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룻기

룻기 1장 6절-18절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by 알렉스강 2024. 7. 9.

룻기 1장 6절-22절 새번역

 

6 모압 지방에서 사는 동안에, 나오미는 주님께서 백성을 돌보셔서 고향에 풍년이 들게 하셨다는 말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지방을 떠날 채비를 차렸다.

7 나오미가 살던 곳을 떠날 때에, 두 며느리도 함께 떠났다. 그들은 유다 땅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나섰다.

8 길을 가다가,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제각기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너희가, 죽은 너희의 남편들과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여 주었으니, 주님께서도 너희에게 그렇게 해주시기를 빈다.

9 너희가 각각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기를 바란다." 나오미가 작별하려고 그들에게 입을 맞추니, 며느리들이 큰소리로 울면서

10 말하였다. "아닙니다. 우리도 어머님과 함께 어머님의 겨레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

11 그러나 나오미는 말렸다. "돌아가 다오, 내 딸들아.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려고 하느냐? 아직, 내 뱃속에 아들들이 들어 있어서, 그것들이 너희 남편이라도 될 수 있다는 말이냐?

12 돌아가 다오, 내 딸들아. 제발 돌아가거라. 재혼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늙었다. 설령, 나에게 어떤 희망이 있다거나, 오늘 밤 내가 남편을 맞아들여 아들들을 낳게 된다거나 하더라도,

13 너희가, 그것들이 클 때까지 기다릴 셈이냐? 그 때까지 재혼도 하지 않고, 홀로들 지내겠다는 말이냐? 아서라, 내 딸들아. 너희들 처지를 생각하니, 내 마음이 너무나 괴롭구나. 주님께서 손으로 나를 치신 것이 분명하다."

14 그들은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울었다. 마침내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맞추면서 작별 인사를 드리고 떠났다. 그러나 룻은 오히려 시어머니 곁에 더 달라붙었다.

15 그러자 나오미가 다시 타일렀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저의 겨레와 신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의 뒤를 따라 돌아가거라."

16 그러자 룻이 대답하였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17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18 나오미는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을 보고,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19 그 두 사람은 길을 떠나서, 베들레헴에 이르렀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르니, 온 마을이 떠들썩하였다. 아낙네들이 "이게 정말 나오미인가?" 하고 말하였다.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들 마십시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도 괴롭게 하셨으니, 이제는 나를 마라라고 부르십시오.

21 나는 가득 찬 채로 이 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를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치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불행하게 하셨는데, 이제 나를 나오미라고 부를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22 이렇게 하여 나오미는 모압 여인인 며느리 룻과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왔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르렀을 때는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엘리멜렉, 하나님은 나의 왕

오늘 본문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소식을 듣고,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 며느리와 나눈 대화의 내용입니다. 두 며느리 모두 처음에는 시어머니와 함께 떠났지만, 결국 한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만류로 떠나고, 한 며느리는 끝까지 남아 함께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마치 한 편의 소설에 나오는 한 효부의 감동적인 일화처럼 보이지만, 이 가운데는 놀라운 복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를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언약 백성이 자기에게 주어진 기업을 떠나는 것은 불충실한 행동입니다. 배고픔을 피해 살고자 이스라엘을 떠나 모압으로 갔지만, 그래도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엘리멜렉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은 나의 왕'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름 하나만으로 신앙을 단정 짓기 어렵지만, 이방 땅에서 남편을 잃고 오랜 시간 고난으로 연단된 나오미의 믿음만큼은 진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두 아들을 잃는 치명적인 고통을 겪으면서도 신앙과 인격에 있어 매우 성숙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오미, 희락과 기쁨

나오미는 모압으로 이주하자마자 남편을 잃었습니다. 과부가 되어 두 아들을 데리고 힘겹게 10년을 버티며 살았습니다. 아들들은 모압 여인과 결혼했지만,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들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현실입니다. 신앙이 있어도 불행은 찾아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이때부터 달라집니다. 감당할 수 없는 위기와 고난이 왔을 때 믿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하는 선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람들은 나오미가 저주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오미נָעֳמִי의 이름은 '희락,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이름과 정반대로 쓰디쓴 고통으로 가득했습니다. 본문 후반부에서 나오미는 고향에 도착해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도 괴롭게 하셨으니, 이제는 나를 마라라고 부르십시오.” 마라는 쓰다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수 없었던 쓰디 쓴 그 물입니다. 욥의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오미도 몹시 고단한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자책하거나 원망하거나 남을 탓하지 않았다

