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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5장 21절-43절 믿을지 안믿을지 그것이 문제이다

by 알렉스강 2024. 6. 28.

https://www.youtube.com/watch?v=BLMj7VH8o2w&t=1661s

 

 

마가복음 5장 21절-43절 새번역

 

21 예수께서 배를 타고 맞은편으로 다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예수께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바닷가에 계시는데,

22 회당장 가운데서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23 간곡히 청하였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 살려 주십시오."

24 그래서 예수께서 그와 함께 가셨다. 큰 무리가 뒤따라오면서 예수를 밀어댔다.

25 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자가 있었다.

26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27 이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여 들어와서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그 여자는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29 그래서 곧 출혈의 근원이 마르니, 그 여자는 몸이 나은 것을 느꼈다.

30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몸으로 느끼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아서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제자들이 예수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셨다.

33 그 여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므로,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께로 나아와 엎드려서 사실대로 다 말하였다.

34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35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말하였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

36 예수께서 이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서,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밖에는, 아무도 따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며 떠드는 것을 보시고,

39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40 그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내보내신 뒤에, 아이의 부모와 일행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달리다굼!"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 하는 말이다.)

42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엄하게 명하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푸는 열쇠 믿음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며 네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고, 네 가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네 가지 이적 중 세 번째와 네 번째에 해당하는 사건으로,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통받던 여인을 치유하시고, 열두 살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놀라운 이적을 연이어서 보이신 것은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실전에서 깨닫고 경험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고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단연코 믿음입니다.

 

지난주에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풍랑으로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믿음이 중요한 문제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요. 예수님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믿었지만, 그 예수님이 나를 도와주실지 여부는 확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풍랑이 일어날 때,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주무시고만 계시니, 예수님이 아무리 강한 들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빠지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조차 흔들리는 것입니다.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했던 예수님의 믿음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도와주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운 사람에게 떡 하나 더 주고, 사랑하는 자에게는 시험을 주시는 분입니다. 친한 사람일수록 섭섭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죠. 그런데도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의지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짝사랑은 원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입니다. 우리는 필요하면 하나님 찾지, 필요하지 않으면 찾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가 변화되어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짝사랑하듯, 우리도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의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보이지 않던 하나님 나라가 보이는 것입니다.

 

체면을 내려놓은 회당장 야이로

그럼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건너편 사역을 마치고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시자, 큰 무리가 모였습니다. 그때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가버나움 회당장인 야이로였습니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자신의 어린 딸이 위중한 상태이니 오셔서 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야이로는 갈릴리 지역의 바리새인 중 유명한 랍비였습니다. 30대 초반의 아직 정체가 온전히 증명되지 않은 목수 출신의 젊은이에게 바싹 엎드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야이로가 예수님께 엎드린 이유는 단 하나, 예수님이 죽음의 위기에 처한 딸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간절히 부탁한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유교의 영향으로 체면 문화가 강합니다. 나이나 신분에 걸맞은 행동을 하도록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교육받고,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민족적 기질로 자리가 잡혔습니다. 그래서 수치심이 많고 자존심도 강합니다. 체면에서 ‘면’ 자는 한자로 얼굴을 뜻합니다. 한국 사람은 성형수술은 많이 하면서, 자기 얼굴이 깎여 체면을 구기는 일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얼굴이 좀 깎여도 괜찮습니다. 신앙의 길을 걸어가려면, 얼굴이 좀 깎일 일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랑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부끄러움을 각오하는 일입니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둔 부모는 자녀의 장애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 때문에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겪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있을 보상을 기대해서 신앙으로 인한 핍박을 견디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보상은 따라오는 것입니다. 신앙의 이유로 손해를 보고, 세상으로부터 미움받는 것을 감당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이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야이로가 사람들의 눈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니면 야이로의 행동이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여인

