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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룻기 4장 13절-22절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by 알렉스강 2024. 7. 13.

룻기 4장 13절-22절 새번역

 

13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 여인이 자기 아내가 되자, 그는 그 여인과 동침하였다. 주님께서 그 여인을 보살피시니,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14 그러자 이웃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자손을 주셔서,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늘 기리어지기를 바랍니다.

15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 아들 일곱보다도 더 나은 며느리가 아기를 낳아 주었으니, 그 아기가 그대에게 생기를 되찾아 줄 것이며, 늘그막에 그대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16 나오미가 그 아기를 받아 자기 품에 안고 어머니 노릇을 하였다.

17 이웃 여인들이 그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주면서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다!" 하고 환호하였다. 그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하였다. 그가 바로 이새의 아버지요, 다윗의 할아버지이다.

18 다음은 베레스의 계보이다.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회복은 희망을 낳는다

룻기는 절망으로 시작하여 소망으로 끝납니다. 죽음으로 시작하여 탄생으로 끝납니다. 이러한 대비 구도는 하나님을 떠난 자와 하나님께 돌아온 자의 삶을 분명하게 나타냅니다. 처음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 나오미는 자신의 인생을 쓰디쓴 마라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녀를 불쌍히 여기며 조롱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오미는 손자를 품에 안고 기쁨의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편과 두 자식을 모두 잃은 나오미의 쓰디쓴 인생을 놀랍게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나오미의 이름의 뜻인 기쁨을 다시 삶에 안겨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룻에게 아들을 주신 것은 나오미와 룻 두 사람만의 기쁨이 아니라, 온 마을에 기쁨과 감격을 가져다준 사건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회복을 보면, 희망이 생깁니다. 나도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이 확산되고 은혜가 사방으로 펼쳐집니다. 베들레헴에 불행한 여자가 나오미뿐이었겠습니까? 룻만 괴로웠겠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이 경우를 보고 희망이 생겼을 것입니다. 우리도 잘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이 되고, 삶을 이겨내고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회복은 희망을 낳습니다. 그리고 회복은 내 힘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나오미처럼 잃어버린 땅이 회복되고 죽은 아들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생명의 힘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 뒤, 영광의 부활을 볼 때, 우리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룻기는 다윗의 출생을 위한 서곡이다

보아스와 룻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이웃 여인들이 오벳이라 불렀습니다. 오벳은 ‘종’ 혹은 ‘섬김’이라는 뜻으로, 할머니를 잘 섬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오미가 그 이름을 수락한 것은 이 아이가 자라 여호와 하나님을 성실하게 섬기길 바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 기자는 오벳을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아버지로 소개합니다. 자식이 없었던 이방 여인을 통해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하며, 오벳이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됨을 말씀합니다. 룻기는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에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그 시대에, 보아스와 룻을 통해 태어난 오벳의 자손으로 난 하나님의 종 다윗의 출생이 영적 혼란과 어둠의 시기에 새로운 소망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유대 구전에 따르면, 사사기와 룻기는 사무엘이 썼다고 합니다. 이는 다윗을 설명하기 위한 글입니다. 다윗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보고 십자가를 붙잡고 좁은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결국 복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대표적인 모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통에는 고난을 붙잡고, 십자가를 붙잡는 자들이 있습니다. 룻기를 통해 다윗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봐야 합니다. 이는 룻기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구속사적 해석의 중요성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성경 해석의 구속사적 접근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구속사적으로 해석한 대표적인 예가 이삭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바치라고 명하셨고, 이삭은 나무를 지고 산을 올랐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신 모습을 예표 합니다.

