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가복음

마가복음 1장 29절 - 39절 곧장 회당 밖으로 나와 홀로 기도하시다

by 알렉스강 2024. 2. 7.

https://www.youtube.com/watch?v=jnEPLcwLxWw&list=PLh4-9uGANmwqQ-_1lMojr-OaWAKWpjfpf&index=5

 

마가복음 1장 29-39절, 새번역

29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서, 곧바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갔다.

30 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사정을 예수께 말씀드렸다.

31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다가가셔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그 여자는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해가 져서 날이 저물 때에,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33 그리고 온 동네 사람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그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35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36 그 때에 시몬과 그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 나섰다.

37 그들은 예수를 만나자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39 예수께서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두루 찾아가셔서 말씀을 전하고, 귀신들을 쫓아내셨다.

 

에우튀스εὐθὺς, 엑크발로ἐκβάλλω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본문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핵심 키워드를 잘 찾아내는 것입니다. 지난 몇 주간의 설교를 통해 원어로 된 몇 가지 키워드들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 키워드들이 오늘 본문에서도 반복되고 있는데요. 이처럼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것은 해당 단어들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네 명의 수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에서 중요한 키워드로 에우튀스εὐθὺς를 말씀드렸습니다. 곧장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제자들은 대단한 지혜나 학식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향해 도전하고 모험을 떠나게 하는 호기심이나 용기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어떤 특징 하나가 보였지요. 예수님이 부르실 때, 그들은 곧장 모든 것을 내려놓고 따라갔습니다. 마가복음 저자는 이 모습을 곧장이라는 단어를 통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또한 예수님이 회당에서 축귀 하실 때, 악령을 몰아내는 능력을 묘사한 동사가 있었지요. 밖으로 끄집어내다, 엑크발로ἐκβάλλω 입니다. 이 동사는 밖으로 무엇인가를 끌어내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의미로 생각을 전환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따라서 밖으로 끌어내는 능력은 생각을 전환하는 것과 같기에, 즉 메타노에오μετανοήω 사람의 생각을 바꾸게 하는 회개와 그 뜻이 연결 지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축귀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인해 생각을 바꾼 회개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일종의 외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Jesus Christ dispossesses by Meister Konrad von Friesach, CC BY-SA 3.0

 

 

곧장 회당 밖으로 나아오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앞서 말씀드린 두 가지 핵심 키워드가 29절에서 다시 사용됩니다. 29절을 읽어보면,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라고 말합니다. 한글 새번역에서는 생략된 부분이 있기에, 생략된 부분을 다시 살려서 원어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곧장 그들이 회당 밖으로 나와’입니다. 곧장이라는 뜻인 에우튀스εὐθὺς와 밖으로 끌어낸다는 뜻인 엑크발로ἐκβάλλω라는 두 키워드가 동시에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 핵심 키워드가 동시에 또다시 사용되었다면, 해당 구절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 할 수 있겠지요. 마가복음 저자는 축귀 사역 바로 직후, 예수님이 곧장 회당에서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두 키워드를 사용한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굳어지고 갇힌 화석화된 회당으로부터 박차고 나온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교 기득권으로 진리가 감춰진 회당

당시 회당은 종교 기득권 세력인 바리새파 사람들에 의해서 구조적으로 타락한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진리를 감춰지게 만드는 곳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타락한 회당에 머물지 않으시고 곧장 밖으로 박차고 나아온 것입니다. 따라서 회당은 구약의 율법, 기득권 화 된 종교, 그리고 심리학의 표현에 빌리자면 굳어진 옛 자아를 상징합니다. 이로부터 박차고 나아올 때, 진리는 참된 진리로서 그 모습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회당으로 상징된 율법이나 타락한 종교, 그리고 옛 자아로 결코 가두어 둘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진리는 물론 그 본성이 불변하는 것이지만, 진리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한되거나 고정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리를 문자로든, 생각으로든, 시스템적으로 붙잡았다고 여긴다면, 사실 그것은 그 순간부터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진리가 결코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회당에 머무르지 않고 밖으로 나아온 것처럼, 어느 순간 진리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 버립니다.

Ruins of the ancient Great Synagogue at Capernaum (or Kfar Nahum) from the 4th century CE.

 

진리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인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보셔도 이러한 진리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버나움 회당 축귀 사건 이후, 예수님의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역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명성과 권위가 자연스럽게 가버나움에 자리를 잡고 세워졌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하고자 할 때, 일의 기반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 기반을 통해서 안정적으로 확장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 복음 운동을 성취하기 위해서 수제자들의 고향이기도 한 가버나움을 기반으로 잡으셨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인간적인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나십니다.

