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6장 9절-16절 새번역
9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셨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주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오라고 일러주십시오."
10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할 때에,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주님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났다.
1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12 "나는 이스라엘 자손이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는 그들에게 '너희가 저녁이 되면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빵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 너희는 나 주가 너희의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고 말하여라."
13 그 날 저녁에 메추라기가 날아와서 진 친 곳을 뒤덮었고, 다음날 아침에는 진 친 곳 둘레에 안개가 자욱하였다.
14 안개가 걷히고 나니, 이럴 수가, 광야 지면에, 마치 땅 위의 서리처럼 보이는, 가는 싸라기 같은 것이 덮여 있는 것이 아닌가!
15 이스라엘 자손이 그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서로 "이게 무엇이냐?" 하고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입니다.
16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명하시기를, 당신들은 각자 먹을 만큼씩만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당신들 각 사람은, 자기 장막 안에 있는 식구 수대로, 식구 한 명에 한 오멜씩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왜 광야에서 이걸 먹어야 하는가?
지난 시간부터 만나에 대해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특별한 양식입니다. 아침에 이슬이 진 사면에 마른 후에 작고 둥글며 서리처럼 세미한 것이 있습니다. 희고 겨자씨 같은 모양인데 맛을 꿀 섞은 과자 같은 맛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전 처음 본 양식이었기에, 서로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며 히브리어로 '만후מַן הוּא'라고 물었습니다. 만나는 이 질문이 이름으로 붙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이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어보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보고 허겁지겁 먹는데 정신 나간 것이 아니라, 일단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바라보고 왜라고 질문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과연 이게 어떤 양식인지에 대한 물음만이 아니라, 왜 이걸 우리는 먹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왜 지금 광야에 와서 이렇게 배를 주리면서 있는가에 대한 자신의 존재 성찰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만나란 광야 생활을 위한 양식입니다. 즉, 만나를 논할 때 광야 생활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만나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먼저 "광야 생활이 왜 주어졌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신명기 8장 3절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광야 생활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또 다른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처럼 이미 구원의 일부를 경험하고는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도 계속해서 정말 하나님을 믿는지 도전을 받습니다. 여전히 광야의 어려움 속에서 믿음을 테스트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도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 역시 광야 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는 것이 광야 생활의 핵심이다
광야 생활이 어려운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눈에 보이는 환경에 따라 삶이 결정된다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광야는 막막하고, 가나안 땅에는 적들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환경에 의존하며 우리는 살 수 없다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약속을 주셨고, 이 약속을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구름을 덮어주셨고, 추운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셨으며, 40년 동안 발이 부르트지 않고 옷도 해어지지 않았습니다. 매일 하늘에서 양식이 내려오고 바위에서 물이 나왔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망각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불안해하며 미래를 계획했습니다. 그 결과,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는 것이 이렇게도 중요하고 어려운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지식에 머물러 있는다면,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정말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광야 생활 동안 각자에게 허락된 믿음을 주실 때까지 우리를 붙들고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광야 생활을 직면할 때, 하나님의 훈련의 채찍을 맞을 때, 나 죽는다 생각하나, 사람이란 그리 쉽게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 쉽게 죽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아무 의미 없이 하루하루 목숨만 연장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들은 결코 그렇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짐승이 아나라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환경이나 신체적 조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 그리고 그 능력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난과 징계가 필요하다
사람이 철들어서 제대로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나이가 들면 기력이 쇠하여져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대로 배우고 고민하고 애쓰며 살아가는 시간이 삼사십 년 정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시간 동안 이 가르침을 배우고 깨닫는 데 써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교훈을 몇 년 동안 배웠습니까? 원래 계획대로라면 1년 안에 깨달아 가나안으로 진군하여 아낙 자손을 물리치고 약속의 땅을 차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간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결국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며 배워야 했습니다. 40년 동안 이들은 소명을 이룰 때까지, 자신들이 죽지 않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광야와 같은 척박한 환경이라면 곧 죽거나 병들어야 하는데, 발도 부르트지 않고, 옷도 해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신기했을 법합니다. 이처럼 광야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삶이 어디서 오는가?, 무엇으로 유지되는가?"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치 만나의 이름처럼, 이것이 무엇인지, 왜 광야에서 만나를 먹는지를 깨닫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1년이든 40년이든 광야와 만나의 교훈을 빨리 깨우쳐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 있습니다. 광야 생활과 만나의 교훈을 가르쳐주는 신명기 8장 5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사람이 자기 자녀를 훈련시키듯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도 당신들을 훈련시키신다는 것을 마음속에 새겨 두십시오.” 여기서 하나님이 훈련하신다고 했는데, 훈련이라는 히브리어 야사르יָשָׁר는 원래 징계하다, 교정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징계는 훈련과 연단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영적 체질을 강화하고, 모르는 것을 배우며, 희미한 것을 확실하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것보다 더 소중한 인생의 과정은 없습니다. 바로 이 징계가 광야 생활에서 겪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고 징계를 내리시는 것은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분명히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앞서 만나가 광야 생활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고난을 통한 징계 역시 광야 생활입니다. 광야 생활에서 만나가 은혜이듯이, 고난과 징계도 은혜인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삶이 인간다운 삶이다