 

이처럼 구약의 모든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형입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은 세례를, 광야의 40년은 성화의 과정을, 가나안 땅은 하나님 나라와 영적인 안식을 상징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구속사적인 관점을 적용하면, 룻은 인간을,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여 절망과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을 보여줍니다. 룻이 보아스를 통해 얻은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영생입니다. 영생은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현실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살아가는 모습이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 비해 내가 노력한 만큼 더 못 살 때가 많습니다. 이로 인해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성경의 해피엔딩은 영적인 성공을 의미한다

사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복과 우리가 생각하는 복은 다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복으로 여기지만,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믿고 세상적으로 잘 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나사로, 베드로, 바울 등 초대교인 대부분은 모두 세상에서 고난을 겪었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일이 잘 안 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습니다. 구약의 인물들이 고생 끝에 잘된 것을 보고 우리도 이 땅에서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사건과 인물은 모두 구속사적 모형입니다. 이들의 해피엔딩은 육체적인 성공이 아닌 영적인 성공을 의미합니다. 고생 끝에 이 땅에서 잘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꿈 깨십시오.

 

사실 많은 경우 고통은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비롯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보십시오. 우울할 이유가 없습니다. 고통의 임계체감 법칙에 따르면, 어느 정도 고통이 넘어서면 그 고통은 다를 바 없습니다. 진리를 깨달아야 고통이 사라집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며 행해야 합니다. 신앙은 내 뜻대로 하기를 기대하며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이방 우상을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보이는 형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힘 있고 부유한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리라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자신의 뜻대로 믿으려 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기복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자기 왕국을 세우려는 시도는 결국 하나님이 인생 중에 허락한 고난을 통해 부서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노력과 의지를 내려놓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베레스의 족보

오늘 본문을 보시면 마지막으로 족보가 소개됩니다. 족보에는 일반적으로 장자가 소개가 되지요. 그런데 마태복음에 나오는 유다지파의 족보를 보면 여인들도 5명 소개가 됩니다. 이들 중 4명이 오늘 나온 족보의 남자들과 관련된 여자입니다. 룻도 그 여인 중 한 명입니다. 그러니 매우 중요한 족보인 것이지요. 이 여인들의 공통점은 모두 하나같이 이 땅에서 온갖 수모와 고난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출신에 있어서, 유다 지파로 들어오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쉽지 않은 인생의 모진 고통 속에서도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먼저, 족보에서 베레스로 시작합니다. 베레스는 유다의 아들로 다말이 낳은 쌍둥이 중 하나입니다. 다말은 이방 여인으로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남편이 일찍 죽고 시동생인 오말과 계대결혼을 했지만, 오말은 아들을 낳으면 기업을 물려주어야 했기에 사정을 외부에서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악하게 보시고 그를 죽여버렸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 막내를 주지 않았고, 다말은 창기로 분장해 유다와 관계를 맺고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중 베레스가 형보다 앞서 나왔습니다. 이 사실만 보면, 다말이나 베레스는 처음에는 부끄러운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세상 기준으로는 결코 복을 받은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다말은 유다 지파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룻에게 다말의 복을 빌어주며, 다말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보아스는 이방 여인의 아들이자 남편이다

다음으로 족보에서 주목해야 할 사람은 살몬입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여리고성으로 보낸 정탐꾼 중 하나가 살몬이었다고 합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주고 여리고성을 함락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습니다. 라합은 기생, 당시 몸을 파는 여자였습니다. 가장 비천한 자였습니다. 하지만 여리고의 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고, 하나님 백성 편에 서서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적극적으로 정탐꾼을 도와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이후 라합은 정탐꾼 중 하나인 살몬과 결혼했다고 합니다. 라합이 살몬과 만나 낳은 아들이 보아스입니다. 보아스의 어머니가 라합이며, 아내가 룻입니다. 모두 이방 여인입니다. 보아스는 이방 여인의 아들이자 남편인 것입니다. 그러니 룻이 낳은 아들 오벳은 유대의 피가 4분의 1만 섞여 있습니다. 혈통적으로 본다면, 정통 유대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혼합된 혈통을 사용하셨습니다.

