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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13장 1절-8절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by 알렉스강 2024. 11. 16.

https://www.youtube.com/watch?v=XJ5Z5Ld_m5E&t=1458s

 

 

마가복음 13장 1절-8절 새번역

 

1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3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보고 앉아 계실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따로 예수께 물었다.

4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는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다.

7 또 너희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일어난 소식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어도, 놀라지 말아라.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8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며, 지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기근이 들 것이다. 이런 일들은 진통의 시작이다.

 

 

갈릴리 촌놈 예루살렘에 가서 눈이 휘둥글해지다

제가 대전 세종 지역으로 내려온 지 10년 되니 충청도 촌놈이 다 되어가는 듯합니다. 누굴 만날 일로 한 번씩 서울에 가면 코 배일까 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릴리 촌놈들입니다. 예수님 따라 십자가 순례 길에 올라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철없는 어린아이들처럼 눈이 휘둥그래하게 커져서 이리저리 쳐다봅니다. 저도 처음에 유럽에 갔을 때, 도시의 야경의 분위기와 성당의 웅장함에 매료가 되어서 정신이 없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성전의 거대한 돌과 화려한 건물을 바라보고 입이 벌어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찬물을 확 끼얹히시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한마디로 정신 차리라는 것입니다.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이 웅장한 성전이나 예루살렘 도성이 영원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다 무너지고 사라져 버리는 인생일 뿐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이중성

여기서 예루살렘 성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도성으로 하나님의 강력한 보호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만이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에 따른 죄악 된 모습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가장 강하게 비판한 대상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왕과 제사장들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화석화되어서 사라져야 할 옛 예루살렘이 있고, 그리고 새롭게 등장할 새 예루살렘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대표적인 신학 이론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 이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과 땅의 도성(Civitas Terrena)의 개념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곳이고, 땅의 도성은 사단의 통치를 받는 곳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 역사 가운데 이 두 도성 함께 공존하며 서로 긴장 관계를 보인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도성에 거해야 할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두 도성이 딱 고정되어 있어서 우리가 잘 식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유혹하고 영의 눈을 어둡게 만들어서 잘 식별하기 어렵습니다. 겉으로는 번쩍번쩍하게 폼이 나는 하나님의 도성처럼 보이는 것이 실상은 사단의 도성일 수 있고, 반대로 겉으로는 초라하고 볼품이 없어도 하나님의 도성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두 도성 가운데 하나님의 도성이 무엇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야 말로 영안이 열린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리두고 빨리 판단하지 말고 기다리기

사물을 관찰할 때 가까이서 자세히 보아야 하지만, 전반적인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거리 두기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가까이서만 파악하면 장님이 코끼리를 손으로 만져보고 내가 코끼리를 다 안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밖으로 나가셔서 동편에 있는 올리브산에 오르셨습니다. 일종의 거리 두기를 하신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가면 올리브산이 여행 코스입니다. 예루살렘이 한눈에 다 내려다 보이기 때문입니다. 황금으로 둘러싼 지붕을 한 성전이 보이는 예루살렘의 사진을 보셨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감람산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감람산에 올라가서 성전을 바라보니깐 그 크던 성전이 이제는 작아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이 좀 정신을 차리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주는 권면은 무엇보다 빨리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는 잘 속습니다. 매는 먼저 맞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좋은 것은 나중에 선택하는 게 좋습니다. 당장 좋다고 서로 가지려고 달려드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기다리고 천천히 선택해도 결국 내 것이 됩니다. 그러니 빨리 판단하지 말고 먼저 참고 기다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성경에서 기다림을 강조한 사건은 너무나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을 약속하셨지만, 사라는 나이가 많아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라는 자신의 몸종 하갈을 통해 아브라함이 자녀를 얻도록 제안했고, 아브라함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하갈이 임신한 이후 사라와 하갈 사이에 갈등이 생기며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사무엘이 와서 제사를 드리기로 약속한 날에 사무엘이 지체하자, 자신이 직접 번제를 드리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왕위를 영원히 이어지지 못하게 하시고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렇게 제자들이 정신을 차린 다음 제자 중 베드로와 야곱과 요한이 예수님께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4절과 5절입니다.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처럼 대단한 것들도 결국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것이 언제 일어나고, 일어날 때에 무슨 징조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때와 징조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은 그 누구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2장 13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여기서 두 가지 악은 결국 하나입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인간적 방법을 찾게 됩니다. 스스로 웅덩이를 판다는 것은 나 자신을 의지하려는 것인데,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결국 사람을 의지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려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내가 지혜가 있고 힘이 있으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혜가 있다면 교만하다 욕하고 힘이 있으면 질투하여 빼앗고자 합니다. 따라서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의지하게 되어 결국에는 사람들에게 배신당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많이 경험하지 않습니까? 내가 가장 가까이하고 신뢰하던 사람이 나의 등 뒤에서 칼을 꼽는 경우 누구나 한번쯤 다 겪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거나 세상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영적 갈증과 공허함이 있습니다. 앞서 예레미야 말씀대로 터진 웅덩이는 물을 가둘 수 없음으로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2장 22절에 그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너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숨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어차피 흙으로 와서 흙으로 돌아갈 죽을 인생인 사람에게 의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성을 분별하기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는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문제는 사람들이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하면서 속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속이는 자들을 잘 피해야 하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닌 것이지요. 우리 시대에도 이단과 같은 거짓 선지자들, 적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이런 악한 세력에게 혼동되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단에게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제대로 깨어 있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거짓과 미혹의 메시지에 속아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 두 도성 이론을 말씀드리면서, 참된 하나님의 도성을 식별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겉모습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도성이라 생각하고 거하는데, 알고 보니 사단의 도성일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의 도성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 신앙이 하나님 도성을 찾아가는 것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그만큼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것입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도 결국 우리 신앙이 하나님의 도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도성을 분별하여 찾아가기 위한 방법을 오늘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해줍니다. 7절과 8절입니다. “또 너희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일어난 소식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어도, 놀라지 말아라.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며, 지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기근이 들 것이다. 이런 일들은 진통의 시작이다.”