 

이른 새벽 기도하시다가 사람들이 자신을 찾는다는 베드로의 말을 듣고 이런 말씀을 하시죠. 38절입니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예수님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갈릴리 전역을 두루 다니시면서 여러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특정 지역에 기반을 두거나 머물지 않고 계속 움직이셨습니다.

 

길을 떠난 영혼은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정신과 의사이자 신학자, 강연가인 스캇펙이란 분이 있으시죠. 이 분이 저서 중 아직도 가야 할 길이란 책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The road less traveled입니다. 직역하면, 좀처럼 여행하지 않은 길이라 할 수 있어요. 제가 우연히 도서관에서 이 책의 옛날 번역본을 봤습니다. 그 제목이 달랐는데, 옛 번역본 제목이 마음에 더 와닿았습니다. 그 제목이 길을 떠난 영혼은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진리를 찾는 부름을 따라나선 영혼은, 그 뜻을 따르기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찾아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The Road Less Traveled's bookcover

 

노자의 도덕경 2장에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공성이부거功成而弗居, 성인은 모든 것을 이루고도 머물지 않는다. 좀 더 풀이하면, 성인이 진리를 성취하면, 그것에 안주하거나 머물지 않고 계속 움직여 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혹자는, 진리가 계속 움직이는 성질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역마살이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원래 불변이나 항구적인 것이 그 본성입니다. 그런데 왜 진리를 성취하면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할까요?

 

머문 적이 없으니 떠날 필요가 없다는 역설

도덕경을 보면, 공성이부거功成而弗居를 언급한 이후, 그 이유에 대해 알려주는 이어지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이룸에도 불구하고 왜 머물지 않는가 하면, 머무르지 않았으니 떠나지도 않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그렇죠. 머문 적이 없으니 떠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깐 머물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것이야 말로 모든 것을 이루었으며, 진정으로 고정된 불변하는 실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는 머물지 않고 움직일 때, 오히려 역설적으로 진리의 참된 속성인 불변성과 항구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하나님을 붙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은 사라져 버리십니다. 하나님을 내가 다 안다, 성경 말씀을 내가 다 깨달았다 하는 순간에 내 안에 진리이신 성령님은 떠나십니다. 하나님을 다 안다고 하는 것만큼 더 큰 영적 교만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란 나를 찾아가는 힘겨운 여정이라 할 수 있지요. 그 길에는 끝이 없습니다. 만약 끝에 이르렇다면, 인생을 끝내는 날입니다.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입니다. 숨을 쉬며 살아있는 동안은 끝없이 진리이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위기가 찾아올 때를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영적인 활동들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입니다. 구도의 길을 나서기보단 안주하고 싶을 때입니다. 외적인 활동에 빠져 내적인 갈망을 놓쳐 버릴 때입니다. 요즘 가장 감사한 것이 있다면, 홀로 시간을 보내면서 진리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 개척을 하고 나서 가장 감사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점입니다. 홀로 은둔할 수 있다는 것, 말씀을 읽고, 책을 찾아보고,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나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날마다 새로워요. 이런 기쁨을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세속에 영향을 받지 않은 천상의 존재를 나타내는 불멸의 흰사슴과 노인을 표현한 명나라 시대의 그림

 

진리이신 예수님이 분노하는 장모에게 향하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진리이신 예수님이 회당 밖으로 곧장 나가셔서 향한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시몬과 안드레 집으로 가셨다고 하지요. 때마침 그곳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몸져누워 있었습니다. 원래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부터 자신의 동생인 안드레와 함께 장모와 더불어 살았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집을 나선 이후 장모는 어떤 이유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열병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에게로 향해 가셨습니다.

 

베드로의 가정을 두고, 베드로와 베드로의 장모가 어떤 관계였는지에 대해서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가 착한 사위라서, 어려운 형편에 있던 장모를 자기와 동생 안드레가 살던 집에 모시고 살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니면 반대로 베드로가 장모님 집에 얹혀살면서 처가살이를 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장모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원어 펜테라πενθερὰ는 의붓어머니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어릴 때 계모 밑에서 가장으로 자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당시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나섰을 때, 베드로의 가정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부모님에 대한 언급이 없기에, 아마도 베드로의 아버지는 진작 돌아가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함께 모시며 기거한 여인이 장모인지 계모인지는 모르지만, 그 여인의 사위이거나 아들이기도 한 베드로는 남편이나 아들로 역할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모든 책임을 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베드로 집터 위에 세워진 가버나움 성 베드로 교회

 

