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룻기

룻기 2장 18절-23절 선택, 섭리, 은혜

by 알렉스강 2024. 7. 11.

룻기 2장 18절-23절 새번역

 

18 룻은 그것을 가지고 성읍으로 돌아갔다. 룻은 주워 온 곡식을 시어머니에게 내보였다. 배불리 먹고 남은 볶은 곡식도 꺼내서 드렸다.

19 시어머니가 그에게 물었다. "오늘 어디서 이삭을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이처럼 생각하여 준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베푸시기를 바란다." 그러자 룻은 시어머니에게, 자기가 누구네 밭에서 일하였는지를 말하였다. "오늘 내가 가서 일한 밭의 주인 이름은 보아스라고 합니다."

20 나오미가 며느리에게 말하였다. "그는 틀림없이 주님께 복받을 사람이다. 그 사람은, 먼저 세상을 뜬 우리 식구들에게도 자비를 베풀더니, 살아 있는 우리에게도 한결같이 자비를 베푸는구나." 나오미가 그에게 말을 계속하였다.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운 사이다. 그는 집안간으로서 우리를 맡아야 할 사람이다."

21 모압 여인 룻이 말하였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가 데리고 있는 젊은 남자 일꾼들이 곡식 거두기를 다 끝낼 때까지, 그들을 바싹 따라다니라고 하였습니다."

22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일렀다. "얘야, 그가 데리고 있는 젊은 여자들과 함께 다니는 것이 좋겠구나. 젊은 남자 일꾼들에게 시달림을 받다가 다른 밭으로 가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23 그리하여 룻은, 보리 거두기뿐만 아니라 밀 거두기가 끝날 때까지도, 보아스 집안의 젊은 여자들을 바싹 따라다니면서 이삭을 주웠다. 그러면서 룻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선택과 섭리, 그리고 은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운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집니다. 앞으로 무엇이 될지,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서 궁금해합니다. 나의 미래가 결정되어 있는지, 아니면 나의 노력이나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지 고민하기도 합니다. "운칠기삼"이라는 말도 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세상의 답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선택의 긴장관계로 고민을 합니다. 내 인생의 운명이 나의 선택에서 결정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로 결정되는가? 만약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한다면, 나의 자의적인 선택과는 어떤 역학 관계를 가지는가? 예를 들자면, 나의 선택 중 옳은 선택도 있고 옳지 않은 선택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선택에 따라서 나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연이라 말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는 변수를 하나 더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선택과 노력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있다는 점입니다.

 

룻기를 깊이 묵상하면, 이러한 문제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룻의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룻은 원래 선택받은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 자였습니다. 자기 의지에 따라 선택한 것으로 그 인생이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이 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룻은 선택의 기준이 일반적인 세상의 기준과 달랐습니다. 자기의 이익이 아니라 시어머니 나오미가 믿는 하나님을 삶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룻이 자기 의지로 선택한 것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자와 같이 선택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룻의 선택은 인간의 선택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게 됩니다. 결국 룻은 자기 선택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여 하나님 백성이 누리는 은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 즉 섭리가 먼저이다

이게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룻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동기는 여러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섬기는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 마음이 가장 결정적이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게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좋기 때문에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역설적으로 말합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입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알고 보니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룻도 마찬가지입니다. 룻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 같지만, 하나님이 룻을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룻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이 룻을 먼저 사랑하셨기에, 룻이 나오미를 따라가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미시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한 순간에서는 내가 선택하는 것 같지만 거시적인 안목으로 한 사람의 인생 전체와 우주적인 차원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하시고 이끌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섭리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앞선 문제에 적용하면 선택보다는 섭리가 우선한다 말할 수 있습니다.

 

섭리의 은닉성

그런데 이 섭리가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결정해서 선택하고 책임지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섭리의 은닉성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난 후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시면, 그 때야 퍼즐이 맞추어지듯 보이기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섭리를 다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섭리가 보이면 이걸 우리가 감당하거나 소화하지 못해서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아니면 다 안다고 교만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사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모든 섭리를 다 풀 수는 없습니다.

 

오늘 밥을 먹었다고 해보십시오. 먹은 밥그릇에 들어간 어떤 쌀 한 톨이 내 입에 들어오기까지 그 과정을 다 알 수 있을까요? 그게 어떤 땅, 누구의 논, 어떤 벼에서 자라서 어떤 온도와 비와 바람의 영향을 받아서 쌀이 만들어지고, 그리고 수확이 되어서 탈곡되어서 유통과정을 거쳐서 마트에 있다가 내가 우연히 그걸 사서 집으로 와서, 어느 날에 그 쌀을 씻어서, 그 쌀을 씻었는데, 하수구에 빠지지 않고 다행히 건져서 밥으로 지어져 내 형제의 밥그릇이 아니라 내 밥그릇에 올려져서 내 입으로 들어왔는지 이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쌀 한 톨의 무게에 담긴 많은 이들의 땀방울과 그리고 쌀 한 톨에 생명 에너지가 담기기까지 있었던 전 우주적인 차원의 조화를 과연 다 알 수 있을까요?

