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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룻기 3장 1절-18절 섭리를 따라 순종하고 책임을 다하면 안식에 이른다

by 알렉스강 2024. 7. 12.

룻기 3장 1절-18절 새번역

 

1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에게 말하였다. "얘야, 네가 행복하게 살 만한 안락한 가정을, 내가 찾아보아야 하겠다.

2 생각하여 보렴. 우리의 친족 가운데에 보아스라는 사람이 있지 아니하냐? 네가 요즈음 그 집 여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잘 들어 보아라. 오늘 밤에 그가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부를 것이다.

3 너는 목욕을 하고, 향수를 바르고, 고운 옷으로 몸을 단장하고서,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거라.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마칠 때까지, 너는 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4 그가 잠자리에 들 때에, 너는 그가 눕는 자리를 잘 보아 두었다가, 다가가서 그의 발치를 들치고 누워라. 그러면 그가 너의 할 일을 일러줄 것이다."

5 룻이 시어머니에게 대답하였다. "어머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다 하겠습니다."

6 그는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가 시킨 대로 다 하였다.

7 보아스는 실컷 먹고 마시고 나서, 흡족한 마음으로 낟가리 곁으로 가서 누웠다. 룻이 살그머니 다가가서, 보아스의 발치를 들치고 누웠다.

8 한밤중이 되었을 때에, 보아스는 으시시 떨면서 돌아눕다가, 웬 여인이 자기 발치께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9 "누구요?" 하고 물었다. 룻이 대답하였다. "어른의 종 룻입니다. 어른의 품에 이 종을 안아 주십시오. 어른이야말로 집안 어른으로서 저를 맡아야 할 분이십니다."

10 보아스가 룻에게 말하였다. "이봐요, 룻, 그대는 주님께 복받을 여인이오. 가난하든 부유하든 젊은 남자를 따라감직한데, 그렇게 하지 않으니, 지금 그대가 보여 준 갸륵한 마음씨는, 이제까지 보여 준 것보다 더욱더 값진 것이오.

11 이제부터는 걱정하지 마시오, 룻. 그대가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소. 그대가 정숙한 여인이라는 것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소.

12 내가 집안간으로서 그대를 맡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소. 하지만 그대를 맡아야 할 사람으로,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한 사람 있소.

13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고, 날이 밝거든 봅시다. 그가 집안간으로서 그대를 맡겠다면, 좋소.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지 않겠다면, 그 때에는 내가 그대를 맡겠소. 이것은 내가,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오. 아침까지 여기 누워 있으시오."

14 룻은 새벽녘까지 그의 발치에 누워 있다가, 서로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운 이른 새벽에 일어났다. 이것은 보아스가, 그 여인이 타작 마당에 와서 있었다는 것을 남들이 알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15 보아스가 말하였다. "걸치고 있는 겉옷을 이리 가지고 와서, 펴서 꼭 잡으시오." 보아스는, 룻이 겉옷을 펴서 잡고 있는 동안, 보리를 여섯 번 되어서 그에게 이워 주고는 성읍으로 들어갔다.

16 룻이 시어머니에게 돌아오니, 시어머니가 물었다. "얘야, 어찌 되었느냐?" 룻은 그 남자가 자기에게 한 일을 시어머니에게 낱낱이 말하고,

17 덧붙여서 말하였다. "여섯 번이나 되어서 준 이 보리는, 어머님께 빈 손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바로 그가 손수 담아 준 것입니다."

18 그러자 시어머니가 일렀다. "얘야, 일이 어떻게 될지 확실해질 때까지, 너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거라. 아마 그 사람은 지금쯤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이 일을 마무리 짓는 데, 오늘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인생은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너무 빨라도 안 되고 늦어도 안 됩니다. 가장 적절한 때, 최선의 방식으로 일을 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정교한 사람이라도 정확하게 맞추기는 어렵습니다.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오히려 우연히 한 것이 딱 맞아떨어질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인생의 타이밍은 우리가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맞추십니다. 섭리에 따라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즉각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결과를 도출합니다.