그런 베드로가 가정을 제쳐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으니, 베드로의 집안은 심각한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성경이 자세히 말해주지는 않지만, 정황상 추측해 보면, 이 사건은 베드로의 장모에게 상당히 큰 충격을 주었겠지요. 지금까지 열심히 일하며 자신과 가정을 잘 돌보던 베드로가 아무 대책도 없이 갑자기 예수라는 사람을 따라갔으니 큰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앞으로 나와 내 딸은 뭘 먹고살아야 하나며 심각한 위기감에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비록 풍요롭지는 않았어도 화목하게 잘 살고 있던 차에 예수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자기와 딸의 형편을 어렵게 하고 인생을 힘들게 했으니, 예수님에 대한 서운함과 섭섭함, 그리고 원망과 불평이 장모의 속에서 부글부글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베드로가 와서 예수님이 자기 집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하면서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베드로 장모의 화병

본문에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이 났다고 했는데, 열병이 나다는 그리스 원어는 푸레쏘πυρέσσω 입니다. 푸레쏘의 어원은 퓨라πυρὰ, 불입니다. 즉 장모가 불이 났다는 것입니다. 화병이 나서 몸져누워버린 것입니다. 의학백과사전을 살펴보니깐 화병을 이렇게 정의했더라고요. 강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고 참는 데서 오는 증세로, 주로 여성들에게 발병하는 질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로 스트레스를 받는 여자들에게 생기는 속병이라는 것입니다. 화병은 특히 열이 치밀어 오르는 증상을 보이는데, 화병이라는 말처럼 속에 불을 품은 것처럼 속이 타는 듯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이 화병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베드로 장모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분명히 화병이 들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딸과 자신의 인생을 어렵게 만든 예수와, 그를 좇아간 베드로에 대한 원망과 섭섭함이 점점 심해져서 마침내 화가 폭발하여 온몸에 열이 펄펄 나는 증세가 나타난 것입니다. 베드로도 나름 장모를 설득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마음이 딱 닫힌 장모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듣기 싫다는 겁니다.

 

The Horse-Headed One, Hayagriva; Tibet, 18th century; Rubin Museum of Art.

 

자기를 보호하는 권리인 분노

화는 일종의 분노라는 감정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분노를 이렇게 분석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언제 분노하는가 하면, 뭔가 부당하게 대우받을 때 분노한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 따라 분노를 부당한 세계에서 나 자신을 지키는 본능적인 힘이라고 정의합니다. 따라서 내가 분노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기준에 볼 때 부당하게 잘못되었고, 그것을 바로 잡고자 하는 내면의 에너지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노를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는데, 사실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분을 내는 것을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분노는 자기를 지키는 본능적인 힘이기에, 일종의 자기를 보호하는 권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가 문제인 것은 분노로 인한 감정 조절이 안되어서 문제입니다. 조절되지 않는 감정에 휩싸여서, 한꺼번에 감정을 마구 발산하고 끝나면, 결국 에너지는 다 타고 날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내가 써야 할 곳에 쓸 에너지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분노는 부당함에 대한 항거이기에, 자기 의로움을 내세울 때가 많습니다. 내가 옳다고 화를 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분노는 자기 의를 내세우다가 그만 교만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분노는 교만의 다른 모습이라 말하기도 하지요. 성경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인생들이 보이는 대표적인 모습 두 가지가 있는데, 분노와 교만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분노나 교만도 영적으로 유익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분노는 큰 에너지입니다. 만약 그 에너지를 가지고 적절하게 통제하여 사용할 수 있다면 유익을 줍니다. 대표적으로 불의에 맞서거나 문제 상황을 개선하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노가 적절하게 사용되려면 오랜 훈련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분노를 붙잡아 두는 겸손과 인내로 다스려야 합니다. 이럴 때, 분노는 거룩한 열정이 되어서 큰 유익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조절 가능한 가스의 불처럼 일상생활에 있어 요긴하게 음식을 하거나 난방을 하는 데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노가 단지 감정적인 토설로 표출되면, 한꺼번에 엄청난 생명 에너지를 소모하고 깊은 내상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나만 다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깝게도 주변의 관계가 악화되고 상대도 다칠 수 있습니다. 분노가 부르는 극단적 파괴로 인한 손해는 정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입니다.

 

사랑과 진리가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분노가 거룩한 열정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이 그리고 있는 모습처럼, 진리이신 예수님과 만나야 합니다. 시편 85편에 유명한 구절이 있지요. '사랑과 진리가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바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장모가 만난 상황도 이와 같다고 보입니다.

