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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장 24절-33절 새번역
24 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27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28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29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서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서, 데가볼리 지역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오셨다.
32 그런데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33 예수께서 그를 무리로부터 따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보시고서 탄식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에바다" 하셨다. (그것은 열리라는 뜻이다.)
35 그러자 곧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였다.
36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명하셨으나, 말리면 말릴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퍼뜨렸다.
37 사람들이 몹시 놀라서 말하였다.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훌륭하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신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셨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마가복음 7장 후반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24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가셔서 어떤 한 집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오늘날 레바논 지역입니다. 당시에는 아람 시리아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리스 식민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을 시로페니키아 여인이라고 하는데, 시리아와 페니키아를 붙인 말입니다. 시리아는 성경에서는 아람이고, 페니키아는 그리스입니다. 구약지명으로는 사르밧으로,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서 떡을 받아먹고, 3년 가뭄 동안 밀과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셨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집이 상징하는 바는 매우 큽니다. 그곳에 기거하는 사람들이 함께 가지는 목적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 사람들과 뜻을 같이하셨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문이라고 하면 주로 혈연관계를 통해 가족을 정의하지만, 유대인들은 혈연을 넘어서 계약이 더 중요했습니다. 어떤 이유든 계약 관계를 통해서 공동거주, 즉 한 집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을 가족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두로 시돈의 집에 거하신 것은, 그곳 사람들과 혈연을 넘어선 뜻을 같이 하는 가족으로 지내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이 알려지길 원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왜 알려지기 원치 않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비난받는 것이 두려워서 그러셨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미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놓고 비난하고 공격하고 있었기에 상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감추고자 하신 것은 믿음이 없는 연약한 유대인들을 위함입니다. 당시 유대 사람들은 이방인과 함께 가족을 이룬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기준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수 있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방 땅의 흙과 먼지만 묻어도 불결해져서 저주받는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예 이방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생활하신 것입니다. 앞선 본문에서 정결법과 관련하여 손 씻기 규례에 대해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몸소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영적으로 어리고 연약한 사람들, 즉 일반 사람들은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굳이 드러내지 않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원형을 보이시다
이방인과 교류하고 하지 않는 것을 단지 문화적인 차이나 생각의 차이로만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집으로 들어가셨다는 사실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집은 단순히 거주하는 장소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뜻과 정신을 만들어내는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사람들과 함께 이룬 뜻은 복음의 정신입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예수님이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되는 것이 교회입니다. 성령 강림 이후에 예루살렘에서 초대 교회가 시작되었지만, 이미 두로와 시돈에서 예수님께서 거주하신 이 집이 초대 교회보다 앞서 시작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태동할 초대 교회 운동을 미리 경험하고 학습하게 하신 것입니다.
진리는 감추어져 있지만, 결국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진리는 감추어지고자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가 이방인의 집안으로 들어가 감추어졌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항상 감추어져 있거나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 진리는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 사람의 집에 계신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고, 결국 숨어 계실 수 없게 되신 것입니다. 진리는 누구에게 나타납니까? 진리를 구하고 찾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거룩하다고 여겨지는 유대 땅이 아니라, 부정하다고 여겨진 이방 땅에서도 진리는 결국 자기를 계시하게 됩니다. 어둠이 빛을 가릴 수 없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되면, 반드시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악한 귀신 들린 딸
25절과 26절 말씀입니다.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인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감추어져 있던 진리가 드러나자, 맨 먼저 알아본 것이 악한 영이었습니다. 선한 영이든, 악한 영이든 영은 영끼리 통합니다.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이 먼저 알아보는 법입니다. 그리고 악한 영이 먼저 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립니다. 영들은 진리이신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단이 공중권세 잡은자라고 하지만, 결국에는 모든 권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권한을 받으셔서 사용하시기에, 어떤 악한 영이든지 결국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으로 불리는 이 여인의 문제는 본인이 아니라 딸의 문제였습니다. 딸이 악한 귀신에 들렸습니다. 아빠들에게 딸은 보화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딸이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항상 삶의 전환점이 생겨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플러스에서 마이너스로,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가 딸입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딸로 인해 삶과 신앙이 바뀌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야곱입니다. 딸 디나가 세겜 추장의 아들에게 강간당한 후, 레위와 시므온이 보복을 감행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야곱은 더 이상 세겜에서 살 수 없게 되어 벧엘로 올라가게 됩니다. 