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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출애굽기 15장 19절-21절 주님을 찬송하여라, 말과 기병을 바다에 던져 넣으셨다

by 알렉스강 2024. 8. 15.

출애굽기 15장 19절-21절 새번역

 

19 바로의 군마가 그의 병거와 기병과 함께 갈라진 바다로 들어갔을 때에, 주님께서 바닷물을 돌이키셔서 그들을 덮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건넜다.

20 그 때에, 아론의 누이요 예언자인 미리암이 손에 소구를 드니, 여인들이 모두 그를 따라 나와, 소구를 들고 춤을 추었다.

21 미리암이 노래를 메겼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던져 넣으셨다."

 

미리암

 

인복이 많았던 모세

인생을 살아가면서 큰 복 중 하나가 인복입니다. 모세를 보면 참 사람 복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세가 태어나 시간을 여러 시간을 보내며 이스라엘을 이끄는 지도자로 세워지기까지, 그리고 출애굽 과정과 광야의 기간 동안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 중에도 하나님이 좋은 사람을 적시에 붙여주십니다. 그래서 출애굽이 모세 혼자 한 것이 아니라, 결국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일하심이었음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누린 인복 중에서 특이한 점이 있다면, 모세를 도운 사람들 중에 여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예수님도 비슷합니다. 헌신적인 여인들의 도움으로 공생애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를 도운 여인 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오늘 노래의 주인공인 누이 미리암입니다. 모세의 출애굽 과정에서 가까운 친지 중에서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 아론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 이면의 상황을 유추해 보면, 아론보다 미리암이 큰 도움을 주었으리라 추측이 됩니다. 여자였기에, 뒤에서 도와서 드러나지 않았지 알게 모르게 크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히브리 산파들

그럼 모세에게 귀인이 되었던 여인들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모세가 만난 첫 번째 귀인인 여인은 이 땅에 나오기 전 어머니 태 안에 있을 때입니다. 강한 의지를 가지고 생명을 존중했던 히브리 산파입니다. 강제노역에도 불구하고 그 수가 자꾸 불어나자 바로는 히브리 산파인 십브라와 부아에게 명령합니다. 히브리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살려 두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도구가 아닌 죽음의 도구가 되라는 바로의 명령을 거부하고 남자아이들을 살려 두었습니다. 이 일이 보고되자, 바로는 산파들을 불러 왜 그렇게 했는지 묻습니다. 산파들의 대답은 매우 지혜롭게 당찹니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달라서 산파가 도착하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바로에게는 둘러 말했지만, 산파들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두려웠기에 그렇게 행동한 것입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권력은 생명을 반하는 행동일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좋은 권력은 약자를 보호하고 생명을 존중하지만, 이런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대체로 권력은 자신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서 약자를 억압하고 권력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은 권력과는 정말 동떨어진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처한 비천한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의 명령을 거역함으로써, 생명을 억압하는 바로의 불의한 권력을 은연중에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은 히브리 산파의 집안을 번성케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생명이라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자에게는 마땅히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

다음으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요게벳은 아기를 낳고 석 달 동안 숨겨 기르다가 더는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아기를 담고 그 상자를 역청과 송진으로 물이 새지 않도록 하여 나일강에 띄웁니다. 단순히 버린 것이 아니라, 나일강에서 매월 초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며 목욕하던 애굽의 귀족들을 염두에 둔 계획이었습니다. '갈대 상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테바’는 노아의 방주를 의미하는 단어와 동일합니다. 요게벳이 만든 것은 생명을 구원하는 방주였던 것입니다. 요게벳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아기의 운명을 맡겼습니다.

 

이후에 요게벳은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재치로 인해서 모세의 유모가 됩니다. 요게벳은 자아 정체성을 형성할 시기에 모세 옆에서 사랑으로 양육하며 말씀을 읽어주었을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무엇보다 너는 히브리인이고,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연스럽게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모세는 장성하여서 사리를 분별할 때가 되자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자문하며, 고통받고 있던 동족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혈기로 한 일이지만, 애굽 감독관에게 학대 받던 동족을 도와주고, 동족끼리의 다툼에 나선 것도 결국 모세 안에 있던 히브리 민족의 정체성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애굽 공주의 아들로서 최고위층에서 온갖 세상의 권력과 쾌락을 누릴 수 있었겠지만, 요게벳이 심어준 히브리 정체성은 결코 모세를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게 만든 것입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

