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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장 38절-44절 새번역
38 예수께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41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 쪽에 앉으셔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많이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44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두 렙돈을 드린 과부의 경우는 위선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이 핵심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전하신 제자도의 가르침 중 마지막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 이후인 13장부터는 종말과 환란에 대한 말씀이 끝난 후로는 예수님이 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사건이 이어집니다. 그럼 제자도의 마지막 가르침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오늘 본문 첫 부분에서는 예수님이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실 율법학자들의 위선의 문제는 복음서 전체에서도 강조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이 위선에 대해 경고하시는 내용이 반복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다음으로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것이 위선의 예로 보기에는 그렇게 잘 와닿지는 않습니다.
본문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비판하시고 난 뒤, 성전 헌금함에서 헌금하는 두 대비되는 사람을 언급하십니다. 성전 헌금함에 두 렙돈, 한 고드란트인 자기 전부를 낸 한 가난한 과부와 비교적 넉넉한 금액을 헌금한 부자가 나옵니다. 두 렙돈은 당시 화페 기준으로는 64분의 1 데나리온인 참새 반마리 가격으로 오늘날 일이천원 정도의 돈입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헌금한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상대적인 금액이 더 큰 것으로 본 것이라고 해석하여, 헌물은 마음의 크기에 있지 물질의 크기에 있지 않다는 가르침으로 본문을 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자들이 적당한 금액으로 헌금한 것을 가지고 자초지종 살펴보지 않고 위선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까요? 그 잣대로 따지면, 우리가 헌금하는 모든 것이 위선적인 것이 됩니다. 반대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전부이긴 하지만 두 렙돈을 내면서, 내가 가장 의롭다고 으스된다면, 오히려 그런 사람이 위선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종말과 환란에 관한 메시지임을 생각해 볼 때, 단지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비판하고자 두 렙돈을 낸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율법학자들의 위선은 예수님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하기 위한 전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님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죽음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더라도 죽음을 그 주제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종말이나 환란 때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각자의 목숨과 생명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가장 큰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 본인도 지금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는 장사가 없다고, 그 누구도 힘을 쓰지 못합니다. 거짓이나 허영은 죽음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고 다 드러나 사라집니다. 죽음 앞에선 오직 진실만이 남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 소용이 없기에, 더는 위선이나 거짓이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 나온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자기 전부를 헌금에 넣었다고 하지요. 그럼 이제 남은 게 무엇이겠습니까? 당장 먹을 것도 없으니 죽는 것만 남은 것입니다. 두 렙돈을 드린 과부의 장면은 구약 엘리야 시대에 3년 가뭄이 들었을 때,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 남은 밀가루 얼마와 기름으로 떡을 해 먹고 아들과 함께 죽기로 작정한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두 렙돈의 과부와 다른 점은 사르밧 과부의 경우 선지자 엘리야의 요청에 그마저도 하나님께 드릴 때, 화수분처럼 밀가루와 기름이 마르지 않고 계속 넘쳐나는 기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과부의 결론이 어찌 되었든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우리 모두 다 결국 죽음을 맞이할 텐데, 그때 어떤 태도와 모습으로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두 렙돈을 드린 과부의 행동은 매우 단순한 상징적 행위이지만, 이 모습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죽음, 에우타나시아εὐθανασία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으로 에우타나시아εὐθανασία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좋은 죽음, 고귀한 죽음, 잘 준비된 죽음으로 일컬어집니다. 또한 이것은 안락사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원래 안락사는 오늘날처럼 현대 의학의 도움으로 생명을 조기 종료하는 뜻으로만 쓰이지 않았습니다. 안락사, 즉 좋은 죽음인 에우타나시아는 아름답고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말합니다. 삶과 죽음에서 조화와 품위가 중시 고대 그리스 사상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죽음을 인생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본 이름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대다수 그리스 철학자들은 덕과 지혜를 지닌 사람은 아름다운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플라톤은 육체를 부정한 것으로 보았기에, 죽음을 육체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영혼의 해방으로 여겼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경우에는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고통을 초월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이상적인 죽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네카와 같은 스토아철학자는 극심한 고통이나 존엄함을 잃는 상황에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해서 자연스럽고 품위 있게 죽는 것이 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안락사의 철학적 근거인 것입니다.