벧엘은 이전에 야곱이 밧단 아람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던 중 하나님과 맺은 약속의 장소로, 야곱은 하나님께 무사히 돌아오면 이곳에 제단을 쌓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야곱은 딸에게 문제가 생긴 후 이제야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딸의 의미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에게는 다말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이복 오빠인 암논이 병 간호를 핑계로 다말을 불러달라고 아버지 다윗에게 요청하여, 결국 기회를 만들어 다말을 범했습니다. 그러나 암논은 다말을 아내로 삼지 않고 버려버렸습니다. 이를 알게 된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은 복수심에 암논을 죽이고, 이로 인해 다윗에게서 쫓겨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부자지간의 원한을 낳는 불씨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에 압살롬은 아버지께 용서를 빌고 돌아오지만, 결국 아버지를 대항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다윗을 치명적인 위기에 빠지게 합니다. 이걸 보면, 야곱에게 딸의 문제는 전화위복이 된 것이고, 다윗에게 딸의 문제는 반대의 경우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수로보니게 여인 역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계기가 딸의 문제였습니다. 이처럼 인생에는 전환점을 만드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우리가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처럼 찾아옵니다. 세상에 취해 정신없이 살다가 병에 걸리거나 큰 사고를 당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예를 들어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피해 두 딸과 겨우 살아남았을 때, 두 딸은 자손을 잇기 위해 아버지 롯을 술에 취하게 하고 차례로 잠자리를 가집니다. 이로 인해 태어난 아들이 바로 모압과 암몬입니다. 술에 취했다는 것은 세상의 풍파에 지쳐 정신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소돔 땅에서 도망친 뒤 술에 취해 살아가던 롯에게 새로운 전환점을 준 것이 바로 두 딸이었습니다. 또한, 사사기에 나오는 입다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이미 승리를 보장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입다는 이방인들이 자녀를 제사에 바치듯이 하나님께 조건을 겁니다. 감정과 기분에 휩싸여 자신의 집에서 자신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사람을 번제로 바치겠다고 서원합니다. 그런데 아니라 다를까 외동딸이 먼저 나와 승리하고 돌아온 아버지를 맞이한 것입니다. 마치 교통사고처럼 느닷없이 찾아온 인생의 치명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왜 생기겠습니까? 물론 자신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술에 취해 인생이 파탄 나거나, 감정과 기분에 휩싸여 경솔하게 서원하여 가장 아끼는 것을 잃게 되는 일들은 본인의 어리석음과 무능함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항상 내 잘못 때문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가까운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일, 갑작스러운 질병 등 불가항력적인 사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면, 우리 삶의 전환점을 만드는 사건들은 결국 우리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를 진리로 이끄는 동기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을 돌아보며,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2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해서 내가 기대한 대로 문제가 바로 해결될 것이라 기대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녀가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 요청을 거절하셨습니다. 여기서 자녀는 유대인을, 개는 이방인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에게는 치료의 은혜를 베풀 수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가족처럼 지내신 것과 상충되어 보이지만, 그 이유는 모든 이방인이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혈통으로 유대인이라 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28절부터 30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서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이 여인은 기가 막히고도 멋진 대답을 했습니다. 개들도 부스러기는 먹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겸손과 간절함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인격적 태도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방인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 15장 2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이 말씀을 통해 여인의 믿음으로 소원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신념은 오직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신념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더 강한 신념, 즉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단순히 힘이 세다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성에서 나옵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진정한 마음이 겸손함과 간절함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다
성경에서 딸에게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 상징하는 바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우리 인생에 반드시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적어도 한두 번은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이 문제를 피하지 말고 직면해야 합니다. 직면한다는 것은 이 문제를 가지고 진리이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끄러움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비참하고 초라해지는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서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으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게 서 있으면서도 내가 당당히 요구할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이 절체절명의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 우리가 요구할 것은 내가 가진 가장 중요한 것,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백성, 하나님 자녀라는 정체성입니다. 마치 숨겨진 보화의 비유처럼, 내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라도 보화가 숨겨진 땅을 사듯이, 내게 가장 중요한 보화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딸의 치유는 물론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수로보니게 여인은 딸을 고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예수님께 요구한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권리입니다. 단순히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면서 막무가내로 고쳐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도 영원한 생명의 빵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 당당히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순위에서 자신이 한참 밑이라 해도 상관없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먹고 남은 열두 광주리가 있었듯이, 자신이 먹을 빵도 남아 있을 것이니 그 빵을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전환점, 질병이나 이직, 삶의 위기 또는 심지어 축복의 순간에서도, 우리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때, 우리의 우선순위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 중요한 가르침을 예수님 앞에서 멋지게 보여주었습니다.
