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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6장 30절-44절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by 알렉스강 2024. 7. 19.

https://www.youtube.com/watch?v=VCAZ0QuO1IU&t=407s

 

 

마가복음 6장 30절-44절 새번역

 

30 사도들이 예수께로 몰려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일을 다 그에게 보고하였다.  

31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와서, 좀 쉬어라." 거기에는 오고가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것을 보고, 그들인 줄 알고, 여러 마을에서 발걸음을 재촉하여 그 곳으로 함께 달려가서, 그들보다 먼저 그 곳에 이르렀다.

3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5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36 이 사람들을 헤쳐,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37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다가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아라." 그들이 알아보고 말하였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39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하여, 모두들 떼를 지어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다.

40 그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앉았다.

41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고 축복하신 다음에,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그리고 그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42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43 빵 부스러기와 물고기 남은 것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44 빵을 먹은 사람은 남자 어른만도 오천 명이었다.

 

 

 

예수님의 기적은 비유와도 같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기적을 꼽으라면 단연코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생각만 해도 너무 행복하지 않습니까? 오천 명이 어떻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를 수 있었을까요? 이런 일이 나에게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 가지실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따르면 기적은 진리를 가리키는 표식이라 했습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을 보지 말고, 달을 봐야 합니다. 기적이 가리키는 바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적은 비유와도 같습니다. 해석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실 때, 기적을 베푸시고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은 깨달을 사람들에게만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적을 경험한 자든 기적을 목격한 사람이든, 기적을 통해 깨우침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깨우침 없이 기적만 경험하거나, 기적과 같이 인생이 승승장구만한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슬퍼해야 합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처럼 결국 진리를 깨닫지 못할 자이기에, 하나님께 버려진 자인 것입니다.

 

바쁘면 과거에 매이게 된다

오늘 본문에 앞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 사역으로 보내시고, 제자들이 돌아와 결과를 보고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귀신이 나가고 병이 나았던 일을 서로 이야기합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자신들이 한 일을 나누면서 승리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제자들도 찾기 시작합니다. 대형교회에서 성도들이 담임목사를 찾아가기 부담스러워 친절한 부목사를 찾아가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너무 바빠서 밥 먹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인기도 예수님 급이 되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사람이 바빠지면 착각을 합니다. 바빠지면 유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의 착각이었습니다. 몇 명을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냈다고 갈릴리 백성들의 고통이 다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대부분은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몇 명 치유하는 기적을 일으켰다고 갈릴리를 다 구원한 듯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기적의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세상은 바쁜 것이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빠야 돈도 벌고 성과를 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화하면 바쁘냐고 인사합니다. 잘 살고 있냐는 것을 바쁘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쁜 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바쁘지 않을 때, 가장 중요한 일을 적시에 할 수 있습니다. 바쁘면 겉만 쫓게 되고 실속이 없습니다. 겉만 화려한 것이 아니라 내면화가 되어야 합니다. 바탕이 튼튼하지 못하면 한방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세상 일도 이러한 데, 진리의 문제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진리를 깨달아 새로운 눈이 열리려면, 바쁘지 말고 홀로 있는 중 단독자로 하나님과 대면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1절과 32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와서, 좀 쉬어라.' 거기에는 오고 가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떠나갔다.” 이것은 권면과도 같지만, 사실 강제로 보낸 것입니다. 정신 차리라고 격리시킨 것입니다. 기적에 함정으로부터 나와서 기적이 가리키는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과거와의 단절을 위해 격리와 금식이 필요하다

