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y5GiTMQvCjM&t=563s
요한복음 6장 51절-59절 새번역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52 그러자 유대 사람들은 서로 논란을 하면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에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을까?"
5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다.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 양식이요, 내 피는 참 음료이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 때문에 살 것이다.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것은 너희의 조상이 먹고서도 죽은 그런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 이것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
내 살은 참 양식이요, 내 피는 참 음료이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고 소개하시면서, 이 생명의 빵으로 인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을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하십니다. 지난 시간 생명의 빵을 먹는다는 의미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받아들임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인 51절부터는 '살'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생명의 빵이 예수님 자신의 구체적인 몸과 관련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빵이 다름 아니라 진짜 예수님의 살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53절에서는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살만 먹는 게 아니라 피까지도 마신다 말씀하시기에, 피를 뚝뚝 흘리며 생육을 뜯어먹는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이 표현으로 인해 초대교회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52절을 보시면, "그러자 유대 사람들은 서로 논란을 하면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에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을까?"라고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실제로 사람의 살과 피를 먹는 끔찍한 행위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식인종도 아니고 정신이 나간 이상한 종교 집단이 아닌 이상 어떻게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충격적이었기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반발하여 배척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살과 피로 지칭되는 예수님의 육신을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살이라는 말 그대로 육체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육체와는 완전히 다른 무엇일까요? 일단 공생애를 살아가실 때의 예수님의 육체는 우리와 같은 육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갑자기 나타나셔서, 의심하던 도마에게 내 몸을 만져보라고 하셨던 그 몸은 도대체 어떤 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물리 법칙을 어기며 벽을 통과하는 육체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살과 피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효과가 무엇인지는 분명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생명을 잇대어 살아가게 해주는 유일한 통로인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일종의 매개체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살과 피는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인간이신 이유와도 같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보이지 않을 것이고, 인간이라면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보려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임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맛보고 경험하여, 삶으로 살아내는 실천적 행동까지를 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대로 실재로 일어나는 사건, 즉 성육신의 사건을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나의 살과 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믿음으로 이러한 변화가 진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의 생각이 변하고 행동이 바뀌고, 더 나아가 체질이 바뀌고 성정이 변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많은 경우 사람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며 자신의 몸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바꾼 사람은 그 인생의 운명도 변한다고 봅니다.
역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먹는 음식이 예수의 살과 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밥을 먹잖아요. 그 밥이 예수의 살과 피라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것처럼, 우리가 먹는 일용한 양식이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내 힘으로 일해서 돈 벌어서 장보고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이걸 내가 모든 것을 감당하여 만든 내 음식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밥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다', '예수님의 살과 피다' 이렇게 선언하고 밥을 먹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믿음이 필요합니다. 식기도를 할 때에도, "하나님 먹을 양식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이걸 진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이 그냥 밥이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생각하면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때론 이런 생각이 바보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빵보고 예수님 살이라 하고, 포도주보고 예수님 피라 말하는 것이 미친 것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위대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고 맛보고 느끼는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바로 믿음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 얻은 중보적인 생명
5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마치 예수님 자신과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이걸 경험해 본 사람은 압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연합하여 접붙임 되면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서 생명이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54절과 55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 양식이요, 내 피는 참 음료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살과 피는 생명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몸을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생명을 생각할 때, 생물학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남녀가 사랑을 하여 자손을 낳아서 자라나 계속해서 번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연적인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통해서 얻은 생명은 다릅니다. 이것을 중보적인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인해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옴으로 얻게 되는 생명입니다. 우리는 생명이 두 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은혜인 이유가 무엇이냐면, 단순히 부모로부터 자연스럽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값을 치르고 산 획득한 생명입니다. 값을 치른 생명이기에, 무엇보다 생명에 대한 책임이 갑절 이상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닙니다. 내 맘대로 막 사는 게 아니라 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간다고 하지만 그 생명이 내 것만이 아닙니다. 이 생명의 주인이 따로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는 내게 주어진 생애를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강령에 따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새롭게 받은 생명을 죽이지 않고 잘 살려 계속 이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51절을 보시면, “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라는 문장에서 주다는 동사를 현재가 아니라 미래 시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앞으로 계속해서 빵이 주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의 빵을 우리가 계속 먹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우리 속에는 생명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내 빵을 먹는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신다는 표현이 수차례 반복되는 것도 이 행위를 계속해야지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머무르다, 메노μένω
그렇다면 영적인 생명을 이어나가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보이는 것으로 눈앞에 있어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56절 말씀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여기서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개역개정 번역에 따르면 “내 안에 거하다”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예수님과 언제나 함께 거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영적 생명을 이어가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거하다'라는 헬라어 동사 메노μένω는 '머무르다'로도 번역되며, 요한복음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요한복음 1장 32절에서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와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재하시는 방식이 바로 머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15장 포도나무 비유에서 머무르다는 동사 메노μένω는 자주 사용됩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을 보시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머무르는 것의 핵심을 알 수 있는데, 바로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다"라고 했습니다. 이 거함은 구약의 표현으로 하면 장막을 친다는 것입니다. 장막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입니다. 말씀이 단지 문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문자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우리에게 그 영을 전하는 매개체로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는 것이 마치 우리 마음 속에 장막을 쳐서 그 장막 안에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살다, 조ζῶ
이처럼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 속 장막에 거하시는 삶을 영생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생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보다 생생하게 말씀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으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정말 계십니다. 육체의 살과 피는 결국 썩어지고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영은 변함없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이 문자로 죽은 것 같지만, 말씀으로 하나님의 영을 경험한 사람은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생생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역사하시는구나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57절을 보시면,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 때문에 살 것이다.” 여기서 ‘살다’라는 뜻인 헬라어 동사 조ζῶ가 세 번 등장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살아계시고, 우리도 예수님으로 인해서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핵심은 하나님의 영이 생명처럼 살아서 계속 전해 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은 생명 그 자체이기도 하고,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부, 성자, 그리고 우리가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영이 결국 성령이기도 한 것입니다. 육체적인 생명은 단일한 개별적 생명체가 물리적인 삶을 지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개별적 생명이 중요한 것입니다. 개별적 생명이 사멸하지 않고 지속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반면에 영적인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함께 형성해 가는 생명 공동체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함께 생명의 교제를 나누는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생명은 공동체적 생명이 함께 이어져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식이 어릴 적에 부모가 그 안위를 늘 생각하는 같습니다. 서로의 생명이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후에는 반대가 되지요. 좋은 자식은 부모의 안위를 생각하여 자주 연락하며 돌보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이어져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서로를 돌보는 관계로, 서로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맺은 거룩한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언약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를 나의 백성으로 삼아 모든 걸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반대로 이스라엘이 해야 할 언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 언약을 지켜야 합니까? 내 삶이 나만의 단지 나만의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과 이어져 있기에, 나를 거룩하게 돌보는 것이 결국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의 삶만이 소중한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또 다른 생명인 타인의 삶도 소중합니다. 타인의 생명도 결국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해 나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타인의 생명을 인정하고 존귀히 여기는 자세는 너무나 마땅한 것입니다.
