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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6장 45절-56절 무리를 헤쳐 보내시고 제자들을 먼저 가게 하시다

by 알렉스강 2024. 7. 26.

https://www.youtube.com/watch?v=oaTGUyLKRxY&t=162s

 

 

마가복음 6장 45절-56절 새번역

 

45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46 그들과 헤어지신 뒤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47 날이 저물었을 때에,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한가운데 있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셨다.

48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이 노를 젓느라고 몹시 애쓰는 것을 보셨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로 가시다가, 그들을 지나쳐 가려고 하셨다.

49 제자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유령으로 생각하고 소리쳤다.

50 그를 보고, 모두 놀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51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쳤다. 그래서 제자들은 몹시 놀랐다.

52 그들은 빵을 먹이신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무뎌져 있었다.

53 그들은 바다를 건너가서,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닻을 내렸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를 알아보고,

55 그 온 지방을 뛰어다니면서, 예수가 어디에 계시든지, 병자들을 침상에 눕혀서 그 곳으로 데리고 오기 시작하였다.

56 예수께서, 마을이든 도시이든 농촌이든, 어디에 들어가시든지, 사람들이 병자들을 장터거리에 데려다 놓고, 예수께 그 옷술만에라도 손을 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병이 나았다.

 


기적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지난주에 이어서 기적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기적은 일종의 마약과도 같습니다. 마약은 원래 좋은 의도로 만든 약입니다. 잘 사용하면 약이 되고,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기적도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경우 기적은 독이 됩니다. 무리는 말할 것도 없고, 제자들에게도 기적은 독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전도 사역에 나아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자 자신들이 갈릴리 전체를 구원한 마냥 착각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적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격리시키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기적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하고 난 뒤에는 무리와 똑같이 흥분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주시고자 한 깨달음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52절을 보면, "그들은 빵을 먹이신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무뎌져 있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마음이 무뎌지다는 말은 그리스어로 페퓨로메네πεπυρωμένη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기적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니 마음이 무뎌졌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뎌진다는 것은 내 욕망대로, 내 뜻대로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육적인 열매를 맺고자 하면, 당연히 영적인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기적이 독이 되는 것은 욕망을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육신의 소욕을 따르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 하지만,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그리고 내 욕망을 채우고 난 뒤에는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기적을 구하는 신앙이 결국에는 기복신앙에 빠지게 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적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이번에도 또다시 사람들과 격리시킵니다. 마가복음 6장 45절에,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라고 합니다. 지난번의 격리는 과거와 단절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실패는 물론이고 성공의 기억까지도 내려놓고 현재 주어진 소명에 집중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만 보낸 것이 아니라 무리들도 모두 떠나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많을 때는 홀로 있게 하거나 흩어지게 하십니다. 반면, 사람은 많이 모이면 더 모으려고 합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전염성이 강하고, 중력과 같이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돈도 일종의 믿음이라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로 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모이면 더 강하게 끌어당기지 못하게 흩어버리십니다.

 

모두 다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시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이면 흩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수록 더 흩어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 말씀에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라는 권면이 있습니다. 물론 모이는 것을 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모일 때는 모여야 합니다. 그러나 계속 모여만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뜻을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단을 보면 가장 모이기를 힘씁니다. 신천지는 10만 명을 거뜬히 모읍니다. 모여서 하는 일이 이만희라는 사람을 우상으로 세워놓고 절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교회에 힘이 집중되면 결국 교회는 힘을 과시하게 됩니다. 사람과 돈이 쌓이면 교회는 백 퍼센트 타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적정 수가 되면 흩어져야 합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 남자만 오천 명이 모였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이삼만 명이 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만 명 이상이 모이는 대형교회입니다. 돈과 사람이 쌓입니다. 그러면 중력 현상이 나타납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결국 흥분하게 됩니다. 우리는 대단한 존재 같고, 하나님도 우리에게 뭔가 더 큰 일을 해주실 것이라는 기대가 커집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폭도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전쟁에서는 군수가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먹을 것을 책임진다면, 우리는 싸우러 나가 로마를 몰아내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자는 생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집단은 이런 어리석음에 쉽게 빠집니다. 이럴 때 정답은 흩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상화하지 말라