모세의 인생에 있어 큰 영향을 준 세 번째 여인은 아내인 십보라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동족 히브리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애굽 관리자를 죽인 후, 바로의 추격을 피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칩니다. 그곳에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일곱 딸들이 양을 먹이러 온 장면을 목격합니다. 당시 이드로의 딸들은 우물가에서 다른 목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모세는 딸들을 도와주었고, 이드로는 감사를 표하며 집으로 초대합니다. 이후 모세는 이드로의 집에 기거하며 일을 도와주다가 십보라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십보라 사이에 첫째 아들을 두었는데,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뜻인 게르솜이라 지었습니다. 모세는 십보라와 미디안 광야 40년 세월 동안 평화롭게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광야의 훈련 시간을 잘 견디어 낼 수 있는 큰 힘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애굽에 있는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받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후, 모세는 자신의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길을 가던 중,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시는 위급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때 십보라는 빠르게 행동하여 아들 중 한 명에게 할례를 행하여 그 피를 모세의 발에 바릅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남편이라고 말하며 모세를 구합니다. 십보라는 이방 여인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 앞에 준비되지 않은 문제임을 자각하여 재빨리 이 일을 이행함으로써 남편 모세의 목숨을 살려낸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십보라는 아들들과 함께 미디안으로 돌아갔다가 광야에서 모세와 합류하게 됩니다. 모세가 주어진 사명에 더 충실히 감당하길 원하는 배려였을 것입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

다음으로 생각해 볼 여인은 모세의 누이 미리암입니다. 모세가 태어나 어릴 적 숨겨두다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 강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을 때, 누이 미리암이 멀리서 갈대 상자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장 4절 말씀입니다. “그 아이의 누이가 멀찍이 서서,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 보고 있었다.” 여기서 '서서'라고 해석한 히브리어 아마드עָמַד는 단순히 우두커니 서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미리암이 주체적인 태도를 가지고 모세를 끝까지 보호하겠다는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서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미리암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의 딸이 갈대 상자에서 울고 있는 아기를 발견하자, 그 아이가 히브리 사람인 것을 알았지만 불쌍히 여겨 살려주었습니다. 미리암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공주에게 다가가 유모를 구해주겠다고 말합니다. 결국 미리암의 재치로 모세는 친어머니인 요게벳의 젖을 먹고 자랄 수 있었습니다. 

 

모세의 양어머니 바로의 딸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한 여인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양어머니인 바로의 딸입니다. 정확히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바로의 딸은 하젭수트로 애굽 18왕조의 세 번째 바로인 투르모세 1세의 딸이라고 추측합니다. 투르모세에게 아들이 없어, 본인의 남편을 바로로 삼습니다. 하지만 남편도 일찍 죽게 되어 본인이 섭정이 되어 애굽을 통치했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당시 애굽의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강가 갈대 사이에 버려진 히브리 아이를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이 마음을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본인이 바로의 딸이었지만, 이미 선포된 국법을 어기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유모를 구한 것도 애굽 왕궁에서 노골적으로 히브리 아이를 키우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바로의 딸은 히브리 사내아이를 태어나자마자 죽이라는 국법을 문제 삼았을 것입니다. 결국 모세의 양어머니인 바로의 딸로 인해 법이 폐지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국법이 바뀐 후에 모세를 궁으로 데려와 키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생명을 살린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받은 것입니다.

 

모세의 부족함을 채우는 미리암의 리더십

다시 미리암을 생각해 봅시다. 미리암은 민수기 12장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출애굽 공동체가 광야에서 많은 시련을 겪을 때였습니다. 고된 행군에 지친 백성들은 불평을 늘어놓다가 징계를 받았고, 단조로운 식사에 지친 사람들은 투덜거렸습니다. 모세 역시 지쳤고, 하나님 앞에서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민수기 11장 12절과 13절입니다. “이 모든 백성을 제가 배기라도 했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했습니까? 어찌하여 저더러, 주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마치 유모가 젖먹이를 품듯이, 그들을 품에 품고 가라고 하십니까? 백성은 저를 보고 울면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고기를 달라!' 하고 외치는데,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제가 어디서 구할 수 있습니까?” 날마다 만나를 허락하셔서 굶지 않게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만 불평은 끝이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어떻게 그 많은 수를 먹일 고기를 구하겠습니까? 모세가 처한 난감한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모세도 이제는 한계에 도달한 것입니다. 혼자서는 이 백성을 감당할 수 없으니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칠십 명의 장로를 세워서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을 내리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함께 돌볼 수 있도록 모세의 부담감을 덜어주십니다. 이 위기의 순간을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미리암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남자가 할 수 없는 여자만이 감당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모세는 탁월한 지도자였지만, 사람들의 삶에 깊이 공감하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반면, 백성들의 삶 속으로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아픔에 공감하며 함께 눈물 흘리고, 위로해 주는 역할은 미리암과 같은 여인들의 몫이었을 것입니다. 이 상황들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미리암의 역할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구스 여인과 재혼한 모세

