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zV4rYJeYUZU&t=937s
마가복음 6장 14절-29절 새번역
14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니, 헤롯 왕이 그 소문을 들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고,
15 또 더러는 말하기를 "그는 엘리야다" 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16 그런데 헤롯이 이런 소문을 듣고서 말하기를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 하였다.
17 헤롯은 요한을 잡아오게 하여서, 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헤롯이 자기와 형제간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헤롯이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았으므로,
18 요한이 헤롯에게 형제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해왔기 때문이다.
19 그래서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요한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그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성스러운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고, 또 그의 말을 들으면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오히려 달게 들었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롯이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요인들을 청하여 놓고, 잔치를 베풀었는데,
22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서, 헤롯과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왕이 소녀에게 말하였다.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내가 들어주마."
23 그리고 그 소녀에게 굳게 맹세하였다. "네가 원하는 것이면,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24 소녀가 바깥으로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무엇을 달라고 청할까요?" 그 어머니가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여라."
25 소녀는 급히 왕에게로 돌아와서 청하였다. "곧바로 서둘러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내게 주십시오."
26 왕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한 것과 거기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 때문에, 소녀가 달라는 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27 그래서 왕은 곧 호위병을 보내서,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호위병은 나가서,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서,
28 쟁반에 담아 소녀에게 주고,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요한의 제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무덤에 안장하였다.
마가복음의 샌드위치 기법
지난주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신 후 제자들을 전도 사역으로 파송하신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내용을 살펴보면, 제자들이 전도 사역을 마치고 예수님께 보고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생략하고 바로 이어서 기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텐데, 굳이 마가복음의 저자는 그 사이에 다 세례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넣었습니다. 이것을 마가복음에서 자주 사용되는 샌드위치 기법이라고 합니다. 겉이 아니라 중간에 있는 내용을 강조하는 문학적인 장치입니다. 제자들의 전도 사역 파송과 결과 보고 사이에,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배치한 것은 세례 요한의 사건이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주제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지난주 말씀을 상기해 보겠습니다. 전도 사역에 앞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가르침은 편견이라는 가짜 믿음을 조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편견에 빠지면 참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편견은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재로는 두려움을 강화시킵니다. 편견은 두려움을 감추어 오히려 두려움을 더 키워 나갑니다. 나중에는 자신의 편견이 틀렸음을 알고도 거짓 안정감을 유지하고자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결국 편견이 강할수록 두려움도 커지게 되고, 결국 두려움에 삼켜져 꼼짝달싹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속이며 거짓 안정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가득 찬 헤롯
오늘 본문에서 가장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인물은 헤롯입니다.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요한이 살아났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세례 요한을 죽인 사건을 다시 상기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이 늘 마음에 걸렸던지, 예수님을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으로 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정작 죽음을 맞이한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오히려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이 두려워합니다. 세례 요한이 죽은 후 몇 년이 지난 것 같은데도 헤롯은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헤롯 마음 안에 두려움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삼국지에서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겼다'는 말처럼, 살아있는 헤롯은 죽은 세례 요한에게 꼼짝달싹 못하는 상황입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에 반응하는 헤롯의 심리 변화가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헤롯의 주된 심리, 바로 두려움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헤롯은 원래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헤롯 대왕은 매우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때,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들을 모두 학살한 왕이 바로 헤롯 대왕입니다.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겁이 많습니다. 또한, 헤롯은 왕이 되기 위해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강한 권력 투쟁을 통해 올라선 사람입니다. 그래서 늘 자신의 위치에 대해 불안해했습니다.
막장 드라마와 같은 헤롯 왕가
그리고 헤롯 왕가는 정통성 있는 왕가가 아닙니다. 이들은 에돔 출신이며, 윗대로는 그리스 혈통도 섞여 있습니다. 출신이 문제가 된 헤롯 대왕의 경우 정권 안정을 위해서, 유대인의 환심을 사고자 성전을 크게 지었습니다. 그게 바로 헤롯 성전입니다. 헤롯 대왕이 죽은 후 팔레스타인은 세 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다스려졌습니다. 유대는 아켈라오, 갈릴리는 안티파스, 갈릴리 북동쪽 드라고닛은 빌립이 다스렸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헤롯 왕은 안티파스입니다.
