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6장 1절-8절 새번역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다.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둘째 달 보름이 되던 날이다.
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항의하였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님의 손에 넘겨 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
4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이 날마다 나가서, 그날 그날 먹을 만큼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그들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하여 보겠다.
5 매주 엿샛날에는, 거두어들인 것으로 먹거리를 준비하다 보면, 날마다 거두던 것의 두 배가 될 것이다."
6 모세와 아론이 모든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였다. "저녁이 되면, 당신들은 이집트 땅에서 당신들을 이끌어 내신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7 당신들이 우리를 보고 원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이 주님을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이제 아침이 되면, 당신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당신들이 우리를 보고 원망하십니까?"
8 또 모세가 말하였다. "주님께서 저녁에는 당신들에게 먹을 고기를 주시고, 아침에는 배불리 먹을 빵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들이 주님을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당신들이 하는 원망은 우리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하는 것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성경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출애굽기 16장에서는 만나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일단 잘 먹는 게 중요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에 차질이 생기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육신에도 병이 오고 마음에도 병이 옵니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에너지라도 공급을 받으려면 기본적인 양식을 제공받아야 합니다. 이게 안되면 불만 불평 원망이 쌓입니다. 결국 먹지 못하면 죽음을 맞이하기에, 근원적인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간사에서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기에, 성경에서도 이 문제는 신구약 할 것 없이 계속 언급됩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에 3년 동안 기근이 들었을 때,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구워 아들과 함께 나눠 먹고 죽기를 기다리려고 하였으나, 구워 만든 떡을 자신에게 달라는 엘리야 선지자의 요구에 응하여 가뭄이 그칠 때까지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도 먹는 문제를 자주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백성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마냥 먹고 사는 일에 힘쓰는 걸 포기할 수도 없고, 또 먹고 사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하나님을 따르는 일에 소흘해집니다. 쉬운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먹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엘림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1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다.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둘째 달 보름이 되던 날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 마라에 도착해 쓴 물이 단물로 변하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이후 엘림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은 12개의 샘과 70그루의 종려나무가 있는 살기 좋은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예비해 두신 곳이었습니다. 마라의 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좋은 생수를 마시며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편하고 좋은 곳이라 계속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엘림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초막 셋을 짓고 영원히 머물고 싶어 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 그 자체가 되어야 하며,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정한 목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대로 따라가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주신 은사나 축복이 삶의 목적이 되어선 안 됩니다. 엘림이라는 축복으로 쉼을 얻었다면, 최종 목적지를 향해 다시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불안하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인 신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이때는 출애굽 후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기점으로 새로운 달을 시작했으니, 출애굽이 1월 15일이었고, 현재는 2월 15일입니다. 가나안 땅은 북쪽에 있는데 그들은 남쪽으로 가고 있었으니 불안해졌을 것입니다. 당시 급히 떠나면서 무교병을 가져왔고 양식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이 한 달 동안 먹을 양식을 짊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곧장 북쪽을 향해 가나안으로 갔다면, 양식 걱정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한 달이 되자 애굽에서 가져온 음식은 모두 떨어졌습니다. 사막을 계속 걸어가면서도 음식이 다 떨어지고, 갈 길이 보이지 않으니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든지 먹을 것이 떨어지면 불안해지기 마련입니다. 쌀독이 비고, 직장을 잃거나 사업이 망해 당장의 생계가 위협받게 되면, 아무리 신앙이 깊어도 불안이 엄습합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며 광야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픈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기에, 그들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더욱 불안해졌습니다. 그들은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는가? 우리가 여기서 굶어 죽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직접 대들지 못하고, 대신 모세에게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대드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드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않고, 물도 양식도 없는 광야로 이끄셨을까요? 이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일부러 광야로 인도하셔서 그들의 육적인 본성을 드러내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현실이 어려워지면 기억이 왜곡된다
2절과 3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온 회중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왜 우리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주려 죽게 하느냐"라고 말합니다. 이게 정확한 기억이 아닙니다. 현실이 괴로우니 과거를 미화하는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애굽에서 고통받던 노예 시절을 동경하며, 지금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하고자 한 것입니다. 물론 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겠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배은망덕한 행동입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를 체험하고도, 한순간에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인간이 가진 악한 본성이 이렇습니다. 자신의 기억조차 왜곡해서 현실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사람은 그 본성이 바뀌지 않는 한 결코 소망이 없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달 동안 고기를 구경도 못 하고, 가지고 나온 양식마저 떨어지자 '옛날이 좋았다'며 애굽에서의 삶을 그리워했습니다. 관심은 오직 육적인 양식에만 있었습니다. 생명의 양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왜 출애굽을 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이스라엘들을 훈련을 통해 바꾸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십니까?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로 하십니다. 이 만나는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영의 양식, 즉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이들을 바꾸어 나가시는 것입니다.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나에게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이야 말로 신앙의 여정입니다.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하여 보겠다