이처럼 때로는 격리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과거와의 단절입니다. 금식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을 끊어내면서 과거와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쁜 과거만 단절시키지 않습니다. 좋은 과거일 수록 더 단절시키십니다. 제자들의 성공을 단절시키신 것입니다. 과거가 좋든 나쁘든 지나간 일일 뿐입니다. 그 어떤 과거에도 묶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현실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대부분 과거에 매여 버리면 인생이 힘들어집니다. 후회하고 회한에 차 술만 마시면서 신세한탄합니다. 과거에 잘 나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잘 나갔다고 과시하지만, 현실과의 괴리로 불행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 모두가 다 과거를 단절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과거를 단절하려면 희생이 필요합니다. 격리나 금식과 같은 일이 그 예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멈추는 것이 내 뜻대로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멈추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의 경우를 보십시오. 모세는 애굽의 왕자라는 과거에 매여 있었습니다. 동족 이스라엘을 구하려 했지만, 과거에 매여 있었기에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거절당했습니다. 과거를 끊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실패라는 광야입니다. 모세는 애굽 왕자로 살아온 성공적인 삶이 완전히 단절된 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양 떼를 돌보는 목자로 살았습니다. 모세는 이 시간이 있었기에, 지난 과거를 단절하고 현재를 살아내어, 결국 이스라엘을 애굽의 손에서 건져낼 수 있었습니다. 과거를 단절하는 것은 인생의 매듭과도 같습니다. 매듭을 지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잘나가던 인생이 한 순간 경력 단절이 되듯이, 하나님이 실패라는 광야를 통해서 인생의 매듭을 짓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 소명과 섭리를 깨닫게 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신기한 점을 발견합니다. 만약 타의가 아니라 내가 자발적으로 먼저 사람에게서 떠나가면, 오히려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점입니다. 33절 말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것을 보고, 그들인 줄 알고, 여러 마을에서 발걸음을 재촉하여 그곳으로 함께 달려가서,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제자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어디로 갈지 예상하여 육로로 앞질러 그곳에 먼저 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서 숨으려고 하면 사람들이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명을 따라가면 사람은 따라오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만약 우리가 사람을 따라가면 사람은 떠나고, 돈을 따라가면 돈도 떠납니다. 반대로 사명을 따라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으면, 사람도 따라오고 필요한 돈도 따라오게 됩니다.

 

그곳에 제자들 보다 예수님이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미 와 있는 사람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얼마나 갈급하고 힘들었으면 이렇게 찾아오냐는 겁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보다 늦게 도착했는데, 이미 와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갈릴리 백성들이 얼마나 어려운 인생을 살고 있는지 직면했을 것입니다. 자기 자랑이나 공로를 내세우는 일을 내려놓고, 먼저 이들을 위로하고 돌보는 제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이 한 단계 성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아는 것이 소명을 깨닫는 데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섭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자,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 세리와 창녀에 대해 불쌍히 여기시는 것, 심지어 그들을 편애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빨리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소명과 그 소명대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빨리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기적이다

결국 예수님은 이들에게도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이 잘 전해지다 보니 시간가는 줄 모르고 결국 날이 저물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급히 따라왔기에 집도 멀고 먹을 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해결해주셔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외면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문제를 회피하기만 합니다. 우리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온 것이니 잘 곳 먹을 것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게 세상이 주는 답입니다. 각자도생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자의 인생은 답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바로 그런 답이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십니다. 제자들은 바로 불평합니다. 우리가 이백 데나리온이라는 돈이 어디 있으며, 그 돈이 있어도 어디서 빵을 사 올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현실의 문제는 바로 계산됩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야 일하고, 사람이 있어야 일하는데, 이 모든 것이 없으니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을 할 때, 내가 할 수 있는지 할 수 없는지를 보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 일을 결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 일이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은지를 보십니다. 특히 약자의 필요에 반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자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앞서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소명이 있다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만약 약자의 필요에 반응하고 응답하는 일이 내게 주어졌다면, 나의 소명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군가의 필요를 알지 못하고, 알더라도 책임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할 수 없습니다. 이걸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이걸 기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적은 신비로운 외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빵이나 물고기가 기하급수적으로 갑자기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들이 만나의 기적을 매일 경험했지만, 결국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너희가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한 양식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에서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수많은 기적의 핵심은 하나님의 동행입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지켜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터져나온 생수까지 모든 것이 다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의 이끄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소명을 따라갈 때 만나게 되는 광야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이끄시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영원한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매 순간 전부를 드리는 삶을 살아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는지 가서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습니다. 이것은 현실을 직시하라는 메시지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는 두 렙돈을 드린 과부의 헌금과 같습니다. 자기 전부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부자가 낸 큰 금액보다 더 귀한 가치를 가집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힘입니다. 세상과 다른 교회의 힘입니다. 교회는 돈으로 살리지 않습니다. 교회는 사람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물론 돈이 필요하고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를 하면 됩니다. 내가 가진 것은 미약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내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작은 씨앗이 되면 결국 열 배, 백 배, 천 배의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매 순간 전부를 드리는 것이 기적입니다. 매일 매 순간 내 모든 힘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을 헌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훈련시키실 때 가장 먼저 헌신을 가르치셨습니다. 제사에서 번제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번제처럼 자신을 통째로 다 드려야 합니다.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일부분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다 태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없어질 것 같고 죽을 것 같지만, 아닙니다. 다시 살아나고 소생하게 됩니다. 운동선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기 중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와 기술을 다 쏟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프로입니다. 파트타임은 프로가 아닙니다. 풀타임으로 프로처럼 살아야 인생이 새롭게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소명에 몰입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