당시 헤롯의 형제들 사이에 유명한 스캔들이 있었습니다. 헤롯의 이복동생 중 분봉왕 빌립이 아닌 또 다른 빌립이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아내는 매우 매혹적이며 욕망이 강한 여자였습니다. 시아주버니인 헤롯과 눈이 맞아, 헤롯은 자신의 아내를 쫓아내고 동생 빌립의 아내를 빼앗아 왔습니다. 이를 보고 세례 요한이 잘못되었다고 질책했습니다. 레위기 18장 말씀에 따라 '너는 내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라는 율법으로 헤롯을 강하게 비난한 듯합니다. 헤롯은 자신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비판의 중심에 서 있는 세례 요한을 잡아 가두게 됩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을 감옥에 집어 넣었지만, 여전히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20절입니다. “그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성스러운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고, 또 그의 말을 들으면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오히려 달게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교회가 돈과 힘이 있으면 세상이 교회를 두려워할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무시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더 많은 돈과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의롭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세상이 교회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헤롯이 세례 요한을 두려워했음에도 그를 감옥에 여전히 가둬둔 이유는 더 큰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어렵게 얻은 분봉왕 자리를 지키기 위해 민중의 비판 여론을 만드는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입을 막아야 했습니다. 일종의 언론 탄압을 한 것입니다.
헤롯의 쌍둥이 빌라도
헤롯과 관련해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예수님의 무죄를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7절과 38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왕이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빌라도가 예수께 "진리가 무엇이오?"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유대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말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
헤롯과 빌라도는 참으로 비슷합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 진리가 자신들에게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진리에 다가갈수록 자신들이 누리는 지위가 흔들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기억해야 합니다. 진리가 자유케 하기 전에, 진리는 먼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진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보게 합니다. 무능력, 거짓, 가짜, 교만, 이것이 우리의 본모습입니다.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진리에 다가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헤롯과 빌라도는 정치적인 야심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올라가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압박이 있는 것입니다. 분봉왕으로서 총독으로서 자신이 맡은 지역을 성공적으로 통치해야 한다는 부담 속에서, 민란이나 비판 여론이 일어날까 두려워 진리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 주는 돈이라는 진통제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 청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 제자가 되고 싶다며, 율법에서 말한 내용을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을 칭찬하시면서 "네가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라오라"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부자 청년은 크게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결국 문제는 두려움입니다. 자신을 보호하는 돈이 사라지면 죽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사건의 원흉인 헤로디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돈과 권력을 위해 자기 남편을 버리고 헤롯에게 갔습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은 돈을 탐할까요? 물론 돈이 있으면 편리합니다. 안정감을 줍니다. 그리고 돈은 어느 정도 있으면 더 많이 가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이 가지려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두려움 때문입니다. 돈이 두려움을 사라지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가진 것이 많을 수록 두려움이 더 커지는 역설적인 상황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사의 많은 문제가 돈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제 대부분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진통제입니다. 고통을 일시적으로 완화시켜 주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일시적으로 두려움을 잊게 해주지만, 두려움의 근본 원인을 제거해 주지는 않습니다. 진통제가 약효가 떨어지면 다시 고통이 찾아오듯, 돈으로 인한 안도감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다시 두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돈이 가진 영적인 속성
돈도 일종의 믿음입니다. 크레딧이라고 하지요. 믿음이 없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원래 돈은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화폐가 문물교환을 위해서 임의로 금속이나 종이에 가치를 매겨 표시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믿고 서로 통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돈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구적인 믿음은 아닙니다. 돈은 가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돈의 가치는 계속 변합니다. 그러다가 만약 문제가 생겨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돈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립니다. 그러기에 불완전한 믿음입니다. 어쨋든 돈이 믿음을 기반하기에 영적인 특징을 가집니다.
돈이 믿음이라는 힘을 가져다 쓰기에, 돈은 자석처럼 일종의 땡기는 힘이 있습니다. 이걸 돈의 중력이라고 합니다. 신념이 강한 사람에게 사람들이 붙는 이유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돈을 더 많이 가질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더 많은 돈으로 더 많이 땡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돈은 몰리면 몰릴 수록 더 크게 불어나기에, 오히려 돈이 많을 수록 빈부격차도 커집니다. 미국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렇게 돈이 많은 나라이지만, 모두가 다 잘 살지 않습니다. 홍수에 물이 없다고, 돈이 많은데, 오히려 돈이 없어집니다. 돈은 결국 몇몇 소수에게 몰리고, 황금 더미 위에 앉은 용처럼 웅크리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 가진 돈의 차이에 따라 지배 구조가 형성됩니다. 일종의 자본주의 피라미드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생존을 위해서 돈이 있는 사람에게 종노릇할 수밖에 없습니다. 빚에 매이게 되어 은행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가난은 자유의 반대말입니다. 부자는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피라미드에서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그 영혼은 더 가난해집니다. 더 큰 사회적 지위와 부를 가지기 위해 또 바쁘게 살아야 합니다. 행복한 삶을 누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 위치에서 내려오지 않기 위해 해야 할 노동의 양이 나의 삶을 압도한하기에, 나 자신과 가족을 돌볼 시간이 없습니다. 남을 지배하는 갑의 위치에 서 있긴 하지만, 본인 역시 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돈의 지배를 받게 되면, 사람이 보이지 않고 돈만 보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돈만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 아닌 사람은 당연히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을 사람 하나 없고 믿을 것은 돈뿐인 세상입니다. 사람 대신 돈을 얻는 것으로 만족해 합니다. 그러니 점점 사람이 누구인지 망각하게 됩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지, 내가 왜 살아가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지 사람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존재 이유를 망각하는 것, 즉 내가 살아갈 이유를 잊어버리면 무의미하고 허무한 인생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앞만 보고 돈을 번 사람들이 결국에 술이나 여자, 마약에 빠지는 게 이런 까닭입니다.