동일한 오병이어 사건을 기록한 요한복음 6장 15절에는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처럼 무리는 비합리적입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기적을 경험했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습니다. 강제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는 애굽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섬긴 것과 같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은 광야나 애굽의 잡신 중 하나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출애굽 시키신 여호와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부유하고 힘 있게 하리라 생각하여 부와 권력의 상징인 송아지를 금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상화하지 마십시오. 자기 멋대로 살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무엇이든 다 되고 구원받는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하려는 것은 이방 신을 섬기는 기복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내세우지만, 그것은 진짜 예수님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하려고 내가 만든 우상입니다. 사사시대에 미가가 세운 금신상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으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심지어 죽어서도 극락에 가려는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부터 23절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 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내 뜻대로 인생을 살아가고자 애써도 결국 헛물질할 뿐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우상화해도 세상의 환란과 핍박이 오면 다 나가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말만 하지, 당장 내 목에 칼이 겨누어지면 세상의 권력과 돈 앞에 속수무책으로 나가떨어지는 것입니다. 46절부터 48절 말씀입니다. "그들과 헤어지신 뒤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저물었을 때에,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한가운데 있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이 노를 젓느라고 몹시 애쓰는 것을 보셨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로 가시다가, 그들을 지나쳐 가려고 하셨다." 이 장면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홀로 산에 오르셨는데, 그 정상에서 갈릴리 바다가 한눈에 보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배는 바다 한가운데 있고, 제자들이 온 힘을 다해 노를 젓고 있는데도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반대 방향에서 불어왔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반대편까지 한두 시간이면 충분히 건널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새벽이 다 되도록 아직 바다 한가운데에 멈춰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을 말해줍니다. 내 힘으로, 내 뜻대로 하려면 결국 아무것도 안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뜻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려고 하면 헛된 노력만 하게 됩니다. 쓸데없는 힘을 쓰고 돈을 쓰고 시간을 낭비합니다. 결국에는 제자리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팔십구십 세까지 삽니다. 인생은 참 짧습니다. 정말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시간은 사오십 년입니다. 이 시간을 돌아보면 허무합니다. 제자들처럼 인생을 열심히 살았지만,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만만치 않습니다. 세상이 나를 막아서고 반대합니다. 부당하게 대하고 위협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막아서는 세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입니다.

 

갈릴리 바다의 물은 제자들의 마음이다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은 이제 세상을 뒤집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 그리고 본인까지도 모두 흩어 버리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높은 자리에 오를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에도 배를 타고 건너라고 하셨는데, 이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후에도 다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계속 뺑뺑이 돌리는 것 같아 짜증이 났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원망만 가득합니다. 온갖 짜증과 원망으로 결국에는 바다를 건너는데 게다가 바람까지도 막고 있습니다. 노를 저어도 나아가지 않습니다. 이 상태가 바로 자기 중심성, 내 뜻대로 하려는 것, 앞서 말한 바 페퓨로메네πεπυρωμένη, 즉 마음이 굳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혈기와 교만으로 가득 차 노를 젓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근심, 걱정, 염려, 불안, 두려움이 불어옵니다. 그러니 올바르게 나아가지 않고 제 자리에 멈춘 채 영적으로 자라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그 어떤 좋은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공중 부양이 아니라 땅을 걷듯이 물을 걸어오신 것입니다. 물이 굳어져 땅처럼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는 제자들의 굳어진 마음을 상징합니다. 마음이 돌처럼 굳어진 상태를 물이 딱딱해진 것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땅이 굳어졌을 때는 쟁기로 파고 기경해야 합니다. 굳어진 물을 깨뜨리려면 강한 망치로 두들기거나 발로 밟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굳어진 마음을 발로 밟으시는 것입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를 속여 선악과를 먹게 한 뱀에게 내려진 저주를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3장 15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굳어진 마음이 풀어지기 위해 예수님의 발에 밟혀야 한다.

