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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사사기 16장 23절-31절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게 하여 주십시오

by 알렉스강 2024. 6. 29.

사사기 16장 23절-31절 새번역

 

23 블레셋 사람의 통치자들이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바치려고 함께 모여 즐거워하며 떠들었다. "우리의 원수 삼손을 우리의 신이 우리의 손에 넘겨 주셨다!"

24 백성도 그를 보고 그들의 신을 찬양하며 소리쳤다. "우리 땅을 망쳐 놓은 원수, 우리 백성을 많이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셨다."

25 그들은 마음이 흐뭇하여, 삼손을 그 곳으로 불러다가 자기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게 하라고 외쳤다. 사람들이 삼손을 감옥에서 끌어내었고, 삼손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재주를 부리게 되었다. 그들은 삼손을 기둥 사이에 세워 두었다.

26 그러자 삼손은 자기 손을 붙들어 주는 소년에게 "이 신전을 버티고 있는 기둥을 만질 수 있는 곳에 나를 데려다 다오. 기둥에 좀 기대고 싶다" 하고 부탁하였다.

27 그 때에 그 신전에는 남자와 여자로 가득 차 있었는데, 블레셋 사람의 통치자들도 모두 거기에 있었다. 옥상에도 삼천 명쯤 되는 남녀가 삼손이 재주 부리는 것을 구경하려고 모여 있었다.

28 그 때에 삼손이 주님께 부르짖으며 간구하였다. "주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의 두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단번에 원수를 갚게 하여 주십시오."

29 그런 다음에 삼손은 그 신전을 버티고 있는 가운데의 두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또 하나는 오른손으로 붙잡았다.

30 그리고 그가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외치며, 있는 힘을 다하여 기둥을 밀어내니, 그 신전이 무너져 내려 통치자들과 모든 백성이 돌더미에 깔렸다. 삼손이 죽으면서 죽인 사람이, 그가 살았을 때에 죽인 사람보다도 더 많았다.

31 그의 형제들과 아버지의 집안 온 친족이 내려와서 그의 주검을 가지고 돌아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에 있는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무덤에 묻었다. 그는 스무 해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다.

 

 

나실인, 제사장의 관, 그루터기에서 난 싹

삼손은 들릴라에게 자신의 머리털이 밀리자, 곧장 나실인의 지위와 그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머리카락이 잘린 삼손은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두 눈이 뽑힌 체 가사의 성읍 지하 감옥에 갇혀 연자 맷돌을 돌렸습니다. 앞선 본문인 22절에서 그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머리털이 삼손이 가진 초인적인 힘의 원천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삼손의 힘은 나실인의 서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민수기 6장에서 나실인의 규례 중 머리카락에 삭도를 대면 안됩니다. 삼손은 머리카락은 손대지 않았지만, 다른 모든 나실인의 규례는 어겼습니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겨둔 규례를 어기면서 삼손은 나실인의 지위를 잃었습니다. 삼손의 머리카락이 잘린 것은 단순한 힘의 상실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진 자로서 나실인의 표식이 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나실인은 나제르נזיר라고 합니다. 이것은 구별과 거룩을 의미합니다. 레위기 8장 9절에 따르면 제사장들이 쓰는 관도 나제르נזיר라 불립니다. 제사장의 관은 여호와께 거룩하게 바쳐진 자로 살아가는 서약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나실인의 머리카락은 하나님께 바쳐진 중요한 표식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여자가 머리를 깎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서 유래합니다. 여자가 상징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분명한 정체성을 지켜야 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시편 132편 18절에는 “그의 원수들은 수치를 당하게 하지만, 그의 면류관만은 그의 머리 위에서 빛나게 해 주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면류관이 나제르נזיר입니다. 머리카락과 면류관은 하나님께 바쳐진 증거로, 이를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최고의 영광의 제물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서는 24 장로들이 면류관을 벗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장면도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님도 나실인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사야 11장 1절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잘린 나무 그루터기에서 난 싹을 히브리어로 네제르נֵצֶר라고 합니다. 바로 나실인 나제르נזיר와 같은 어원입니다.