처음 남편이 죽었을 때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 둘이 죽자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모압 땅에 와서 남편이 죽었으니, 모압 여인을 맞아들이면서 아들들도 죽었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며느리 잘못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사람은 감당하지 못하는 고통이 올 때 먼저 자책을 합니다. 내가 잘못해서, 선택을 잘못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렇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냐며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성격이 모나고 거칠어지면서 타인들을 원망하고 공격합니다. 나오미의 경우라면 며느리들을 공격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책하거나 원망하거나 남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죽은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13절에서 며느리들에게 "주님께서 손으로 나를 치신 것이 분명하다"라고 말합니다. 자신보다 남편을 잃은 며느리들의 입장을 먼저 생각한 것입니다. "너 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며 울었을 것입니다. 고통을 직면하고 피하지 않고 서로 껴안고 견딘 것입니다. 그래서 며느리들도 남편이 죽었다고 해서 시어머니를 버리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의리를 지키며 자신들이 해야 할 책무를 다했습니다.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이 정도만 되어도 요즘 보기 드문 효부입니다. 아마도 나오미가 하나님께 연단받아 좋은 시어머니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한 사람의 큰 특징은 다른 사람들과도 인격적으로 대면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죄 중에 있는 그들을 용서하고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그들도 외모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면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신자의 일대일 영적 관계는 직접 확인할 수 없지만, 삶의 변화된 모습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이웃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순탄하지 않습니다. 나오미, 아브라함, 야곱, 모세처럼 많은 세월 동안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겪은 후에야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약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교만하고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고 나서도 수시로 이전 본성이 올라와 실패의 쓴맛을 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매운 손길로 그들을 되돌리십니다. 이렇게 성화의 과정은 길고 긴 실패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돌보시다, 파카드פָּקַד, 일어나다, 쿰קוּם

그 와중에 나오미는 고향에서 전해온 소식을 듣습니다. 고향 베들레헴이 이제 좀 먹고살기 괜찮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는 복음과 같은 소식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나오미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냥 모압 땅에 머물며 살 것인지, 아니면 자기 혼자 베들레헴으로 가야 할지, 며느리들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갈지 이런 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쨋든 나오미는 모압 땅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6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모압 지방에서 사는 동안에, 나오미는 주님께서 백성을 돌보셔서 고향에 풍년이 들게 하셨다는 말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지방을 떠날 채비를 차렸다.”

 

나오미가 결단을 내리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것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돌보셔서"는 히브리어로 ‘파카드פָּקַד’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돌본다는 뜻이 아니라 주의 깊게 살펴본다는 의미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났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오랜 생활을 청산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떠날 채비를 차렸다"라고 의역했는데, 개역개정에 따르면 “일어나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쿰קוּם’이란 표현도 주목해야 합니다. 단순한 신체적 행동뿐만 아니라 결단을 내리거나 행동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영적으로 각성하여 진리의 빛을 선포하도록 하실 때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말씀하십니다. 나오미가 오랜 고통의 시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맛볼 시간이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인생에는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다

모든 인생은 성공만 있지 않습니다. 실패도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는 물론 본인에게 달렸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에게만 그 책임을 물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사실 인생의 많은 부분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세상 말로는 운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로,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린 것이라 고백합니다.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남들이 쉽게 하는 것이 내게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고난의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이때는 잠자코 있으면서 하나님의 돌봄을 받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간만 있지는 않습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이 우리를 일으켜 세워서 하나님의 뜻을 마음 것 펼치게 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이 순간을 기다리고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어나라 하실 때 일어나야 합니다. 신부들러리들이 기름을 준비하고 있다가 신랑이 왔을 때 일어나지 않고 졸고 있으면, 지금까지 기다린 시간이 헛일이 되는 것입니다. 단 한순간입니다. 신랑을 맞이하고 기뻐하는 그 일 하나를 위해서 그 오랜 시간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도록 내 뜻을 내려놓게 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낙심이 되고 시험에 들 수 있지만, 믿음의 눈을 열어보면, 이 시간만큼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관심을 받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만약 내 뜻대로 인생이 마음껏 펼쳐지고 있다면, 이것은 내 실력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수록 겸손하게 욕심내지 않고 하나님 뜻을 구하며 주변 사람들을 돌보며 살아야 합니다. 인생은 언제 어떻게 한 순간에 추락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준비한 사람에게 기회가 온다

