값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까지 한 것은 땅을 무상으로 받을 경우에는 의도하지 않게 매매 계약이 아니라 일종의 임대 형식의 계약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게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르는데, 에브론이 관계가 틀어져서 아 그때 나 돈 받지 않고 그냥 빌려 준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나중에 다른 소리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시세보다 몇 배나 높은 금액을 쳐서 겨우 무덤자리 하나 받아낸 것입니다.
결혼에는 사사로운 인간의 감정이 개입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땅을 중시하는 고대 근동의 가나안 사람들이 굳이 아브라함과 같은 이주민과 결혼 관계를 맺고자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혼을 하면, 자기 땅을 이주민의 가문에게 넘기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지키고자 동생 나홀의 가문에서 리브가를 데려온 것도 있지만, 가나안 족속 중 어느 가문도 아브라함과 쉽사리 혼인 관계를 맺길 꺼려한 것도 있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룻의 예입니다. 고엘제도에 따라서 보아스가 룻과 계대 결혼을 맺기 전 먼저 친족 중에 룻과 더 가까운 사람에게 우선권이 있었기에, 그 뜻을 확인하는 과정이 나옵니다. 그때, 그 가까운 친족은 자기 권리를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굳이 자기의 땅을 나오미나 룻에게 나온 아들에게 물려 손해를 볼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혼은 당시 고대 시대에 정점에 있던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 계약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경우를 봐도 그렇습니다. 야곱은 쌍둥이 형 에서를 피해서 리브가의 오빠인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거기서 레아와 라헬을 만나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라반이 결혼을 그냥 시켜줍니까? 아니지요. 두 딸에 대해서 각각 칠 년 도합 십사 년 동안 삯을 받지 않고 일해야 했습니다. 땅 대신에 노동력을 욕구한 것입니다. 물론 라헬의 경우는 결혼 적령기의 남녀가 만나서 눈이 맞아 결혼한 것입니다. 그런데 라반이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계약에 따른 결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레아와 결혼하게 만듭니다. 이게 당연한 것입니다. 결혼은 남녀가 눈이 맞아서 하는 게 아닙니다. 가문과 가문이 만나 계약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큰 딸인 레아를 시집보내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보면 첫날밤에 아내가 될 여자의 얼굴을 가려서 보이지 않게 하지요. 야곱은 라헬이라 생각하고 첫날밤을 가지는데, 알고 보니 레아인 것입니다. 이런 문화가 고대 근동만 있는 게 아닙니다. 전 세계적인 문화입니다. 결혼이라는 너무나 중요한 계약을 맺는 데, 인간의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오늘 본문으로 보시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묻습니다. 이혼해도 되는가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은 뭐라 했는지 묻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모세도 이혼의 경우는 이혼증서, 일종의 계약서를 쓰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결혼도 계약이지만, 이혼은 계약을 파기하는 또 다른 계약입니다. 이걸 분명히 해야지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당시 나이 든 홀로 된 여성은 사회적 약자입니다. 스스로 벌어먹고 살 수 없습니다. 보호를 받으려면 남편을 두어야 하는데, 재혼에는 이혼증서가 있어야 했습니다. 만약 이혼증서 없는 과거 결혼 경력이 있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면 간음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혼증서가 있는 여성은 재혼을 보다 떳떳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혼증서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당시 사회의 보험 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뭐라고 하십니까? 5절 말씀이지요.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이 계명을 써서 너희에게 준 것이다.” 이혼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는데,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6절부터 9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결혼 계약을 깨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계약도 깨뜨린다
왜 이혼을 금지하시는가 하면, 앞서 말한 대로 결혼은 인간 사회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credit, 신용을 기반으로 합니다. 결혼을 파기하는 것은 신용을 깨는 행위입니다. 인간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계약을 깨는 사람은, 결국에는 하나님과의 약속도 깨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혼은 원칙적으로는 금지하신 것입니다. 지난번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 십자가를 지고자 올라가실 때 마지막으로 남은 열 두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입니다. 급진적인 제자도를 말씀하시는데, 그 핵심은 믿음이라 했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신용입니다. 내가 예수의 제자가 된 이상 아무리 손해를 보더라도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더라도 끝까지 신용을 지켜내는 것이 핵심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계약, 즉 결혼에서 신용을 지키는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믿음을 가르치시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이 중요한 것이기에, 다시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10절부터 12절 말씀입니다.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이 말씀을 두고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는, 아내에게 간음하는 것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 가면, 간음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재혼을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간음은 성적인 외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관계의 배신으로 신뢰의 기초를 무너뜨려서 서로가 상대방에게 느꼈던 안전과 보호의 감정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계약을 어기는 것이 가져오는 파괴적 결과들, 가문과 가문 사이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공동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모든 신용이 부서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우상숭배를 간음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이 혼인 관계로 맺어져 있고, 그 언약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충실할 때, 그 계약이 유효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만 섬기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특별히 보호하시는 것을 통해서 그 언약에 지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이 땅에서 계약을 맺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이 있는데,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기를 바랐는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으며 못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화를 내시며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13절부터 15절까지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는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을 일반적으로 어떻게 해석했냐 하면,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야지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어린 아이가 순수한가 하면, 어린 아이 중 영악한 애들은 어른들이 감당이 안됩니다. 그러면 결혼과 이혼에 대한 가르침과 이어지지 않는 말씀을 갑작스럽게 생뚱맞게 언급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린아이는 세속적인 계약에서 자유롭고, 순수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예로 든 것은 단순히 그들의 순수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있어서 인간 사회의 여러 복잡한 계약과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삶의 태도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은 이 땅으로부터의 구속이 전혀 없기에, 하나님 나라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낫다