이런 상황에서 민수기 12장에서는 뜻밖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구스는 에티오피아를 뜻하지만, 미디안 족속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모세가 새롭게 아내로 맞이한 여인이 이방인임은 틀림없습니다. 모세의 결혼은 단순히 외로움으로 짝을 찾은 것으로 봐서는 안됩니다. 당시 출애굽 시 이스라엘 민족만이 애굽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여러 민족들도 함께 나왔습니다. 모세는 이들도 품어야 했습니다. 구스 여인이 어디 멀리서 데려온 것이 아니라 이 민족 중 하나였으며, 민족 통합의 대의로 구스 여인과 결혼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미리암과 아론은 구스 여인과의 결혼 문제로 모세를 비방했다고 말합니다. 모세의 민족 통합 정책을 그리 좋게 보지 않은 듯합니다. 미리암은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챙겨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같습니다. 아론과 미리암은 모세의 선택이 잘못되었다 주장하며, "주님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라고 따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한 행동을 높게 평가하십니다. 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겸손한 사람이라 칭찬하시면서 다른 예언자들에게는 꿈과 환상으로 뜻을 전하지만, 모세에게는 얼굴을 마주 대하고 말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출애굽 공동체의 실질적인 이인자 미리암

하나님은 미리암과 아론에게 화를 내시고 떠나가자 구름이 장막 위에서 걷히게 되고 미리암이 악성 피부병에 걸려 눈처럼 하얗게 되었습니다. 아론도 모세에 대해 비방했지만, 징벌은 미리암에게만 임했습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론보다 미리암에게 더 책임을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리암이 아론 보다 더 큰 리더십을 이스라엘 공동체에 발휘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론은 모세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며, 미리암을 저 상태에 버려두지 말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미리암을 고쳐주실 것을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미리암을 이레 동안 진 밖에 있다가 돌아오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리암이 돌아올 때까지 행군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출애굽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모세가 아버지였다면, 미리암은 어머니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리암이 돌아오지 않으면 떠날 수 없다고 한 것도 미리암의 따뜻한 돌봄을 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출애굽 공동체가 광야에서 보낸 40년을 중요했던 사건으로만 기억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수많은 우여곡절은 성경에 남지 않았습니다. 광야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모세의 리더십만이 아니라, 미리암과 같은 따뜻한 돌봄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리암은 백성들이 신 광야 가데스에 머물 때 죽음을 맞이했고 그곳에 묻히게 됩니다. 미리암의 죽음을 짧게 언급하지만, 구약 선지자 미가는 미리암을 출애굽을 이끈 3대 지도자로 치켜세워 이야기합니다. 미가서 6장 4절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왔다. 나는 너희의 몸값을 치르고서, 너희를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나왔다.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서, 너희를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게 한 것도 바로 나다.” 미가는 출애굽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사람이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리암, 한나, 마리아의 노래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매우 짧은 구절이지만, 앞서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념한 모세의 노래에 이어진 미리암의 노래입니다. 보통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바다의 노래라 부르기도 합니다. 미리암의 노래는 모세의 노래에 비해 소박하고 간략합니다. 하지만 미리암의 노래가 토라의 여러 전승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 말합니다. 다시 말해, 미리암의 노래가 모세의 노래보다 더 오래되고 원형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쳐 주저앉아 있을 때, 그들을 격려하고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도록 이끈 것은 미리암이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노래의 경우 1인칭을 사용한 것과 달리, 미리암의 노래는 2인칭을 사용하여 여호와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모세의 개인적 찬양이 온 공동체가 함께하는 찬양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줍니다. 20절에서 미리암은 '아론의 누이요 예언자'로 불리며, ‘미리암이 손에 소구를 들며 여인들이 모두 따라 나와 소구를 들고 춤을 추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미리암은 이스라엘 백성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살펴 돌보며 이끌었던 지도자였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미리암의 단순하면서 분명한 찬양은 출애굽의 역사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던져 넣으셨다.” 미리암의 노래는 단순하지만 강력합니다. 혼돈과 억압의 세력은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잠시 동안 그들이 이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해가 떠오르면 이슬이 사라지듯 그들은 결국 사라질 것입니다. 미리암의 노래는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왔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도 그러합니다. 아이를 갖지 못해 고통받던 한나는 하나님의 긍휼로 아기를 얻고, 하나님의 역사 섭리에 대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무엘상 2장 8절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는 모두 주님의 것이다. 그분이 땅덩어리를 기초 위에 올려놓으셨다.” 고통과 소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한나는, 억울한 자들의 처지를 기억해 주시는 하나님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렇게 가장 연약하고 약한 자들을 돌보는 마음이 미리암이 가졌던 마음이었습니다.

 

미리암의 노래는 한나의 노래에 이어서 신약의 마리아의 노래와도 연결됩니다. 마리아는 당시 로마 제국의 착취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무책임 아래에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현실 가운데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51절부터 5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비천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유린되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그 권능의 팔을 행하셔서 이 땅의 제왕들과 교만하고 부한 자들 낮추실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미리암과 한나, 그리고 마리아의 노래는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약자들의 편이라는 것입니다. 애굽 바로의 병거가 강력해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팔로 한꺼번에 바닷속으로 처넣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미리암의 노래가 우리의 고백이 되길 바랍니다. 강자를 낮추시고 약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하심을 우리 인생에서도 계속해서 찬양하게 되길 간절히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