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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9장 30~37절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by 알렉스강 2024. 9. 18.

https://www.youtube.com/watch?v=XKY-GkcVUrg&t=606s

 

마가복음 9장 30~37절 새번역

 

30 그들은 거기에서 나와서, 갈릴리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남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31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고,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그가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고, 예수께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34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35 예수께서 앉으신 다음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36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에, 그를 껴안아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두 번째 수난예고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을 예고하는 장면이 세 번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30절부터 32절까지 읽어봅시다. “그들은 거기에서 나와서, 갈릴리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남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고,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그가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고, 예수께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제자들에게 집중하시다

예수님이 갈릴리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갈릴리는 갈릴리 지역이라기보다는 갈릴리 호수를 말합니다. 갈릴리라는 대명사는 지역을 가리키지만, 장소로 본다면 호수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합니다. 예수님은 바다 한가운데를 건너면서, 십자가와 부활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께서는 이것을 남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특별히 시간이 남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십자가 달려 죽기까지 몇 주 남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합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을 제자들에게 쓰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 제자들에게 복음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와 진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 하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저주의 갈릴리 바다로 이끄시다

그렇게 예수님이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가셔서 특별한 시간을 보내셨는데, 그 장소가 갈릴리 바다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제자들이 익숙한 장소이긴 하지만, 하지만 여전히 두려운 곳입니다. 원래 사람이 뭔가 모르면 용감합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어부로 살아온 제자들은 바다를 잘 알았습니다. 바다가 잔잔한 것 같지만 변덕스러워서 언제 변할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다를 건널 때면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선경험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가 몇 번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바다는 주로 죽음이나 저주를 뜻합니다. 이 죽음과 저주 가운데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죽을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제자들의 기분이 어떠했을까요? 섬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까지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계속 선생님이 계속 죽는 이야기를 하니깐, 이게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께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이 두려웠던 것은 다름 아니라 십자가를 따라가기 싫은 것입니다. 대가를 지불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이게 무의식 중에 작용하는 것이고, 영적으로 묶여 있으니 거부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귀신들은 물로 뛰어들게 한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것은 본문에 앞선 사건입니다. 간질병 귀신 들린 아이가 있었는데, 제자들이 이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곤란한 상황에 있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이 아버지에게 어떻게 된 거냐 물으시니, 어릴 때부터 귀신이 들어가 아이를 죽이려고 여러 번 불 속에로 던지고 물속으로 던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귀신의 특징이 있습니다. 귀신은 불이나 물로 뛰어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군대귀신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군대 귀신들이 예수님께 허락을 받고 귀신 들린 사람에게 나아가 돼지 때에게로 향했다고 하지요. 그런 다음 돼지들이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천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강 물속으로 다 뛰어 들어갔다고 하지요. 실재로 주술사들이 축귀를 할 때에, 귀신을 돼지에게로 보내어서 물에 빠져 죽게 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저주와 사망으로 상징되는 물 속으로 뛰어들게 하는 귀신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가르치고자 물 가운데로 이끄신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바다 한가운데로 가신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귀신처럼 저주와 사망으로 이끄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귀신들은 저주와 사망으로 끌고 가서 우리의 육신도 죽이고 영도 죽이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입니다. 비록 육신의 눈으로는 저주와 사망일지 모르나, 그곳에서 우리의 영을 살리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 한가운데에서 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가르치신바대로 죽고자 하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가르치시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가 바로 저주와 사망으로 목숨이 위협받는 갈릴리 바다 한가운데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저주와 사망의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되었을 때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바로 그 시간을 통해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사는 것입니다. 회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 이끄시는 대로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 인생의 배의 선장이 되셔서 붙잡고 이끌고 가십니다. 그럼 폭풍이 불고 파도가 쳐도 절대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라고 몸부림치면 위험합니다. 배가 전복될 수 있습니다. 그냥 죽겠노라 주님께 내 몸을 맡기고 힘을 풀면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빨리 깨닫고 주님 가르치신대로 제자답게 살아가는 것이 참된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이후에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가버나움 어느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아마도 베드로의 장모의 집이었으리라 보입니다. 33절과 3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어떤 문제로 다투었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만, 서로 누가 큰 사람 인가 하는 것으로 다투었다고 합니다. 추측하건대 베드로 장모가 오랜만에 식사를 마련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집 안이 아니라 노상에서 먹을 때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집 안에서는 식사 자리를 정해야 하는데, 서로 상석에 앉고자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말다툼이 나고 시비가 붙은 것입니다.

