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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4장 21절-34절 땅에 씨를 뿌리면 자라기 마련이다

by 알렉스강 2024. 6. 12.

https://www.youtube.com/watch?v=FANFaya4HkQ&t=2228s

 

마가복음 4장 21절-34절 새번역

 

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다가 말 아래에나, 침상 아래에 두겠느냐? 등경 위에다가 두지 않겠느냐?

22 숨겨 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23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2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만큼 너희에게 되질하여 주실 것이요, 덤으로 더 주실 것이다.

25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26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27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에 알찬 낟알을 낸다.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30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32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로, 이와 같이 많은 비유로 말씀을 전하셨다.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으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다.

 

 

감추어진 것 같지만 드러나 있는 진리

종종 핸드폰, 지갑, 차 키를 찾다가 바로 눈앞에 두고도 찾지 못해 허둥지둥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물건들이 눈에 확 들어오며, 왜 이걸 못 봤지 하며 자책하게 됩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추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드러나 있습니다. 누구나 볼 수 있는데도 쉽게 보지 못합니다. 보는 눈이 있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말해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듣고 깨달을 사람만 들으라는 의도였습니다.

 

예전에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고 그 의미를 몰랐던 말씀이 시간이 지나면서 큰 감동과 위로를 주는 것을 경험합니다. 영적인 세계는 들릴 때가 있고, 더 나아가서 보일 때가 있는 것이지요. 사람은 들리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잘 들리거나 눈에 선명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는 보이는 것이 없기에 일단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 들을 때는 무슨 소리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계속해서 들어야 합니다.

 

잘 들어야 한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음에 담아 두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말씀은 내면에서 떠오르게 됩니다. 이렇게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할 때, 이를 기준으로 삼아 삶과 행동으로 이어갈 때 신앙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이는 마치 씨앗을 뿌린 뒤 자라서 열매를 맺는 과정과 같습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듣다를 'audire'라고 합니다. 잘 듣는 경청을 'obaudire'라 하는데, 여기서 영어 단어 'obedience'가 나왔습니다. 즉, 잘 듣는 사람이 결국 순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어느 때보다 잘 들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고난의 시간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이 말씀을 사모하는 때입니다. 고난이라는 쟁기가 우리의 마음 밭을 갈고 엎는 역할을 하며, 막혀 있던 귀를 열어줍니다. 여기에 인생의 눈물이라는 거름을 더하고, 인내의 시간을 통해 더 깊이 파면 팔수록 마음 밭이 좋아집니다. 듣는 것은 마음에 새겨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새겨졌다는 것은 들은 대로 행동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들음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고, 그 변화가 우리의 일상과 행동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열매가 맺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이 마치 한 해의 농사를 짓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나는 영적인 열매를 맺고 있는가?

마가복음 4장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네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이어 등불의 비유, 자라나는 씨앗 비유, 겨자씨 비유가 나옵니다. 이 세 가지 비유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부연 설명합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씨앗이 떨어진 네 가지 경우를 말합니다. 길 가, 자갈밭, 가시떨기, 좋은 땅입니다. 이 네 가지 중 좋은 밭에 떨어져야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좋은 밭이어야 할 텐데, 내가 좋은 밭인 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내가 영적인 열매를 맺고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을 오늘 본문의 세 가지 비유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영적인 열매를 맺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살펴보겠습니다.

 

숨겨 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첫 번째 비유는 등불의 비유입니다. 마가복음 4장 21-22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다가 말 아래에나, 침상 아래에 두겠느냐? 등경 위에다가 두지 않겠느냐? 숨겨 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등불은 방 전체를 환하게 하기 위해 위에 두는 것처럼, 복음은 나 혼자 간직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땅에 심어진 씨앗은 많은 열매를 맺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당연히 그 열매의 씨앗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게 됩니다. 의도하지 않아도 씨앗은 바람을 타고 퍼져나갑니다. 이것이 좋은 땅이라는 증거입니다.

 

달란트 비유처럼 우리 인생은 언젠가는 받은 것에 대해 결산해야 할 날이 옵니다. 게을러서 열매를 땅에 묻어둔다면 책망받을 일입니다. 열매는 나누면 풍성해지고, 기쁨과 은혜도 나누면 커집니다. 잠언 13장 4절은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진리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꾸준함과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고,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했습니다. 진리는 보고자 하는 자에게 보입니다. 진리를 알수록 더욱 힘써야 합니다.

