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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10장 35절-45절 가장 좋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길

by 알렉스강 2024. 10. 19.

https://www.youtube.com/watch?v=Alg2JqmD0uI&t=1012s

 

 

마가복음 10장 35절-45절 새번역

 

35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37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

40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그 일은,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41 그런데 열 제자가 이것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개하였다.

42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44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는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다

지지난주부터 계속해서 마가복음 10장을 묵상해 오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단연코 땅입니다. 그래서 땅을 계속 말씀드립니다. 결혼도 땅과 관련이 있었고, 재산 또한 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땅이라는 주제는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현실적인 터전이 바로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땅에만 얽매여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두 발은 땅을 디디고 서 있지만, 시선은 하늘을 향하여 땅을 초월해 나가는 방법을 예수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이게 바로 제자도의 핵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입니다. 어느 날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자신들의 요구를 무엇이든지 들어주시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시니, 예수님이 영광 받으실 때에 하나는 예수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인사청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갑작스럽고 무리한 요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단순히 갑작스럽거나 뜬금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누구보다도 큰 희생을 치렀고, 그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요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평행본문인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이 어머니를 통해 이루어진 요청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머니는 ‘땅’을 상징합니다. 어머니가 태에서 아이를 생산하듯이, 땅도 소출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이 그냥 소출을 내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흘린 땀과 수고의 열매로 소출을 내는 것입니다. 열심히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그 수고에 맞는 많은 수확이 기다리고 있으며, 반대로 게으른 자에게는 얻는 것이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자신들이 쏟은 노력에 대해 합당한 대가를 요구한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에 비해 자신들의 공헌이 1등, 2등이라 생각했고, 그에 걸맞은 상급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터무니없는 요구는 아니었던 셈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계약을 맺고자 하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나라가 세워지면 그 공로에 따라 땅을 수여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를 봉건제도라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나라가 세워지면 황제가 건국 공신이나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제후로 삼아 왕으로 임명하고 다스리게 했습니다. 공적이나 혈연관계를 고려하여 땅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왕이 넓은 지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정치 시스템으로, 유교적 종법 질서를 통해 통제력을 유지한 것입니다. 반면 서양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왕이 땅을 수여할 때 혈연보다는 쌍무적인 계약 관계에 기반을 둡니다. 주군은 보호해 주고, 가신은 충성을 맹세하는 관계입니다. 왕의 보호에 대한 책임으로 가신은 매년 세금을 납부하고, 전쟁이 나면 군사를 보내어 참전하는 등 상호 의무를 기초로 한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요구한 것은 마치 봉건제와 같은 일종의 계약 관계를 원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런 계약 관계는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은 결국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은 일종의 봉토가 되어, 그곳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었지요.

 

많은 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은혜로만 생각해서 계약의 측면을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 역시 계약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란, 사실 한쪽이 더 큰 책임을 지는 일종의 불공정한 계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손해를 보시면서까지 우리와 계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불공정해도 계약은 계약입니다. 불공정한 계약이라도 최소한의 의무는 있습니다. 따라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 계약 관계에 있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계약이란 기본적으로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야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로 바라는 것이 다르다면 계약이 성립되지 않지요. 하나님과 맺은 계약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쪽이 손해를 본다고 해서 그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약을 맺은 양측이 동일한 목적을 가져야만 그 계약이 유효해질 수 있습니다. 결국 계약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뜻이 일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38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 이유는,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맺게 되는 계약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계약을 맺으려 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모르면서도 자신들이 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이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9절과 40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말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그 일은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제자들이 비록 계약의 목적을 알지 못할지라도 결국 그 목적을 따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와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명확한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라고 하셨지요. 아브라함은 목적지를 알지 못한 채로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 땅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계약은 은혜와 추인이라는 다소 불공정한 성격을 가진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맺으신 계약의 목적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사실을 알고 그 길을 따랐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대략 짐작은 하더라도, 설마 그럴까 하며 따라간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하는 길은 결국 십자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는 필연입니다. 그렇다면, 계약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추인을 받는 것으로 계약이 성립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이른 다음, 그 길에 대해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었는데, 이제 이후로는 너 혼자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 걸어가겠느냐?" 그러면 제자들은 지금까지 걸어온 계약을 인정하고, 앞으로 걸어갈 것을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신 것이지요. 베드로는 주님만 아십니다 했는데, 암묵적으로 결국 계약에 동의한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과 맺는 계약은 일방적인 선택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고 한쪽에서만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계약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쌍방의 계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추후에 동의를 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계약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맺으시기 때문에, 그분의 입장에서는 손해를 보는 불공정한 계약입니다. 반면, 우리의 입장에서는 처음 계약서를 쓸 때 우리의 동의 없이 상당 부분이 진행된 다음에 추인을 받는다는 점에서 불공정한 계약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니 하나님 입장이나 우리 입장에서 어느 정도 불공정성이 만나 상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계약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의 선택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결국, 하나님과 맺는 계약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40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요구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점이 일반적인 계약과 다른 점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공훈만 놓고 본다면 야고보와 요한이 최고 일등 공신으로서 오른쪽과 왼쪽에서 제일 크고 넓은 땅을 얻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약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선택은 자신이 허락하거나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 기준이 없으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해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기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경우입니다.