 

삼손의 힘은 나실인의 서약의 근거한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사야 11장 말씀처럼, 이제는 뭐가 날 것 같지 않은 죽은 나무의 밑동에서 싹으로 난 것이 바로 나실인입니다. 모두 다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포기하라고 할 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회복하게 하시는 소망의 새싹이 바로 나실인입니다. 죽은 나무 밑동에서 난 싹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아니면,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11장 2절에서 말합니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바로 여호와의 영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삼손의 머리카락은 나실인의 상징하는 것으로, 죽은 나무 그루터기에서 난 싹으로, 이것을 보호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인 것입니다. 이처럼 나실인은 세상에서 강한 자가 아닙니다. 가장 약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기에 나실인으로 구별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처럼 나실인으로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모인 우리는 이 땅에 정해진 기한 동안 나실인처럼 거룩함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믿음을 지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특별히 이 땅이 타락하고 교회가 힘을 잃어가는 시대일수록 하나님은 남은 자를 허락하십니다. 이 땅에 그루터기와 같은 이들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과 교회에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이어가십니다. 우리가 나실인으로서 거룩함을 지키는 것은 단지 율법을 지키는 삶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살아가야 함을 말해줍니다. 앞서 나무 그루터기에서 난 싹에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사망인 것입니다. 지나가는 들짐승이나 사람들에게 뽑혀 버리면 그만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성령으로 살아야지 영적인 생명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나실인의 서약을 갱신하기 위해 머리카락이 잘리다

나실인 규례에 따르면, 나실인으로의 서원 기한을 끝나려면 머리를 깎아야 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전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깎은 것도 나실인의 서원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헌신했던 시간을 나실인의 서원 기간으로 여겼으며, 사역을 마무리한 후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 머리를 자른 것입니다. 삼손도 나실인 규례에 따라 서원을 어겼거나 기한이 끝났다면 머리를 깎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실인 규례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해 머리를 자르지 않았으며, 자신의 힘이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고 머리카락에 힘이 있다고만 믿었습니다.

 

삼손의 머리털은 들릴라에 의해 잘렸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자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나실인 서약을 맺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삼손은 머리카락이 잘린 이후 하나님과 다시 나실인 서약을 맺게 됩니다. 바로 자신의 최후의 순간, 삼손의 인생에서 두 번째로 드린 기도였습니다. 첫 번째 기도는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인 뒤 목이 말라죽게 되어 물을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목이 말라 할례 받지 못한 자에게 죽게 되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되겠냐고, 이기적인 자기 필요로 당당하게 요구하던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진정한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삼손은 “주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부르짖습니다.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참된 것을 간구하도록 가장 비참한 상황으로 내버려 두시기도 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조롱당하는 핍박당하는 가장 수치스러운 자리, 가장 낮은 자리, 가장 무력한 자리에 있게 하십니다. 삼손은 눈이 멀고 벌거벗은 채 사슬에 묶여서 원수인 블레셋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제물로 삼아 다곤 신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다곤은 하반신이 물고기로 된 신상으로 풍요와 번영을 약속하는 신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골칫거리였던 삼손을 처리하게 되자 이제는 마음껏 이스라엘을 유린할 수 있게 되었음에 기뻐하며 자신의 신에게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보다 자신들의 신이 강하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삼손을 짐승처럼 재주 부리도록 시켜 삼손도 조롱하고 여호와 하나님까지 함께 조롱했습니다.

