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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장 1절-23절 새번역
1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2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바리새파 사람과 모든 유대 사람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켜, 규례대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4 또 시장에서 돌아오면, 몸을 정결하게 하지 않고서는 먹지 않았다. 그 밖에도 그들이 전해 받아 지키는 규례가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대를 씻는 일이다.-
5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하여 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사야가 너희 같은 위선자들을 두고 적절히 예언하였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8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9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10 모세가 말하기를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다.
11 그러나 너희는 말한다.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게서 받으실 것이 고르반(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만 하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12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그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13 너희는 너희가 물려받은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며, 또 이와 같은 일을 많이 한다."
14 예수께서 다시 무리를 가까이 부르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6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
17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 비유를 두고 물었다.
1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도 아직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9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뱃속으로 들어가서 뒤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여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하셨다.
20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21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곧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23 이런 악한 것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19장 2절입니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며 율법을 주셨습니다. 거룩을 카도쉬 קָדוֹשׁ 라고 합니다. 그 뜻이 구별하다 입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거룩하기 위함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구별하는 게 중요합니다. 따라서 율법에서는 성결에 관련 된 법이 강조되었습니다. 성결법은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구분하고, 부정해졌을 때 그 부정을 씻는 방법에 대한 지침을 제공합니다. 성결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와 타락으로 오염된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을 강조했기에 성결법의 특징은 이분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아이들이 자랄 때, 나쁜 것과 좋은 것을 구분하여 가르칩니다. ‘거짓말은 나쁜 것이다, 싸우는 것은 나쁜 것이다, 저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다, 저 나라는 나쁜 나라다’ 이렇게 분명히 말합니다. 이분법적으로 딱 구분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분별할 수 있기 전까지 해로운 것에 노출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이가 자라나 스스로 분별하게 되고, 그리고 세상을 두루 경험하게 되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살아보니깐 100% 나쁜 사람이나 나쁜 것, 반대로 100% 좋은 사람이나 좋은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릴 적 앞서 배운 부모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부모가 되어 자식이 생기게 되면, 그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정한 것과 거룩한 것을 구분해 주시고 부정한 것들을 철저히 경계하도록 가르치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 땅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으로 어린 상태에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커피나 탄산 음료를 생각해 보면,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자기 스스로 먹는 양을 컨트롤 할 수 있기 전까지는 경계하도록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도 가나안의 타락한 문화와 우상숭배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엄격한 정결법을 통해서 구별된 삶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나안의 타락한 문화에 쉽게 물들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을 잃게 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정결법이 생겨난 이유
정결법에서 문제 삼는 것은 주로 먹는 것과 관련된 게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돼지고기입니다. 굽이 있는데, 되새김질하지 않는 것은 먹어서는 안 된다 했습니다. 돼지고기가 본질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선하며, 그 자체가 악하거나 부정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 이러한 것들을 탐하다 보면, 가나안 족속의 우상숭배와 타락한 생활 습관에 빠질 위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돼지를 키우는 것은 다른 가축에 비해 많은 물과 음식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물이 부족한 고대 근동의 환경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되새김질하는 양이나 염소와 같은 가축은 주변 들판에서 먹이는 목초만으로도 사료로 주기 충분했기에, 비용면에서 키우고 관리하기가 용의 한 것입니다. 그런데 키우는데 비용이 많이 드는 돼지고기는 귀하기에 상대적으로 맛있다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부유한 자일수록 돼지 고기를 먹으려고 했겠지요. 고대 근동의 환경에서는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인간의 욕망을 무분별하게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세상적인 가치관이나 우상숭배, 그리고 타락한 삶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돼지고기를 금하게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복음이 전해지던 초기 서양 선교사들은 술, 담배, 도박을 죄로 가르쳤습니다. 물론 성경 어디에서 술이나 담배, 도박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된 것에는 시대적 배경이 있습니다. 우선 복음이 전해진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은 미국 사회에 청교도를 중심으로 사회 개선 운동이나 도덕 재건 운동이 일어나는 시기라 금주법이 제정되고 금주 문화도 가장 고조 된 시기입니다. 그리고 서구 선교사들이 당시 조선에 와서 보니, 농경문화의 영향인지 몰라도 겨울이 되면 남자들이 일은 하지 않고 방구석으로 들어가서 술 먹고 담배 피우면서 노름을 하는 것을 보고 매우 한심하게 생각하며 악하게 본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결국 조선 사람을 죄로 빠지게 하는 연결 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술, 담배, 도박을 강하게 금지했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럼 오늘 이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당시 시대와 마찬가지로, 이 세 가지가 여전히 심각한 죄로 빠져들게 하는 연결 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당연히 금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장로의 전통, 손 씻고 먹기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 7장은 정결법 중에서 손 씻기 규례에 대한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이 지키는 손 씻는 정결법은 토라에 규정된 것은 아닙니다. 