 

분노는 불의에 대한 저항이기에, 사실 그 안에는 사랑과 정의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사랑과 정의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지 못해서 불을 뿜는 것입니다. 베드로 장모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분노가 진리를 마주한 일입니다. 진리를 통해 자신이 그토록 갈망한 사랑과 정의가 충족되자, 분노는 거룩한 열정으로 변하여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Laurent de La Hyre (French, 1606–1656), “The Kiss of Peace and Justice,” 1654.

 

분노를 거룩한 삶의 에너지로 승화시키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를 만날 때 한 가지 퍼포먼스를 보이면서 열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손을 꽉 잡고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손은 권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장모의 손을 잡음으로 먼저 장모의 분노가 정당한 권리임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 분노의 에너지를 온전히 사용하도록 손을 잡아서 이끌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장모를 이끈 길이 무엇입니까? 장모에게 일어난 분노의 원인 한가운데로 초대했습니다. 자신의 가정을 위기에 빠뜨리게 만든 베드로가 따라나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역설적으로 헌신하게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장모 안에 있던 엄청난 분노의 에너지를 부정적인 방향이 아니라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린 것입니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던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분노는 거룩한 열정으로 변해 하나님 나라 운동을 돕는데 본인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헌신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장모가 예수님의 손에 이끌리여 열병이 떠나가자 예수님과 제자 일행들을 수종 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만 섬긴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제자들, 그리고 자신의 집을 찾아온 귀신 들린 자, 병든 자 할 것 없이 모두를 섬겼습니다. 이런 큰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분노라는 거대한 힘을 승화시켜 거룩한 삶의 에너지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홀로 기도하시다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한 가지 더 살펴보도록 합시다. 오늘 본문 후반부를 보면,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친 이후에도 많은 축귀와 신유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주변의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아마도 늦은 시간까지 이들을 돌보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사역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아마도 옆에서 돕고 있었던 제자들은 피곤했기에 눈을 붙이거나 무엇인가 먹으며 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집에 머무르거나 쉬지 않으시고, 아주 이른 새벽 홀로 외딴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기도하다는 그리스어 동사는 프로세우코마이προσεύχομαι 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도하다는 동사는 에우코마이εὔχομαι인데, 특별히 여기서 프로스πρός, 무엇 앞에서 라는 전치사와 합성된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에우코마이εὔχομαι가 아니라 프로세우코마이προσεύχομαι라는 동사를 사용한 것은 분명 의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기도할 때, 특정한 장소에서 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외딴곳에서 기도했다고 하지요. 여기서 외딴곳은 황량하고 적막한 장소를 말하기도 하지만, 정확하게는 홀로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어느 특정 장소에 가서 기도했다기보다는, 홀로 기도했다는 것에 주목한 것입니다.

 

 

Christ in the Desert, Painted by Ivan Kramskoi, © Tretyakov Gallery, Moscow

 

기도하는 본질적인 이유

기도는 본질적으로 나의 존재의 이유,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내 인생에 허락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이 길을 찾아가는 것은 큰길이 아니라 좁은 길입니다. 깊은 산속 외진 좁은 길을 걸어보셨을 것입니다. 그 길을 걸을 때, 둘이서 나란히 걷기 힘듭니다. 혼자 걸어야 합니다. 이처럼 기도는 좁은 길을 걷는 것과 같아서 홀로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 기도하지 않으면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나 자기 발견이 불가능합니다. 

 

물론 우리가 때로는 공동체로 모여서 합심해서 기도해야 하지만, 기도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홀로 기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6절에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처럼 홀로 기도하며 나의 내면을 향해 걸어갈 때 진리이신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왜 기도하셨을까?

그런데 여기서 이런 생각이 들지요. 예수님은 왜 기도하셨을까요? 사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자신의 존재 이유, 즉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살아가는 이유를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 31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축귀 하실 때, 내쫓긴 악령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굳이 악령들이 말하지 않아도, 예수님 본인이 너무나 분명히 잘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누구보다 자기 존재 이유를 잘 알고 계신 예수님이라면 굳이 기도가 필요 없지 않았는가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왜 기도했을까요? 우리가 기도할 때를 생각해 봅시다. 주로 문제가 있다거나 마음이 허할 때 기도하게 되지요. 그럼 진리이신 예수님도 허하셨을까? 이런 생각도 해 볼 수 있겠지요.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기도를 깊이 하거나, 때로는 말씀에 깊이 빠져 있을 때, 그리고 설교를 한 이후에 가끔 한 번씩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 있어요. 주로 충만함과 기쁨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나도 모를 허함이 있습니다. 영혼의 메마름과 같이 뭔가 허전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진리를 대면할 때 느껴지는 허함과 메마름

일반적으로 진리를 생각할 때, 우리는 충만이나 완전을 생각하지요. 그러나 진리는 또 다른 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바로 허함이나 메마름이니다. 진리 그 자체가 공허하거나 메말라서가 아닙니다. 진리가 드러날 때, 진리와 대비되는 거짓으로 가득 찬 공허한 세상의 벌거벗은 모습을 우리가 대면함으로 인해 생기는 허탈감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과 대비되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부끄러움이기도 합니다.