이걸 결혼에 대한 권면과 연결 지어서 생각해 보면, 신약에서 말하는 결혼에 대한 가르침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먼저 결혼에 대한 바울의 권면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 따르면, 바울은 결혼과 독신 모두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만, 특별한 상황을 고려하여 독신을 더 권장합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시대는 환난과 박해가 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굳이 예수님 오시는데 결혼할 필요가 있냐는 것입니다. 바울도 독신으로 살아가면서 사역에 더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독신의 상태가 더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안해도 된다고 가르친 것은 단지 이 이유만이 아닙니다. 결혼이라는 계약이 너무나 신중하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을 보시면,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도 남편에게 의무를 다하도록, 즉 계약에 충실할 것을 매우 강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이 계약에 충실할 자신이 없다면 결혼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은 결국 이 땅에서 맺는 계약 행위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과의 계약 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굳이 인간 세상에서 계약 관계를 맺어서 이 땅의 문제로 얽히고설키는 것보다는 하나님 백성으로 이 땅을 초월하는 삶을 살도록 권면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결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직접 가르치지 않으셨지만, 부활에 대해서 부정하던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 26절과 27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고 있다. 부활 때에는 사람들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 부활 후에는 결혼과 같은 세속적인 계약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사와 같은 하나님 백성은 결혼을 안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독신일 경우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더 큰 복으로 여기라
결혼과 관련해서 적용점을 몇 가지 살펴보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먼저 특별히 교회에는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많습니다. 그렇기에 미혼 크리스천 여성이 늘어나는데, 그렇다고 믿지 않는 남자와 결혼을 하거나 어쩔 수 없이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는 것은 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여성이 결혼하는 것이 사회적인 보호를 받는 안정장치인데, 지금은 국가가 사회복지 제도로 여성을 보호해주고 있기 때문에 미혼으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대신 혼자 있으면 외롭고 혹시 힘들 수 있는데, 그 부분을 교회 공동체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미혼인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수님을 신랑 삼아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것이 절대 나쁜 게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장려해야 할 것입니다. 외로움의 자리 가운데 하나님을 모시고 더 깊이 하나님과 만난다면, 그 누구보다 영적으로 복 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 했습니다. 계약은 하나님과의 계약으로도 족합니다. 그 계약에 충실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결혼할지 안 할지 묻는 경우 이걸로 판단해서 결정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에서 신용을 지키기 위해서 결혼이 방해가 된다면,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하고, 반대로, 하나님과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결혼이 도움이 된다면 결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적으로 유혹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결혼해서 성적 욕구를 푸는 것이 신앙생활에 더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치명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이혼하지 말라
그렇다면 교회가 결혼하지 말라고 가르쳐야 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 젊은 청년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걱정을 많이 합니다. 결혼한 경우에도 아이를 놓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혼해야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필요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이런 시대 분위기를 통해서 결혼이라는 계약의 엄중함을 다시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물론 젊은 사람들은 책임 지기 싫어서 결혼을 하지 않는데, 그렇다고 무턱대고 결혼하는 것도 좋다고 볼 수 없습니다. 결혼이라는 계약을 맺게 되면, 될 수 있으면 계약을 파기하는 행위인 이혼은 가급적이면 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만약 젊은 시절이 지나서 사리를 분별할 나이가 되었다면, 결혼에 대해서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말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결혼을 했다면 웬만하면 이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이라든지, 악의로 가족을 해치려는 아내라든지, 생명을 헤치고자 작정하는 악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잘못했을 때 용서하고 그냥 사는 게 맞습니다.
어떤 이유든지 결혼을 했다면, 그 결혼 계약을 끝까지 지켜나가십시오. 많은 경우 젊을 때 감정 기분으로 생각 없이 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서로에게 속아서 결혼할 수 있습니다. 이게 시간이 지나자 불공정한 계약이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약을 물릴 수도 다시 할 수 없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아내로 라헬만을 원했었고 7년만 일하면 되는데, 불공정 계약으로 레아까지 도맡아 14년을 외삼촌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그래도 계약이니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불공정 계약이 오히려 내게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야곱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보니 라헬이 아니라 레아를 자기 첫 번째 아내로 여겼습니다. 결국 라헬은 길에다 묻고, 레아는 막벨라 굴에 함께 장사를 지내게 된 것입니다. 불공정한 계약일 수록 하나님의 역전이 있음을 믿길 바랍니다. 그러니 잘못된 계약서에 싸인한 것 후회하지 마시고, 부부가 서로에게 책임을 다하며 맺어진 인연에 감사하여 잘해주며 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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