 

다음은 룻의 아들인 오벳입니다. 룻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오벳 대신 오벳의 손자인 다윗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족보에는 나오지 않지만,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낳은 아들 솔로몬을 통해 유다 지파의 계보를 이어갑니다. 밧세바는 원래 다윗의 충신 우리아의 아내였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불륜을 숨기기 위해, 살인교사로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밧세바를 취한 뒤 첫째 아들은 죽었지만, 그 뒤에 태어난 아들이 솔로몬입니다. 윤리적으로 본다면, 솔로몬은 왕 위를 이을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솔로몬을 여러 아들들 중에서 왕이 되게 하셔서 다윗의 계보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을 위한 것이다

이처럼 다말은 시아버지와 근친 관계를 맺고, 라합은 창녀였으며, 룻은 모압의 이방 과부이고, 밧세바는 간음한 여인입니다. 어찌 되었든지, 이 여자들은 모두 온갖 부끄러움과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자신의 출신이나 외부의 시선을 게이치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결국 침노하는 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고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온갖 부끄러움과 눈물, 희생과 수고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침노하는 사람의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다말과 라합, 룻은 모두 침노하는 자들입니다. 룻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고 본인이 선언하며, 자신을 떠나보내려는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더는 말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대응했습니다. 자신은 이방 여인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임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비천하고 뭔가 부족한 이방 여인들이 유다 지파의 족보에 들어갔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들을 위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다말, 라합, 룻, 밧세바와 같은 사람들도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혈통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고 출신이나 윤리적으로도 아무런 하자가 없는 자가 합당한 부와 지위와 명예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찌꺼기 같고, 버려진 돌과 같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 자랑할 것 없는 인간의 가계와 족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이나 집안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는 착각입니다. 그들의 윗대까지 올라가 보면, 많은 경우 정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돈을 벌어 부자가 되기 위해 사기를 치고, 다른 사람들을 착취했으며,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몇 대만 올라가서 살펴보면 엉망진창일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족보와 가문에는 이러한 악한 저주가 흐릅니다. 어떤 집안에는 흐르고, 어떤 집안에는 흐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집안에는 저주가 흐릅니다. 특별한 죄 때문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원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는 사망과 죄가 흐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 저주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끊을 수 없습니다. 신령한 목사의 안수 기도나 은사 받은 부흥사의 축복 기도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고 세상 모든 법을 다 지키고 다고 해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육신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는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룻도 모압 이방 여자로서 저주가 있었습니다. 이 저주를 끊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것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룻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인 보아스의 옷자락 아래까지 나아갔습니다. 옷자락이 덮인 자리가 바로 은혜의 자리로 구원받는 자리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누리는 구속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여 양자 됨으로 하나님의 혈통이 되자

성경이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누리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편입되는 것입니다. 바로 양자 됨입니다. 혈통적으로는 족보에 들어올 수 없으므로, 입양이라는 방식밖에 없습니다. 입양은 영적으로 건너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의 족보에서 하나님 나라의 족보로 건너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당시 마지막 열 재앙인 장자의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이 양의 피로 인한 대속적 결과가 유월을 통한 양자 됨입니다. 애굽의 노예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따라서 문설주에 발린 양의 피가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저주의 운명을 축복의 운명으로 바꾸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집안만이 저주를 피해 갔듯이, 내가 세상을 선택할지 하나님을 선택할지, 분명히 결정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부적처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이 바로 유월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이 내 운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선택할 때, 육체의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혈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 혈통이 좋아도 결국 저주와 사망과 죄의 혈통일 뿐입니다. 결국에는 땅에 저주를 피하지 못해 흙으로 돌아갈 인생일 뿐인데, 십자가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혈통을 받는 영적인 지혜를 가지길 바랍니다.

 

십자가를 선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혈통으로 바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게 됩니다. 모든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른 것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망가진 죄인이고 쓰레기 같은 죄인인데, 어떻게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업으로 삼은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가장 큰 복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보여주신 좁은 길로 걸어가십시오. 이방 여인들이 선택했던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럴 때, 세상에서 저주받은 혈통에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의 혈통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