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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장 17절-31절 새번역
17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1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19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20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21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23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의 말씀에 놀랐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제자들은 더욱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께서 그들을 눈여겨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28 베드로가 예수께 말씀드렸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
2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30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31 그러나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길을 떠나실 때 가르치시다
오늘 본문은 흔히 부자 청년에 대한 말씀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언급하셨습니다. 청년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이 모든 계명을 지켜왔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그가 가진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근심하며 슬퍼하며 떠나갔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주해하기에 앞서 몇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하신 말씀입니다. 17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길을 떠나실 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길'은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의 중요한 사건들은 주로 길 위에서 일어납니다. 이 길을 예수님 혼자 걸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함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길에서 일어난 사건이 주는 메시지는 단지 부자 청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부자 청년의 질문인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메시지라 할 수 있습니다.
영생의 길을 땅을 통해 말씀하시다
지난 설교에서 결혼과 이혼의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혼을 금지하셨는가 하면, 결혼이라는 중요한 계약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계약도 지키지 않을 것이라 보셨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이혼할 것이라면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계약은 적을수록 좋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계약은 하나님 한 분과의 계약으로 족하니, 성적인 욕구를 감당할 수 있다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출산율 저하로 인구 소멸을 걱정하는 우리 시대의 가르침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당시 독신을 권면한 것은 결혼은 단지 성적인 문제나 출산과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 땅과 관련된 매우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계약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땅과 관련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시 땅은 거의 절대적인 자산이었습니다. 땅을 유지하기 위해 가문과 가문이 결혼이라는 계약을 맺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그 땅을 이어갈 승계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이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재산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크테마κτῆμα라고 합니다. 물론 재산을 의미하지만, 주로 토지를 가리킵니다. 부자 청년은 갈릴리에서 명망 있고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많은 토지가 상속될 예정인 지주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청년에게 그 땅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신명기 27장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저주받을 일을 쭉 열거하는데, 그중에서 세 번째로 "이웃의 땅의 경계석을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웃의 땅을 사서 내 것으로 만드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율법에 따르면 토지는 매매할 수 없습니다. 이웃의 땅을 산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장기 임대일뿐입니다.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이 되면, 땅은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희년법이 지켜졌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많은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가 생겨났다는 것은, 가나안 정착 시부터 이스라엘의 헌법적 가치로 주어진 희년의 정신이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율법에 따라 희년을 지키지 않는 문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본인이 땅을 돌려주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자면 그 땅은 결국 원래 소유자에게 돌아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토지를 돌려주지 않는 것은 남의 것을 계속 빼앗아 소유하고 있는 것이므로 도둑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의 말씀을 언급하셨습니다. 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렇다고 예수님은 십계명을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부자 청년이 중간에 말을 끊고 자기가 어려서부터 그 계명들을 모두 지켜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본인 역시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이기에, 도둑질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지키지 않은 사람입니다. 조상 대대로 십계명을 어겨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말을 하는 부자 청년을 "눈여겨 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스럽게 여기셨다"는 것은 이 청년의 무지함과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뜻입니다. 부지 청년의 조상들은 대대로 십계명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갑자기 영생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진리를 찾고자 하는 모습이 대견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청년의 무지함에서 나온 용기를 나름 좋게 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입니다. 조상 대대로 남의 땅을 빼앗아 축적한 헌 상황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땅을 원소유자에게 돌려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대신 땅이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신 "한 가지 부족한 것"입니다. 이 한 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이 청년은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한 가지 부족한 것"이란 땅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행위를 말하는 것일까요?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러한 행동 자체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얻기 위해 그 행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청년이 진정으로 소유해야 할 자신의 땅입니다. 가나안 정착 시 각 지파와 가문에게 주어진 각자의 땅이 있습니다. 이 땅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유업이며, 이 유업을 지키고 이어가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말하는 구원입니다.
