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1M2bP2zypjI&t=896s
마가복음 9장 38절-50절 새번역
38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39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쉬이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41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42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곧 그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손을 잃은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4 (없음)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발은 잃었으나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6 (없음)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들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9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너희는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겠느냐?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쳐 두어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
급진적인 제자의 길에 대한 과격한 표현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를 떠나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전환점에 서 있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강한 믿음이 요구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말씀이 좀 직설적이고 거칠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손발을 찍어버리라든지, 맷돌에 매어 바다에 빠뜨려진다든지, 지옥에 던져진다든지 표현이 무섭고 잔인합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죄로 인해서 사람의 신체 일부를 잘라야 할지 모릅니다. 지옥에 대한 생각을 하면 꺼지지 않는 불과 벌레가 가득하여 우글거리는 곳에서 죽지 않고 고통당해야 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복음이 레디컬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요. 본문의 상황과 말씀이 급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급진적인 말씀이 누구에게 주어졌는가? 바로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는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사람은 크게 세 무리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반대하고 트집 잡고 시비 거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가 있고, 둘째는 기적과 빵을 바라며 몰려든 무리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예수님께 붙잡혀 끝까지 따라가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마음먹은 후부터 말씀을 이 세 무리 중에서 제자들에게만 주십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배척하지 말라
그럼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은 배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요한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 중에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이 우리를 따르지 않으므로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기적까지 행한 자가 곧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비방하지는 않지 않겠느냐고 하시며 그 일을 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면 그에게 주님의 능력이 함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백성이 아닌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어 주의 뜻을 행하지만 단지 나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해 배척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41절입니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단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치 내 가족 내 형제를 만난 것처럼 그를 반기며 그에게 물 한 잔이라도 대접하는 자는 결단코 그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 안에서 모든 당파를 배격하는 말씀입니다. 어느 교단 어느 교파에 속한 자이든, 그가 어떤 스타일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든, 피부색이 어떻든, 어느 지방 사람이든, 학벌이 어떻든, 진보에 속한 자이든 혹은 보수에 속한 자이든 상관없이 주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 된 자가 분명하다면, 그것 하나로 한 가족 한 형제처럼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뜻을 함께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두고 다른 복음서인 마태와 누가는 완전히 반대로 기록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요, 나와 함께 모이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마가복음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이냐면, 결국 그 뜻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함께 한다는 것이 단지 같은 시공간에서 물리적으로 같이 있는 것만이 아니지요. 주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진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시공간으로 주님과 함께 하며 따르지 않아도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결국 주님을 따르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가복음이 다른 복음서보다 가장 먼저 쓰였기에, 굳이 표현으로만 본다면 마가복음이 좀 더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마태와 누가가 이를 알면서도 굳이 반대로 기록한 것을 보면, 마가와는 달리 마태와 누가가 처했던 당시 초대교회에서 내부의 분파 다툼이 마가복음이 기록된 시기보다 훨씬 더 심각해졌음을 말해줍니다. 당시 로마에 박해라는 외부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사실 교회의 큰 위협은 내부에 있었습니다. 외적으로 누가 공격하면 오히려 내부는 똘똘 뭉칩니다. 그런데, 내부에서 서로 나눠지고 다투게 되면, 그냥 여지없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 수난예고 본문에서 말씀을 드렸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서로 싸운다고 했지요. 베드로는 예수님과 싸웠고, 야고보 요한도 나머지 제자들과 누가 더 높은 지를 가지고 싸웠습니다. 자중지란이라고 하지요. 외부의 적이 아니라 결국 내부의 적으로 인해, 서로 싸우다가 넘어집니다. 이것은 영적인 원리이기도 합니다. 악한 세력도 넘어지는 방식이 자중지란이고요. 반대로 하나님 백성들도 망하는 모습을 보면, 결국 서로 싸우다가 넘어집니다. 교회도 보십시오. 내부 분쟁이 나면 그냥 무너지는 것입니다.
