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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룻기 1장 1-5절 두 아들은 다 모압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by 알렉스강 2024. 7. 5.

룻기 1장 1-5절 새번역

 

1 사사 시대에 그 땅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그 때에 유다 베들레헴 태생의 한 남자가, 모압 지방으로 가서 임시로 살려고,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2 그 남자의 이름은 엘리멜렉이고,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이며,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다. 그들은 유다 베들레헴 태생으로서, 에브랏 가문 사람인데, 모압 지방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살았다.

3 그러다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았다.

4 두 아들은 다 모압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한 여자의 이름은 룻이고, 또 한 여자의 이름은 오르바였다. 그들은 거기서 십 년쯤 살았다.

5 그러다가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으니, 나오미는 남편에 이어 두 아들마저 잃고, 홀로 남았다.

 

 

룻기는 구원의 섭리가 담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룻기는 4장밖에 안 되는 간단한 내용으로, 쉽게 한 가정사에 얽힌 소설과 같은 이야기로 보일 수 있습니다. 가볍게 생각하고 읽으면 룻기의 주제를 한 여인의 현숙함이나 효심으로 파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룻기는 단순히 재미있고 유익한 교훈을 담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 66권에 포함된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룻기의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그리고 하나님은 무엇을 행하시는지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정사에서부터 룻과 보아스의 만남과 결혼으로 이어지는 과정까지 하나님은 어떤 성품을 가진 분이시고, 그리고 그 성품에 따라 사람들에게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언약에 끝까지 신실하신 하나님

이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약을 관통하고 있는 언약입니다. 먼저 룻기가 기록된 배경이 사사시대였기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얼마나 불성실하였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고 가나안 족속과 어울려 살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만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가나안의 이방 신을 가져다가 함께 섬겼습니다. 이후에는 혼합해서 섬기는 것을 넘어서서 아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기도 한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에 대해서 끝까지 성실하게 지키셨습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났다가 징계를 받아 다시 돌이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는 반복되는 패턴을 수차례 반복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에게 압제당하여 고통 가운데 부르짖기만 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사사를 세워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패턴이 더욱 강화됩니다. 점점 하나님께로 돌이키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어지다가, 언젠가부터는 이방 민족에 압제 아래에 고통받고 있어도 돌이키고 부르짖을 줄 모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방법을 아예 잊어버렸든지, 아니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보다 이방 민족 아래에서의 누리는 세상적인 평안을 더 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스스로 결정하셔서 사사를 세워 이스라엘을 구하셨습니다. 그 사사가 바로 사사기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삼손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삼손은 결격 사유가 많은 사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을 자기 욕망을 채우는 데 사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삼손을 통해서도 구원하셨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이유가 이스라엘의 의로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로움,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죄악까지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삼손은 사사로 활동할 때 나실인 서약을 거의 지키지 않습니다. 들릴라의 꾐에 넘어가 마지막 남은 서약인 머리카락까지 자르자 힘을 완전히 잃어버립니다. 결국 블레셋에게 잡혀 두 눈이 뽑힌 채 지하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육신의 두 눈이 뽑히자 영의 눈이 뜨이게 된 삼손은 결국 하나님 뜻을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마지막으로 사용합니다. 자신의 온 힘을 다하여 이방 신전의 두 기둥을 무너뜨려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땅에 묻혀 죽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낸 것입니다. 삼손이 자기를 희생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마지막 모습 때문입니다.

 

삼손의 이야기를 보면서, 삼손이 자신의 욕망으로 저지른 잘못들을 단순히 인간적인 실수로만 보면 안 됩니다. 삼손이 잘못하면 잘못할수록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물론 우리가 삼손의 신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옳지 못한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따라 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강한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봐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룻기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룻의 시아버지인 엘리멜렉과 그 남편과 시동생인 말론과 기룐의 불신앙도 결국 룻을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죄악까지도 당신의 구원의 방법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한 사람들