자기 유업을 잘 가꾸는 것이 소명이다
앞서 "땅"이라는 단어가 크테마(κτῆμα)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크테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일반적인 밭을 가리키는 사데(שדה)보다는, 포도원을 뜻하는 케렘(כֶּרֶם)이 더 적절합니다. 크테마라는 단어에는 분배된 땅, 곧 몫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땅이 좋든 나쁘든, 중요한 것은 그 땅이 내 몫으로 받은 땅이라는 사실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받은 유업을 말할 때, 일반적인 밭을 가리키는 사데 대신, 주로 포도원인 케렘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포도원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며 모든 힘을 다해 가꾼 땅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에 최선을 다해 가꾸고, 그곳에서 가장 좋은 포도를 수확하려 했던 것입니다.
포도는 역설적이게도 척박한 땅일수록 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포도나무는 영양분이 풍부한 비옥한 땅보다는, 석회석, 자갈, 모래, 암반 등이 섞인 척박한 토양을 선호합니다. 일반 농작물이 잘 자라는 비옥한 땅에서는 포도나무가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고, 줄기와 잎을 키우는 데 대부분의 영양분을 소비해 번식을 위한 열매를 맺는 데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최상의 포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반면에 척박한 땅에서는 수분과 영양분을 찾아 포도나무가 깊게는 40미터까지 뿌리를 내립니다. 이는 최대한 영양분을 흡수하며,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자신의 땅이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유업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포도원이라 부를 수 있으며, 유산이나 기업을 뜻하는 히브리어 나할라(נחלה)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나할라는 그 사람의 소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모든 소유를 버리라고 하신 말씀은, 단지 모든 것을 다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 자신의 원래 소유를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것이 아닌 땅을 포기해야만, 진정으로 자신에게 속한 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거짓된 자아, 즉 남의 땅을 버리고, 진정한 자신의 땅을 찾는 여정에 나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
이러한 여정을 단순히 선택 사항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 청년이 질문한 영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생명과도 관련된 문제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가 생긴 이후 제자들이 자신의 재산을 팔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재산도 크테마, 곧 땅입니다. 이를 본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자신의 크테마를 팔았으나, 그중 절반은 교회에 바치고, 나머지 절반은 자신들의 소유로 남겨두었습니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베드로에게 지적받았을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자리에서 혼령이 떠나갔다고 합니다. 이를 도덕적으로 해석하여 교회 헌금 시 '삥땅을 치지 말라'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가 이 사건을 엄중하게 다룬 이유는,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을 판 후 일부를 감추었다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 노스피조마이(νοσφίζομαι)의 어원은 "멀리 떨어지게 하다" 혹은 "분리시키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분리한 것은 바로 땅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 땅의 기업과 세상의 기업을 모두 가지려고 했습니다. 부자 청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여러 개를 다 가질 수 없습니다. 자기 유업 하나만을 가질 수 있으며, 유업은 둘일 수 없습니다. 하나를 가지려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가르치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두 가지 사이에서 갈등을 느꼈습니다. 그만큼 그에게는 이 땅의 토지가 중요했습니다. 문제는 내세의 영생과 현세의 토지, 둘 다를 취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길을 차단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슬픔에 빠졌습니다. 결국 부자 청년은 낙담하고 떠나갔습니다. 여기서 낙담했다는 말인 스투그나사스(στυγνάσας)는 큰 슬픔으로 충격에 빠진 상태를 말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베드로의 말을 듣고 혼령이 떠나간 것처럼, 부자 청년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그의 육신은 죽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영혼은 죽어버렸습니다. 그는 영생을 원했지만, 땅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땅 대신 자신의 영혼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은 죽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지난번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말씀은 급진적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두 번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이 떠난 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4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그의 말씀에 놀랐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하시니, 제자들은 더욱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이 말씀은 매우 유명합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는 말씀이죠. 