유대 땅도 아니고 이방인의 땅도 아닌 곳
오늘 본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됩니다. 31절과 32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서, 데가볼리 지역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오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예수님께서 두로를 떠나 시돈을 거쳐 데가볼리를 지나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시돈은 현재의 레바논 지역이고, 데가볼리는 요르단 지역인 오늘날 무장단체인 헤즈볼라가 통치하는 지역입니다. 데가볼리는 '데카폴리스'라고 불리며 그 지역에 열 개의 도시가 있었습니다. 이 도시들 중에서 유명한 곳이 다메섹과 예수님이 군대 귀신을 몰아내신 가다라입니다. 예수님의 이동 경로를 살펴 보면,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신 갈릴리 서편 가버나움 주변으로 오시기 위해서는 데가볼리를 거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시돈에서 곧장 내려오시면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데가볼리 지역을 지나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데가볼리에서 무엇을 하셨는지 성경에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예수님께서 이방 땅을 지나 유대 땅으로 들어오는 경계에 서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예수님께서 서 계신 곳은 유대 땅도 아니고 이방 땅도 아닌 곳입니다. 그렇다면 여기가 어디일까요?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세상의 구분 방식으로 속해 있지 않은 곳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 20절 2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어느 특정한 곳에 속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에게 속한 것도 아니고, 이방인에게 속한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이곳이 갈릴리 바다라고 말합니다. 바다는 죽음이자 저주를 상징합니다. 누구도 가지 않으려 하고, 소유하고 싶어 하지 않는 곳입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버려진 곳, 소외받은 곳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곳에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에바다, 열리라 하셨다
33절부터 3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무리로부터 따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보시고서 탄식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에바다' 하셨다. (그것은 '열리라'는 뜻이다.) 그러자 곧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였다."
사람들이 귀가 먹고 말이 어눌한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안수해 주시기를 요청하자, 예수님께서 무리로부터 따로 때어내어 데려가셨습니다. 무리가 깨닫지 못하기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무리가 그것을 보았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뱉어 혀에 대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침투를 의미합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귀먹은 사람의 귀에 직접 말씀을 넣어 주셨고, 입술의 혀에도 말씀을 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다음 "에바다"라고 말씀하신 점입니다. "에바다", 즉 "열리라"는 뜻입니다. 이로 인해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열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때, 바로 그 순간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인생에서 전환기적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무력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마치 폭풍이 치는 갈릴리 바다 한가운데 있는 기분일 것입니다. 죽음과 저주라 불리는 사건 앞에서 우리는 마주해야 합니다. 그곳은 유대인의 땅도 아니고, 이방인의 땅도 아닙니다. 모두가 거부하고 피하고 싶은 곳입니다. 내가 유대인이라고 해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나를 살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내가 이방인이라고 해서 나를 살려주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강력한 군대를 가진 로마인이라고 해서, 내가 세상의 지혜와 지식을 가진 그리스 사람이라고 해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살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백성만이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귀에 들어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입에 놓여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집에서 먹고 자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리고 이 땅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치료와 보호, 사랑과 은혜가 반드시 임하게 됩니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구약 이사야 35장 4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인데,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을 격려하여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복수하러 오신다. 하나님께서 보복하러 오신다. 너희를 구원하여 주신다' 하고 말하여라. 그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 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 신원하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보복하심이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 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의 보복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처럼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유황이 떨어지는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복수는 세상에서 무시당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자랑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지금 고생하지만, 이 세상에서 다시 역전해서 높은 자리 올라가고 돈을 많이 벌겠다는 것이 보복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누구보다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보복입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향해 눈을 뜨고, 귀를 열어야 합니다. 진리를 향해 마음을 열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사슴처럼 달려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행해서 죽음과 저주가 임했노라고 비웃고 조롱하던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광야 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 그 생명수와 시냇물을 마시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보복입니다. 하나님의 신원인 것입니다. 이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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