 

눈에 보이는 성은 허물라

7절과 8절은 전쟁과 기근과 고통의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소위 종말의 상황입니다. 당시 시대 사람들은 종말을 자신이 살고 있는 도성의 함락으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종말이란 도성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우리는 이런 결론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성을 찾기 위해서는 이미 세워진 도성을 허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판단하기에 하나님의 도성처럼 보이더라도 내 눈앞에 세워진 것이 있다면 허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세속의 도성도 허물 수 있다면 허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이들이 잘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서 살해합니다. 이 일로 가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다시는 농사를 짓지 못하고 정착하지 못하며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농사꾼이었던 가인이 농작물을 얻지 못하고 떠돌아다닌다는 것은 생계가 위협받는 중대한 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인을 내버려 두지는 않았습니다. 가인을 해치는 자는 가인이 받은 벌의 7배의 벌을 받으리라며 가인의 생명을 지키는 보호의 약속을 맺으십니다. 가인이 이전의 모습처럼 윤택하거나 안정적인 삶을 살 순 없겠지만 하나님께선 가인에게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와 어떻게 그의 죄에 대해 속죄해야 하는지 평생에 걸친 어려움과 궁핍을 통해 깨달을 기회를 가인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선택은 무엇이었습니까? 성을 쌓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성을 쌓아서 에녹성이라 이름 붙이고 그곳에서 안정을 누리길 원한 것입니다.

 

남이 쌓은 성이든 내가 쌓은 성이든 결국 다 무너진다

상아탑이라는 말이 있듯이, 성은 인간이 쌓아 올린 공적을 말합니다. 내가 쌓아 올릴 수 있고 남이 쌓아 올릴 수 있습니다. 사람이 불행한 것은 이 성을 보고 서로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남이 쌓아 올린 성과 내가 쌓은 성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초라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두 가지 태도를 보입니다. 남의 떡이 커보인다고 다른 사람이 쌓아올린 성을 보고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주로 인생에서 내 뜻대로 되지 않거나 실패한 인생일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타인의 삶을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내 성이 아니기에 의미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화려하고 멋진 성이라 할지라도 결국 다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사람에게는 남의 성을 부러워하지 말고 자신의 주어진 성을 잘 가꾸어라, 자기 인생을 사랑해라고 조언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와는 달리 반대로 내 성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대게 인생에서 큰 성공을 거두거나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세운 자신의 성에 만족하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족하더라도, 이 성이 나 자신이 될 수 없습니다. 일종의 우상인 것입니다. 이 성에서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이 그 인생의 숨을 거두어가시면, 모든 것이 끝나버립니다. 성을 들고 갈 수도 없습니다. 어쩌면 자식이나 남 좋은 일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결국 어찌 되었든지, 남이 쌓은 성이든, 내가 쌓은 성이든 다 무너지게 됩니다. 언제 성이 무너지느냐, 오늘 예수님 말씀대로 반드시 종말이 오게 될 것인데, 이 종말이 오면 쌓아 놓은 성들은 어떤 것이든지 다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전쟁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 따른 결과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마가복음이 복음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대략 60년 후반에서 70년 초반 정도로 봅니다. 당시 유대 민족을 크게 바꾸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는데, 유대전쟁이라 불리는 7년에 걸친 로마 제국과 유대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반란 전쟁입니다. 결국 예루살렘이 포위되어서 베사누피우스 장군과 그 아들 티투스에 의해서 완전히 망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극찬했던 헤롯 성전도 이때 다 무너지게 됩니다. 예루살렘이 넘어간 이후 끝까지 항전하던 유대인들은 마지막 거점인 마사다 요새로 들어가 저항합니다. 3년간 버티다가 결국 패배가 임박하자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 960명이 전원 자살했다고 하지요.