나오미는 자신의 삶에 일어날 변화에 대한 신호를 바로 알아차랍니다. 영적으로 준비되었기에 본능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임을 알았습니다. 이미 체력도 떨어진 나이로 두 아들을 잃은 무력감에 그냥 신세한탄하며 죽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십 년 간 살아온 모압 땅에서 두 며느리와 함께 살아가며 안정감을 느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이 소식이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시는 소리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주저함 없이 두 며느리를 데리고 함께 일어나 고향 베들레헴으로 출발했습니다. 처음에는 두 며느리를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함께 살면 좋을 것 같다는 인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출발해서 가는 길에 생각을 바꿨습니다. 혼자 가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왜 마음을 바꾸었을까요? 기도하면서 생각이 바뀐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더 고민해 보니, 며느리들을 데리고 가면 자신은 좋지만 며느리들에게는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타인을 배려하고 상대를 먼저 생각할 줄 압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표독스러워지고 자기중심적으로 변한다면, 잘못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너희는 아직 젊으니 새롭게 출발하라고 권하였습니다. 이들에게는 익숙한 고향을 떠나는 일이고, 심지어 남편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나오미는 고향을 떠나 이방 땅에서 과부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았습니다. 이제 입장이 바뀐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을 반성한 것입니다. 내 고통을 남에게 전가하지 않은 것입니다. '나도 고통받았으니 너도 고통받아라'가 아니라 '내 고통은 나로 족하니 너희는 나처럼 쓰디쓴 인생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룻은 나오미를 선택했는가?

나오미는 한사코 며느리들에게 떠나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두 며느리가 모두 울면서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고대근동에 널리 퍼져있었던 결혼 풍습 중 하나가 계대결혼입니다. 장자가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다른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하여 아들을 낳아 그 가문과 기업을 잇게 해주는 규례를 말하는 것으로 일명 형사취수제도라고 합니다. 만약 계대결혼을 하려면 나오미에게 아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들이 없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데리고 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너희가 다시 시집가려면 내가 먼저 시집가서 아들을 낳고 자라게 해서 너희와 결혼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떠나갈 것을 몇 번 더 권하자 오르바는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떠나지 않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붙잡았습니다.

 

룻이 왜 나오미를 떠나지 않았을까요? 보장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오미뿐입니다. 그렇다고 나오미가 힘이 있거나 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나오미를 붙잡고 갑니다. 모압 땅 친정에 있으면 그래도 어느 정도 먹고 살 수 있고, 잘하면 좋은 사람과 재혼도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미를 선택한 것입니다. 왜 룻은 나오미를 선택했을까요? 우선 인간적인 나오미의 사랑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나오미는 진심으로 며느리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며느리를 축복합니다. 8절과 9절입니다. "너희는 제각기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너희가 죽은 너희 남편들과 나를 한결같이 사랑해 주었으니, 주님께서도 너희에게 그렇게 해주시기를 빈다. 너희가 각각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기를 바란다." 나오미가 인간적으로 사랑이 많았기에 룻과 오르바가 처음부터 따라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사랑은 딱 거기까지입니다. 오르바가 떠나간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룻이 나오미 곁에 남은 것은 인간적인 사랑 때문만이 아닌 것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결정적인 무엇이 있었습니다. 

 

나오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8절과 9절에서 나오미가 두 며느리를 따뜻하게 배려해 주는 말 뒤에 사실 굉장한 믿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축복할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께서 너희를 사랑해 주시길 빈다.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길 바란다고 말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모든 말에 하나님을 빼놓지 않습니다. 나오미가 하나님을 항상 고백할 때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룻은 시어머니가 하나님을 믿어서 잘된 것을 하나도 본 적이 없습니다.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남편과 시동생이 차례대로 죽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는 분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오미를 괴롭게 만든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따라가는 걸까요? 이는 신비로운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보고 신기해합니다. 하나님을 믿은 이후로 그 인생이 성공하거나 큰돈을 벌어 잘 된 사람을 보고서 신기해하지 않습니다. 같은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잘 믿어 복 받았다는 간증을 들으면서 좋겠다며 은근 부러워하며 좋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간증이 성공에 초점이 맞추어지면, 이 일로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는 이 사람이 타고난 능력이 많거나 운이 좋거나 아니면 남을 짓누르고 사기를 쳐서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이 놀라는 것은 다른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서 아무것도 잘된 것 하나 없는데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는데 왜 떠나지 않고 있지? 이 사람 바보 아닌가? 그런데 말해 보면 멀쩡한 사람인데, 왜 이렇게 살아가지? 이렇게 궁금해하는 것입니다.