역마라는 말이 있지요. 한 곳에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인생을 말하는데, 오늘날에는 긍정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원래는 매우 부정적인 뜻을 가집니다. 왜 부정적이냐면, 고향이나 집이 아니라 길 가다가 타지에서 객사하는 경우가 많아서입니다. 오늘날에는 반대인 것이 일인 가구가 많아서 혼자 집에서 고독사하는 게 문제가 되지요. 최근 뉴스를 보니 한 청년이 어머니와 같이 한 집에 살고 있지만 히키코모리처럼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는데, 죽은 뒤 6개월이 지난 후에 부모가 알았다고 하지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처럼 누구나 전쟁, 폭력, 사고, 전염병 등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가능한 천수를 다하고 죽는 자연사를 갈망합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스스로 자기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은 죽음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가 옆에서 지켜봐 주는 죽음은 참으로 복되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잘 죽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좋은 죽음
그럼 좋은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바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기억되는 죽음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야곱입니다. 야곱은 아들 요셉이 애굽 총리가 된 사실을 알고 칠십명의 가족을 이끌고 애굽 고센 땅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곳에서 147세의 나이로 천수를 다하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기 직전에 열두 아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랑하는 가족들의 축복과 애도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애굽 바로를 축복하면서, 네 나그네 길이 일백 삼십년이고, 내 연세가 우리 조상에 비해서는 얼마 못되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의 죽음만큼은 그 누구보다 복된 것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죽음을 맞이하면서 유언하기를, 나를 가나안 땅에 있는 내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 그리고 아내 레아가 묻힌 막벨라 굴에 장사지내라고 당부합니다. 요셉과 아들들은 아버지를 위해 칠일 동안 애통하며 장사지냈고 애굽 사람들까지도 칠십 일 동안 야곱을 위해서 곡을 하였다고 말합니다. 야곱은 죽음을 맞이한 순간부터 죽은 이후로도 자손 대대로 기억되는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둘째, 조용한 죽음입니다. 조용한 죽음은 언뜻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사실 현재의 가치를 영원으로 이어가도록 죽음을 맞이한 경우를 말합니다. 이상과 신념을 이어 내기 위해서 죽음을 피하지 않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그리스 젊은이를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아테네 정부로 재판에 회부되어 자기 사상을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독약을 받고 죽을 것인지 기로에 놓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단호하게 자신이 주장한 영원불멸을 믿음 죽음을 택하고 독배를 받아 듭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지키고자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조용한 죽음을 우리 신앙의 경우로 생각하자면 소명에 따른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믿음의 여정을 걸어갔고, 언약의 약속을 따라 후손을 보았으며,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아갔습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언약이 당대에 다 성취된 것은 아니지만, 그 첫 열매인 이삭과 에브론에게서 산 헤브론 땅 막벨라 굴로 확인받았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25장 8절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마지막을 가리켜, 아브라함이 오래 살고 나이 많아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 조상들과 함께 누웠다는 표현은 아브라함처럼 자기 소명을 다하는 자에게 붙여지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도 아브라함과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모세의 경우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 입구까지 인도한 후, 자신의 소명을 다한 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시간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모압 평지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에도 동일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신명기 34장 7절을 보면 죽음을 맞이한 모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사명자는 사명이 끝날 때까지 죽지 않고, 사명이 다하면 하나님이 데리고 가신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모세의 시신을 두고 싸움이 일어났다고 하지요.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육체를 가지고 가려했는데, 사단이 자기 소유로 주장하여 싸우다가 결국 시신을 하늘로 데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죽음은 사명자가 그 사명을 다할 때, 죽지 않고 하나님이 데리고 가시는 경우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 결국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간 에녹이나 불병거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이타적 죽음이 있습니다. 서구 고대 전통에서는 인간이 가진 덕 중에서 우정이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친구를 위해서 대신 죽는 행위를 최고의 우정으로 여겼습니다. 전투 중에서 친구를 위해 희생한다던지, 아니면 친구 대신 감옥에 들어가서 자기 목숨으로 담보 삼는 행위야 말로 고결한 행위라 여긴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요나단도 자기 생명처럼 다윗을 사랑했다고 하지요. 아버지 사울의 뜻을 어기고서라도 다윗의 생명을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길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도 자신이 하신 말씀대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자신을 조롱하고 공격하는 자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속죄의 죽음이라는 잔을 받아 마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타적 죽음을 다른 말로 하면, 구속적인 죽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실존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이처럼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늘 이야기하고 있으며, 죽음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지 직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태도에 따라서 삶도 달라지고 마지막 순간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유한성,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는다는 것입니다. 