 

이 사건이 왜 중요하냐면, 이후로 유대교와 기독교가 완전히 갈라지게 됩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는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 모두에게 신학적 위기를 가져왔는데, 이 문제에 대한 해석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이전 바벨론의 경우처럼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율법을 무시한 결과로 생각했습니다. 민족적 갱신과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징계로 이해해서 더 엄격한 율법 준수를 통한 민족 정체성 강화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럼 초기 기독교는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이 예언하신 바 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사라지리라는 하나님의 최종심판으로도 생각했지만, 부정적인 해석을 넘어서 긍정적인 해석을 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 사마리아를 넘어서 전 세계로 복음이 확장되는 사건, 즉 옛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새 예루살렘인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사건으로 본 것입니다.

 

이처럼 마가복음 13장부터 시작되는 종말과 환란의 메시지는 이 유대 전쟁을 배경으로 쓰인 것입니다. 미래에 있을 예언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성찰과 그 과거의 연속성 속에서 현재를 마주한 자들이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해석인 것입니다. 그럼 마가복음의 해석은 무엇이냐면, 당연히 유대전쟁에 대한 초대교회의 관점이 들어 있습니다. 종말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유대 민족이 겪은 역사적 비극을 종말로 바라 보지 말고 하나님 섭리에 따른 새로운 시작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잘못해서 벌 받은 것이라는 율법적이고 과거에 묶인 해석에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혼란한 역사 속에서 처한 비극적인 실존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역사적 의미와 자기 인생을 책임 있게 해석할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해석을 통해서 새시대를 맞이할 것을 요청하는 태도가 바로 종말을 맞이하는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지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을 해체한다는 것은 해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전이 무너질 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교훈하신 바를 이것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먼저 거리 두기를 해라고 했습니다. 거리두기를 왜 하는가 하면, 해석하기 위함입니다. 멀찍이 떨어져서 볼 수 있어야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빨리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역시 해석하기 위함입니다. 빨리 판단하지 않고 천천히 음미하고 생각해야지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그 누구도 믿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남의 해석을 따라 하지 말고, 나 스스로가 해석의 주체가 되어서 내 인생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눈에 보이는 성을 무너뜨려라는 것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함입니다. 해체는 영어로 deconstruction 입니다. deconstruction은 construction의 반대 과정입니다. 해체할 수 있는 사람은 construction, 즉 제대로 된 성을 쌓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리고 deconstrcution은 construction을 해석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종말이 오면 쌓아 놓은 성들은 어떤 것이든지 다 무너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어떤 이들은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태도를 가질지 모릅니다. 어차피 무너질 것 쌓을 필요가 있나 하며 빈둥거리거나 허무함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을 쌓고 무너뜨리는 행위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참된 성을 쌓는 것입니다. 이른바 우리 영혼의 성입니다. 우리의 공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쌓는 성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깨달음으로 세상과 거리 두며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고 오직 내게 주신 소명을 따라 기다리고 인내하면서 쌓아가는 우리 영혼의 성입니다. 영혼의 성을 세워가는 것이 바로 역사와 삶에 대한 해석의 과정에서 이루어집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역사와 우리 인생의 여러 일들을 감당해 내면서 사유하며 성찰하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나의 소명을 발견하고 쫓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영혼의 성을 쌓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없이 죽어서 천국 가면 저절로 세워놓은 아무 성에서 탱자탱자하며 편히 살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이 과정을 묵묵히 감당하고 거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일 줄 믿습니다. 모두 이 복을 누리길 진심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