예수님은 야이로의 요청을 들어주시고 그 딸을 살리기 위해 야이로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주변의 무리도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하고 함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불쑥 예상치 못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한 여인이었습니다. 여자의 하혈이 계속되는 유출병이라 불리는 병으로 당시에는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나병과 동급으로 부정하다 여겨진 병입니다. 12년 동안 온갖 방법을 찾아다녔지만 병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었습니다. 치료비로 재산을 다 탕진했고, 율법에 따라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고립된 삶을 살았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으로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있었습니다. 절망감과 소외감에 빠져 어쩌면 죽을 날만을 기다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로로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가면 심한 질병이나 귀신 들린 사람들도 치유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혈루증 여인은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단 한 가지는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사실 이 여인은 12년간 모든 것을 다 탕진했기에, 이제는 가진 것도, 힘도,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불러 자기 집으로 초대할 수도 없고, 만나서 고쳐달라고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몰래 들어가서 예수님 옷에 손만이라도 대어 보면 혹시 낫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거라도 하고 죽으면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고 믿음만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순수한 믿음의 능력

우리의 신앙이 왜 무기력할까, 왜 우리의 믿음이 능력이 없을까, 생각해 본 적 있으십니까? 그렇게 믿자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많은 경우 신앙생활이 오래되면, 되려 믿음이 약해집니다. 대충 타협합니다. 그냥 될 대로 되겠지, 이렇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왜 믿음이 없겠습니까? 다른 것과 함께 걸쳐놓은 채, 그냥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믿음만이 있어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게 단순히 절박하다고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간절하다고 말하면서, 다른 것에 양다리를 걸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섞이면 믿음이 일으키는 능력이 약해집니다. 하나님이 중심을 보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혈루증 여인은 자신의 부정함을 숨기고 많은 사람을 비집고 들어가서 결국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그 순간 병이 나았습니다. 혈루증 여인의 믿음과 예수님의 생명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인간의 간절한 단 하나의 믿음과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과 자비가 스파크처럼 만나 불꽃을 내는 사건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혈루증 여인은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순간 자신이 병이 나았음을 확신했습니다. 이 확신은 여인에게만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셨습니다. 믿음은 믿음을 낳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생명력입니다. 믿음이 살아서 역동하는 이유는 그 전염력 때문입니다. 주변 사람이 믿지 않아도 내가 계속해서 믿음을 가지면, 결국 사람들이 믿게 됩니다.

 

믿음은 은혜의 통로이다

예수님도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시고, 누가 옷에 손을 대었는지 물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로 혼잡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고,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의아해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능력이 나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능력이 나갔다는 것은 능력을 전달하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도관으로 물이 흘러가듯이, 능력이 흘러가는 통로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 통로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의 통로가 열려야 은혜가 흘러갑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은혜에 대해 오해하는 것이 은혜가 공짜로 주어진다고 마냥 입만 벌리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는 게으른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 없이 무작정 행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어리석음을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려면, 올바른 목적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수조에 제대로 관을 연결해야 물이 나오는 것처럼, 분명한 목적과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옵니다. 그리고 믿음은 마치 낙수물이 구멍을 뚫는 것과 같습니다. 일관성을 가지고 한 방향으로 뜻을 두고 계속해서 반복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지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먹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관계를 이어준다

혈루증 여인이 자신이 치료된 것을 알았을 때, 예수님도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갔다는 것을 동시에 알았습니다. 믿음이 통로라고 한다면, 믿음은 누군가와 연결하고 이어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관계를 형성합니다. 믿음 없이 하나님을 만나면 결코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인데,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신뢰 속에서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고 깊어집니다. 믿음 없이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면, 세상에서 하는 활동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성경도 믿음 없이 읽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도 믿음 없이 하면 중언부언하는 것입니다.