 

땅 분배 첫 번째 원칙, 참여해야지 받을 수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을 분배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첫 번째로 가장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결코 그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단강 동편에서 먼저 기업을 얻고자 했던 두 지파 반, 즉 르우벤 지파,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먼저 요단강 동편 땅을 자신들과 후손의 기업으로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그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다 같이 무장하고 요단강을 건너가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할 때까지 함께 싸워야만, 그 땅을 그들과 후손에게 기업으로 줄 수 있다고 말한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과의 계약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은혜라고 해서 의무를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공짜가 없지만, 영적인 것도 공짜가 없습니다.

 

45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고난의 종으로서 십자가의 수난을 겪을 것을 말씀하시는 구절이지만, 동시에 땅의 원리를 알려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고통의 근원은 땅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그가 해야 할 일은 땅에서 나오는 소출을 얻기 위해 노동하고 땀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그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이 고통을 받게 된 이유입니다. 땅은 산출을 내기 위해 고통을 요구합니다.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또 다른 생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이는 일종의 피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속물로 자신을 주시려고 오셨다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속물은 속전(贖錢)입니다. 속전이란 빚이나 여러 이유로 인해 노예가 된 자가 자유인이 되기 위해 지불하는 몸값을 말합니다. 땅을 얻기 위해서는 희생을 치러야 하는 것은 영적으로 보나, 육적으로 보나 공통된 것입니다. 정말 공짜는 없습니다.

 

땅 분배 두 번째 원칙, 우리의 의사와 공로가 반영된다.