 

이삭 줍기가 끝나갈 무렵, 나오미는 룻에게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근본적인 대책을 찾고자 룻과 보아스를 결혼시키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룻이 효심으로 감동하여 나오미가 이제야 생각하고 결단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나오미는 룻과 보아스가 처음 만날 때부터 이미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적절한 때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삭줍기가 끝나갈 무렵인 곡식을 타작하는 날입니다. 이는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이 룻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섭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동안 룻은 성실하게 이삭줍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기회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요? 룻이 아닙니다. 섭리주이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때를 정하시고 나오미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섭리는 안식으로 인도한다

1절을 보면, 나오미가 룻을 위해서 구하고자 한 것은 안식할 곳입니다. 이처럼 섭리는 우리를 안식으로 인도합니다. 안식은 세상의 풍요와 안전이 아닙니다. 세상의 풍요와 안전은 순간 만족할 수 있으나 영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는 안식은 완전함입니다. 하나님은 6일째 창조하신 후 7일째 안식하심으로 창조를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안식만이 완전하고 모든 것을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가 이르게 되는 안식이 하나님 백성에게는 가장 좋은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머물러 하나님 날개 그늘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 고향을 버려두고 하나님 백성이 살아가는 베들레헴으로 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나오미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당시 타작은 주로 밤에 이루어졌습니다. 타작이 끝나서 보아스가 혼자 쉬고 있을 때 보아스에게 접근하라고 지시합니다. 룻에게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입은 후, 보아스가 누운 곳을 확인하여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그 자리에 가서 발치의 이불을 들추고 누우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오미가 쓴 방법은 불법이 아니라 당시 사회적으로 인정된 관습입니다. 룻이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추고 가만히 누운 것은 일종 결혼을 제의한 것입니다. 룻은 아무에게나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친족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의무를 행사하도록 기회를 준 것입니다. 계대결혼이라는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한 것입니다.

 

섭리를 따라 안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때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룻에게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방 여자에다 젊은 과부이기도 한 룻이 결혼한 남자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밤에 찾아가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 만한 일이었습니다. 부잣집 늙은이를 찾아가니 돈만 탐내는 여인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일이 잘못되면 보아스에게 음란한 여인이라 오해받아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의 접근을 불순하게 여길 가능성도 있었지만, 나오미는 이 계획이 룻에게 안식과 복을 가져다줄 돌파구라고 믿었습니다. 룻은 나오미의 계획에 순종하며,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룻의 이러한 결단은 나오미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룻이 하나님의 섭리를 따른 것입니다. 지난번 말씀드렸듯이 나오미는 하나님의 섭리를 상징합니다. 룻이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를 신뢰했기에 나오미의 뜻을 따르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한 것입니다. 그리고 룻은 인간의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을 상징합니다. 룻은 나오미를 따라 이방 땅으로 오면서 매순간마다 선택의 순간마다 책임을 지고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순종인 것입니다. 룻의 순종은 하나님의 섭리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때로는 우리에게 위험을 감수하고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들을 맞이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적극적인 선택과 책임을 행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이 일이 하나님의 안식으로 가기 위함입니다. 섭리로 안식에 이르는 길에는 세상으로부터의 위협이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감내해야 합니다. 용기가 필요하고 순종이 필요합니다.

 

섭리를 깨달을 뿐만 아니라 순종해야 한다

신앙에 있어서 섭리를 알아차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즉각 반응하여 순종으로 행동하는 데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신앙은 단지 지식이나 경험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지식과 경험이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순종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순종하지 못하며 두려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순종을 하려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힘들기에 순종은 어렵습니다. 그러면 룻은 어째서 순종을 잘할 수 있었을까요? 룻은 나오미에 대한 긍휼에서 순수했습니다. 결단에 있어 단호했습니다. 신뢰에 있어 철저하며, 행동에 있어 우직했습니다. 룻이 순종할 수 있었던 힘은 이러한 단순함에서 나왔습니다. 이 단순함이야말로 룻이 가진 믿음입니다. 그 믿음의 고백을 1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는 매우 주체적인 자기 결단과 선택이 있었습니다. 이게 룻의 신념이자 인생 철학입니다. 바로 룻의 소명이 된 것입니다.