 

진리란 일종의 술래잡기와도 같습니다. 숨었다고 해서 안 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에는 꼭 잡게 됩니다. 아이들과 술래잡기할 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이가 술래가 될 때, 내가 너무 꽁꽁 숨어버리면 안 됩니다. 찾다가 지치면 아이들이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타이밍이 중요해서 지칠만 할 때, 짠 하고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면 너무 재미있어하면서, 아빠하고 달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치려고 할 때,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타나십니다. 사랑의 관계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사랑을 잘하려면 밀당을 잘해야 합니다. 밀고 당기다가 결국에는 서로 하나가 됩니다.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고, 사랑할 사람은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진리를 막아서는 가장 큰 장애물인 두려움

등불 비유에서 왜 사람들이 어리석게 등불을 침대 아래 두겠습니까? 그 이유는 두려움입니다. 진리를 찾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수영을 배울 때와 비슷합니다. 물에 들어가 힘을 빼면 몸이 뜨는데, 두려워서 힘을 빼기가 어렵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직접 고난의 과정을 경험해야 합니다. 생각으로 단순히 두려움을 내려놓아야지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물에 빠져 허둥대다 보면 결국 힘이 빠지면서 두려움을 극복하게 됩니다. 고난을 묵묵히 지나가다 보면, 두려움을 받아들이게 되고, 두려워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진리를 찾아갈 때 가장 큰 걸림돌은 두려움입니다. 고난은 두려움을 넘어서게 해주는 용기와 힘을 기르는 훈련 기간입니다. 사실 고난 중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으로 두려워서 주저앉아 버립니다. 하나님을 만날 절호의 기회를 두려움 때문에 빼앗깁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고난이 크면 클수록 더 과감하게 나갑니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빈익빈 부익부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4장 25절에서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땅속 깊이 갈수록 더 값진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영적인 것도 깊이 들어갈수록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고난이 더 세지면, 더 깊은 진리로 가기에 더 기쁠 수 있습니다.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란다

두 번째는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입니다. 마가복음 4장 26-27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 구절은 마가복음에만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씨앗을 뿌렸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났습니다.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자라난 것입니다.

 

아이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넷째를 보면 언제 컸나 싶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저보고 언제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것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는 사이에 씨앗이 자라듯, 영적인 성장은 눈에 보이지 않게 이루어집니다. 씨앗을 심으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뿌리를 내리며 싹이 돋아 자라납니다.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지만 자랍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뿌린 대로 거둡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단을 거둡니다. 영적인 눈이 있는 사람은 이것을 압니다. 설령 영적인 눈이 없더라도, 마지막 때가 되어서 주님 앞에 서게 되면 알게 됩니다. 열매로 안다고 했던 것처럼, 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씨를 뿌린 사람이 있기에 열매가 맺힌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씨앗을 뿌렸기에 시작된 것입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알곡의 씨앗을 뿌립니다. 그러면 알곡이 자립니다. 반대로 가라지를 뿌리면 가라지가 자랍니다. 인간은 스스로 먼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고 있다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누군가의 눈물과 기도가 있습니다. 친구의 눈물, 부모의 기도, 혹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같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도 누구는 잘 자라고, 누구는 잘 자라지 못합니다.  똑같은 땅에 똑같이 물 주고 거름 주고 햇빛을 받아도 열매가 다릅니다. 똑같은 조건에서도 열매가 다릅니다. 왜 그럴까요? 열매는 내가 맺는 것이 아닙니다. 농사는 농부가 짓는 것 같지만, 하늘이 짓습니다.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십니다. 이게 감추어진 신비입니다. 때론 하나님은 왜 나를 이렇게 이끄시는가? 내 인생을 지금 여기에 살게 하시는가? 왜 이 사람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게 하셨는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신비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결국 씨를 뿌리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자라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추수 때까지는 지켜보고 계신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이 있습니다. 그 기한 안에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기한은 아무도 바꿀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시간만큼은 보장받습니다. 이게 농사와도 비슷한데요. 처음에 씨를 뿌리고 떡잎이 나왔을 때 마음에 들지 않는 종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뽑아버리지는 않습니다. 추수 때까지 놔둡니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떡잎부터 안다고 별 볼일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내 생각한 것과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약해 보였던 게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각자 하나님의 시간표와 계획이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가만히 지켜보십니다. 때가 되면 사명을 다했기에 데려가십니다. 반대로 사명을 다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그 누구도 우리를 해치지 못합니다. 구약의 에녹은 365세에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오래 살았다 생각할 수 있으나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이삼십 대에 삶을 마감한 것입니다. 안타까운 죽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에녹이 가장 복 받았다고 합니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열매가 중요합니다. 에녹의 시간표는 365년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동안 가장 좋은 열매를 드리고 사명을 다하자, 하나님이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지막 세 번째는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마가복음 4장 30절부터 32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습니다. 겨자씨는 너무 작아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라고 하지요. 그러나 자라면 작게는 3미터, 크게는 4미터가 넘게 자라게 됩니다.