앞서 삼손이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룻기에도 동일하게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나오미의 먼 친척인 보아스입니다. 고엘 제도를 통한 기업 무를 자를 통한 구원을 말해줍니다. 기업 무름은 철저히 자기희생에 기반합니다. 보아스는 굳이 룻을 아내로 맞이할 이유가 없습니다. 첩실로 맞이해서 밥만 먹여주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지혜롭게 상황을 대처합니다. 룻의 평판을 생각해서 이불로 덮어주게 하고, 그리고 아내로 맞이하기로 마음을 정하자 그날 바로 곧장 룻의 집안에 대해 첫 번째로 기업 무를 자에게 찾아가 그 의사를 확인한 다음 자신이 기업 무를 것임을 마을 장로들에게 분명히 밝힙니다. 이 모든 것이 언약에 있어 신실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사사기 마지막 구절인 21장 25절에서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라고 말합니다. 바로 사사시대의 시대정신을 말해줍니다. 이 왕은 하나님이시기도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한 지도자가 없음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결국 보아스와 같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한 왕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룻기 마지막에는 룻과 보아스의 족보를 통해서 다윗 왕이 소개됨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생존을 위해서 약속의 땅을 떠나다

오늘 본문은 사사 시대에 있었던 일이라 말하며 시작합니다. 사사 시대는 영적으로나 현실의 삶이나 동일하게 모두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들자 유다 지파 사람인 엘리멜렉은 가족을 데리고 유다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이주합니다. 베들레헴은 떡집, 양식의 집을 의미합니다. 그런 베들레헴 조차도 먹을 것이 떨어졌으니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겠습니까. 결국 생존을 위해서 모압으로 건너가게 된 것입니다.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입니다. 하지만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이방 민족 중 하나입니다. 모압왕 에글론이 침입하여 18년간 다스린 적이 있습니다. 결국 왼손잡이 에훗이 사사로 일어나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지만, 이스라엘의 괴롭힌 원수입니다. 그런 모압땅으로 엘리멜렉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인간적인 판단에 따라 오직 생존을 목적으로 이주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거기서도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살기 위해 정착한 모압에서 엘리멜렉과 그의 두 아들은 얼마 되지 않아서 죽음을 맞습니다.

 

인생의 고통에 대해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고통을 하나님의 시선에서 보지 않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단지 의문을 제기하기만 합니다. 엘리멜렉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생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스스로 판단해서 모압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생존은 더 어려워진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뿐만 아니라 결국 아들까지도 생명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결국 주어진 인생을 허비하고 고민만 하다가 떠나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떠나 살아가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의 끝이 이와 같이 허무합니다.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입니다.

 

바로 엘리멜렉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룻기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무리 암울하고 참혹한 상태에 놓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을 신뢰하며 현재를 어떻게 바라보며 살아갈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생존의 위협에 처하고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라도,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가 어떻게 신뢰하고 나아갈지에 대해 말해줍니다. 성경은 결코 믿는 자들의 성공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꿈꾸게 하시고, 인생의 고통과 눈물을 축복으로 바꾸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고통의 근원을 깨닫게 하시고, 슬픔과 고통, 죽음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에 대한 길을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아버지도 잃고 남편도 잃고, 자신의 고향과 친정을 떠나 시어머니의 생존을 위해서 따라나선 룻의 결단은 인간적인 결단이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합니다. 사사시대 영적으로 어두운 시기에 사람들은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고, 그 결과 신앙적으로, 윤리적으로, 경제적으로 모든 것이 어두워진 그 시대에 한 줄기의 빛처럼, 시원한 생수와 같은 한 사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 평범하고 연약한 한 이방 여인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의 섭리를 나타내셔서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인생의 문제 가운데 역사하시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희망은 없지만 은혜의 불씨는 남아있다

엘리멜렉의 아내였던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십 년이라는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지만, 두 아들이 모압 땅에서 아내를 얻었습니다. 한 여자의 이름은 룻이고, 또 한 여자의 이름은 오르바였습니다. 성경은 절망 속에서도 은혜의 불씨가 남아있음을 보여주는데, 역설적으로 은혜의 불씨가 이방 여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불씨를 이스라엘 안에서 찾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밖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방 여인에게 찾으신 것입니다. 앞서 삼손의 경우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이유가 이스라엘의 그 어떤 신실함이나 의로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약속에서 오는 구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방 여인을 불러 세우시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신앙생활을 하다가 낙심하여 그만둔 뒤, 내가 하나님을 떠나 잊어버렸기에, 하나님도 나를 잊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들은 결코 하나님의 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입니다. 한번 내 백성은 끝까지 내 백성입니다. 물론 잘못하면 징계를 내리십니다. 하지만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엘리멜렉의 영적인 탈선을 징계하셨지만, 나오미와 두 며느리를 통해 은혜의 불씨를 남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의 인생을 맡길 때, 그 어떤 절망 속에서도 은혜의 불길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내 안에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은혜인 것입니다. 이 은혜의 단비를 룻기라는 작지만 아름다운 구속의 이야기를 통해서 깨달아 누리는 모두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