장로의 유전이라 불리는 또다른 유대 경전인 미쉬나에서 정한 것입니다. 손 씻기의 기원은 레위기에서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봉사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어야 한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이 일상에서 지키는 규례가 된 것은 후대에 생겨난 것입니다. 손 씻는 것은 일종의 위생법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안타깝게도 좋은 취지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지나친 율법주의에 빠진 규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살고 있는 땅의 흙과 먼지가 오염되었다고 생각해서, 이들이 사는 지역을 지나가거나 접촉하는 것을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방인이 만든 포도주나 빵은 먹어서는 안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왔을 때라든지, 음식을 먹을 때에는 흐르는 물에 손을 씻어서 부정을 제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매번 손을 씻는 게, 물이 귀한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점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 예수님이 하인들 보고 비워진 항아리에 물을 담아라고 하지요. 사람 키 만한 큰 항아리를 모두 6개를 놓고 정결예식을 위해서 물을 담아 둔 것입니다. 이렇게 큰 항아리를 준비해 놓고 물을 담아 사용할 수 있는 가정이 많지 않습니다. 먹을 물도 귀한 곳인데, 손 씻을 물을 넉넉히 준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상당한 재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몇몇 사람들만이 호사스럽게도 여겨지는 손 씻는 혜택을 누린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갈릴리 주변을 순회하시던 예수님이나 제자들은 손 씻는 규례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예루살렘에서 올라온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비난하고 나선 것입니다.
극단으로 치달은 율법주의의 문제
이처럼 율법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특정 음식이나 사람에게 마치 영적인 악한 병균이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가르쳤습니다. 접촉하면 마치 전염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불안해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어야 했으며, 만약 손을 씻지 않으면, 그 사람조차도 부정한 자로 규정한 것입니다. 어릴 적에 왕따 시키는 방법 중에 에이즈라고 놀리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에이즈는 불치의 병으로 매우 혐오되던 질병이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은 아이 하나를 공개적으로 에이즈 걸렸다고 놀리고, 만지면 에이즈 옮긴다고 피하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참 악하지요. 어린아이들도 차별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렇게 놀림받는 아이는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신앙에 있어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한참 신앙이 올라와 뜨거울 때, 기도를 많이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깨끗한데, 기도 안 하는 사람들은 혼미하고 뭔가 부정한 것이 있어서, 그들과 섞이게 되면 나에게 옮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걸로 차별하고 판단하고 자기 의를 주장하려는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실 부정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코이노스라 해서 보통이다, 일반적이라는 뜻입니다. 왜 일반적이냐면,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정한 것은 구별되지 않은 것이지, 사실 정한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구별하여 정한 것이 되게 한 것입니까? 하나님께 드리기 위함입니다. 율법의 목적이 그렇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과 6절을 보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가 나옵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선택한 백성으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함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정한 것을 먹는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설령 부정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악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부정한 것을 먹지 않고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자로서 구별되어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의 참된 목적을 외면한 것입니다. 타락한 본성을 숨기고 겉모습으로만 율법을 지키는 척한 것입니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하여 살기도 싫고, 동시에 하나님을 완전히 버릴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타협점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고, 율법의 문자적 요구를 만족시키려는 태도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법망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구실을 만들면서 세상에서는 적당히 죄악을 즐기려 한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하는 율법의 본래 뜻을 왜곡했습니다. 그들은 돼지고기가 본질적으로 부정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러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거룩한 백성이 되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것보다 더 쉽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돼지고기와 같은 부정한 음식을 철저히 금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앞에서는 지키는 척하지만 뒤에서는 지키지 않는 위선과 허위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6절부터 8절까지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사야가 너희 같은 위선자들을 두고 적절히 예언하였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입술로는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 없이 사랑하는 척하는 게 통하겠습니까? 다 드러납니다. 사랑이 식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마음이 멀어지면 끝난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본질입니다. 본질을 쫓아야 하는데,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지요. 이런 것을 형식이 내용을 삼켜버린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본질을 쫓는데, 사랑하지 않으면 비본질에 집착합니다. 무엇을 위한 율법인가 하는 것이지요. 율법은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도구입니다. 이 도구를 왜 뒤바뀌어서 사용하는가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르반, Κορβᾶν
