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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사사기 15장 1절-20절 성령의 역사는 감정의 흥분과는 다릅니다

by 알렉스강 2024. 6. 27.

사사기 15장 1절-20절 새번역

 

1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밀 추수 때가 되었을 때에, 삼손은 새끼 염소 한 마리를 가지고 아내를 찾아가서, 장인에게 아내의 침실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장인은 그가 아내 방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2 그리고 장인은 다른 제안을 하였다. "나는 자네가 그 애를 몹시 미워한다고 생각하고, 자네 친구에게 아내로 주었다네. 사실은 동생이 언니보다 더 예쁘니, 부디 그 애를 아내로 삼아 주게."

3 그러자 삼손이 그들에게 "이번만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어떤 손해를 끼친다 해도 나를 나무라지 못할 것이오" 하고 말하면서,

4 나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 꼬리에 꼬리를 서로 비끄러매고는, 그 두 꼬리 사이에 가지고 간 홰를 하나씩 매달았다.

5 그는 그 홰에 불을 붙여 블레셋 사람의 곡식 밭으로 여우를 내몰아서, 이미 베어 쌓아 놓은 곡식가리에 불을 놓았다. 불은 곡식가리뿐 아니라 아직 베지 않은 곡식과 포도원과 올리브 농원까지 다 태워 버렸다.

6 블레셋 사람들은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알아 보았다. 마침내 사람들은, 딤나 사람 곧 삼손의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아 들러리 섰던 친구에게 아내로 주었기 때문에, 삼손이 저지른 일임을 알게 되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딤나로 올라가서, 그 여자와 그 아버지를 불에 태워 죽였다.

7 그러자 삼손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이렇게 하였으니,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기 전에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

8 그는 블레셋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무찌르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동굴에서 쉬고 있었다.

9 블레셋 사람들이 쳐올라와서 유다 땅에 진을 치고는, 레히 지방을 짓밟았다.

10 유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치러 올라왔소?" 그들이 대답하였다. "삼손을 잡으러 왔소. 삼손이 우리에게 한 대로, 우리도 그에게 갚아 주겠소."

11 그래서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동굴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말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지 않소? 그런데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런 일이 미치게 하오?" 삼손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나에게 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갚아 주었을 뿐이오."

12 그러자 그들이 삼손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당신을 묶어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 주려고 왔소." 삼손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하시오."

13 그들은 삼손에게 다짐하였다. "결코 죽이지 않겠소. 우리는 당신을 묶어서 그들에게 넘겨만 주겠소. 결코 우리가 당신을 죽이지는 않겠소." 그리고 그들은 새 밧줄 두 개로 그를 묶어서, 바위 동굴에서 데리고 나왔다.

14 삼손이 레히에 이르자, 블레셋 사람들이 마주 나오며,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때에 주님의 영이 그에게 세차게 내리니, 그의 팔을 동여매었던 밧줄이 불에 탄 삼 오라기같이 되어서, 팔에서 맥없이 끊어져 나갔다.

15 마침 삼손은 싱싱한 당나귀 턱뼈 하나가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손에 집어 들고, 블레셋 사람을 천 명이나 쳐죽이고 나서,

16 이렇게 외쳤다. 나귀 턱뼈 하나로 주검을 무더기로 쌓았다. 나귀 턱뼈 하나로 천 명이나 쳐죽였다.

17 이렇게 외치고 나서, 삼손은 손에 든 턱뼈를 내던지고, 그 곳 이름을 라맛레히라고 불렀다.

18 삼손은 목이 너무 말라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께서 친히 이 크나큰 승리를 주님의 종의 손에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목이 타서 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붙잡혀 죽어야 하겠습니까?"

19 하나님이 레히에 있는 한 우묵한 곳을 터지게 하시니, 거기에서 물이 솟아나왔다. 삼손이 그 물을 마시자, 제정신이 들어 기운을 차렸다. 그래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고 하였는데, 오늘날까지도 레히에 있다.

20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다.