 

쌀 한 톨의 경우도 그러한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인간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그 인간이 왜 이 땅에 태어나 존재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우리의 이성으로는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어느 순간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알고 지내고 듣고 알아왔던 후대 사람들은 그 인생을 평가할 때,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이러이러한 이유라고 결과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평가도 오해가 있을 수 있고 완전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함은 하나님의 뜻하심이 섭리 가운데 역사하여 그 사람의 인생에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 자에게 섭리가 나타난다

따라서 섭리란 감추어져 있다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길 원하실 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는 것을 하나님의 자기 현현, 즉 계시라고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천사나 하나님의 사자들이 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곤 했습니다. 여기서 천사나 하나님의 사자는 사실 하나님의 현현이나 계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사람 없이 하나님이 단독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시지는 않으십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불타지 않는 떨기나무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현현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성전에서 스랍들이 날아다니는 가운데 하나님 보좌에 임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을 선택하는 순간,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책임 있게 이행하려는 자에게 섭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가 따라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섭리는 보이지 않다가 하나님 뜻에 따른 계획과 필요에 따라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결코 섭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면, 그 섭리를 깨닫게 된 사람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나님이 정하신 것은 바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때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신명기 29장 29절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도 많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뜻이 담긴 율법을 밝히 나타내 주셨으니, 이것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자손은 길이길이 이 율법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숨겨진 섭리처럼 아무도 모르게 책임 있게 선택하라

신명기 말씀은 섭리를 깨달은 자의 모습을 말합니다. 섭리를 깨달은 자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법을 배웁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 뜻에 숨겨진 섭리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겠다고 나서서 나팔 불고 북 치고 장구 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자조차도 하나님의 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냥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는 섭리의 은닉성을 알고, 비밀스럽게 하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은닉된 섭리대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보아스는 은혜를 베푸는 방식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드러내 놓고 하지 않습니다. 받는 사람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젊은 일꾼들에게 곡식 다발에서 이삭을 조금씩 뽑아서 땅에 버리라고 합니다. 의도적으로 룻이 많이 주울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룻이 보아스가 배려해 주었다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당연히 몰랐습니다. 오늘 본문 다음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하루에 주울 수 있는 양을 몇 배나 넘어서는 무려 22킬로그램이나 되는 한 에바를 가져오자, 이것을 본 나오미는 바로 눈치를 챕니다. 이게 룻의 노력으로 한 게 아니라는 걸 압니다. 영적인 감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보아스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환하게 보는 것입니다. 이게 영안인 것입니다.

 

헤쎄드와 고엘

그래서 나오미는 20절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는 틀림없이 주님께 복 받을 사람이다. 그 사람은, 먼저 세상을 뜬 우리 식구들에게도 자비를 베풀더니, 살아 있는 우리에게도 한결같이 자비를 베푸는구나.” 아마도 보아스가 남편 엘리멜렉이나 그 윗대에게도 은혜를 베풀었는데,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보면 참 복받을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헤쎄드חֶסֶד라는 말이 나옵니다. 은혜야말로 보아스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앞서 보아스를 칭찬한 것도 결국 가장 중요한 이 말을 하기 위함입니다.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운 사이다. 그는 집안간으로서 우리를 맡아야 할 사람이다.” 새번역에서는 우리를 맡아야 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는 바로 기업 무를 자라는 말입니다. 바로 히브리어로 고엘גֹּאֲלֵ입니다.

 

기업 무를 자의 기업은 토지나 집과 같이 대대로 내려오는 재산을 뜻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근간이 되는 기업을 잃으면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까운 친척 중 한 사람이 잃어버린 기업을 회복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사람을 기업 무를 자, 즉 고엘이라 말합니다. 고엘의 책임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빚을 대신 갚아주는 것입니다. 빚 때문에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을 때, 대신 그 빚을 갚아 해방시켜 주어야 합니다. 둘째, 남에게 넘어간 토지를 돌려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하나님께 유업을 받은 것으로 사정상 어쩔 수 없이 팔더라도 반드시 다시 사 와야 합니다. 이걸 할 수 없다면, 가까운 가족이 대신해주는 것입니다. 재산 상의 문제만 있지 않습니다. 셋째, 죄의 값을 대신 갚아주기도 합니다. 죄를 지었으나 가난하거나 몸이 약하여 그 죄 값을 치를 수 없을 때, 가까운 친척이 벌금을 대신 갚거나 형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넷째, 원수를 갚아주는 일도 있습니다. 친족 중 한 사람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을 경우, 살해당한 자의 가까운 친척이 대신 복수를 해 주는 것입니다. 이를 피의 보복자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고엘 제도의 핵심인 계대결혼이 있습니다. 형제가 자식 없이 죽었을 때, 대를 이어 주기 위해 가까운 형제 순으로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기업을 잇게 하는 것입니다.