흙으로 지어진 피조물로 하나님의 숨결이 사라지면 결국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두 죽음으로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실존철학자들은 우리는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 말했습니다. 이렇게 죽음이라는 끝을 행해서 세상으로 내던져진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던저진 인생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가 불안이라는 상황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면하는 자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를 인칭마다의 시점의 차이로 구분 지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죽음을 삼인칭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두렵지만, 당장 나의 일이 아니기에 크게 게이치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차츰 가까운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할 때, 죽음은 이인칭이 됩니다. 삼자의 죽음이 아니라 당신의 죽음인 것입니다. 죽음을 옆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죽음을 완전히 직면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일인칭이 될 때 비로소 마주 보는 것입니다. 내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거나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자각할 때, 나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나 자신의 삶에서 참된 의미를 찾고자 몸부림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렙돈을 드린 여인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이 여인은 이미 남편과 자식을 떠나보내면서 죽음을 2인칭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살 날이 멀지 않았음을 예감하고 3인칭의 시각으로 죽음을 직면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좋은 죽음이 되고자 예수님 앞으로 나온 것입니다.
두 렙돈을 드린 과부가 보인 죽음에 대한 자세
그럼 두 렙돈을 드린 과부가 어떤 점에서 좋은 죽음을 맞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첫째,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전부인 두 렙돈을 드렸다는 것은 자기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전부를 다 비우고 삶의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라는 것이 자살이나 안락사를 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언제 죽을지를 알고 있고, 그 죽음을 준비하고 받아들이는 태도와 자세입니다. 앞서 자연스러운 죽음, 즉 소명에 따르는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 보여준 죽음의 모습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의의 면류관을 받기 직전의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에 떠밀려 죽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여 예루살렘 십자가의 자리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에 대해 자기 결정권을 가질 때, 그 삶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최근 지나친 연명치료가 좋지 않다고 이야기하는데, 이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겠습니다. 연명한 삶이 육신으로는 살아있어 가족은 좀 위안을 받지만, 본인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일 뿐입니다. 제가 앞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좋은 죽음으로 기억되는 죽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야곱의 경우를 말씀드렸는데, 야곱의 죽음을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49장 33절에서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자기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었다는 것은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행사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때, 자신의 죽음이 자녀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자가 죽음을 의미 있게 맞이합니다. 과부의 두 렙돈은 아마도 하루 먹을 빵 값입니다. 당시 과부가 남의 집에 가서 허드레 일 도와주고 받은 삯일 수 있습니다. 이걸 드린 것입니다. 그 말은 과부는 자신의 인생이 비루해도 그 삶에 최선을 다했음을 말해줍니다. 라틴어 격언 중 잘 알려진 말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있습니다. 오늘을 즐기라는 말인데, 사실 이 말을 하기 앞서 생각해야 할 전제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입니다. 오늘을 즐기기 앞서 죽음을 먼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자가 오늘을 완전히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간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 가짐으로 살아갈 때,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각자의 삶이 유한하기도 하기에, 모든 인생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 소중한 삶을 위해서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지요. 앞서 죽음에 대한 태도에 따라서 삶도 달라지고 마지막 순간도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나 역시 언젠가 죽을 것임을 자각하는 자는 부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유종의 미란 말이 있습니다. 끝이 좋으면 물론 과정이 반드시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고 평가를 받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끝을 잘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끝을 잘 맺기 위해서 과정에도 충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끝은 영어로 end로 목적과도 같은 말입니다. 