두 번째로,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의 경우에서처럼, 자신들이 직접 땅을 지목하여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의사를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에 좋아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요단강 동쪽의 땅은 그리 안전한 땅이 아닙니다. 이민족의 침입이 잦은 곳이었기 때문에 지켜내기 어려운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그들이 원했던 요단강 동편의 땅은 가나안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분배를 받았다 하더라도, 가나안 땅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가나안 땅은 가나안 정복 전쟁이 끝난 후에 땅을 분배받은 것입니다. 이 분배는 제비 뽑기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가나안 땅의 분배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비뽑기를 통해 기업이 분배되었지만, 인구가 많은 지파에게는 더 많은 땅이 기업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공적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 과정이나 가나안 정복 전쟁에 가장 많이 참여한 지파는 요셉 자손들이었고,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영적 전쟁에 가장 많이 참여한 지파에게 더 많은 땅을 기업으로 준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지만, 그래도 우리의 공로가 반영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비 뽑기로 주어졌다고 해서 불공평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땅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자들에게는 얼마든지 땅을 넓혀갈 수 있도록 개척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요셉 자손들은 여호수아에게 제비 뽑기를 통해 분배받은 땅이 작아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한 분깃만으로는 거할 땅이 비좁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아직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일곱 족속의 땅을 가서 개척하라고 말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에게는 서쪽으로 가서 르바임 족속의 땅을 개척하라고 했고, 므낫세 반 지파에게는 북쪽으로 가서 브리스 족속의 땅을 개척하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가나안 땅은 좁아 보였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기에는 충분히 넓은 땅이었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 전쟁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해서, 주어진 땅을 충분히 차지하지 못한 데 있었습니다. 산 아래의 기름진 땅은 철병거를 가진 강한 가나안 족속들이 여전히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위의 척박한 땅에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기업이 포도원인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 이 때문입니다. 포도 농사는 척박한 땅에서 잘 자랐기 때문입니다. 포도원이 대대로 이어진 유업이 된 배경에는 이러한 부끄러운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땅 분배 세 번째 원칙, 분배받은 내 땅을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세 번째로, 분배받은 것에 대해 집중하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원래 차지하는 것보다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점은 지난번 설교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원하셨던 것은 그의 재산을 다 팔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의 기업, 세상의 기업을 탐내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땅에서 나오는 산출로 기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가나안 정복 전쟁 시 땅 분배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 있습니다. 두 가지 사건이 있는데, 첫 번째는 아간의 경우입니다. 가나안 땅의 첫 성인 여리고를 정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성의 모든 사람을 진멸하고, 남은 물건들은 모두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리고성 정복 과정에서 유다 지파의 아간이 여리고성의 물건을 탐내어 비싼 옷 한 벌과 약간의 은과 금을 훔쳤습니다. 십계명에서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도둑질이 아닙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구할 것은 오직 가나안 땅입니다. 그들이 대대로 누릴 영적인 기업입니다. 그런데, 이 기업을 놔두고 세상의 금은보화에 눈에 멀어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부자 청년이 자신의 기업이 아닌 남의 땅을 탐내는 것과 같고,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을 팔아 그 절반을 교회에 내고 절반을 자신들이 숨긴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이렇게 되면 땅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땅의 저주는 생명을 빼앗아갑니다. 결국 아이성 정복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하였고, 제비 뽑기를 통해 아간의 범죄 행위가 드러나자, 아간을 돌로 쳐 죽이고 돌무더기로 쌓아 표시하였습니다. 오직 가나안의 기업에 마음을 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간은 땅의 저주를 받아 가나안 땅의 기업을 얻지 못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두 마음을 품은 자에게 주어지는 땅의 형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슬로브핫의 경우입니다. 요단강 동쪽 므낫세 반 지파의 마길의 후손 중 슬로브핫이 있었는데, 슬로브핫은 아들을 두지 못한 채 다섯 명의 딸만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가문의 기업이 사라질 뻔했지요. 슬로브핫의 딸들은 모세에게 찾아가 자신들에게도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모세가 이 문제를 하나님께 묻자, 하나님은 딸들에게도 기업을 물려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딸들이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게 된다면, 반드시 아버지가 속한 지파의 남자와 결혼하여 그 기업이 다른 지파로 넘어가지 않게 해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한 번 받은 기업은 영원히 그들의 기업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은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없고, 남의 기업을 빼앗을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딸에게도 상속을 허락한 것은 이렇게 자기 땅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땅 분배 네 번째 원칙, 내가 원해야 한다.

네 번째 교훈은 '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기업도 그렇고, 하늘의 기업도 내가 원하고 구해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갈렙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갈렙은 그니스 사람으로 유다 지파 여분네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니스 족속은 에서의 후손들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종살이하다가 출애굽 시 함께 나온 족속으로 보입니다. 갈렙의 부친 여분네가 유다 지파로 귀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갈렙은 유다 지파 출신이지만, 이방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지파 내에서 주류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유다 지파 내에서 땅 분배 시 혜택이 적을 것이라 예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에 갈렙은 제비 뽑기 전에 먼저 나서서 자신이 원하는 땅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85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에게 가서 이 산지를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당시 그 땅에는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낙 사람들은 가나안 족속 중에서도 거인에 속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출애굽 당시 열두 명의 정탐꾼 중 한 명이 갈렙이었습니다. 정탐꾼들이 다녀온 곳이 바로 아낙 자손들이 거주하던 땅이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을 보고 정탐꾼들이 겁을 먹고 가나안 정복이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아낙 자손을 쳐서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갈렙은 그때부터 이 땅을 자신이 차지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45년이 지난 후, 여호수아와 모세에게 자신이 말했던 그 땅에 대한 기득권이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땅을 분배하는 제비뽑기 전에 자신의 권리를 행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고백이 나옵니다. 여호수아 14장 12절의 말씀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하나,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갈렙이 요구한 땅은 기름진 평지가 아닌 산지였습니다. 이 산지를 요구한 이유는 이 땅이 가지는 상징성 때문입니다. 바로 기럇 아르바, 즉 헤브론이었기 때문입니다. 헤브론은 아브라함이 거주했던 곳으로, 헷족속 에브론에게서 은 사백 세겔을 주고 막벨라 굴을 산 곳이기도 합니다. 당시 가나안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는 에브라임 지파가 받은 가나안 땅 중앙에 위치한 세겜과 벧엘이었습니다. 세겜은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와 처음 거주한 곳이고,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과 서원을 한 장소입니다. 세겜에는 요셉의 뼈가 묻혀 있었으며, 벧엘과 세겜 사이에 위치한 실로라는 곳에 법궤를 모셔놓았습니다. 이로 인해 에브라임 지파는 이곳을 차지하여 가나안 땅의 중심에서 전 이스라엘을 이끄는 지파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필적할 만한 곳이 바로 헤브론입니다. 사실 정통성을 따지자면 야곱보다 아브라함이 우선이지요. 그래서 에브라임이 세겜과 벧엘을 기반으로 야곱을 기원으로 삼았다면, 유다는 헤브론을 기반으로 아브라함에게서 기원을 찾고자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처음 7년 동안 유다만을 다스릴 때에는 헤브론에서 통치하였고, 이후 압살롬도 헤브론의 상징성을 알았기에 이곳에서 아버지 다윗을 대적하여 반역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헤브론이 누구에게 주어졌느냐 하면 바로 갈렙입니다. 갈렙의 이름은 '개'라는 뜻인데, 이는 개처럼 끈질기게 구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번 물면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결국 갈렙은 유다 지파 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땅을 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땅을 차지하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이다