 

고엘 제도는 일종의 강한 책임의식입니다. 가문과 가족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엘이 헤세드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즉 누군가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반대로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룻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룻이 나오미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하겠다는 결정은 룻이 고엘을 행한 것입니다. 그러자 헤세드가 나오미에게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그 헤세드를 본 보아스는 자기 친족에게 고엘을 행한 것을 보고 헤세드를 받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룻에게 고엘을 행하고자 마음을 먹습니다. 그러자 헤세드가 룻을 통해서 나오미에게 흘러간 것입니다.

 

섭리와 관련된 영적인 원리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들이 있습니다. 첫째, 고엘과 헤세드가 항상 함께 하듯, 책임과 은혜는 항상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무책임하게 행동하면서 은혜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반드시 책임에 은혜가 따라오고, 은혜에는 책임이 따라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 나오미가 룻의 고엘과 보아스의 고엘의 연결자라는 사실입니다. 나오미를 통해서 헤세드가 룻과 보아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오미는 서로를 이어주는 연결자인데, 마치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게 섭리입니다. 나오미는 일종의 하나님의 섭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간 것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간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룻과 보아스는 각자가 고엘을 행하는데, 나오미는 중간에서 그 헤세드를 함께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엘은 헤세드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이렇게 헤세드가 움직이면 그 크기가 커져갑니다. 은혜가 전의될 때에 은혜가 배가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행할 때, 은혜는 더 풍성해져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결국 이 영적인 원리의 핵심을 우리 인생에 적용해 보자면, 그 어떤 선택이나, 내 의지와 상관없는 우연도 모두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놓여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분의 섭리로 우리 삶에 선하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는 이게 감추어져 있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령 최상의 선택을 해도 실패할 수 있고, 썩 좋은 선택이 아니더라도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에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실패하든 성공하든지 하나님의 섭리라는 안전망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가 주는 평안과 믿음입니다.

 

따라서 섭리를 믿는 사람은 발버둥 치지 않습니다. 내 뜻대로 안 되어서 어딘가에 갇혀 있으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라고 준 시간임을 알고 견디어낼 것입니다. 빡빡하게 살아가지 않습니다. 내 계획대로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막살지는 않습니다. 매 순간 최선의 역할을 하고 선택을 하며 노력을 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립니다. 결과가 내 기대만큼 나오지 않아도, 하나님의 섭리임을 인정하며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것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이유가 있겠지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기다립니다. 설령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모르지만 결국 나중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최선을 주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앞으로도 나도 주님께 나의 최고의 것을 드리길 원합니다. 더 책임 있게 더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로써 내 삶 전부를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섭리가 주는 달고 씁쓸한 맛을 깨달아라

이것을 깨닫고 누리는 것이 신앙에 있어 너무나 중요합니다. 섭리가 주는 기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이 섭리의 씁쓸함도 알아야 합니다. 나오미가 섭리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나오미의 이름의 뜻이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고생 끝에 고향에 돌아와서 자신을 마라, 씁쓸함이라 부르라 했습니다. 이처럼 섭리는 달지만은 않습니다. 씁쓸함이 있는 것입니다. 달고 씁쓸해야 진짜 맛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인생에서 섭리의 맛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37편 3절부터 5절까지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놀라운 시편 기자의 고백입니다. 주님의 자리에 섭리를 넣어보면, 더 와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신 섭리를 기쁘게 여기며 살아갈 때, 내 마음의 소원을 아시고 이루어주신다고 말합니다. 또 오해하지 마십시오.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나의 소원이 되어서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섭리는 우리에게 선택이나 책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삶의 선택과 책임을 온전히 감당할 때 반드시 그 이상의 은혜를 받을 것임을 말합니다. 세상의 욕망에 따라 선택하지 마십시오. 무책임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 생각을 관철시키려는 기복신앙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뜻을 행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참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가장 중요한 선택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결정하는 사람입니다. 이 선택의 열매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고, 믿는 자에게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