 

사실 여인이 치료받은 것을 아셨더라도 예수님은 그냥 지나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굳이 멈춰서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기 직전이라 시간이 촉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은 소식을 들으시고 3일 후에야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멈춰서 여인과 대화를 나눈 것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계속 강조하지만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 나라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야이로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반드시 필요한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시간을 지체하면서 야이로의 믿음을 보고자 하셨습니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그동안 야이로의 집에서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이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맡기고 집으로 향해 갔습니다. 어차피 죽었으니, 딸을 떠나보내면서 예수님께 기도로 가족을 위로해 주시길 부탁하려 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장례식이 시작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 돌아가셨을 때, 영면에 들어갔다고 말하지요. 세상 사람들도 죽은 것을 잠자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신앙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는 것이나 죽은 것이나 똑같습니다. 잔다는 것은 이후에 깨어난다는 말이지요. 죽음이라는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바로 부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자, 집 안에 부모와 수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소녀를 살리신 방법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말 그대로 잔다고 생각하고 깨우신 것입니다. 일어나라고 하자, 야이로의 딸은 일어나 걸어 다닌 것입니다. 마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것과도 같습니다. 말씀으로 일어나라 하시니, 소녀가 일어나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병이 낫고 안 낫고,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다

누군가 병으로 고생할 때, 기도하면 과연 병이 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반드시 낫는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낫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병을 고치는 능력은 있지만, 과연 이 병을 고쳐주실지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병을 치료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이는 불신입니다. 병에 걸렸을 때, 삶을 포기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버렸어, 하나님은 나를 치료하시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믿지 않는 자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천지를 주관하시는 분임을 믿는다면, 당연히 하나님은 치료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치료해 주실지 여부를 떠나서 일단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병이 낫고 안 낫고는 모르는 일입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병보다 무서운 것은 병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죽음이 주는 두려움입니다. 죽음은 순간입니다. 죽음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순간만 지나면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두려운 것입니다. 결국 죽음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몸이 낫는 것이나 영혼이 낫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몸이 아픈 것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고, 영혼이 병든 것도 결국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결국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몸도 치유되고 영혼도 치유됩니다. 그래서 모든 병은 믿음으로 나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셨을 때, 병이나 죄에서 놓이는 것은 결국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죽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일어서 걷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저앉지 마십시오. 불신이 오히려 사망입니다. 낙심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상의 메시지는 '죽었다', '안 된다', '사망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그 말에 붙잡혀 누워있거나 주저앉지 마십시오. 박차고 일어나서 달려가야 합니다. 절망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죽고 사는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인생에서 산다고 해서 답이 나오나요? 반대로 죽는다고 해서 다 나쁜 것일까요?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그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말씀대로 행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살려주십니다.

 

믿을지 안 믿을지 그것이 문제이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마지막에 로마로 가서 선교를 했다고 하지요. 당시 박해가 심해 주변의 권고로 몸을 피하려 로마를 떠났지만, 도망치던 중 예수님을 만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로마로 간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베드로는 처음에는 목숨을 부지하려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그 삶은 사실 살아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유명한 대사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가 생각이 납니다. 이 대사는 단순히 죽고 사는 선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느냐는 엄중한 질문입니다. 마지못해 사는 삶, 죽지 못해 사는 삶은 이미 그 가치를 상실해 살아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로마를 떠나던 길을 돌이켜 다시 로마로 향해 걸어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였습니다.

 

결국, 죽음을 피하려는 삶은 사실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살아있어도 죽음의 두려움에 꼼짝달싹하지 못하면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이 갈리는 갈림길에서 삶의 진정한 존재 가치를 찾기 위해서는 단연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없다면 두려움을 넘어서고 죽음을 이기는 선택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To believe or not to believe, that is the question.” 믿을지 안 믿을지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을 때에, 우리는 육신의 병도 고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영혼의 구원, 영적인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지 않고 있다가 육신도 죽고 영혼도 죽으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죽음의 갈림길에 누구나 결국에는 서게 됩니다. 그때 반드시 믿음을 지키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이 중요한 이유는, 세상과 구분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존엄함이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은 가진 하나님 백성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질병도 사망도  그 어떤 위협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면,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습니다. 그러면 아무 소용이 없어 길에 버려집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에서 믿음을 가진 자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으로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십시오. 그럴 때, 혈루증과 같은 치료 불가능한 질병에서도 치유받고, 심지어 죽음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경험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