 

교회를 다는 사람 중에도 불신자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실적 장애 앞에서 크게 좌절하여 하나님께 원망만 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자입니다. 믿음이 필요한 때는 고난의 때이지 평안할 때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신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는 항상 존재합니다. 중병으로 운신이 어려운 경우나 현실적 방안이 완전히 고갈된 상황이 아닌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어려운 상황에 두는 이유는 그 상황에서 신자가 믿음으로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면, 처음에는 하나님께 한탄하고 원망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회상하면서 평강과 소망을 회복하고 감사와 찬양으로 마무리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부부는 생리적으로 임신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지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기에 믿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임신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계속해서 잠자리를 가졌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고 행동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불가능하다고 가만히 있었다면, 하나님이 이삭을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인생을 주관하신다는 진리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나에게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주시리라 믿고 나아가 행동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내용이 이루어지든 거절되든지 간에, 우리의 믿음은 전지전능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순종을 필요로 합니다. 믿음은 순종의 실천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

룻은 나오미의 지시대로 행동했습니다. 보아스가 곡식단 더미 옆에 누운 것을 확인하고, 발치의 이불을 들추고 눕습니다. 보아스가 깨어나 룻을 발견하고 놀랍니다. 9절에서 개역개정 번역으로 보면, 룻은 "당신의 여종 룻입니다.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먼저 '옷자락'입니다. 이 말은 ‘여호와의 날개’와 연관이 있습니다. 룻기 2장에서 보아스는 룻을 가리켜 ‘여호와의 날개 아래로 보호받으러 온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방 여인이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복된 인생으로 살아가도록 빌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옷자락'이란 말과 '날개'란 말은 모두 히브리어 'כָּנָף(카나프)'에서 왔습니다. 2장에서 ‘카나프’를 ‘날개’라 번역했고, 3장에서는 ‘옷자락’이라 번역한 것입니다. 보아스의 옷자락이 바로 하나님의 날개인 것입니다. 룻이 여호와의 날개 아래로 찾아온 것이 보아스의 옷자락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덮다'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를 속죄소로 덮어 두도록 하셨습니다. 지성소의 언약궤를 덮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심지어 제사장이라도 그 앞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의 뚜껑인 속죄소로 덮었습니다. 그 속죄소가 바로 시은좌라고 해서 구속의 은혜의 자리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일 년에 한 차례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에 번제로 드린 양의 피를 일곱 번 뿌려서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덮어야 했습니다. 룻이 옷자락으로 자신을 덮어달라는 요청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기를 원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시편 32편 1절과 2절 말씀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로 허물과 죄가 덮인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마음에 간사함이 없다고 합니다. 마음에 속임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덮는 사람은 거짓과 속임수로 불투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덮여진 자는 정직하고 마음이 청결한 것입니다.

 