 

내가 먼저 희생하기 싫기에 다툼이 생긴다

다툼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십자가를 선택하고 따라가지 않을 때, 일어나는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영광만 받으려 하고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기에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아이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먼저 희생하기 싫어서 다툽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를 가르치실 때에도 제자들은 다투었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묻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다 고백했을 때에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처럼,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고 죽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라 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달려들며 선생님 그러시면 안 된다고 하면서 예수님과 맞짱을 뜨며 항변하며 다투었다고 하지요. 제자들끼리는 아니지만,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과 다투었습니다. 사실 모든 문제가 그렇습니다. 누군가 십자가를 지면 싸움이 쑤그려집니다. 다툼은 이해관계가 첨예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다 이 문제로 다투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희생해야 하는데, 아무도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할 수 없다

제자들 간의 다툼은 어쩌면 예정된 일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불러 데리고 가셨습니다. 수제자라 불리는 이들입니다. 이때부터 제자들 사이에도 계급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얗게 변하시는 사건을 보이시고 나서,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입방정 맞은 베드로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당연히 자랑하며 신나게 떠들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 요한은 어머니를 불러다 로비를 했습니다. 나중에 잘 되고 나면 우리 아들 둘을 우의정 좌의정하듯 예수님 양 옆에다 세워달라 했습니다. 누구나 다 예수님 옆에 앉고 싶겠지요. 이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노골적으로 예수님께 요구를 한 것입니다. 누가 서열이 높은가, 누가 최측근이나, 누가 어디에 앉을 것인가를 놓고 다투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할 수는 없습니다. 과정은 공정해야 하겠지만, 결과는 모두 다 똑같을 수 없습니다. 그런 평등 사회를 꿈꾼 게 공산 사회 아닙니까? 하지만 결국 이상으로 끝나고 실패했습니다. 극소수 일부가 모든 권력과 부를 차지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이 바로 북한의 모습이지요. 이 세상에서는 결코 평등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결코 완전할 수도 선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환상을 깨고 나와야 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자리다툼에서의 문제는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교만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남을 섬기는 것을 일종의 처세나 관계 기술로 사용해서 결국 자신을 높이려는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겸손하다 할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고등 지능 범죄자입니다. 결국 그 안에 교만한 마음이 가득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신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못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다루기 힘든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십니다. 그 교만을 깨뜨리지 않고는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 깨어진 사람을 가까이하시고 그런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시편을 보시면, 곳곳에 교만을 경고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시편 138편 6절에서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교만한 자를 멀리 하시며,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느니라.” 시편 18편 27절에서는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마지막으로 시편 101편 5절에서 “그 이웃을 은밀히 비방하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라

결국 제자들의 이런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지요. 35절입니다. “예수께서 앉으신 다음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예수님이 먼저 말로 가르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첫째가 되고 싶으면, 스스로 꼴찌가 되어라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모든 사람을 섬기게 되면, 하나님 나라에서 크고 중요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못 깨달았습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유교 관습 때문에 그런 경향이 있는데, 유대 문화에서도 자리 앉히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공식적으로 다 함께 밥을 먹으려 할 때 쉽지가 않다고 합니다. 그냥 밥을 먹지 않습니다 다. 밥을 먹기 전에 절차가 많습니다. 손을 씻어야 하고 발도 씻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리 정하는 것이 일입니다. 초대받은 각 사람마다 서열이 있어서 자리배치를 잘해야 합니다. 이게 문제가 생기면 큰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기 직전까지 서로 자신이 높다고 다투었다