끝을 잘 맺는 것은 결국 목적과 소명에 충실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좋은 죽음의 두 번째 경우로 앞서 말씀드린 조용한 죽음에 해당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셋째, 두 렙돈을 드린 과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죽음을 준비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과부가 보인 죽음에 대한 태도는 인문학이나 교양적인 가르침에서도 죽음이 주는 교훈으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신앙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보다 더 한 발짝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하나님께 두 렙돈을 드리는 행위는 자신의 마지막 시간을 주님과 함께 하겠다는 믿음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가장 좋은 죽음이란 바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뜻을 따라 함께 죽는 죽음이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설령 스스로 죽음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며, 최선을 다해서 삶을 경주해 왔다고 할지라도 죽음을 앞두고 서 있으면 후회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유약한 우리 인간의 실존적 한계이기도 합니다. 사실 아무리 마음을 담대하게 먹어도 죽음은 여전히 두렵습니다. 죽음 이후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은 혼자 가야 하는 외로운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죽음의 과정을 누군가와 함께 맞이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과정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친구가 되어주셔서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예수님을 친구로 삼아야 하겠습니까? 죽을 직전에 친구가 된다면, 안 그래도 쉽지 않은 그 길이 얼마나 어색하겠습니까. 앞서 긴 인생 여정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시간이 많아야지, 죽음이라는 가장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함께 했던 시간이 많다면, 바로 그 시간이야 말로 죽음을 연습한 시간이기에, 죽음이라는 실전에서 제대로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죽음을 매일 연습하는 것이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제가 짧은 시간 목회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에게 말하지 않고 이야기해서 죄송하지만 모두의 유익을 위해서 잠시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교육전도사 시절 섬기던 대학부 학생입니다. 이 친구는 제가 정확한 병명이 기억나지 않지만, 어릴 적부터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삶을 살아간 친구였습니다. 병증으로 휴학을 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컨디션을 회복하고 다시 복학한 시점에 저희 교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어릴적부터 시한부 삶을 선고받고, 무기력하게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도 인생에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이 지방이라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부모님은 평생소원이라 생각하고 허락한 듯합니다. 아픈 몸인데도 힘들게 공부해서 원하던 대학에 합격을 했고 학교를 다녔던 것입니다. 학교를 잠시 다니다 몸 상태가 악화되어서 공부를 더 지속할 수 없었는데, 몸 상태가 조금 회복된 후, 부모님께 마지막까지 학업을 마무리하고 졸업하고 싶노라 요청을 한 것입니다. 허락을 받고 마지막 한 학기를 지방 학생들이 기숙할 수 있는 당시 제가 당시 섬기던 교회 생활관에 들어와 살게 된 것입니다.
저는 구체적인 상황은 이후에 알게 되었고, 구체적인 상황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한 학기 정도를 함께 했습니다. 짧은 시간이라 제가 깊이 알아가지는 못했지만, 나이에 비해서 성숙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기억으로는 아픈 상태였기에, 얼굴이 창백한 편이었고 눈을 쳐다보면, 큰 눈은 아니라도 참으로 그 눈이 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생활관에서의 생활을 잘해서 주변 친구들에게도 선한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곤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해 겨울 몸이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어 급히 고향으로 내려갔고, 그리고 일주일이 되지 못해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함께 했던 시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참 큰 울림을 주던 친구였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하고 난 뒤 부모님의 부탁으로 짐을 옮겨 붙여드리고자 그 친구가 지내던 방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방에 들어갔을 때, 한참을 서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많지 않은 짐이지만 그 방이 한치에 흩틀어짐 없이 당장 오늘 죽음을 맞이할 준비로 살아간 삶의 흔적들이 제 눈에 아른거리는 것입니다. 아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 매일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삶을 살았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은 죽음을 매일 연습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을 위해서 매일매일 나의 전부를 허비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저는 이 친구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기에, 이런 삶을 살아냈을 것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 그 기한은 알 수 없지만, 모두가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각자 주어진 소명을 다하고 그 숨을 거두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내 삶을 어떻게 살지에 따라서, 그 삶의 마지막 순간인 죽음이 어떠할지 결정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막연한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만 하지 마시고, 내게 주어진 지금의 삶에서 최선으로 살아가길 축복합니다. 혹시 이런 경우 한 번쯤 경험했을지 모릅니다. 이것으로 나는 끝났다 생각이 들 정도로 나 자신을 다 내어버리듯 혼신의 힘으로 하루를 끝내고 난 뒤 죽은 사람처럼 쓰러져 잠을 자고 일어나면, 또다시 힘이 다시 올라와서 새로운 하루를 맞이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루의 전부를 내어드린 사람이 맞이하는 새로운 날의 축복일 것입니다 이렇게 삶을 지혜롭게 성실히 경주한 사람은 마지막 남은 하루의 삶도 두 렙돈을 드린 과부처럼 자신의 전부를 주님께 내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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