내 딸아 너는 현숙한 여인이다

우선 보아스는 룻을 안심시킵니다. 10절에서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며 축복합니다. '내 딸'이라 함은 룻과 보아스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가 아닙니다. 애정의 표현입니다. 이 호칭에서 이미 보아스는 룻의 제안을 수락한 것입니다. 그리고 룻이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크다고 칭찬했습니다. ‘나중 베푼 인애’란 어머니를 봉양할 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위해서 기업을 잇기 위해 이렇게 나이 든 보아스와 결혼까지 하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룻의 선택과 책임, 그리고 순종은 바로 룻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보아스는 룻을 현숙한 여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쉐트 하일(אֵשֶׁת חַיִל)'은 본래 힘 있는 여자, 능력 있는 여자를 의미합니다.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지혜롭게 행동하여 사람들에게 감화력이 있는 여인을 가리킵니다. 잠언 31장에서 현숙한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합니다. 현숙한 여인은 얼굴이 예쁜 여자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살림을 잘하는 맏며느리감입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여인을 가리킵니다. 보아스는 룻의 성실함에 대하여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안다"고 말했습니다. 보아스는 이미 룻이 밭에서 쉬지 않고 열심히 땀 흘려 이삭줍기 하는 모습을 다 보았습니다. 게다가 룻이 시어머니를 극진히 섬기는 것을 동네 사람들도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섭리를 따르면 순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룻의 제안을 수용한 보아스는 함부로 결정하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문제가 없도록 상황을 살핍니다. 먼저 청혼에 대해 조건부 수락을 했습니다.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다면서, 아침이 되면 그를 불러서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감당할지의 여부를 따져보자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가 감당하겠다면 그가 룻의 남편이 될 것이고, 만일 그가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자신이 모든 것을 담당하겠노라고 말합니다. 차후에 생길 오해나 법적인 문제를 확실히 하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라도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아스는 율법에 따라 순리를 따르며 일을 처리해 나갔습니다.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무리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룻이 새벽까지 타작마당에 있다가 사람들이 잠든 때 몰래 빠져나가도록 했습니다. 불필요한 오해가 없도록 함입니다. 그리고 룻을 돌려보낼 때는 겉옷에다가 보리를 여섯 번 퍼서 잔뜩 보냈습니다. 이는 나오미에게 “내가 당신의 뜻을 잘 이해했습니다”라는 답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보리를 담은 횟수인 숫자 육은 사람과 짐승의 숫자로 불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여섯 번 담은 것은 이 일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마지막까지 이 일을 책임지고 마무리한 다음에 나머지 보리 한 되를 담아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6년은 봉사와 수고의 기간이며 7년째는 안식과 해방의 순간입니다. 따라서 보아스는 룻에게 6번 보리를 되어 줌으로써, 수고와 노역의 긴 기간이 이제 다 되었음을 암시한 듯합니다. 이제 곧 안식이 멀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선택이나 운명도 결국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

룻으로부터 간밤에 일어난 일의 시종을 들은 나오미는 룻에 대한 보아스의 호의와 결심을 확신했습니다. 보아스의 신실한 인격으로 보아 조만간 약속을 이행하리라고 믿었습니다. 더 이상 다른 계획을 세우거나 안달할 때가 아님을 알았고, 오직 보아스의 조처를 기다리는 것이 최대로 현명한 방법임을 알았습니다. 나오미는 확신 있는 목소리로 룻에게 가만히 기다리라고 일렀습니다. 섭리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알리며 단지 하나님이 하실 일을 가만히 보고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일의 결국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진 오랜 신앙의 격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잠언 16장 1절과 33절의 말씀입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사람의 선택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운도 결국 하나님의 섭리를 앞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후 보아스는 자기가 해야 할 바를 정확하게 알고 신속하게 일을 진행합니다. 모든 것이 다 준비되고 하나님의 때가 이르자, 단 한나절 만에 모든 일이 아무런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순식간에 진행되었습니다. 이처럼 섭리는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때가 되면 순식간에 이루어집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최선의 노력으로 다한 후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염려와 불안에 빠져 있지 말아야 합니다. 불순종하거나 무책임하고 게으르며 불평하는 인생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열매 맺는 신앙생활의 3단계

빌립보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일반화하여 단순화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본문과 사도 바울의 권면을 통해서 열매맺는 신앙 생활을 세 단계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첫 번째, 기도를 통해 내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섭리를 깨달아합니다. 이게 안 되면 시작을 못합니다. 두 번째, 육신을 거스르고 섭리를 따라 순종할 수 있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섭리를 따라가는 것은 때론 위험하기에 용기가 필요합니다. 육신의 본성이 가로막기도 합니다. 내 뜻을 이루어 달라 부르짖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부르짖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을 가지고 내 모든 의지를 다해서 노력하고 책임을 다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안식에 이르게 됩니다. 간단한 원리이지만, 이를 행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믿음의 길을 기쁨으로 기꺼이 걸어가시는 모두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