4절과 5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이 날마다 나가서, 그날그날 먹을 만큼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그들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하여 보겠다. 매주 엿샛날에는, 거두어들인 것으로 먹거리를 준비하다 보면, 날마다 거두던 것의 두 배가 될 것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만나를 주시는 원칙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날 그날 먹을 만큼 거두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지 지켜보겠다고 하십니다. 일종의 테스트와도 같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것이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에게 공급하시는 원칙으로 이 원칙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구절을 모르는 성도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왜 하나님은 한 번에 넉넉하게 주셔서 걱정 없이 살게 하지 않으시고, 꼭 날마다 필요한 만큼만 주시는가?" 그 답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함께 동행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곁에 머물면서 은혜를 누리고 감사하며 찬송하기를 원하십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하고 싶어 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한꺼번에 모든 것을 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경험상 사람을 완전히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결과를 비관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구비된다면 하나님을 더 이상 찾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더 이상 기도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으며,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잘 아시기에, 모든 것을 한꺼번에 주시지 않고, 그때그때 조금씩 주셔서 항상 함께 있도록 하십니다.
이러한 삶의 원리는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에 살아가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광야길에서도 아무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살기 위해서는 한 가지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일용할 양식을 받아도 걱정 없이 편안히 살 수 있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부모를 신뢰하며 수중에 돈이 없어도 매일매일 걱정 없이 살아가듯이,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부모가 채워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도 이와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첫째 조건은 다름 아닌 믿음입니다.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그리고 주목할 표현으로 “너희가 먹을 것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늘에서 양식을 비처럼 내려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만나야 말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원망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주시는 은혜를 주시는 것일까요? 4절 후반부에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하여 보겠다”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주시는 게 시험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은혜를 좋다고 생각하지요. 은혜가 마냥 좋은 것만이 아닙니다. 은혜가 크면, 시험도 크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도록 허락하신 복이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늘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은혜를 누리는 원칙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날그날 먹을 만큼 거두어들이게 하여라”는 말씀처럼 일용할 양식으로 감사하며 만족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 “나의 지시"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히브리어로 토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지를 반드시 확인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험에 불합격하고 말았습니다. 16장 후반부인 20절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정해진 양 이상을 거두어 다음 날까지 남겨 두었습니다. 또한, 26-27절에서는 안식일 전날 두 배로 거두고 안식일에는 거두러 가지 말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이 안식일에 나가 양식을 거두려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거두어도 결국 썩은 양식을 쌓아두는 꼴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만나는 이 땅의 양식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결국 먹어도 배고프고, 먹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늘의 양식을 먹더라도, 이 땅의 양식을 먹고 살아가는 짐승들과 별 차이 없는 인생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든 원망하지 마라
7절과 8절을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당신들이 우리를 보고 원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이 주님을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이제 아침이 되면, 당신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당신들이 우리를 보고 원망하십니까? 또 모세가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저녁에는 당신들에게 먹을 고기를 주시고, 아침에는 배불리 먹을 빵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들이 주님을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당신들이 하는 원망은 우리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핵심 단어는 원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모세는 원망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인간의 원망은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죄인의 고질병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보면, 아담은 "하나님이 지어준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하와는 "하나님이 지으신 뱀 때문에 먹었다"라고 변명합니다. 결국에는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처럼 원망은 결국 그 칼끝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특징은 불만과 불평, 그리고 비난과 원망입니다. 사람에 대해서 원망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을 향한 원망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아담의 타락은 단순한 상징적 사건이 아닙니다. 아담의 타락처럼 인간의 본성은 왜곡되고 비뚤어진 상태에 있습니다. 이 왜곡된 본성을 잘 나타내는 단어가 바로 원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에 그치지 말고, 어떤 이유에서든지 원망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과 걱정, 염려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는 실패하고 큰일 날 거야", "너는 결국 잘못되어 죽을 거야"라는 생각들이 엄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을 대적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 결코 죽지 않는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라고 믿음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과 이 땅을 살아갈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도 필요한 만나의 은혜를 주셔서 불만, 불평, 원망, 시비 없게 해 달라 간구하여, 기도의 응답 받는 모두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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