 

삼손은 눈이 보이지 않은 채 사슬에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이 의지할 것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삼천 명이 넘는 블레셋 사람들과 혼자 마주했습니다. 너무나 두려고 떨리는 상황일 수 있으나, 삼손은 이전보다 더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두 눈이 뽑힌 후 삼손은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블레셋 사람이 얼마가 있던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눈이 열리자 하나님 한 분만이 내 앞에 계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께 삼손은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힘을 구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힘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의 힘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겸손하고 간절하게 자신의 있는 힘을 다하였다

사실 삼손의 머리털은 이제 자라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머리털에서 힘이 나왔다면, 발휘할 수 있는 힘은 미약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의 원천이 머리카락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알았기에, 이전보다 비교할 수 없는 몇 배나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삼손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아이에게 부탁하여 신전의 받치고 있던 두 기둥을 왼손과 오른손으로 기대어 섰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고백하며, 있는 힘을 다하여 기둥을 밀어내었습니다. 그러자 한순간에 신전이 무너져 내려 블레셋의 통치자들과 모든 백성이 돌더미에 깔려 죽었습니다.

 

여기서 삼손이 자신의 있는 힘을 다하였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삼손에게 특별히 하나님의 영이 더 많이 내린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삼손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있음을 믿고, 이전의 교만함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채 내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 쏟은 것입니다. 그러자 엄청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신전의 기둥이 무너지면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땅에 묻히는 순간, 삼손은 자신이 블레셋 사람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가 되는 일을 완수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도구로 사용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았음을 마지막 순간에 깨달았습니다.

 

 죽으면서 죽인 사람이 살았을 때에 죽인 사람보다도 더 많았다

인간의 모든 방황과 실패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뜻하신 바를 이루십니다. 삼손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사사로 부름 받았지만, 이와 반대되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 일을 이루었습니다. 30절 후반부에 삼손이 죽으면서 죽인 사람이 그가 살았을 때에 죽인 사람보다도 더 많았다고 하는 것은 삼손의 인생에 대한 안타까운 독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손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삼손에게 주는 따끔한 질책이며, 삼손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에게 돌이킬 것을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의 온갖 실패와 조롱을 다 받고 나서야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삼손이 자신의 인생에서 겪게 되는 모든 상처와 아픔과 방황과 실패는 사실 삼손의 전적인 책임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삼손을 붙잡고 놓지 않으시며 회복시켜 원래의 뜻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신 계획이 있습니다. 설령 그 인생이 계획과 달리 나아가 실패 속에서 낙심하고 방황하더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품으신 선한 계획을 이루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도 막을 수 없고, 우리도 거스를 수 없습니다.

 

내가 죽을 때, 내 안에 있는 원수가 함께 죽는다

삼손이 있는 힘을 다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게 해 달라는 간구는 참으로 놀라운 영적인 통찰이자 믿음의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의 육체가 지닌 힘으로 알았던 하나님의 힘을 이제는 나의 육적인 자아를 죽이는 데 사용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의 육적인 자아가 죽어야지 블레셋 사람들을 완전히 물리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영적으로 얻게 되는 참된 승리는 바로 나의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 내 안에 있는 원수 블레셋도 함께 죽는 것입니다. 삼손의 육적인 자아가 죽고 영적이 자아가 살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역설적인 구원의 신비가 삼손의 마지막 최후의 순간에 나타난 것입니다.

 

마지막 31절에, 삼손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삼손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에 있는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함께 장사했다고 말합니다. 마노아의 옛 자아가 묻힌 곳에다가 삼손의 옛 자아도 함께 묻히게 된 것입니다. 마노아가 옛 자아가 죽은 뒤 새로운 이름을 받아 새 사람으로 태어난 것처럼, 삼손도 동일하게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삼손의 이름이 가진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태양의 신을 섬기는 자로서 세상에서 마음 것 내 힘을 뽐내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비추는 작은 태양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예표하는 자로 믿음의 반열에 서게 된 것입니다.

 

삼손이 그 육신을 스스로 죽음으로서 블레셋을 죽이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되는 이야기는 자기 부인이라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삶을 상징합니다. 삼손이 맷돌을 돌리며 자신을 갈아 넣어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먹이는 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을 떠올리게 합니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 삼손은 자기부정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나실인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실인의 삶을 사셨고, 교회도 나실인으로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야기이며, 자신을 부정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자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