 

영적인 세계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보잘것없고 초라해 보일 수 있습니다. 처음 신앙 생활할 때에는 순수하게 믿다가도, 결국 세상에 나가 살아보니 현실적인 감각이 생기면서 세상의 힘이나 돈이 더 대단해 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너무 작고 미약해서 이게 정말 있는 건가 싶을 정도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깐, 내가 무엇인가에 홀렸거나 속았나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화려한 왕궁이 아닌 베들레헴 마구간 구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어부와 세리 등으로 사회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학식도 없고 변변치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들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의 말처럼 복음은 기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고,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그냥 던져 놓고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시작이 작고 초라하고 미련해 보이지만, 결국 모든 나무 중에서 가장 큰 나무로 자라납니다. 진리는 마지막이 되면 분명히 드러납니다. 우리의 소명이 다 되어 하나님께 부름 받을 때면, 비록 우리의 육신은 쇠해지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그 어느 것보다 강한 성으로 우뚝 서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홀로 있을 때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다

마지막으로 마가복음 4장 33-34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로, 이와 같이 많은 비유로 말씀을 전하셨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으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다.” 여기서 '따로'라는 말을 개역개정에는 '홀로 있을 때'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제자들과 홀로 계실 때에만 비유의 의미를 풀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홀로 있을 때 어떻게 하는가라는 점입니다.

 

제자라면 혼자 있을 때 예수님께 묻습니다. 제자가 아닌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 예수님께 묻지 않고 세상에 답을 구합니다. 혼자 있을 때 예수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주님은 말씀해 주시고 함께 해주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거나 믿음이 생기지 않아 주저앉을 때, 주님은 결코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사실 홀로 있을 때, 내가 주님을 찾은 것 같지만, 주님이 나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홀로 있는 나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주시고, 그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비밀을 간직한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과 위로입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믿는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나는 좋은 땅인가요? 열매를 맺고 있나요?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등불을 등경 위에 두고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비추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숨기지 말고, 들은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씨앗을 땅에 뿌리십시오. 순종하고 뿌리기만 하면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말씀대로 행하면 됩니다. 시작은 미약할 수 있습니다. 겨자씨 비유처럼 작고 초라해도 뿌리기만 하면 가장 큰 나무가 되어 온 땅에 충만할 것입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믿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이 우리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두려움이 커지면 아는 것도 잊어버리고, 눈이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됩니다. 세상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이 예수님보다 더 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때 믿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세상이 커 보이고 예수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찾는 사람은 예수님의 음성만 들어도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마치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양과 목자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기에, 예수님의 말씀만 들리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풍랑 이는 갈릴리 호수로 데리고 가십니다. 풍랑 가운데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곤히 주무시고 계시고, 제자들은 이제 죽었다고 소리칩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풍랑만 보이다가 몸에 힘이 다 빠지고 이제 죽었다고 포기하는 순간 배 한 구석에 앉아 계시던 예수님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고 계신 예수님을 깨웁니다. "주님, 죽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예수님은 풍랑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풍랑이 멈추고 잠잠해졌습니다. 예수님이 풍랑을 향해 꾸짖으신 것 같지만, 사실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있지 않느냐. 두려워 말고, 잠잠하라" 그제야 제자들은 예수님이 풍랑보다 훨씬 크신 분이라는 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니깐, 믿음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풍랑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두려움을 줍니다. 진리로 향하는 발걸음을 막아섭니다. 자신들이 예수님보다 크다고 속이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럼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냥 듣지 마시고 잘 들어야 합니다. 들은 말씀대로 행하십시오. 반드시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두려움을 넘어서 믿음으로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역사와 복음의 생명을 누리는 모두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