불신의 세 가지 측면 무지, 오해, 배척
이게 불신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부의 분쟁이 믿음이 없어서 생깁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이러한 불신을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히 제자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인데요. 내부의 분쟁을 일으키는 불신의 모습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지, 오해, 배척입니다. 일단 제자들의 문제는 무지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복음과 진리가 무엇인지,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 메시아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며 그를 통해 세워질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그것을 이루는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믿음은 우선적으로 앎에서 시작됩니다. 앎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뭔지를 알아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름답다는 말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알다에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알다라는 동사 어간에 음이라는 접미사가 붙어 알음이 된 뒤 답다라는 접미사가 합쳐서 된 말입니다. 이를 통해서 무엇보다 알아야 아름답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는 것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깨닫고, 깨달은 만큼 행동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고 겸손해져서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게 다 잘 알고 있다고 하지요. 전공 분야, 자기가 잘하는 세상 지식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앎인 진리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성경에서 대해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도 무지한 것이 우리의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무지에서 발생한 오해와 배척
무지한 사람들은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불신의 모습은 이해가 아닌 오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왜 믿지 못하겠습니까?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교만한 것도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부분적으로 아는 것을 전체로 확대합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맞다고 우기기도 합니다. 아니면 감정 기분에 따라 의미를 부여해 오해하기도 합니다. 편견과 선입견 모두가 다 이런 것들입니다. 편견이 강하고 선입견이 강할 수록 교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오해가 결국 잘못된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문제을 일으키고 갈등을 일으킵니다. 오해의 가장 큰 문제는 분쟁인 것입니다. 오해를 이렇게 정의하면 좋을 듯 합니다. 타인의 입장보다 내 입장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해는 내 입장만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역지사지라고 하지요. 이게 이해입니다.
그러니 오해하는 사람의 특징은 남을 배척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에 대해서 무지하고 오해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배척을 합니다. 예수님은 가족에게 오해받고, 고향에서 배척당하고, 제자에게도 결국 부정되고 배신당했습니다. 결국 무지와 오해는 배척이라는 태도를 낳는 것입니다. 무지도 믿음이 없는 것이고, 오해도 믿음이 없는 것이고, 배척도 결국 믿음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반복하는 무지와 오해와 배척이라는 불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믿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게 공생애 동안 예수님이 하신 일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도 제자들처럼, 무지하고 오해하고 배척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잠깐 방심해서 유혹에 넘어가고, 한눈을 팔아도 넘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쉬지 않고 배우고, 깨닫고, 받아들임으로서 온전히 믿음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신이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부분으로 넘어가는데요. 본문 42절, 43절, 45절, 47절에서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죄짓게 하다는 말인데요. 원어로 하면, 스칸달리조입니다. 덫에 걸려 넘어지다, 함정에 빠지다는 것입니다. 죄를 도덕적인 의미로, 문자적 의미로 이해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지요. 성경이 이야기하는 죄의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니 걸려 넘어지게 하는게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불신을 일으키는 무지와 오해와 배척입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를 죄 짓게 하도록 걸려 넘어지게 하는 덫입니다.
우선 42절에서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중 하나를 넘어지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본인이 스스로가 불신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남에게까지 불신하도록 하는 것은 이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진리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하게 만들고, 오해하게 만들고, 배척하게 만든다면 이게 정말 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매우 강한 어조로 말씀하셨는데, 이게 정말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하지요. 정말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 뜻에 대해서 우리가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내 문제는 상관없지만, 남의 인생에 쉽사리 참여해서 좌우지하는 것은 정말 악한 행동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뜻을 따르지 않게 하는 것들은 잘라버려야 한다
다음으로 43절과 4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곧 그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손을 잃은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발은 잃었으나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손과 발과 눈이 죄를 짓게 하면 잘라버리라고 했습니다. 손과 발과 눈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육체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진리를 알아가는 수단을 말합니다. 손과 발과 눈이 진리를 향하지 않고, 오히려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그냥 잘라버리라는 것입니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덫이라고 하지요. 덫에 걸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잘라버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걸어가는데, 나를 가로막고 걸려 넘어지는 것이 되었다면, 여지없이 과감하게 잘라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잘라버린다는 것은 일종의 매듭짓기와 같습니다. 매듭이 지어져야지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실 때에도 단계에 따라 이끄십니다. 새로운 과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잘라내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게 매우 아프고 힘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불신인 오해나 무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지옥, 즉 게헨나와 하나님 나라를 비교하시며 선택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손발과 눈을 잘라버리고서라도 생명을 건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가 게헨나입니다. 게헨나를 지옥이라 했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로 골짜기를 뜻하는 게(ge)와 사람 이름인 힌놈(hinnom)이 합성된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의 지명입니다. 게헨나는 예루살렘 남쪽 비탈 아래의 계곡으로, 아하스와 므낫세 왕 시절 우상숭배가 극심할 때에는 자식들을 이방 신 몰록에게 불살라 제사를 드린 매우 악한 곳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로 인해 힌놈 골짜기를 살육의 골짜기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떠난 악한 백성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짐승의 밥이 될 것이고, 그 땅이 황폐할 것이라 예언을 했습니다. 실제로 요시야 왕은 이 예언에 따라 게헨나 골짜기는 죄수의 시체나 죽은 짐승의 사체, 그리고 오물을 버리고 태웠습니다. 화장장이나 쓰레기 소각장과 같이 사용한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지옥으로 형상화된 것입니다.