오늘 본문인 42절과 44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를 알게 된 제자들이 강한 불만을 품고 분개했다고 합니다. 물론 제자들이 서로 분개하고 다투는 것이 옳은 행동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과 야고보가 위대해지고 으뜸이 되는 높은 자리를 바라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목적 없이, 단순히 종처럼 겸손하게 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종으로 섬기는 이유가 분명히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받은 권한을 남용하여 사람들을 괴롭히고 세도를 부리는 데 있는 것이지, 권한에 대한 욕망 자체를 부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땅 계약을 맺고자 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땅을 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땅을 차지하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이야 말로 진짜 제대로 된 땅을 차지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땅이란 재화는 유한한데, 이를 서로 차지하려고 할 때 생기는 분쟁은 필연적입니다. 오늘날 민사 소송의 대부분이 땅과 관련된 문제라고 합니다. 그만큼 땅이 중요하고, 이로 인해 분쟁이 많이 발생한다는 뜻이지요. 분쟁이 생긴다면, 이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복에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아닙니다. 시편 37편 11절에서도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편 37편 9절에서는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온유한 자가 여호와를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망한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을 내포합니다. 하나는 기대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기대하고 기다릴 때 형성되는 성품이 바로 온유입니다. 온유함은 감정을 부드럽고 말을 친절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대하는 믿음 위에서 하나님의 때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이삭입니다. 이삭은 아버지 때부터 살고 있던 땅에 흉년이 들자, 블레셋 왕이 다스리는 그랄이라는 땅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곳은 팔레스타인의 곡창지대였습니다. 이삭은 농사를 지어 백 배의 수확을 거두었고,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삭이 만들어낸 풍요의 근원인 우물들을 모두 메워버린 것입니다. 당시 우물은 생명줄과 같았습니다. 우물을 흙으로 막아버렸다는 것은 이삭과 가족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싸우지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메워진 우물을 보면서 아무 말 없이 빈손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새로 판 우물 역시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메우고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우물 파기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다툼'이라는 뜻의 '에섹' 우물이 막히고, '대적함'이라는 뜻의 '싯나' 우물이 막히자, 이삭은 다시 새 우물을 팠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았습니다. 그 우물을 '르호봇'이라 이름 지었는데, 이는 '넓음' 또는 '넓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이삭은 가장 넓은 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외부의 적과 싸우지 말고, 나의 내면과 투쟁하라

가장 좋은 땅을 많이 차지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갖고 있는 공통된 욕망입니다. 그러므로 분쟁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분쟁 가운데에서 결국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온유한 마음으로 투쟁해야 합니다. 이삭이 우물을 판 행동은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면과의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결국 곧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물이 나올 때까지 나의 내면 깊은 곳으로 계속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실 때까지 파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잘 지내는데, 혹시 누군가 빼앗으려 한다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우물을 파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나만의 우물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나에게 영원토록 생명을 주는 참된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가장 높은 자리, 가장 좋은 땅을 요구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핵심은 그저 싸우지 말고 욕심부리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하고 으뜸이 되는 사람이 되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대가를 치렀다고 먼저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될 때까지 기대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먼저 나서서 "내가 이렇게 했으니 이 자리를 주세요"가 아니라, 희생을 치렀다면 더 겸손하게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계약을 서두르지 말고, 하나님께서 "계약하자"라고 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는 동안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우물을 파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물을 누군가 빼앗아 가면, 또 다른 곳으로 옮겨서 물이 나올 때까지 계속 파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가장 좋고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원리를 깨닫고, 우리의 영적 삶과 인생 여정에 잘 적용하여 큰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