 

 

감정과 성령의 관계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사람들은 종종 충동적인 행동 후 후회하게 됩니다. 성경 속 삼손의 이야기는 이러한 행동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삼손은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블레셋 사람들과 막장 드라마 같은 싸움을 벌입니다. 감정의 힘은 강력해서 모든 것을 쏟아버립니다. 사람들을 모으고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강하게 역사할 때, 우리는 대게 감정의 반응과 변화로 알아차릴 때가 많습니다. 감정은 우리의 영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삼손은 감정이 격분하여 블레셋과 싸움을 할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내 감정인지, 아니면 성령이 주신 능력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사실 많은 경우 감정 기분으로 동하여서 성령의 능력을 사사로이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나섰지만, 결국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자존심과 자기 뜻을 내세우다 망하게 됩니다.

 

감정으로 모든 일을 그릇치는 삼손

삼손은 블레셋의 젊은이들과의 수수께끼 내기에 지는 바람에 감정이 상하여서 결혼식을 끝내지 않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감정이 가라앉자 아내를 찾기 위해 딤나에 사는 장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장인은 삼손의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주었으며, 대신 아내보다 예쁜 동생을 아내로 삼으라 제안합니다. 자신은 삼손이 화가 나서 떠나가버리자 딸을 미워하는 줄 알고 다른 남자에게 줬다는 것입니다. 삼손이 이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화가 나고 후회가 되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결국 결혼하지 못하고 순간 감정에 빠져서 일을 그르친 것입니다.

 

삼손은 곧장 격분합니다. 자신의 결혼을 망쳐버린 블레셋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겠다고 선언합니다. 자신이 블레셋에게 어떤 손해를 끼친다 해도 나무라지 못할 것이라 말합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공적인 소명, 즉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삼손은 여우 300마리를 잡아다가 두 마리씩 꼬리를 묶고 그 사이에 횃불을 달아 보냈습니다. 당시 밀 추수하던 시기로 5월에서 6월 정도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꼬리에 불이 붙은 여우들은 밀밭이며 포도원과 올리브 농장에까지 모든 곳에 불을 붙였습니다. 이로 인해 블레셋 사람들은 큰 농작물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블레셋 사람들은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삼손의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블레셋 젊은이에게 준 것으로 인해 삼손이 화가 나서 저지른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장인 탓을 하며 그 가족을 모두 불살라 죽였습니다. 삼손이 했다는 것을 알면 삼손을 잡아야 하는데 삼손의 장인과 아내를 불로 태워 죽입니다. 당시 블레셋이란 민족의 성숙도를 알 수 있죠. 비겁하고 비열한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힘에 버거운 상대는 그대로 두고 만만한 상대를 골라 괴롭히는 것입니다. 삼손은 장인과 아내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불에 타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이제는 겉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이게 됩니다. 내가 원수를 갚기 전에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 말하며, 곧장 딤나의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가서 모두 학살해 버립니다. 개역개정 번역에서는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였다고 말하는데, 잔인하게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인 것입니다.

 

이렇게 삼손은 블레셋과 싸웠으나 공적인 사사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복수로 한 행동이었습니다. 그것도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한 자기 감정에 휩싸여서 한 일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블레셋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삼손이 불을 지르면 자신들도 불을 지르고, 삼손이 학살을 하면 자신들도 학살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블레셋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삼손을 붙잡기 위해서 무기를 들고 이스라엘 유다 지파에게로 쳐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삼손을 내놓으라고 협박했습니다. 삼손은 단 지파 사람이었는데, 단 지파 근처에 가장 강한 지파가 남쪽 아래로 위치한 유다 지파입니다. 블레셋은 유다 지파로 향하여 단 지파를 압박하도록 머리를 쓴 것입니다.

 

비굴하고 이기적인 유다 지파

당시 삼손은 블레셋을 피해서 에담 바위에 숨어 있었습니다. 유다 지파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에 있는 삼손에게 찾아갔습니다. 삼천 명을 데리고 간 것은 삼손이 그만큼 힘이 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삼천 명이나 되는 숫자가 모였으면 블레셋을 칠 것이지, 어리석게도 자기 동족 이스라엘 사사를 잡아서 블레셋에 넘기려는 것입니다. 유다인 삼천 명에 블레셋 천 명이에요. 숫자로 봐서도 맞서 싸우면 충분히 이길 숫자입니다. 근데 그들은 블레셋에 대항해 싸우지 않습니다. 되려 블레셋에 잘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굴하고 이기적인 태도입니까.

