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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8장 27절-38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너라

by 알렉스강 2024. 9. 14.

https://www.youtube.com/watch?v=gw9uU1JGPOA&t=1062s

 

 

마가복음 8장 27절-38절 새번역

 

2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길을 나서셨는데, 도중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30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시기를,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3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3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3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38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가이사랴 빌립보

 

가이사랴 빌립보로 가시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시고, 제자들을 이끌고 갈릴리 북쪽에 위치한 가이사랴 빌립보로 떠나셨습니다. 마지막 십자가 사역을 마무리하기 전, 마음과 육신을 정비하고자 일종의 피정, 수련회를 떠나신 것입니다. 지금도 이곳은 휴향지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 도시는 식민 도시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기리기 위해 지은 도시입니다. 이후에 분봉왕 헤롯 빌립이 자신의 수도로 삼아 자기 이름을 황제 이름 뒤에 붙여 부른 것입니다. 이 도시의 이름처럼 로마 황제와 분봉왕을 주인으로 삼은 곳에서, 예수님은 이와 반대되는 참된 생명의 길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이 길을 가르치시기 위해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에 대해 제자들은 당시 사람들이 부르는 바를 말했습니다. 모두 다 예수님을 오해한 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말씀을 가르치는 랍비나 엘리야, 혹은 세례 요한이 환생한 게 아닌가 하였고, 그저 능력을 가진 사람, 하늘로 내려온 불을 받은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나 예언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이유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칼뱅은 기독교강요 1권에서 "자신을 알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알아야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나는 누구이기에, 어떤 이유에서 왜 예수님을 따르는가? 이 질문에 명확히 답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명확히 알아야 예수님을 제대로 따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는 선한 것이 없고, 내 안에서 생명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제대로 따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없는 것을 예수님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실상은 자기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고,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게 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진짜 뭘 원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해서 생긴 것입니다.

 

자신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선지자라고 한 것은 사실 그들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욕망에 맞춰 바라본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오해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앞에서 헛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살아간다면, 삶의 목적도, 의미도, 방향도 잃게 됩니다. 결국에는 그저 목숨 하나 부지하고자 하는 생존 본능에 이끌려 살아갈 뿐입니다. 사실 동물과 다를 바 없지 인간으로서의 삶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잘못된 자아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을 오해한 채 스스로 답을 내리고, 실제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에서처럼 백조 새끼가 자신을 오리라고 착각하며 비관하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잘못 알고 살아갑니다. 이처럼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깨닫지 못하면 인생을 허비하게 됩니다. 오리는 오리로, 백조는 백조로, 거위는 거위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나의 정체성을 모른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은 결국 의미 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맞지도 않고 불행할 뿐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다

그럼 우리의 참된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베드로의 대답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다." 이 짧은 문장에는 두 가지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라는 고백입니다. 둘째, 그 주인이 그리스도, 즉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고, 그분이 구원하시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이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흔들리게 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정체성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었습니다. 광야에서의 시간은 이 정체성을 완전히 체득하는 훈련 과정이었습니다. 광야에서 하늘의 만나로 먹고살았으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에 따라 인도받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흔들릴 때, 항상 세상과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거나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울부짖으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또한 "주는 그리스도시다"라는 고백에서 중요한 것은 생명이라는 가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는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서도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라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자입니다. 구원자는 무엇을 구원합니까? 바로 생명을 구원합니다. 예수님이 생명을 구원하실 수 있는 이유는 그분 자신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고 하셨고, 수가 성 여인에게도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며, 그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참된 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많은 분들이 로또나 주식과 같은 불확실한 것에 기대어 인생을 바꾸려 하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반면,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생명은 불확실한 기대가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지는 확실한 약속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진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었습니다. 세상은 보장되지 않는 것들에 목숨을 걸며 성공을 추구하지만, 그런 삶은 많은 경우 실패와 불행으로 끝납니다. 인간의 욕망과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누군가를 이용하거나 이용당하는 인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36절에서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천하를 얻어도 생명을 얻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베드로가 고백한 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말해도 오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의 참된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의 대답에 대해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이 사실을 너에게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조차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따랐던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셨기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인자가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살아나야 한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은 후,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십자가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왕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생명, 즉 구원을 얻는 방법이 십자가라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자들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32절과 33절을 이어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32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항의했다고 표현된 부분과, 33절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으셨다고 표현된 부분이 모두 같은 헬라어 단어인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베드로가 서로 강하게 대립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인이라 고백하고, 구원자라 말하지만, 결국 예수님과 맞서 싸우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간 동기가 세상적 성공에 있었기 때문에 벌어지는 스승에게 덤비며 싸우는 막장의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성공하고, 세상에서 높아지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결국 베드로처럼 하나님과 싸우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과 베드로가 싸운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로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결국에는 예수님을 우상으로 믿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의 생명을 내려놓고 영적인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게 육신의 복을 주면 괜찮지만, 만약 그렇지 않으면 싸움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내가 만든 우상이 아니며, 허상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이 허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상 복을 주는 예수라는 우상을 내려놓는 것이야 말로 진짜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33절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신 때 ‘사탄’이라고 부르십니다. 이후로도 사탄은 베드로와 함께 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기 직전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베드로는 결국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맙니다. 그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났고, 베드로는 사탄의 밥이 되었습니다. 사탄의 밥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게 하고, 사탄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내 걱정, 내 염려, 나의 이해관계에 붙들리고, 항상 나만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른 진정한 목적이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적인 길을 걸어갈 때 세상에서의 갈등은 필연적이다