 

바울을 생각해 보세요. 바울은 로마서 7장 마지막에 자신이 한 가지 법을 깨달았다고 하지요.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 속에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서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허함이자 메마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 가지 기도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기도 장면이 세 번 나옵니다. 첫 번째가 바로 오늘 본문이고, 두 번째가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킨 이후입니다. 오병이어의 경우,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을 본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대중들이 진리를 붙잡으려고 하자, 진리이신 예수님이 피하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예수님의 모습처럼,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움직여 나아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 이런 생각도 들어요. 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시고,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이후, 예수님도 그 추하고 연약한 인간의 민낯을 그대로 보셨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인간도 허하지만, 예수님도 허하시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자신에게 기적을 바라며 몰려드는 군중들을 보면서도 안타까워하시며 허탈해하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도 자신과 군중들의  간격, 진리와 거짓의 간격을 메우고자 홀로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Christ in Gethsemane, Heinrich Hofmann, 1886

 

마가복음이 소개하는 세 번째 기도의 장면은 십자가 돌아가시기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입니다. 로마 군병에게 체포 당하시기 직전, 심히 고민하는 가운데 예수님은 잠시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신 끝에, 결국 나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예수님이 정말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으로 이 땅의 오셨음을 알게 되지요. 심지어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어요. 메시아로서 이 땅을 구원하러 온 자신의 존재 이유도 알고 계셨어요. 그럼에도 우리와 같은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계셨기에, 우리 인간의 육신에 따른 헛된 애욕과 집착, 그리고 육신의 한계에 따른 공허함과 메마름을 우리와 똑같이 느끼셨던 것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은 홀로 기도하기를 요구하신다

그래서 진리이신 예수님도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시면서 인간의 추잡스러움을 보셨을 것이지요. 그리고 베드로 장모의 노골적이고 무례한 분노도 다 참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 생겨난 질병들, 그 질병에 붙은 인간의 온갖 탐욕과 집착을 자신의 영으로 다 씻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 일을 행하시는 가운데, 예수님의 육신의 몸도 더럽혀졌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시면서, 이것을 다 밖으로 끄집어내어서 흘려보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에 다가갈수록, 풍성함이나 즐거움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진리에 다가갈수록, 우리는 메마름이나 공허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고약한 냄새를 맡기도 하고 온갖 더러움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나의 기대와 다르다고 해서, 기도하기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영적으로 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로 향하여 나아갈 때, 진리이신 하나님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결국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그것도 홀로 기도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의 장모를 생각해 보세요. 장모는 결국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던 사위 베드로를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길이 무엇입니까? 자립하여 홀로 기도하며 내게 맡겨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손을 잡아주시면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시고 요구한 것은 사실 홀로 기도하기입니다. 많은 이들을 수종 드는 것은 그날 하루 한 번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떠난 이후 그 빈자리를 경제적으로나 영적으로 메우는 것은 장모 스스로 평생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장모는 베드로 보다 훨씬 더 강력한 제자의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가장 어려운 영적 훈련인 자립 해서 홀로 기도하는 것을 요구받은 것입니다.

 

홀로 기도한다는 것

그렇다면 홀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마가복음 1장에서 계속 반복되는 키워드처럼, 에우튀스εὐθὺς 엑크발로ἐκβάλλω, 즉 곧장 밖으로 끌어내는 것입니다. 나의 내면으로 곧장 들어가서 나의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모든 애욕과 집착에 묶여 있었던 나의 생각을 밖으로 끄집어내어서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로워진 내 영혼에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진정한 회개라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홀로 기도하는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참된 회개의 능력이 어떤지 알고 있습니다. 분노가 거룩한 열정으로 변하여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뜻으로 향하도록 만드는 새로운 에너지가 나의 내면에 차오르는 것을 홀로 기도하는 순간 경험합니다. 베드로의 장모 안에 있던 분노가 거룩한 열정으로 승화되자 많은 이들을 섬기도록 만든 거룩한 삶의 에너지를 홀로 기도할 때마다 그 내면에서 채워짐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도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내면으로 들어가 홀로 기도합시다. 홀로 기도할 때, 반드시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 계시의 영으로 온전한 진리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관념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성령이 주시는 능력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도록 행하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