씹어 삼키다, 트로고τρώγω
영적인 생명을 이어나가는 방법과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이기도 합니다. 바로 먹다입니다. 그런데, 이 먹다는 동사가 한 가지 단어가 아니라 두 단어로 사용됩니다. 53절의 경우 헬라어로 ‘파고φάγω'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면, 54절 이후부터는 '트로고τρώγω'라는 단어가 쓰입니다. 파고φάγω는 끼니를 챙겨 먹는 전반적인 활동을 가리킨다면, 토로고τρώγω는 음식을 이빨로 잘라서 씹어 삼키는 구체적인 소리와 모습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이 그만큼 매우 실재적인 사건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게 된 것은 예수님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철저히 짓밟히고 찢겨서 죽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살을 갈아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 참된 생명을 함께 나누고 이어가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앞서 영적인 생명이 자연적인 생명이 아니라 중보적인 생명이라 했습니다. 누군가 값을 치른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생명을 값없이 은혜로 받았지만, 이후로 그 생명을 계속 이어가고, 그리고 그 생명을 누군가와 나누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육체적인 빵만 먹는 게 아니라 영적인 빵도 먹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단지 성실히 일하는 것만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육체의 빵을 얻기 위해 사용할 시간을 줄이고, 반대로 영적인 빵을 얻기 위해 사용할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빵을 조금 적게 거둘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과 생명이 연결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연약한 자를 위해서 나의 육체의 빵을 나눌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공적인 생명 연장 행위인 성찬
이처럼 육체의 생명을 지속하는데만 목적을 두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부단히 애를 써야 합니다. 육신을 지녔음에도 육체의 본성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기적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이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보시고, 하나님의 신비, 즉 하나님의 힘으로 이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행위를 성찬이라는 예전으로 행하여 기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찬이 율법적으로 받아드려 하나의 형식적인 예배 행위로만 생각한다면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설령 우리가 성찬의 의미를 다 헤아리지 못하더라도 예배 중 이루어지는 성찬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영적인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영적인 비밀이 각자 주어진 바 받게 되는 은사와 같은 사적인 능력이 아니라 공적인 능력이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각 지체로서 예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우리 모두의 정신과 육체가 공유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찬을 통해서 생명이 공유되고, 영이 공유되고, 믿음이 공유가 됩니다. 내가 믿지 못해도, 누군가가 믿었다면 모두의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행하지 않아도, 누군가 행하면 모두가 행한 것이 됩니다. 내가 깨닫지 못하더라도, 누군가가 깨달았다면, 이것은 모두의 깨달음이 됩니다. 따라서 영적인 생명을 이어가는 방법으로 사적인 것만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 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각자 삶 속에서 말씀을 읽으며, 성령으로 기도하는 개인적인 경건 생활을 충실히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공적 예배에서 성찬으로 주어지는 생명의 은혜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3절 이하를 보시면 바울은 성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으로부터 전해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바울은 예수님이 매번 성찬을 통해서 자신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을 상기시키며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강조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인 고린도전서 11장 26절을 보시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성찬을 끝까지 반드시 행하도록 권면한 것입니다. 성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하고, 어쩌면 근본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살과 피가 내 살과 피가 하나가 되는 신비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단순한 비유적인 표현을 넘어서, 그분과의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실재적인 연합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며, 생명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가 받은 영적인 생명을 지속시키는 근본적인 방식인 것입니다.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실재적인 사건이기에,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구체적인 행위로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 결과 예수의 살과 피가 내 살과 피가 되어 마치 하나가 되는 신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앞서 이것을 머물다, 살다, 씹어 삼키다는 세 가지 동사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것, 그분 안에서 머무는 것,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매일 힘써 지키고 행하여 그리스도의 몸 값으로 산 중보적인 생명을 잘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찬은 이 믿음을 공적으로 실천하는 행위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며 하나가 되는 신비를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누리는 영적 생명은 개인적인 경건 생활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나누는 성찬을 통해 더욱 확고히 이어집니다. 성찬은 단순한 예식이 아닌, 우리가 예수님과 그리고 교회 공동체와 깊이 연결되는 중요한 은혜의 통로이며,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굳건해지는 근본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경험하는 신앙이 주는 생명의 신비가 반쪽만 되지 않게 하길 바랍니다. 신앙의 사적인 책무만이 아니라 공적인 책무 역시 잘 감당하여 더 온전한 은혜를 누릴 수 있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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