두려움을 잠시 잊게 해 주는 허영이라는 술
이건 헤롯도 마찬가지이요. 많은 부와 권력이 있지만, 존재 이유를 망각하니 괴로워서 술과 여자로 문제를 풀려고 했습니다. 생일날 유력 인사를 초대해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추었습니다. 초대교회 전승에 따르면, 나중에 살로메가 회심했다고 합니다. 친아버지는 헤롯이 아니라 그 전 헤로디아의 남편인 빌립입니다. 헤롯은 말이 새아버지이지 큰아버지입니다. 자기 친아버지인 빌립의 원수 앞에서 춤을 춥니다. 왜 춤을 출까요? 바로 돈 때문입니다. 새아버지에게서 얻어먹을 것이 있으니 춤을 추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돈이면 다 가져다가 바치는 것입니다. 그녀가 춤을 잘 추니 헤롯이 흡족해하며 뭐든지 원하는 것 있으면 말해라면서, 나라 반이라도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살로메는 어머니의 사주를 받아 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 줄 것을 요구합니다.
술에 취해 사람들 앞에서 헛소리를 하는 속 없는 남자들이 하는 말입니다. 술에 취하는 것은 고통이나 두려움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술로 잠시나마 두려움을 감추면, 어느새 그 자리에서 허영심이 나옵니다.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슈퍼맨이 됩니다. 할 수 없는데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나라의 반을 주겠다고 합니다. 허영은 마치 거품과도 같습니다. 뭔가를 과대 포장해서 자신의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강한 척 허세를 부리는 사람은 실상은 약한 것입니다. 똑똑한 척하는 사람은 사실 보잘것없는 학벌로 열등감에 빠진 사람입니다. 돈 자랑하는 사람은 사실 자랑할 것이 없는 속이 텅 빈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결국 허세와 허영은 두려움을 감추고자 할 때 나오는 거짓된 자기변명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허영심으로 가득 차 내뱉은 말, 헛된 맹세 때문에 꼼짝달싹 못하게 되었습니다. 잔치에 참여한 갈릴리에서 온 로마 귀족이나 유대 유력자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습니다. 헤롯이 한 말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시선이 두려웠습니다. 분봉왕은 사실 이들의 비위도 맞추어야 합니다. 해당 지역의 귀족이나 유력자들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으면 왕위가 흔들립니다. 만약 이들이 나쁜 마음먹고 왕을 내리기 위해 로마 황제에게 탄원서를 쓰게 되면, 자칫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허영심으로 가득 차 자기 기분에 취해 내뱉은 말로 인해 꼼짝달싹 못하게 된 것입니다. 허영심 때문에 더 큰 두려움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과음하고 일어난 뒤에 머리가 깨질 듯 찾아온 강한 숙취와 현실 자각으로 더 큰 두려움과 불안에 빠진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세상의 노예가 된다
헤롯은 세례 요한에게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도 두렵긴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센 세상의 힘과 권력이 두려웠습니다. 결국 딸의 요청을 수락하고 결국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르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위한다고 말은 많이 하지만, 실상 세상에 나가면 예수를 밟고서라도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따라 선택합니다. 내면의 갈등이 있다고 하지만, 결국 중요한 순간에는 하나님을 뒤로 젖혀놓고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그게 바로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러다가 세상에서 밀릴 것 같은 두려움,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입니다. 그게 아무것도 아닌데, 한 순간에 사라질 세상의 헛된 권세에 무릎을 꿇고, 거기에 자신의 명줄을 붙잡혀 어리석게 살아갑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세상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헛된 두려움에서 벗어나십시오. 우리는 진리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했습니다. 자유란 걸림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스캔들, 걸림돌이 없는 것입니다. 부자유함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강해지면 몸이 마비되고, 꼼짝달싹 못하게 됩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스캔들 속에 가둡니다. 배척하는 것도 두려움 때문입니다. 마케팅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너 이거 안 사면 뒤처진다고 두려움을 줍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이지요. 사람들의 두려움을 교묘하게 조장해서 주식을 움직이고, 돈을 움직입니다. 전염병도 두려움이 주는 피해가 더 큽니다. 코로나의 경우 물론 질병 자체도 강력했지만, 코로나가 주는 두려움 때문에 모든 것이 마비되었습니다. 전쟁도 마찬가지로 두려움이 주요 요인입니다. 죽음이라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도 두려움 때문에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죽음은 두려움의 친구입니다. 죽기 직전의 상태를 보면 그 사람의 두려움에 대한 태도가 드러납니다.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죽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관문으로 여기며 가볍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사명에 충실하면 두려움을 넘어선다