영적인 세계란 분명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생명을 구하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자 마음을 먹으면, 그때부터 심각한 갈등이 시작됩니다. 마치 조폭이 조직 생활 청산 하려면 손가락 하나 자르고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영적인 자유를 얻고자 세상에서 돌아서면 세상은 큰 손해를 볼 것을 요구합니다.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은 세상에서 손해 보는 것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막아섭니다. 예수 잘 믿다가도 사람이 한순간에 변하기도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사단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멀정 하다가도 사단처럼 교회를 대적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다다. 언제 그러냐 하면, 내 욕심이 나올 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면 어느 순간 확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내 생각을 내려놓아라

34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을 따르는 것, 즉 참된 생명을 얻는 길은 무엇보다도 자기 부인이 먼저입니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다'는 헬라어로 ἀπαρνέομαι로, 자신의 욕망, 입장, 이익조차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자신의 이익과 체면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내 권리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소유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나의 생명조차도 내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상 기득권을 얻기 전에, 내가 먼저 앞서서 세상 기득권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기 욕망을 따라 세상의 성공과 성취를 위해 예수님을 따른 사람은 결코 이것을 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성공도 내려놓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선택하라는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내 생각을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입장, 내 현실, 내 미래, 이 모든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일단 뒤로 물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자리에 하나님의 입장,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 이것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내 힘으로 아등바등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주인 되는 삶을 포기하면, 하나님이 주인이 되십니다. 그럴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놀랍게도 사탄의 묶임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육적인 생명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다음은 35절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결국 우리가 육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은 영의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즉 구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버려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육의 생명을 버리고 영적인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은 세상의 권리나 힘을 얻으려는 길이 아니라, 포기하고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길입니다. 각자가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자기 부인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진짜 구원은 육의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육의 목숨을 잃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육신의 생명을 버려야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손에 잡고 있는 세상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참된 구원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손에 쥔 것을 내려놓게 하시고자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라 고백했습니다. 그 고백은 자신의 육의 생명을 내려놓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걸 알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못합니다. 하나님이 고백하게 하셨고,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이고 복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고자 성령이 고난을 주시는 것이고, 고난이 복이라 하는 것입니다.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38절에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음란하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십자가는 결코 인정받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소돔성에서 롯의 사위들은 ‘소돔이 불과 유황으로 심판받을 것’이라는 천사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이들이 순간의 쾌락과 세상의 이익을 위해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생명의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세상 것에 얽매여 영원한 생명을 위해 살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 그분을 부끄러워한 자들을 주님도 부끄러워하실 것이라고 하셨고, 같은 본문을 기록한 마태복음에서는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창조주요, 섭리주이신 하나님은 반드시 행한 바대로 다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이걸 기억하는 사람은 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영적인 생명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지만, 성령이 주시는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의롭다 여겨지는 믿음이다

바로 이 믿음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는 노아를 의인이며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합니다. 노아가 왜 의인이며 완전한 자였을까요? 노아는 십자가의 삶을 실천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듯이, 노아도 나무를 잘라 그 어깨에 짊어지고 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며 헛된 일을 한다고 했지만, 노아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 일을 실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노아의 믿음이며 의인이라 불린 이유입니다. 이것은 모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부터 26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잠시의 세상적 영광과 죄악의 쾌락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는 고난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노아나 모세의 믿음이 단순히 믿습니다, 믿습니다, 구원받았으니 나는 아무 문제 없이 천국 간다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노아와 모세의 믿음은 십자가를 선택하고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의롭다 여겨지는 믿음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우리를 의롭다 여기며,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선택하지 않고, 나는 구원받았네 노래 부른다면, 그 사람은 나중에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주님의 책망을 들을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십자가 구원의 길을 믿음으로 따라가는 사람은 세상의 어떤 부귀와 영광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고난이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영광입니다. 이렇게 고백하길 바랍니다. 십자가를 통해 육이 죽고 영이 살아나는 것, 바로 이것을 믿는 것이 의롭다 여김 받는 구원인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참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모두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