 

삼손 한 사람의 일에서 시작했지만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분쟁으로 이어졌어요. 결국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삼손을 사용하셔서 분쟁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을 흔들어 깨우시는 것입니다. 삼손에서 시작한 불이 블레셋에 붙고, 그 불이 이스라엘에도 옮겨 붙기 원하신 것입니다. 근데 이스라엘은 지배 받는 것에 익숙해지고 편안해져서 거기서 벗어날 생각을 못합니다. 이게 죄의 속성입니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두렵지만 죄에 익숙해지면 죄책감도 없고 전혀 죄의식도 없어지게 되는 거죠. 이렇게 죄가 깊어지면 내가 누구 편이고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를 놓치게 됩니다. 빨리 삼손을 넘겨서 평화를 되찾자하고 평화를 구걸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평화가 아니라 내가 위험과 두려움에 처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가진 값진 것을 내주는 꼴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책망합니다. 왜 이런 문제를 일으켜서 어렵게 만드는지 따진 것입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에게 한 잘못에 대해서 복수를 한 것이라 말합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서로 복수혈전을 벌인 것이라 말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양쪽이 다 책임이 있음에도 유다 지파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의 말에 따라 삼손을 잡아 넘겨주려고 합니다. 삼손도 같은 이스라엘 사람인 유다 민족과 충돌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다 사람들에게 결박당해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졌습니다.

 

라맛 레히, 나귀의 턱뼈 

숨어 있던 삼손이 줄에 묶인 채 나오자 블레셋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승리를 만끽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합니다. 그러자 삼손은 자신을 묶은 밧줄을 불에 탄 삼과 같이 쉽게 끊어버렸습니다. 삼손은 주변에 있던 나귀의 새 턱뼈를 손에 집어 들고 블레셋 사람 천 명을 다 죽여버립니다. 이곳이 아마도 나귀 턱뼈처럼 길쭉하게 튀어나와 있어서 라맛 레히, 즉 나귀 턱뼈라는 지명으로 불린 것입니다. 아니면 삼손의 승전이 후대에 남아서 지명으로 불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새 턱뼈라는 것은 아직 혈흔과 고기가 붙어 있는 죽은 지 얼마되지 않은 사체에서 꺼내 온 것을 말합니다. 이 때에도 삼손은 사사의 규례를 어긴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상관없이 여호와의 영은 삼손에게 강하게 내리게 되고 순식간에 블레셋 사람 천 명을 다 쳐 죽입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과 용맹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감정이 격동하면 자신의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사용하였습니다. 그 정도로 강한 삼손인데, 만약 여호와의 영이 내리면, 불에 기름을 붓는 것처럼 폭발하는 것입니다. 맨손으로 사자를 찢어 죽이고, 나귀 턱뼈로 천 명을 때려 죽일 힘이니 아무도 말릴 수 없었습니다. 삼손을 보면, 감정의 힘인지 아니면 성령의 힘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삼손의 감정을 사용하셨습니다. 삼손과 블레셋의 감정 싸움으로 분쟁을 만들어서 영적으로 자고 있던 이스라엘을 깨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삼손이 무력을 사용할 때, 모든 경우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고자 하실 때 삼손에게 임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때에 내려지는 것이다

삼손의 감정이나 사사로서 규례를 지키는 유무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때에 내려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착각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하게 살아서 성령이 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 영적인 상태나 윤리적인 수준 이런 것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그 영을 부어주십니다. 결코 우리가 재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삼손을 보십시오. 삼손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임했는데도, 계속해서 거룩함과 거리가 먼 행동을 합니다. 자꾸 사체를 만집니다. 나귀 사체에서 갓 꺼낸 턱뼈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데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해도 내 방식대로 내 뜻대로 사역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감정과 기분으로 하나님의 영이 허락하신 힘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어할 수 있는 게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이 기준으로 세워져 있지 않으면, 계속해서 내 방식대로 내 뜻대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제어되지 못하는 힘은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강한 힘이라도 적절하게 조정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끕니다. 원자력과 같은 엄청난 힘도 결국 전기 에너지로 전환해서 적절하게 사용해야 유익한 것이지, 생짜 그대로 사용하면 핵폭탄이 되어 재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내가 블레셋 사람을 바보로 만들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뭔가 대단한 일을 행하면, 하나님이 행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한 것이라 뻐기게 됩니다. 결국 교만해져서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삼손을 보십시오. 일대 천으로 싸워 승리한 삼손은 마땅히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승리를 노래하는 삼손의 시에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가 없습니다. 자신이 나귀 턱뼈로 천 명을 죽였다는 자화자찬의 이야기뿐입니다. 앞선 수수께끼에서도 보듯이, 삼손은 문학적으로도 상당한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16절입니다. “이렇게 외쳤다. 나귀 턱뼈 하나로 주검을 무더기로 쌓았다. 나귀 턱뼈 하나로 천 명이나 쳐죽였다.” 이 구절의 원문을 보면,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나귀라는 단어와 무더기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동일합니다. 따라서 내가 나귀의 턱뼈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을 나귀로 만들었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나귀는 멍청한 바보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내가 블레셋 사람을 바보로 만들었다고 놀려댄 것입니다.