이를 두고 ‘청부론’(부자가 깨끗하다)과 ‘청빈론’(이 땅에서 가난해야 깨끗하다)이라는 오래된 논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해석의 오류에서 비롯된 논쟁입니다. 본문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희랍어 원어에서 낙타가 "마켈로스"인데, 배의 밧줄을 뜻하는 "카밀로스"로 해석하여 바늘에 밧줄을 넣는 정도는 바늘을 크게 만들면 가능하니 청부론이 옳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낙타나 밧줄이나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문 중 안식일에 모든 문이 닫힐 때, 부득이하게 드나들어야 하는 작은 문이 있었는데, 이 문을 '낙타 바늘귀 문'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낙타 상인들은 낙타의 짐을 모두 내려놓고 낙타가 무릎을 꿇고 기어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자라 하더라도 삭개오처럼 자신의 부를 다 내려놓으면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로 청빈론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낙타의 짐을 내려놓고 성문을 기어가는 것과 부자가 자기 재산을 다 내려놓는 것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남의 땅이 아니라 자기 땅에서 살아가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
예수님께서는 "부자로 살아라" 혹은 "가난하게 살아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구약에서부터 일관되게 말하는 구원의 메시지는 땅입니다. 예수님은 땅을 버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남의 땅을 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자신이 받은 땅을 잘 가꾸고 이어갈 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결국, 내가 받은 땅이 무엇인가가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하나님의 선물이자,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이며, 하나님의 동행하심의 표시입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 땅을 통해 조상들과 가족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땅 자체가 곧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은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고, 다른 땅으로 대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나할라(נחלה), 즉 '조상의 기업'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업을 하나님 나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땅을 소유한 자로 살아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할라를 얻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것을 다 팔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부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내가 받은 기업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그 기업을 목숨을 걸고 지키며, 생명을 누리며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29절과 3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해, 복음을 위해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박해를 받지만, 결국에는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녀나 논밭을 백 배나 받는다." 결국 땅을 잃음으로 땅을 얻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봇의 포도원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구약의 한 사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사건입니다. 나봇의 포도원은 이스르엘에 있었습니다. 이스르엘은 '하나님이 파종하신다'는 뜻으로, 그 의미가 더 깊습니다. 이스르엘은 잇사갈 지파의 아름다운 성읍이었고, 그곳에 아합의 별궁이 있었습니다. 아합 왕의 별궁은 '상아궁'이라고 불릴 만큼 호화스러운 궁전이었습니다. 그 옆에 나봇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아합 왕은 그 포도원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곳에 나물밭을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 여기서 나물밭은 정원을 의미합니다. 상아궁에 이미 정원이 충분히 있었을 텐데, 왜 굳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냈을까요? 남의 떡이 더 커 보였던 것입니다. 포도원은 척박한 땅이었지만, 나봇의 조상 대대로 가꾸어져 있었기에 더 좋아 보였던 것입니다. 정원은 지력이 좋아야 하지만, 척박한 포도원 땅에는 정원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아합 왕은 그 포도원을 갖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아합은 나봇에게 제안을 합니다. 이 포도원을 주면 더 좋은 포도원을 주겠다고 하고, 아니면 돈으로 비싸게 쳐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이 제안을 단칼에 거절합니다. 이유는 바로 이 포도원이 나할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기에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근심하며 드러눕게 되는데, 이는 어설프게 영생을 구하려던 부자 청년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도 근심하며 슬퍼했습니다. 