우리의 굳어진 마음은 예수님의 발로 밟혀야 합니다. 예수님의 발로 밟힐 때, 강한 힘으로만 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 밭을 밟으시는 예수님의 발꿈치에서 피가 나는 것입니다. 예수 보혈이 결국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영적인 생명이 되어, 영적인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의 완악한 마음이 풀어지기 위해서는 피가 필요합니다.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피가 아니면, 세상의 기적이라 여겨지는 돈과 권력의 독에 취한 우리의 영혼이 깨어나지 않습니다.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께 밟히는 것이 복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고난 받으면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은 복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뿌려지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여 분별하십시오. 만약 내가 당면한 문제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죄와 세상의 종처럼 어리석게 불만과 불평을 하지 말고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마땅한 바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유령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이 굳어져 깨닫지 못하니 예수님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았다는 것을 잘못된 징조만으로 볼 수 없습니다. 사실 이제 예수님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고 영적인 존재로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삼위 하나님 중 유일하게 두 인격을 가지신 분입니다. 사람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제자들은 이전까지 예수님을 눈에 보이는 사람의 아들로 보았습니다.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로 보게 된 것입니다. 앞서 예수님을 우상화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고정된 실체로 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도깨비방망이처럼 내 뜻대로 해 주는 주술로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내 손아귀로 잡을 수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직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내 뜻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길로 우리도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리고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은 오직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인생의 항해에서 예수님과 함께 한 배에 올라타고 건너가는 것, 바로 성령의 교통하심과 교제하심입니다. 이 임마누엘의 역사만이 예수님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가 구해야 할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돈을 주세요, 사람을 주세요, 기적을 주세요 등등 물론 우리가 간구해야 할 것들이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게 해주세요. 예수님과 동행하게 해주세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기에, 이제 우리에게 보내신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을 내게도 보내주세요. 성령으로 살아가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아비규환과 같은 세상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마가복음 6장 53절부터 5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가서,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닻을 내렸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를 알아보고, 그 온 지방을 뛰어다니면서, 예수가 어디에 계시든지, 병자들을 침상에 눕혀서 그곳으로 데리고 오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마을이든 도시이든 농촌이든, 어디에 들어가시든지, 사람들이 병자들을 장터거리에 데려다 놓고, 예수께 그 옷술만이라도 손을 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병이 나았다.”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에서 또 다른 기적을 경험하고 세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 사람들이 사방천지에서 몰려왔고, 여기저기 온 지방을 뛰어다니면서 병자들을 데려와 치료받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 옷술만이라도 손 대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나았습니다.

 

물론 병든 자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병이 걸린 것이 너의 잘못이라 탓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은 너무나 큽니다. 그런데 병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온 지방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마을이든 도시이든 농촌이든 어디에 들어가시든지, 사람들이 병자들을 장터거리에 데려다 놓고 간청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정신없이 살아가면서 언젠가 기적처럼 행운이 따라오기를 바라는 오늘날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어쩌면 닮아 있지 않습니까? 사실 이러한 현실이 아비규환이 따로 없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아가다가 운 좋게 기적을 경험하면 무엇을 합니까? 기적을 통해 참된 진리로 나아가는 깨달음이 없으면 또다시 아프게 되고 기적을 구하러 정신없이 찾아다닐 것입니다.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 땅의 현실 속에서 육체라는 몸뚱이를 하나 잘되고자 애쓰지만, 결국 그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육이 죽고 영이 사는 삶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2절에서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드린 페트로메네, 마음이 굳어진 자입니다. 자기 중심성에 빠져서 교만하고 혈기에 차 결국 눈이 먼 것입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스스로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혼이 치료가 되지 않으면, 육체가 치료되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육신이 낫기를 바라지만, 때로는 극심한 추위로, 때로는 극심한 더위로 돌려가면서 육신이 아픈 것입니다. 사는 게 생지옥인 아비규환입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먼 맹인처럼 미련한 자로 지옥 불의 고통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기적이나 요행을 바라며 육체의 행복만을 좇아 이리저리 정신없이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물론 기적을 경험하는 것은 필요하고 좋지만, 이게 독이 되면 차라리 아픈 게 낫습니다.

 

사실 우리가 참된 진리를 쫓아가면 이상하게도 우리 몸이 아프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몸이 즐겁다면 우리 영혼이 죽어갑니다. 영육 간의 복이 모두 다 즐겁고 좋기만 한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영육 간의 복이란 이 두 가지가 적절하게 균형이 잡힌 것이 복입니다. 야베스의 기도처럼 너무 가난해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너무 부하여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균형조차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이기에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몸이 아픈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인데, 육신이 죽고 영이 살아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리석게 육체의 고통을 피하고자 몸을 살리려고 발버둥 치지 마십시오. 육신이 아픈 것은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운 것 이 둘 뿐입니다. 물론 고통스럽지만, 불가피하게 당장 치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면 믿음으로 견디면 됩니다. 병원을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이 하나도 없는 육체의 상태는 불가능합니다. 어느 정도의 고통은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잖아요. 육체의 가시가 있어서 세 번 기도했지만 낫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깨달았습니다. "내 은혜가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진다." 그리고 내 육체의 가시가 있을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이 정답입니다. 등 따뜻하고 배 부르면 하나님 찾지 않습니다. 내가 고통이 있어야지 하나님을 찾습니다. 너무나 단순한 진리입니다. 그러니 몸이 아픈 것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만약 육신의 치유가 필요하면 하나님이 고치십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사람을 보내셔서 살리십니다. 그러니 어리석게 육체에 매인 인생을 살아가지 마시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십자가의 길, 진리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내 육이 죽고 영이 살 때, 감사 찬양 올리는 모두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