다른 말로 하면 몰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집중을 쏟아 넣는 것입니다. 몰입은 나를 뛰어넘는 일입니다. 초월하는 능력이 몰입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이 축사하시며 감사 기도하실 때 하늘을 보셨습니다. 이는 직면한 현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몰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땅의 현실을 넘어서게 되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하늘을 보는 것은 현실을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현실을 무시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망상입니다. 거짓으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전부를 드린 다음 하늘을 봐야 합니다. 그때 삶에 기적이 나타납니다. 기적의 현재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몰입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몰입은 가장 순수한 원초적인 힘입니다. 몰입을 경험한 사람은 이 사실을 압니다. 몰입했을 때, 내 생명을 드리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울입니다. 바울은 이방인 선교라는 소명에 몰입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럽 선교 사역을 마무리하며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자신의 소감을 전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처럼 자기 생명을 걸고 몰입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입니다. 소명에 몰입하는 사람이야 말로 가장 행복합니다. 이 소명을 찾는 축복이 있길 바랍니다. 그럴 때 숨겨진 보화를 발견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하늘을 보고 나아가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병이어를 축사하신 후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시고, 그다음은 하늘에 맡기신 것입니다. 이처럼 현재를 몰입해서 전부를 드린 사람은 초월로 향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를 나누면서 어떻게 모두가 먹을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하늘에 맡겨두는 것입니다. 시선이 땅으로 향하면 움켜쥡니다. 하늘로 향하면 떼어 줄 수 있습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래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목자이시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나누고 떼어주더라도 부족하가나 모자라지 않습니다. 엘리야를 대접한 사르밧 과부의 경우처럼, 밀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남았을 때도 엘리야를 위해 떡을 만들었더니 3년 동안 밀가루와 기름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물론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하고 걱정이 됩니다. 나는 괜찮아도 자녀들이 걱정인 분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미래가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많은 경우 짜증이 나고 불안할 때는 배고파서 그렇습니다. 뭔가 허전하면, 불안합니다. 육적인 배고픔도 그러한데, 영적인 배고픔은 더욱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배고프면 현실이 두려워집니다. 현실이 두렵다면 내가 영적으로 배고픈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배부르고 풍성함을 느껴야 합니다. 영적으로 풍성해지면 현실의 어려움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풍성해지면 현실에서 과감해질 수 있습니다. 진리에 배부르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앞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기적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날마다 풍성히 경험하는 것이 가장 큰 기적을 누리는 복된 삶입니다.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산법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베푸신 참된 기적의 의미를 깨달아 살아가는 인생이 누리는 복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우리 인생을 바라보면, 내가 받을 복의 그릇이나 크기를 결국 내가 결정합니다. 물론 인생의 크기는 타고난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인생은 그 믿음대로 바뀝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십시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기에 너에게 많은 것을 맡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과거에 매이지 않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이 미래에 받게 되는 상급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헤아림의 법칙이라 불리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 말씀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주는 만큼 받는 것입니다. 주기 위해서는 결국 내게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럴 때 줄 수 있습니다. 자기 것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남에게 주지 못하는 그릇만큼 살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샘법은 최소 열 배, 삼십 배, 백 배입니다.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과대평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통해서도 많은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은 그 타고난 역량이 일이라면, 하나님의 영이 부은 바 되면 열 배 백 배 능력을 발휘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넉넉하게 베푸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성공해서 부자가 되어서 헌금을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으로 인해 배부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관심을 쓰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나보다 약한 자들을 돕고 있는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베풀며 사는 게 복이 있습니다. 돈으로도, 마음으로도 베풀어야 합니다. 속고 산다는 생각이 들어도 어리석게 베풀어야 합니다. 계산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머리카락도 세시는 분이시기에, 한치 오차 없이 정확하게 하십니다.

 

그렇다고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책 없이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천 명이 먹고 남은 음식을 바구니에 모으라고 하셨습니다. 영적인 것도 풍성하지만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내게 주신 은혜를 잘 모아 두었다가 필요한 곳으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이 은혜를 잘 관리하지 않고 썩게 내버려 두면, 파리 떼가 몰려오듯이 악한 귀신이 달려듭니다. 부자들이 돈 귀신, 두려움 귀신에 걸려서 술과 약에 취해 사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오늘 당장 목숨을 거두어가면 아무 소용없는 일에 힘쓰는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말고, 하늘 창고에 쌓아두는 지혜를 가지길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차고 넘치는 은혜와 지혜로 인해,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복이 있길 바랍니다. 주어진 사명에 생명을 걸었던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모아 놓고 했던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이 있습니다. 모두 사도 바울과 같은 말을 남기는 인생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