선택을 미루지 말고 잘해야 한다
예수님은 손발과 눈을 찍어 버리는 이유로 게헨나가 아니라 생명과 하나님 나라에 속하기 위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게헨나로 들어갈지, 하나님 나라, 즉 생명으로 들어갈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들어간다는 말은 원어로 에이스에르코마이라고 해서, 구체적인 장소나 조직에 가입하다, 참가하다, 침입하다는 말입니다. 게헨나와 하나님 나라는 다른 곳에 있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에 있습니다. 따라서 게헨나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피안의 세계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미루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살아가고 있는 내 삶이 게헨나에 속해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잘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르다는 말은 결국 내가 어떻게 할지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게헨나가 될지, 하나님 나라가 될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선택은 신중해야 하지만, 미룰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 선택을 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축복으로 생각하십시오. 선택을 잘하려면 정보가 있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선택을 잘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안에 불신을 걷어내야 합니다. 무지, 오해, 배척 이 세 가지를 피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불신의 길을 따릅니다. 무지에 호소하여 만용으로 무모하게 행동하고, 거짓된 길이 바른 길이라 여기며 어리석게 걸어갑니다. 그리고 화평하는 길이 아니라 싸우거나 배척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선택 하나가 정말 많은 것을 결정합니다. 한 가지 잘못된 선택을 했을 경우 십 년이 허송세월처럼 지나가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 선택을 잘하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장고악수로 미루지 마시고, 하나님의 지혜로 용기 있게 잘 선택하길 바랍니다.
선택의 기준은 불과 소금이다
하나님의 백성일 수록 선택이 정말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선택에 있어서 기준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49절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소금과 불은 시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금과 불은 시련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소금과 불의 특징은 소멸시키는 힘만이 아니라 정화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시련이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시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정화시키는 소금과 불과 같은 고난입니다. 무엇을 정화시키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의 불신입니다. 믿음 없음입니다. 무지와 오해와 배척하는 우리를 새롭게 바꾸는 것입니다. 참된 지식과 깨달음으로 배척이 아닌 관용과 포용으로 우리를 바꾸는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47절에서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너희는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겠느냐?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쳐 두어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 했습니다. 여기서 소금을 쳐 두는 것, 즉 우리를 정화하는 시련을 기꺼이 맞이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서로 화목하게 지낸다고 했습니다. 화목하게 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죄짓지 않게 하는 것, 즉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거부할 때 늘 서로 싸운다고 했습니다. 화목하는 것은 좋은 제자 공동체를 이루어서 서로 싸우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화목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진리이신 하나님과, 생명 되신 예수님과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 말씀을 읽으며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신으로 인한, 모든 무지와 오해, 그리고 배척을 내려놓길 바랍니다. 두려움도 내려놓으시고, 불안도 내려놓고, 진리로 인해서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선택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불과 소금과 같은 시련이 앞에 놓이더라도, 그 시련이 우리를 깨끗하게 흠이 없는 자로서 정화해 주리라 믿으며,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기꺼이 기쁨으로 불구덩이로 뛰어들길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불에 다 타 죽고 재만 남아도, 우리의 영혼은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고 구원받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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