사람은 자기 것을 구하면 됩니다. 땅의 부자라면 땅의 부자로 만족하면 됩니다. 반대로 하늘의 부자는 하늘의 부자로 만족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땅의 부자이면서 하늘의 부자가 되고 싶거나, 하늘의 부자이면서 땅의 부자가 되고 되고자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이 상황을 본 왕비 이세벨은 한심하게 여깁니다. 바알 신앙을 가진 이세벨에게는 하나님이 땅 매매를 금하신다는 것이 생소할 뿐 아니라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왕이 백성의 것을 원하면 얼마든지 차지할 수 있는 존재로, 백성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것이 왕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나할라의 개념을 모르는 이세벨의 눈에는 나봇의 포도원이 그저 나봇이라는 개인의 소유물일 뿐이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에게 땅은 단지 공정하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거래될 수 있는 재산의 일부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땅은 권한의 문제로 결국 힘 있는 자가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세벨은 아합에게 "내가 당신에게 나봇의 포도원을 주겠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땅의 저주를 받으면 생명을 잃는다
그리하여 이세벨은 꾀를 냅니다. 거짓으로 나봇이 왕과 하나님을 저주했다고 하여 두 사람을 시켜 위증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봇을 죽인 후 포도원을 강탈합니다. 절차적으로는 위증을 제외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기에 아무도 아합을 비난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악의 진짜 실체입니다. 율법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죄를 짓는 것이 진정한 악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거짓과 위증, 두 마음을 가진 것은 법으로는 밝힐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드러내십니다. 결국 이세벨은 창밖으로 던져져 죽임을 당합니다. 이후 이세벨의 시체를 묻어주려 했지만, 개들이 다 뜯어먹어 시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세벨은 땅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저주받은 것입니다. 거짓과 위증으로 땅을 오염시켰기 때문에 땅이 그녀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것을 일종의 ‘땅의 저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이 저주받으면 생명을 잃게 됩니다.
이런 점을 다윗의 경우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사건과 짝을 이루는 사건이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일입니다. 다윗이 왕궁을 거닐다가 밧세바를 보고 탐심을 품은 것처럼, 아합도 자신의 궁 옆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보고 탐심을 품습니다. 우리야의 충성심과 나봇의 신앙은 서로 쌍을 이루며, 다윗은 모합이라는 악한 부하 장군을 시켜 우리야를 죽게 만들고, 아합은 이세벨을 통해 나봇을 음모 속에서 죽게 만듭니다. 결국 이세벨과 모합은 모두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아합과 다윗의 자녀들도 생명을 잃게 됩니다. 엘리야의 예언대로 아합의 후손은 모두 몰살당하고, 다윗이 밧세바와 낳은 첫아들도 칠일 만에 죽게 됩니다. 이후 다윗의 가문에는 칼이 떠나지 않으며, 다말을 범한 암논과 사랑하던 아들 압살롬도 죽임을 당합니다. 솔로몬을 재치고 왕위를 노리던 아도니야도 죽임 당합니다. 밧세바의 태에서 나온 솔로몬이 왕이 되지만, 이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나누어지게 된 것도 다윗 가문에 내려진 ‘땅의 저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길을 걸어간 사람은 나봇과 우리야이다
현실의 눈으로 보면 세상 왕으로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간 아합이나 다윗이 저주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나봇이나 우리야가 억울하게 죽은 저주받은 인생이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나봇과 우리야가 진정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포도원의 비유처럼 종들이 포도원을 차지하려 주인이 보낸 대리인들을 폭력으로 쫓아내고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 포도원을 차지하려 했던 것처럼, 나봇은 성 밖으로 끌려나가 죽임을 당했고, 우리야도 성문 앞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의 길, 즉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성 밖에서 죽임을 당한 나봇의 죽음도 결국은 승리였음을 성경은 말해줍니다.
그러니 나봇의 삶은 결코 실패한 삶이 아닙니다. 나봇은 나할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었지만, 그로 인해 이 땅의 나할라가 아닌 영원한 하늘의 나할라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의 기업이 아닌 하늘의 기업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럼 하늘의 기업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시길 바랍니다. 어설프게 이 땅의 기업을 기웃거리다가 모든 것을 빼앗깁니다. 그리고 하늘의 기업을 바라며 살아갈 때, 이 땅에서 고통 당하고 소중한 것을 빼앗기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실패가 아닌 승리임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영원하신 기업이라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이 믿음 굳게 가지시는 모두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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