이어서 예수님은 고르반Κορβᾶν이란 또 다른 장로의 전통을 말씀하십니다. 9절부터 13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가 말하기를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말한다.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게서 받으실 것이 고르반(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만 하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그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너희가 물려받은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며, 또 이와 같은 일을 많이 한다." 우선 고르반Κορβᾶν이란 가까이 가져오는 것이란 뜻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헌물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고르반을 핑계로 부모를 공양할 의무를 저버리는 경우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먹을 것이 없는 굶고 있는 부모 앞에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다는 핑계로 공양하지 않는 인간의 악함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신앙을 핑계 삼아 마땅히 인간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의무를 저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일로 핑계되지 말라, 교회 가면 모든 것이 면죄받는다는 생각을 내려놔야 합니다. 이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 욕보이는 일입니다. 앞서 율법주의 함정을 말씀드리면서, 기도를 많이 하게 되면 영안이 좀 열렸다고 교만해져서 사람들 판단하고 정죄하고 자기 의 내세우는 것도 사실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핑계 삼아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 핑계 삼아 다른 이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많이 읽을수록 많이 알 수록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고 생각할수록, 이런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말씀 대로 살아가야 할 일이 생기면 정작 아무것도 못합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사회에서 일반적인 최소한의 윤리적 기준조차도 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너무 중요했는지, 오늘 본문에서만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앞서 예루살렘에서 올라온 바리새인들에게 경고하신 이후에, 다시 한번 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14절부터 16절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무리를 가까이 부르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중에는 더러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 더러운 것은 사람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래서 더러운 것은 사람의 속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아마도, 이 말을 처음 들은 무리들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사람들은 부정한 것과 거룩한 것으로 나뉘어 있다는 일종의 이분법적 편견은 너무도 자명한 진리였습니다. 음식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부정한 음식을 먹거나 부정탄 손으로 음식을 먹는 일로 인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모릅니다. 흔들릴 수 없는 강한 세계관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계관의 근간을 흔들고 계신 것입니다. 이건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 따라 손을 씻지 않은 채 음식을 먹긴 했지만, 그 배경에 그런 엄청난 이유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따로 만난 자리에서 그 말씀의 의미를 다시 한번 물어본 것입니다. 18절부터 20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도 아직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뱃속으로 들어가서 뒤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여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하셨다.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더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먹은 것은 소화가 되어서 배변으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먹은 것이 아니라, 사람 마음에 있는 게 나와서 더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21절부터 23절 말씀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곧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이런 악한 것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 진정 더러운 것은 사람의 마음에 품은 생각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 음란에서 우매함까지 12가지의 악한 생각을 말씀하시는데, 정직하게 우리의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도 이러한 생각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말씀이 사라지고 사랑이 식으면 끝이 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어지면, 성령이 떠나면, 우리 신앙이 위선에 빠집니다. 우리 힘으로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 사람의 힘으로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게 거짓입니다. 그러니 위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마음이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의 중심을 바꾼 다음에, 그 안에 성령이 임함으로 그 결과로 우리 행동까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과 그 동기까지 살피신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율법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종교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모두가 지켜나가야 할 사회적 규범이 필요합니다. 건강하고 바른 전통은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주고 사회를 세워가는 데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율법이나 전통과 규범이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신앙에 있어서는 더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사회적인 규범은 사람들 앞에서 외적으로 잘 지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지만, 신앙의 규범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이 이것을 외적으로 지키는 것을 보실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지키는 사람의 내면과 그 동기까지도 살펴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정확하게 세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지킨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외적으로 모든 율법을 지킬 수 없고, 그리고 내적으로도 깨끗한 마음을 늘 가질 수 없음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솔직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식 없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사람 앞에서는 완전히 솔직하게 나아갈 수 없으니, 하나님 앞에서만큼은 숨김없이 정직하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신앙의 큰 축복입니다. 그럴 때, 우리를 용납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고, 우리 역시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온전해야 한다고 하지요. 온전하다는 것은 완벽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카타르티조καταρτίζω라고 해서, 탈골된 뼈를 맞추는 행동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온전해지는 것은 어지럽힌 것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온전함이란 말씀으로 다시 새롭게 맞추어져서 하나님 목적에 맞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할 수 없고 뭔가 부족하지만, 그 부족한 모습을 용납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우리도 그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해지는 것임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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