요한복음 6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장정만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이 일로 사람들은 무작정 예수님을 쫓아갑니다. 예수님 옆에 있으면 굶어 죽지 않겠다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호구로 생각하고 내 배를 계속 채워주실 것이라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떡을 주시는 기적을 반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냥 먹을 것을 주지는 않으시고, 그 대신 일하면 먹을 것을 주시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리석은 그들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 역시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오병이어와 같은 표적을 구하는 것으로 생각하여사.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듯이, 매일마다 오병이어를 일으켜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하늘에서 빵을 주신 이는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이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이, 곧 예수님 자신이야 말로 생명의 빵으로,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을 먹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다가 아님을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삶이 진정한 생명임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면서 깨달으신 것도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40일간 굶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죽기를 각오했다는 것입니다. 돌이 떡처럼 보이는 상태까지 이르는, 굶어서 죽어가는 과정인데, 그런데 예수님은 그 가운데에서 어떤 진리를 드러내셨습니까?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단순히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갈 때 진정한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만나는 은혜이기도 하지만 시험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렇게 참되고 궁극적인 생명의 근원을 보여주시기 위해, 때로는 우리를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생리와 벗어나는 상황에 몰아가시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전 경험하신 40일 광야 금식이 그러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 생활과 만나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따라서 만나는 우리의 삶을 배부르고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배우게 하는 도구입니다. 만나는 분명히 은혜이지만, 이 만나라는 은혜 뒤에는 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광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모든 물질들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만나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돈을 적게 벌어도 만나 은혜이고, 돈을 많이 벌어도 만나 은혜입니다. 그런데 많이 번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놔두면 썩어버립니다. 족한 줄로 알고 일용할 양식만큼 살아가는 것이 은혜입니다. 돈을 적게 벌면 이 돈으로 살 수 없노라 절망하지 말고, 이 돈으로도 살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나에게 허락하신 처지가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으며, 이 가운데 나의 생명이 돈이나 물질로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나는 단지 배고픔을 채우는 음식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먹으며 불평했던 것도, 만나가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음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나가 물론 꿀 섞은 과자와 같다고 했는데, 이걸 40년 먹는다고 생각한다면, 다채롭지 못해서 질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혀가 얼마나 간사합니까? 맵고, 짜고, 시고, 감칠맛 등 별의별 맛을 원하는데, 계속 만나만 먹어보면 질리게 됩니다. 하지만 맛이 없지 않다는 것만 하더라도 얼마나 은혜입니까? 따라서 만나의 진정한 목적은 그들의 육체적인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우고 그분께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질리지 않도록 너무 많이 먹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좀 허기지게 먹는 게 좋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해서, 좀 배가 고파야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족한 대로 족한 줄로 알고 내게 주어진 만나를 누리며 살아가라
진실로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만나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분께 감사해야 합니다. 만나 자체가 맛있거나 만족스럽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비록 그것이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해주는 도구입니다. 나의 가족, 친구, 직업, 재산 등 내가 처한 모든 상황이 바로 내게 주어진의 만나입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그분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게 주신 인생의 조건, 만남, 관계, 모든 것들이 마치 만나처럼, 일용할 양식으로 주시는 내게 필요한 만큼의 분량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많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닙니다. 쉽게 질립니다. 게을러서 적으면 너무 배가 고픕니다. 약간 허기질 정도로, 영의 배고픔을 느낄 정도로만 채우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부족한대로 족한 줄로 알고 내게 주어진 만나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지혜인 것이지요.
따라서 광야 생활을 해 나가는 이 땅의 여정에서 부족하거나 완전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평하기보다는, 그것을 통해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믿고, 현재의 삶에서 주어진 것들로 만족하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길을 끝까지 걸어가길 바랍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적절한 만나를 주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배우게 하실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 가운데, 헛된 영광을 추구하지 말기 바랍니다. 어차피 좀 더 배불러도 광야이고, 좀 잘 입고 크고 좋은 집 살아도 밖으로 나가면 결국 광야 생활입니다. 그러니 광야에 허락된 고난도 만나도 모두 다 달게 받으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나아갈 때, 반드시 우리는 죽지 않고 하나님의 뜻 이루어 영광스러운 가나안에 들어갈 줄 믿습니다.
'출애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애굽기 17장 1-7절 너는 그 바위를 쳐라 (0) | 2024.08.19 |
---|---|
출애굽기 16장 16절-36절 한 오멜씩 가득 담아 간수하여 자손 대대로 볼 수 있게 하여라 (0) | 2024.08.17 |
출애굽기 16장 1절-8절 먹을 것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0) | 2024.08.16 |
출애굽기 15장 22절-27절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으므로 이름을 마라라고 하였다 (0) | 2024.08.15 |
출애굽기 15장 19절-21절 주님을 찬송하여라, 말과 기병을 바다에 던져 넣으셨다 (0) | 2024.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