두려움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야 합니다. 과장할 것이 없습니다. 바르고 신실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당당하지 못하니깐 밖으로 보이는 것에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사실 이게 다 허영입니다. 진짜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 가짜일 뿐입니다. 돈은 자기를 망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돈을 붙잡았지만, 결국 자기를 망각하게 되 더 큰 두려움에 빠집니다. 로마서 12장 3절에서 사도 바울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내게 주신 소명과 그 몫이 있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에 한눈팔지 말고 주어진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고, 그 사명이 끝났기에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눈을 뜨면 두려움을 넘어선다
두 번째로,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 복음의 능력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나님 나라는 가까이 왔습니다. 가까이 왔다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해서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가 진짜입니다. 영원한 진리의 세계에 눈이 뜨여질 때,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하나님 나라로 방향을 돌이킬 때, 우리는 두려움을 이기는 힘을 얻게 됩니다. 세상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이 땅에서 겪는 어떤 환난이나 곤고, 박해도 다 견딜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로 회심이 일어나야 합니다. 성도들 중에는 회심이 아니라 후회만 하는 분이 있습니다. “내가 그때 하나님을 붙잡아야 했는데, 말씀대로 해야 했는데”라고 이렇게 후회만 하는 것은 진정한 회심이 아닙니다. 헤롯, 빌라도, 부자 청년 모두 돌이킬 순간이 있었지만,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이들도 후회는 했으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후회와 회심은 다릅니다. 후회와 회심의 차이는 나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후회는 “내가 아차 했어. 다시 하면 잘할 거야”라는 생각입니다. 이는 자신이 살아있고, 아직 자신을 믿고 있는 교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반면 회개는 “내게 다시 기회가 와도 나는 못한다. 나는 할 수 없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마음입니다. 내가 죽고 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 자아가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면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그럴 때 하나님 나라가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돌봄을 누리는 것만이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함께 하심으로 두려움이란 귀신을 몰아내라
세 번째,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기에, 이 땅에서 더는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 이 땅에서는 지금 당장 죽어도 되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 강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감당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헤롯보다 강한 자는 세례 요한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되는 존재입니다. 자기는 메시아가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할 일이 끝났습니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가장 강한 자입니다. 반대로 두려움이 많은 사람 지킬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헤롯을 보십시오. 이 말해도 흔들리고, 저 말해도 흔들립니다. 이 눈치 저 눈치 다 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세례 요한으로 생각하는 걸 보면, 누군가에게 저주받거나 살해당할까봐 극심한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았을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가장 큰 귀신들린 자가 다름아닌 두려움에 사로잡힌 헤롯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을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이 가장 강할 때는 유대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주변 이방 나라를 평정했을 때가 아닙니다. 그 때 다윗은 늦잠 자고 일어나 밧세바를 보고 불륜에 빠져서 자기 부하를 살인교사하는 큰 죄를 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이 늙을 때까지 점점 힘을 빼내어서 자신이 가진 부와 권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는 스스로 체온을 내지 못해 수넴 여자 아비삭을 인간 난로로 옆에 두고 잘 정도까지 약하게 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다윗은 사울을 피해 광야 굴에 숨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할 때, 세상 그 어느 것 하나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도 인정 받지 못하는 자식으로 집에 들어오지 못한 채 들판에서 양떼를 돌보며 살아갔을 때, 바로 그 때 다윗은 가장 강했습니다. 다윗이 수금을 타며 노래를 하면 모든 악령은 떠나갔습니다. 가장 큰 귀신인 두려움도 꼼짝 못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던 골리앗 조차도 다윗이 던진 물맷돌에 그만 꼬꾸라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썩어 없어질 것들 무엇 하나 없어도, 오직 하나님만이 내 옆에 계시면 우리는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광야에 있을 때 누구보다 강하고 용감했던 다윗처럼 이 땅에서 진정 이긴 자로 살아가는 모두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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