 

룻도 바로 이 점이 궁금했을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잘해준 것도 없는데 시어머니 나오미가 하나님을 붙잡고 있는 것을 보면 룻은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겠다'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이를 확인하고자 나오미를 따라간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룻은 분명 알고 있었습니다. 왜 나오미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버리지 않고 있는지, 나오미와 함께 지내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이방 땅에서 남편도 떠나고 두 아들도 죽어 외로운 한 인생이 되었는데도, 나오미는 자신 곁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늘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누구냐 바로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사실입니다. 룻은 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을 잃어 비참하다 생각한 자신에게 나오미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준다면, 그 어떤 두려움이나 외로움도 없으리라 확신한 것입니다.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내가 잘된다고 해서 부자가 되고 성공한다고 해서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믿는 자들의 세상적인 형통을 보고 놀라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은 믿는 자들에게 항상 변함없이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놀랍게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붙잡는 이해할 수 없는 믿음을 부러워합니다.

 

룻은 나오미가 하나님을 끝까지 붙잡고 신뢰한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봤습니다. 그때 나오미만 본 것이 아닙니다. 룻은 나오미와 함께하는 하나님을 보고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룻은 나오미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16절과 17절에서 룻은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내 뜻대로 하도록 하는 신 vs 언약을 따라 살아가도록 하는 신

룻이 조상 대대로 믿어왔던 모압의 신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는 신이었습니다. 어떻게든지 그 신을 기쁘게 해서, 이 땅에서 성공하고 형통하며 살아가는 것을 최고의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약속을 따라 살아가도록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살아가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 두 신 중 누구를 선택할지가 바로 룻의 결정이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바로 이러한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성공하게 해 주고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신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바로 이 선택의 기로에서 내가 어느 가족에 속해 살아갈지가 결정됩니다.

 

룻은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으로 인해 나오미와 진정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으로 모시는 집의 한 식구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 믿음의 집안을 통해 다윗을 나게 하셨습니다. 룻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자 결심하고, 함께 마음을 합쳐 동행하기 시작하니 하나님의 구원 역사 한가운데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결국 룻은 보아스를 통해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습니다. 다윗의 후손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믿음의 가족이 되는 비밀

믿음의 가족이 되는 비밀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한 믿음 안에서 한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기한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변합니다. 하지만 변치 않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영원합니다. 신실한 관계는 바로 이 믿음 안에서 형성되고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의 띠로 묶인 한 가족이 되게 합니다. 14절에서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고 떠났지만, 룻은 시어머니에게 달라붙었습니다. 달라붙었다는 말, '다바크דָּבַק'는 굳게 잡고 늘어지다 뜻입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2장 24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합하여'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이처럼 나오미와 룻은 한 몸이자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자신의 남편으로 함께 섬기며 한 가정을 이룬 것입니다.

 

유대교 전승에 따르면, 오르바는 시어머니를 떠나 모압 땅으로 돌아간 뒤 방탕한 생활로 인해 인생을 방황하다 블레셋 남자를 만나 골리앗을 낳았다고 합니다. 물론 룻의 태로부터 나온 다윗의 출생과 비교해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이러한 전승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 메시지가 주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내 뜻대로 내 소원을 이루어주는 세상의 신을 쫓을 것인가, 아니면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이 선택에 대한 답은 룻과 오르바의 선택에 따른 결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다윗을 낳는 모태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골리앗을 낳는 모태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를 부러워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세상 모든 사람이 겪는 어려움이 내게 닥치지 않을까요?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 역시 그 어려움을 반드시 겪습니다. 성경은 인생에 문제가 없는 것을 형통이라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형통과 다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은 아무리 어렵고 좁은 길을 가더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알고 믿음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문제가 많아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해 주시고, 이 문제가 결국 협력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자 나의 참된 가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참된 형통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룻도 마찬가지입니다. 룻이 이방 여인임에도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까요? 물론 유다 지파 사람 보아스와 재혼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육적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은 단 한 가지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신실한 관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아무 일이 되지 않고, 하나님을 섬겨도 내 소원대로 된 것은 없지만, 나오미의 이런 모습을 본 이방 여인 룻은 하나님을 선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방 여인 룻은 자신의 시어머니 나오미처럼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한 반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다윗의 계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중심에 서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고결함입니다.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입니다. 세상의 돈이나 권력이나 성공과도 결코 바꿀 수 없는, 세상의 어떠한 강함이나 지식으로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 세상은 바로 이 믿음의 관계를 부러워합니다. 이 믿음을 지켜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