제자들은 예수님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이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유월절 밤 성만찬 식사 자리에서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세족식 장면입니다. 일반적으로 주인이 사람을 자기 집으로 초대를 했으면, 발을 씻기고 닦아 주어야 합니다. 종이 있다면 주인 대신에 종이 할 것이고, 종이 없다면 가족 중 자식이 하던지 본인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유월절 만찬은 제자 중 어느 누구 집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집의 다락방을 빌린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제자 중 한 명을 보내어서 우연히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 그 집주인에게 유월절을 보낼 객실을 달라고 하면 큰 다락방을 줄 터인데, 거기에서 유월절을 준비하라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유월절을 준비를 했는데, 문제는 발 씻어주는 게 문제였습니다. 집주인이 씻어주지 않으면, 누군가는 먼저 발을 씻어줘야 하는데, 그냥 서로 눈치를 보면서 머뭇거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아무도 발을 씻지 않고 그냥 앉아 버린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다락방 안으로 들어오신 다음 상황을 보시니 한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먼저 팔을 걷어 수건을 허리에 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웠겠습니까? 베드로는 처음에는 그러시면 안 된다고 하다가, 발을 씻지 않으면 나와 아무 상관없다는 예수님의 말에 나중에는 다 씻어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리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35절과 3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에, 그를 껴안아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해를 못 하기에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림 언어를 잘 사용하시는데, 이걸 말로 하시면서 동시에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데리고 오셔서 제자들 가운데 세워놓으셨습니다. 학자들에 말로는 베드로의 아들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어찌 되었든지 어린아이는 작고 약하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을 뜻합니다. 이런 아이를 중심에다 세우시고 꼭 앉으신 다음에 높이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아이를 대접하면, 그 사람은 나를 대접하는 것이고, 나를 대접하면, 무엇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대접하는 것이라 하신 것입니다.

 

대접하는 사람은 생명을 선물로 받는다

37절에 영접하다, 즉 대접하다는 말인 그리스어 텍세타이τεξέται입니다. 문법적으로 보면, 텍코τέκω라는 동사의 수동태입니다. 텍코라는 말은 낳다, 창조하다, 만들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말로 하자면, 낳아지고, 창조되고, 만들어지는 것이 대접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조되기 위해서, 태어나기 위해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대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접하는 자에게는 생명의 축복이 선물로 주어진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을 대접하여서, 그로 인해 약속의 아들 이삭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황금률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먼저 대접하는 자에게는 그 대접한 대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해관계가 아닌 그 사람 모습 그대로 대하라

그리고 대접하다는 텍스타이τεξέται는 환영하다, 인정하다는 뜻 외에 인내하며 참다, 역경을 극복하고 받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약한 누군가를 참고 인내하며 받아주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내게 중요한 사람과 밥을 먹으려고 합니다. 내게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 에너지를 쓰는 것입니다. 친구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의 이해관계에 따라 만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만나서 사귀게 된 사람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친구 사귀기가 어렵다고 하지요. 나이가 들면 만나는 사람이 다 하나같이 서로 자기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만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짜 친구는 어떻습니까? 상대가 부족하고 힘들고 어려워도 그것과 상관없이 만나는 것입니다. 

 

정말 좋은 교회가 무엇입니까? 잘 살고 힘 있는 사람이 다니는 교회가 좋은 곳입니까? 아닙니다. 남녀노소, 사회 각 계층의 사람들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공통점 하나 만으로 만나서 공동체를 이루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곳입니다. 돈 있고 없고 가 아니라, 서로가 진실함으로 대하는 곳입니다. 차별 없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심지어 교회에 와서도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서는 안됩니다. 이 문제가 노골화되어서 성만찬도 함께 하지 않았던 곳이 바로 고린도교회였습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준비해 온 음식으로 밥을 잘 차려서 먼저 먹고, 일하는 것이 바쁘기에 정시에 예배에 참여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나중에 변변치 못한 음식을 먹었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한 몸이다, 한 공동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교회 안에서 이해타산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내려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접하고자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대접해야 한다

우리 중에 만약 하나님을 대접한다고 하면, 주저하거나 망설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늘을 공경하는 사람이라고 하지요. 이게 다 하나님을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직접 하나님을 대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만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직접 대접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이 행복하고 평강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들을 섬기며 돕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내게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사람들을 환대하고 관용하는 것을 잘 실천하기 바랍니다. 겉으로 하지 마시고, 마음의 중심으로 섬기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아니라 인간도 영물이라서 내가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결국 다 압니다. 그런 것은 효력이 없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대접하듯, 사람들을 진실하게 대하길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빌립보서 2장을 읽으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간단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이 땅에 가장 낮은 곳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제자의 길을 믿음으로 온전히 걸어가시는 모두 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