 

이렇게 삼손은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높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비아냥거리며 놀려댔습니다. 교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보면 막장처럼 행동하는 것이 삼손인데, 그래도 하나님은 이러한 삼손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인생을 사용하시는가 의문이 듭니다. 주변에 성령의 강한 힘으로 사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격적으로 형편없고, 자기 감정에 따라 자기 뜻대로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왜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실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삼손을 보면서, 결국 성령이 하시는 것은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는 크기와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의 온전함과는 결코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찬양을 잘하고 설교를 잘하고 사역을 잘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일 뿐입니다.

 

인생의 목마름은 교만한 자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시험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부족하고 흠이 많은 삼손에게 끝까지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회는 삼손에게 위기로 다가왔습니다. 갑자기 목이 심하게 말라서 죽게 된 것입니다. 이때 삼손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하나님께 물을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삼손에게 주신 일종의 시험과 같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수백 명과 맞서 싸운 후 대승을 거두자, 이세벨의 박해를 피해 탈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승리한 이후 시험에 빠진 엘리야는 갈증에 빠진 것입니다. 동일하게 삼손에게도 이런 현상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목마름은 교만한 자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시험입니다.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승리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전형적으로 잘되면 내 탓, 안 되면 하나님 탓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목이 마르고 나서야 자신의 승리를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으로 고백했습니다. 급한 상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드디어 여호와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 사건임을 삼손은 비로소 인정한 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을 찾으며, 심지어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까지 합니다. 내가 했다고 자만하는 이전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아직 자아가 살아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일 하다가 목말라 죽으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끝까지 자기 중심적입니다.

 

엔학고레, 부르짖는 자의 샘물

그런 삼손에게 하나님은 또다시 기적을 베푸십니다. 레히에 있는 한 우묵한 곳을 터지게 하셔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삼손이 그 물을 마시자, 제정신이 들어 기운을 차렸습니다. 그래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고 불렀습니다. 엔학고레, 부르짖는 자의 샘물이란 뜻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기대하지 못했던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터져 나오는 그 순간을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얼마나 자비와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샘물이 우묵하게 들어간 부분에서 솟아 나왔습니다. 라맛 레히와는 반대입니다. 라맛 레히는 나귀 턱뼈처럼 길쭉하게 나와서 높은 지대를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샘물은 낮은 곳에서 나옵니다.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인생의 갈증을 해결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것입니다. 이처럼 겸손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리고 라맛 레히라 불리는 나귀의 턱뼈는 죽음을 뜻합니다. 반대로 엔학고레의 샘물은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삼손을 보면서 인생의 성공이나 승리가 목마름을 해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낮은 곳에서 부르짖을 때 얻는 은혜의 생수만이 우리를 갈증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앞에 겸손히 항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승복하고 항복하는 자로 지어져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세상에서 용사가 되고 이름을 남기려는 욕망을 추구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감정에 따라 자기 공명을 나타내고자 사용한다면, 결국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인생의 목마름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 갈증을 해소하는 길은 낮아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의 용사처럼 되려고 하거나 자기 이름을 높이고자 할 때, 그 교만과 허영을 부수시는 분이십니다. 신앙은 철저한 자기 부인의 현장입니다. 라맛 레히를 부수고 엔학고레가 열리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영을 부어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반드시 이 일을 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성령이 하시는 역사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